이규연의 로스트 타임 - 지연된 정의, 사라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36개의 스포트라이트
이규연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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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 사라진 시간을 되찾기 위한 36개의 스포트라이트

참혹하고 추악하더라도 진실을 대면하는 것, 그것이 탐사 저널리스트의 일이다

무지와 무관심, 기만과 폭력으로 지체된 정의를 불러내기 위해 지옥에서 천국을 상상하는 탐사 저널리스트의 이야기 (표지 中)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우리집 테이블은 정규방송만 나올뿐 유선티비나 케이블티비나 인터넷티비 같은 것이 아예 연결되어 있지 않다.

나는 기사를 자주 보지만 기자 이름을 기억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뭔가 후속기사를 기다렸다가 찾아본다던가 까지는 하지 않고 언론사와 기사제목을 봐서 내용을 훌어보는 정도로 사회소식을 접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습관임을 이 책을 읽으며 반성했다.

책날개에 씌여있는 저자에 대한 소개글을 보면 저자는

탐사 저널리스트, 중앙일보 탐사기획 에디터, JTBC 초대 보도국장을 거쳐 현재 탐사기획국장으로 탐사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제작 및 진행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나온 책이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본적이 없지만, 보았다 할지라도 책으로 다시 읽는 것은 영상을 보는 것과 또다른 느낌이리라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은

묻혀 있는 진실을 발굴하고 마지막 한 조각까지 짜맞추며, 공익 탐정으로 탐사보도의 길을 개척해온 한 탐사 저널리스트의 분투기이며 성장기다. 세상은 무관심으로 파괴된다. 직접 마주한 현장은 생각보다 참혹했고 그 곳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울고 있었다. 밝혀진 진실이 우리를 할퀴더라도 그 진실은 확인하지 않은 의혹보다는 값지다.

그랬다. 이 책은 읽는 내내 마음이 할퀴어지는 책이었다. 아픈 책이었고 슬픈 책이었다. 하지만 읽지 않을 수 없었고,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머리만 알았던 동물의 발끝까지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코끼리 코만 봤던 사람에게 코끼리 전신을 그리게 해주는 책이었다. 그렇게 사회의 겉모습만 봐왔던 내게 속모습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이면을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표지에 써있듯이 책속엔 36건의 탐사보도의 내용이 실려있다. 그 내용들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헤드라인을 거의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조두순 사건,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사건, 버닝썬, 최순실,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루게릭병, 빈곤의 마을 난곡, 이영학, 황우석, 지존파, 5.18, 간첩사건, 평양, 북한식당 종업원 단체 탈북사건, KAL기 폭파사건, 방사능 피폭, 메르스, UFO, 미인도 진위논란, 화성연쇄살인, 전두환, 인혁당 사건 까지 제목을 보는 순간 하나같이 흡 숨이 막히는 사건들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사건들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것만큼만 알고 있던 나는,

기사가 뜨고 폭풍같은 반응이 들끓던 그 정점까지의 소식만 기억하는 나는,

그 후일담에 대해 너무 무지했구나 싶었다.

정점에서 뚝 끊긴 소식이후 오히려 처음보다 더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눈물을 너무 몰랐구나 싶었다.

해결이 되었건 되지않았건 지속적인 관심이 얼마나 중요했을지 깨닫게 되서 죄송스럽고 죄송스러웠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탄생 과정에는 잔혹한 동화가 숨어 있다. 1998년 가을, 마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

직장을 잃고 끼니 걱정을 하던 아버지가 보험금을 노리고 아들의 손가락을 잘랐다. 당연히 아버지의 무모함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바로 이어, 가난한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계는 국가가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이른바 '손가락 법'을 만든다. 이것이 지금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다. 이 사건을 보면서 '정책의 창' 모델이 생각났다. 사회 문제 흐름과 정치 흐름이 결정적 이벤트의 출현으로 하나로 합쳐질 때 정책의 창窓이 열린다는 것이다. 빈부격차 심화라는 사회문제 흐름과, 김대중 정부 출현이라는 정치 흐름이 '손가락 절단 자작극'이라는 이벤트를 계기로 결합하면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탄생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p. 17)

 

책의 첫장 첫줄부터 당혹스러웠다.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달해온 복지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런 잔혹동화가 계기였다니...

뒤이어 나오는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사건'은 더 가슴아프다. 어린아이가 동네에서 황산테러를 당했다는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끔찍했는데... 6살 소년의 몸 겉에만 뿌린 것이 아니라 고개를 젖혀 목안으로 붓기까지 했다고 한다... 소년은 죽었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으며, 부모는 범인을 지목했지만,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조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5년 7월 31일자로 살인 공소시효 폐지법이 발효됐지만, 이 사건은 법 발효 20여일 전이라 재소사 할 수 있는 사건에 포함되지 못했다. 태완이의 죽음은 그렇게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탐사 보도의 중요 요소 중 하나는 '독자적인 시각'이다. 출입처가 있는 기자들은 출입처의 시각에 매몰되기 쉽다. 굴을 파고 들어가 출입처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받아쓰려는 습성이다. 반면 출입처에 얾매이지 않는 탐사 보도는 그 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시각으로 진시리에 접근해야 한다. 일반 보도 기자의 타성에서 벗어나라고 탐사 보도가 있는 것 아닌가. (p. 38)

저자는 스스로 출입처 조직 내부의 프레임에 빠졌던 과거를 털어 놓으며 기자의 본분에 대해, 탐사 보도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깨닫고 읽는이도 다시 깨닫게 한다. 출입처 조직 구성원도 아닌 출입기자가 이러할 진대, 조직안에서 끊임없어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임은정 검사의 인터뷰는 일제치하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외롭고 위험해 보였고, 안타깝고 아쉬우며 결국 화가 났다....

"검찰은 법을 집행하고 적용하는 기관이지 법을 적용받는 기관이 아니에요. 그 법을 집행할 의지가 있는 실질적으로 지휘권을 가진 분들이 내부에서 갑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스스로 자제해야 하거나 또 다른 갑을 만들어야 하는데, 또 다른 갑은 없고 최상의 갑이 그 짓을 하는 거니까 브레이크가 없어요" (p. 41)

상부의 지시를 거스르고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임 검사는 인사와 징계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외로움이라고 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긴 한데, 함께 행동해주지 않으면 목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적어도 사건이 됐을 때 목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피해자는 혼자 죽어요. 이것이 검찰의 현실이기도 해요." (p. 43)

 

최근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개혁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검찰 내부 갑들에게는들리지 않는가 보다.

미국에서 뭔가 배워오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검찰 제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미국 검찰은 3개조직으로 분권되어 있다. 그래서 내부의 경쟁적 인식과 사건 해결에 대한 의지면에서 한국과 많이 다르다. 한국은 거의 완벽한 피라미드 체제다. 제일 위의 한명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는 조직이자 법을 휘두르는 조직이다. 누가 반항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검찰과 정치권이 손잡으면 그야말로 국민누구도 아무도 모르게 그들만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여지껏 그래왔기에 한국의 법정의와 정치현실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임은정 검사가 피해자로 혼자 죽어가면 안될 텐데... 조직내에서 임검사의 옆에 지지자가 목격자가 동행해주어야 할텐데... 아직은 몹시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인터뷰말미의 임검사의 말은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는 임검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는 듯 하다.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한 사람은 깨울 수 없다. 더이상 잠든 척할 수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검찰이 이제 비로소 잠이 깬 척하면서 눈을 뜨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요."

임 검사는 자신이 몸담은 검찰 조직과 언제까지 대결을 할까.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검찰을 나올 때까지 계속되겠죠" (p. 44)

 

임검사가 검찰조직내에서 승승장구 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정년퇴임할때까지 무사히 잘 있어주기만이라도 응원해본다...

과학언론 전공으로 문학박사 과정을 밟을 때였다. 과학철학 과목을 수강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주장이 흥미로웠다. 그는 과학과 사이비 과학의 감별법을 제시했다. "반증할 수 없으면 과학이 아니다" 칼 포퍼틑 마르크스주의를 사이비 과학이라고 진단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들어맞는다는 사례는 무수하게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잘못됐다는 사례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화 역시 과학이 아니다. (p. 200)

칼 포퍼의 과학철학을 공부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저 인용문장만 같고 칼포퍼가 맞다고도 틀리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읽고는 왜 저 인용문을 말했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뒤에 황우석 박사가 신화로 불리던 사건이 전개되고 그 뒤는 모두가 알다시피 사기극이었다. 당시 MBC 의 PD수첩에서 황우석 신화에 흠집을 내려 했을때 전국민적 분노가 방송국에 쏟아졌다. 하지만 제보가 이어졌고 결국 용기는 신화를 깨트렸다. 과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무지적 맹목성이 정치적인 과학자의 쇼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앞으로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개략적이나마 사건들에 대해 사전지식이 있었는데 딱 하나 UFO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인이 멀리서 본것도 아니고 공군전투기 조종사가 추적까지 해서 실물 UFO를 보았고 기록까지 남아있는 사건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게다가 미국 CIA 창설이 미국에 UFO가 추락한 사건에 대한 은폐뒤 2개월 후에 창설됐다는 것도, 이래서 FBI 와 별도 조직으로 있는 건가 싶으면서 신선했다.

오래된 과거의 팩트를 수집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자료가 적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기억도 희미해진다. 당대의 권력자는 수치스러운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한다. 입을 막기도 한다. 우리는 지워지거나 더럽혀진 자료나 증언과 싸워야 한다. 또 누군가의 입을 열게 해야 한다. 어려운 작업이라도 결국 탐사 언론인이 휘슬을 불어야 하는 이유는 명맥하다. 잊힌 역사는 결국 더 뒤틀려지니까. (p. 424)

읽으면서 탐사 보도는 일반 보도와 정말 다르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슈메이커 같은 기사보다 장기간의 조사끝에 발표되는 후속기사에 더 관심을 가져야 겠구나 를 절실히 느꼈다. 탐사 보도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도 독자가 읽지 않으면, 세상에 퍼지지 않으면 그또한 묻히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묻히는 역사는 우리 모두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를 뒤틀게 만드는 행동이 될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적어도 뒤틀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과거만 보고 살자는 말이 아니다. 잘못된 과거가 현재를 좀먹고 미래를 파괴하는 것은 막자는 말이다. 제대로 알기 위해 기자도 독자도 모두 끊임없아 알아내야 하는 시대다. 그리고 알 수 있는 시대다. 적어도 알고도 모른체 하지는 말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제대로 고쳐알아가며 살아야 겠다.

표지에는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라고 씌여 있지만, 너무 늦더라도 정의를 밝혀내고 알게 된다면 정의는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늦지 않도록 각성하자는 주의를 주는 멘트였겠지만, 그래도 마음 아프다. 저 멘트를 피해자들이 한다면 정말 그럴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피해자들도 제보자들도 용기를 내어 인터뷰하고 끝까지 싸우고 있는 이유는 너무 늦어도 정의를 되찾을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먼저 포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잊지 않고 함께 응원해주는 우리가 되기를 그런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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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비판 경제학 -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경제 교과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이푸로라 옮김, 성일권 감수 / 마인드큐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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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경제교과서> 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목과 달리 경제학!서 라기 보다는 경제현실분석서 로 읽혀지는 책이었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는 무척 멋진 언론관을 가지고 있다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자매지이자 국제관계 전문시사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가 기획한 책이라는데, 이 시사지는 국내에서 <르 디플로> 라는 애칭으로 발행되고 있다고 한다.

책은 서문부터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포문을 연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아 사회과학계를 장악하게 된 것이 주요 이유라 할 것이다. 이후 경제 현상의 해석에 있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입김은 더욱 세졌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더 높은 방어벽을 세웠다. 문제의 원인은 항상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p. 9)

금융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에 있다는, 아니 그보다도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은 책 내용 여기저기서 자주 반복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이 쓰신 '감수자의 말'코너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연결된다.

국가경쟁력 지수는 한 국가의 경제 성장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능력을 따지는 상대적 지표라고 하지만, 해마다 국제 민간포럼기구인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하고 있다. 개최지인 휴양지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다보스 포럼이라고 불리는 WEF 회의장에는 세계의 유력 기업인들, 경제학자들, 정치인들, 국제경제기구 관계자들이 몰려든다. 공식적인 국제기구인 유엔이나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오랜 자료수집과 분석을 거쳐 국가경쟁력 지수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 친화적인 민간 이익단체가 '기업을 위한, 기업에 의한, 기업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한 각 항목들을 점수화하여 이를 국제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분찰하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안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엄밀히 따져보면 국부를 쌓은 국가경쟁력이 아니라, 기업의 이익을 도모하는 기업경쟁력인 셈이다. (p. 13)

이 대목을 읽고 기가 막혔다. 국가경쟁력 지수 가 기업인들이 만든 기업목표 성장지수 였다니 너무 웃기지 않는가? 국민들은 모른다고 치자. 국가정치핵심가들은 알 것 아닌가? 언론인들은 알 것 아닌가? 그런데 국가경쟁력지수 라는 표현에 대해 다들 동의하는 건가? 그래서 이 지수가 어떻게 산출되는 건지 굳이 알려주는 것없이 바로 지수를 수치로 사용하고 인용하는 것인가? 이건 거의 오보 수준 아닌가?

하긴 '4차 산업혁명' 몸살을 앓은 한국에서 그 용어가 세계적이지도 않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닥 회자 되지 않았으며 정식 명칭도 아니라는 것은 얼마나 알려져 있을까? 이 '4차 산업혁명' 이라는 말도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표현되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의 목표설정으로 만들어진 용어를 한국에서는 이것 아니면 죽을듯이 미래산업의 핵심으로 유행되었다. 왜일까?

지금까지 우리가 듣고 배운 '경제학 교과서' 는 우리 사회의 99%를 이루는 '우리의 것' 이 아니라, 1%에 불과한 '그들의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우해 쓰고, 말하고, 밑줄치고, 그럴듯하게 학문적 성과로 포장한 '허튼 이론들'을 마치 경전인양 받아들였다. 수적으로는 1%에 불과하지만 자본, 권력, 국제사회, 미디어와 여론을 장악한 그들은 때로는 동업자로서, 때로는 경쟁자로서 개방화, 자유화, 세계화, 규제완화, 자유무역의 가치를 설파하며 우리의 삶을 옥죈다. 그들이 은밀하게 곳곳에 살포한 '허튼 이론들' 은 마치 마약의 치명적 독성처럼 우리의 삶을 무한경쟁의 '성장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과 환경을 해쳐온 '그들만의 독점적인 성장모델'이 우리에게 그토록 깊이 파고든 까닭에서다. (p. 14)

'서문' 과 '감수자의 말' 이 어찌나 구구절절 옳은지 책의 핵심은 이 앞장 몇 페이지에 다 있는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상이 제정된 해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69년에 처음 수여되었다. 이 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진 상이 아니다. 다른 노벨상들과 달리 이 상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이 정식 명칭이다. 노벨은 유언을 통해 국적을 불문하고 '인류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에게 노벨상을 수여할 것이라고 정한바 있다. 그러나 스웨덴 중앙은행이 상을 수여한 사람의 상당수는 서양 출신이다. 게다가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경제모델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만큼 인류에 충분히 이바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경제학은 역사가 길지 않은 학문이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절반 이상이 현재 생존해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경제학자의 82%가 미국 국적이다. 그에 반해 유럽 국적을 가진 수상자는 독일1명, 영국3명, 프랑스1명, 그리고 노르웨이인 1명으로 극히 낮은 비율을 차지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노르웨이인 과 프랑스인 이 두 사람은 박사 학위를 미국에서 취득했다. 개발도상국 수장자는 인도출신 1명 뿐인데, 그는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했다.

수상 후보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국적의 수상자 수가 증가하는 한편 신자유주의 경제와 기술적 분석이론, 금융 분야의 비중이 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벨상을 통해서 경제과학을 표방한 이들은 금융세계화를 옹호하고 시장의 효율성에 관한 이론을 펼쳤으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권장하기도 했다. 반면 정부의 시장개입은 부작용을 이유로 반대했다. 그들은 과학계와 공공의 영역에서 서구 중심, 더욱 정확히는 미국 중심의 시장 경제를 집단으로 이상화했다. 그런 움직임은 198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국제기구(IMF)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p. 34)

노벨상이 서구 중심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노벨 경제학상이 노벨상도 아니고 90%가까이 미국 경제학자들이 받은 상이라는 것은 몰랐었다. 사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왜 우리나라는 노벨과학상이 없냐 하거나 노벨문학상을 노려봄직한 문학가들을 살펴보는 정도 외에 다른 내용은 국내에서 거의 회자되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사실 경제와 가장 크게 연관되어 있는데, 그 경제를 주무르는 세계의 분위기를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싶다. 대충은 짐작했지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이 생각난다. 그때 왔던 IMF 관련자들은 경제사냥꾼들 같았다. 세계은행이라고 불러야 하는게 아니라 미국은행이라고 불러야 하는게 아닐지...

언론을 통해 경제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정부 정책에 자문을 제공하는 대학 교수들이 은행이나 대기업으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p. 45)

경제학 대학 교수가 자산관리 컨설팅기업의 자문위원이고, 경제학 교수가 주요기업의 경영이사로 있는 일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겸직을 하거나 은퇴후 기업으로 보직변경을 하면서 상임고문료나 강연료를 고액으로 받고, 연구소 지원비를 받기도 한다. 이론이 뒷받침해주는 기업의 경영논리는 어느새 나라의 경제정책에 반영되기 일쑤이다. 우리가 배운 경제학 이론이 과연 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질문을 바꿔야 한다. 누구에게 알맞은 경제학이론들이었던가?

 

 

이 책은여러모로 무척 시각적인 책이다. 경제학이론이나 마르크스경제학 등을 시각적으로 정리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정리 자료는 몇 가지가 더 나오긴 하는데, 이런식의 정리가 신선하게 읽혔다.

정치적 상상의 핵심부에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 이념은, 부의 재분배 없이도 빈곤을 해소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채질했다. 또한 누군가가 감수해야 하는 가난의 주된 요인은 다른 이들이 독점하고 있는 부에 있음을 망각하게끔 했다. (p. 127)

기업가에게 부여된 영웅적인 창조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질적인 고용을 창출해내는 것은 특정 주체가 아닌 전반적 경제의 활동, 즉 경기다. 이 같은 (이념적 이해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오해의 결과로, 지난 30년에 걸쳐 줄곧 경제정책의 초점은 경기 그 자체가 아닌 불량한 '창조의 대리인'인 기업에 혜택을 베푸는데 잘못 맞춰져 있었다. 거시경제 정책이 유럽연합의 규제라는 굴레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와중에 기업들은 부담금과 세금 감면 이라는 횡재를 누리기도 했다. 실업자가 계속 늘어만 가는 현실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p. 163)

이 책은 경제학 이론들을 설명해 주는 책도 아니고, 현실경제에 대한 문제점은 지적하나 답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고 그저 다시 질문해 볼 것을 은근히 요구하고 있다. 책은 내게 묻는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경제학은 무엇인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현실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몰라서 망각하고 왜곡된 정보로 오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읽으면서 뜬구름을 잡으려는 듯 답답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정리가 되질 않아 힘들기도 했다.

내가 읽으면서 가장 난감했던 것은 시각적 자료들이었다.

책장 한두장마다 컬러판 사진들이나 그림들이 가득하다. 쉽지 않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책이 시각적 자료가 많은 것은 의외였는데, 그 시각적 자료들이 다 그 페이지의 내용들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건지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다. 예를 들어 아시아경제개발을 이야기하면서 과거 한국이 국가주도 산업을 육성했던 내용을 말하는 도중에 들어간 사진이

 

 

 

이것이다. 이 사진이 한국의 경제개발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사진의 인용은 사실 표지부터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표지그림은 50페이지에 나오는데, 그 부분의 내용이 비주류경제학자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것과 종이가면은 무슨 상관인 걸까? 대부분은 내용상의 맥락과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그림들이 많앗지만 때로는 내용 전체의 핵심을 은유하는 듯한 사진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번 보고 바로 알아챌 수 없었다. 왜 이 사진이 인용되었을까? 생각하다가 이 내용을 함축하는 건가? 하고 다시 생각해봤을때 꿰어 맞춰지는 느낌이었을 뿐...

나의 이런 느낌은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조금 이해가 되었다.

당초 프랑스에서는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나 경제에 입문하는 대학생들을 겨냥해 출판됐다는 점에서 이 책을 좁게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다음 세대를 위한 지침서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p. 395)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에 나오는 철학적 질문은 유명하다. 온국민이 매년 그 문제를 궁금해하며 기다린다고 할 정도로 바칼로레아 에서 나오는 질문은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굉장히 함축적인 질문들이라고 들었다. 혁명과 자유와 철학의 나라인 프랑스 언론기사의 문체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바칼로레아 식으로 씌여진 경제비판서를 읽었으니 나한테는 영 익숙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문제점을 정확히 꼬집어 주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구체적인 학문서들이 적당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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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배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9
이경희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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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담은 사이버펑크 액션 스릴러

치밀하게 채워진 암투와 반전, 첨단 과학과 철학적 사유의 흥미로운 결함 (표지 中)

 

 

그래비티북스의 새로운 SF시리즈인 GF시리즈 중 <꿈을 꾸듯 춤을 추듯> 을 읽었었는데, 신선하고 좋았었다. 그런데다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보고 바로 흥미가 일었다. 그리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책이었다.

테세우스는 알겠는데,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일까?

테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속 인물이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 왕의 혼외 자식으로 성장하면 아버지가 정해놓은 미션을 수행후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떠났고 테세우스는 미션을 성공하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고구려 왕 주몽과 아들 유리왕의 일화와 흡사한 셈이다. 왕자의 성장기 랄까.

왕자 테세우스는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크레테의 왕을 찾아가 미로 속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귀환하지만, 떠나기전 자신이 살아돌아오면 흰돛을 펼치고 오고 죽으면 검은돛을 펼치고 오겠다고 말한 것을 깜빡하고 승리감에 취해 검은돛을 바꿔달지 못한채 돌아오는 길, 멀리서 돛의 색깔만 보고 좌절한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 바다가 아이게우스의 바다 즉 에개해 이다. 이 신화 속 배가 테세우스의 배 일텐데... 배가 무슨 의미가 있었나? 내가 아는 신화에서 배에 대해 별다르게 언급한 것을 읽은 기억이 없다.

이 배에 대한 의미는 1장 / 2장 / 3장 을 구분하는 검은 속지 속의 내용에서 알 수 있게 되는데, 1장 앞 검은 속지의 글자는 희랍어 같긴 해지만 뜻모를 글자였고, 2장 앞 검은 속지의 글자는 영어였지만 패스했고, 3장 앞 검은 속지에 와서야 한글로 된 내용을 읽으면서 앞의 두 검은 속지 내용도 같은 내용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장의 제목이 컨티넘 CONTINUUM, 2장의 제목이 BODY, 3장의 제목이 MEMORY 인 것도 그 의미도 그제야 나름의 깊은 뜻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멋진 발상이다.

아테네인들은 젊은이들과 함께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오래되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온전한 새 판자로 교체했고, 그 결과, 이 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성장과 변화에 관한 논쟁의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배가 처음과 같은 배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배가 다른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3장 앞 검은 속지 내용)

위 인용 문구는 2장의 초반 내용과 연결되고 이 책의 핵심질문과도 연결된다.

그는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생일 선물로 받은 블록 조립 장난감에 관한 기억이었다. 어린 아이였던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블록들을 쌓아 배를 만들었다. 손수 바느질한 돛을 달고, 해적 깃발도 올렸다. 자신만의 배를 갖게 된 그는 기뻤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기뻐해주지 않았다. '누가 이따위 것에 시간을 써도 된다고 했지?' 아버지는 배를 집어 던졌다. 조각조각 블록들이 산산히 흩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블록을 주워 담은 그는 이불 속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펑펑 눈물을 쏟다 잠이들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아침에 눈을 뜨자 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영문을 묻자 가사 안드로이드는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엄마가 밤을 꼬박 새워 산산이 조각난 배를 다시 하나하나 조립했다는 거였다. 가사 안드로이드의 메모리까지 확인해가며 재현해낸 해석선의 조립상태는 완벽했다. 하지만 더는 기쁘지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 순간 그 배가 전혀 다른 배처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p. 123~124)

 

이 소설은 SF이면서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연속성? 몸? 기억?

트라이플래닛이라는 거대 기업의 화장 석진환은 어느날 사고를 당하고 6개월 후 눈을 뜬 순간 온몸이 기계화 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를 죽이고자 하는 여동생 석미진은 오빠의 신체조직들로 몸을 부활시키고 그 몸의 석진환은 백지상태로 깨어난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준비해둔 절차에 따라 비밀리에 저장해둔 메모리기억은 실체는 없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신이 진짜 석진환이라고 주장한다. 세 명의 아니 세 종류의 석진환, 그 중 진짜 석진환은 누구인가?

트라이플래닛의 주요 사업은 크게 두가지 갈래다. 플래닛 전자와 바이오메디컬 로 의족, 의수, 인공장기 같은 의체를 개발하는 전자 쪽과 DNA 조작이나 신약개발을 하는 바이오메디컬은 둘다 인간과 관련된 첨단산업의 결정체이다. 뇌는 그대로 두고 인공신체를 갖는 것과 병든냉동보관신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존재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으며, 동시에 거대재벌기업이 독점하는 사회의 폐단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서야 블록체인금융에 대해 이해가 가기 시작했고, 뉴럴링크 니 실리카나노셀 이니 등에 대해, 그외 여러 신기술들에 대해 꼼꼼이 달린 주석을 읽으며 이런 기술까지 있었나 싶어 놀라하며 읽었다. 과학적 근거가 분명한 SF는 현실감을 높인다. 중국 SF작가 류츠신의 소설을 읽을 때 신빙성 높은 기술들에 대한 해박한 묘사에 감탄했었는데, 우리나라 SF소설도 그에 못지 않은 묘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고 이제껏 알지 못해 미안했다. 탄탄한 과학적 근거들에 대한 설명에 푹 빠져들어 읽느라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의체를 교환하는 동안 그는 영생의 꿈을 꾸었다 사실 꿈이라기보단 상상에 가까웠다. 그는 잠이 들지 않는 뇌를 가졌으니까. 상상과 꿈의 경계 속에서 그는, 몸이라 부를만한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고, 작디작은 뇌만이 블랙박스에 갇힌 채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죽음을 정복한 그의 정신은 상자 속에서 영원히, 끝없는 미래까지 존재를 이어갔다. 하지만 더는 이 상황이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제 알았다. 영겁에 가까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온전히 세계를 누빌 육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그 육체를 매만져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p. 148)

소설은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기준에 대한 질문과 함께 로맨스도 빠트리지 않고 있다. 아무리 인공화되어 가고 기계화되어가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포스트 휴먼'을 등장시킴으로써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는 포스트휴먼의 사랑.

이 소설은 외부적 묘사보다는 내부적 묘사가 많아서 미래사회를 연상하게 하는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지금과 같은 듯 다른 방식으로 벌어지는 기업내부에서 벌어지는 친족들간의 암투, 인간과 직결된 미래산업에 대한 전망, 인간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SF가 이렇게도 상상하게 만들 수 있구나 싶어 놀라웠다.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프로그래밍을 배웠고, 철학을 좋아했지만 결국 경영학을 전공했다는 저자의 이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젊은 작가답게 뒤에 붙여진 '작가의 말은' 시작부터 참신했다. '작가의 말' 을 읽어보며 웃어보긴 또 처음이다.

[강력 경고] 세상에는 책을 펼치자마자 맨 뒤로 달려와 후기부터 읽어대는 폭주족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에는 강력한 스포이러가 포함되어 있사오니, 부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 첫 장부터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p. 312)

이런 발랄한 경고를 보았나 ㅎㅎㅎ

작가는 작품으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믿음이 세간에 널리 퍼진 듯합니다만, 30년 남짓 독자로 살아온 저는 항상 이런 전통이 불만이었습니다. 무릇 작가라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태산보다 높게 쌓인 사람들이며, 독자라는 사람들은 작가의 깊은 마음을 캐내고 싶어 안달 난 광부들이 아니겠습니까. 블루레이 디스크마다 담겨있는 코멘터리 영상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 오늘은 저만의 공간을 얻은 기념으로 마음껏 길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p. 312)

이어지는 작가의 말 또한 이 책을 상상해온 작가의 생각들을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책 내용은 진지하게 읽었는데 작가의 말에서 웃어가며 읽은 것도 처음이지 싶다. 여러모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해준 책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다 좋았다.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면 찾아 읽고 싶고, 다른 GF시리즈도 읽어보고 싶다는, 독서의 폭을 넓혀준 좋은 SF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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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아들은 처음이라 - 첫 아들을 키우는 엄마를 위한 심리학 수업
안정현 지음 / 꼼지락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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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들을 키우는 엄마를 위한 심리학 수업

아들과 잘 지내는 엄마는 무엇이 다른가!

15년차 심리상담가 안정현 대표가 전하는 엄마와 아들 자존감 성장 프로젝트 (표지 中)

저자는 15년차 심리상담가로 현재 '마음달 심리상담센터' 대표를 맡고 있다. 이 책은 아들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엄마들과의 상담 사례를 통해, 엄마와 아들이 함께 성장하는 대안을 모색한 책이라고 한다. 이 정도의 소개가 있는 책들은 대부분 다 읽었을때 저자의 상담센터로 오라는 얘기인가 싶은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상담사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왠지 상담하러 가야할 것만 같은 위화감을 주지 않고 사례를 최소한으로 정리하여 이야기하면서 엄마의 마음상태를 표현해보고자 애쓰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아들은 커갈수록 남자가 되어가고 엄마는 나이들수록 꼰대가 되어간다. 남자의 뇌로 성장하는 아들의 행동과 말은 여성의 뇌로 고정된 엄마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하물며 치유되지 못한 내면의 아이를 마음에 숨긴 엄마라면 더욱 아들을 자식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충족대상으로 보게 된다.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엄마와 아들이 서로 심리적 거리를 둘 때 아들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라는 저자의 말은 엄마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자식은 손님처럼 키우라는 말이 있긴 하다. 어차피 떠날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힘든 일인지라 빈둥지증후군이니 소외감/우울중에 시달리는 엄마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나마 딸은 나이들수록 친구가 된다는데, 아들은 그야말로 남같은 존재가 되기 마련이다. 원래 무뚝뚝하던 남편과 달리 애교에 귀여움이 넘쳐나던 아들과 소원해지면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엄마는 아들과 일찍부터 심리적 거리를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

변화는 상대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타인의 감정을 "그랬구나" 라고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상대가 그럴 수밖에 없는 타당성을 읽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담자 또한 내담자들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게 되고 대화하게 되면서 내담자가 지각하는 세계를 바라보게 되면 '당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군요'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아울러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공감받는 경험을 하면 스스로에 대해 통찰하는 순간이 옵니다. (p. 19)

육아상담프로가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하물며 개그코드로까지 번진 그 멘트! "그랬구나~" 는 사실 그 말 자체 보다도 그 말을 하는 상황에서의 태도나 인지방식이 중요하다. 여성은 공감으로 이해하고 남성은 논리로 이해한다고 하는데, 아들은 '그랬구나' 하며 공감하는 것보다도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 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는 상담사에게 아이를 고치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하지만 아이는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p. 21)

상담센터까지 가게 되는 상황은 사실 갈등의 정점까지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렇게 된 상황이 자녀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 외에도 여러 (상담사례를 바탕으로 한) 심리서들을 읽어봐도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말은 '아이는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문장만 잘 기억하고 살아도 상담센터까지 가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계선이 없는 어른들은 자녀나 친척의 일을 자신이 다 해줘야 한다고 믿으며 오지랖을 부립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면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불안한 마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어른은 타인을 좌죄우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녀를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p. 43)

자녀 수가 많았을 때는 할래야 할 수 없었겠지만, 한명 내지 두명 정도의 아이를 키우는 요즘 시대는 그야말로 아이 중심으로 살게 되기 마련이다. 아이를 왕처럼 모시고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왕은 명령을 하는 사람이지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 아이가 왕인 집에서도 부모는 아이를 통제하기 마련이다. 잘 가르치고 잘 키우겠다는 일념하에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그 완벽함을 아이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흠을 내는 것 같으면 부모는 화를 낸다. 하지만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갑작스럽게 경험하는 작은 실패들에도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더구나 주도권 이나 승부욕이 강한 아들이라면 더욱 이러한 통제를 감당해내지 못한다. 아들에게 점점 조금씩조금씩 선택권을 주도권을 주는 것은 천천히 오랜 기간 해야 엄마도 겨우 제대로 완전히 넘겨줄 수 있는 때가 온다.

많은 신화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가진 어머니를 두고 떠납니다. 어머니 품에서 자라던 아이는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아버지가 남긴 물건을 찾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있는 고향을 두고 모험을 떠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아들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어머니를 떠나야만 합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람은 어머니의 사랑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행될 때 정신적 건강과 성숙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따뜻하고 온전한 사랑을 주는 근원입니다. 아들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거나 뛰어남을 증명하지 않아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풉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회적 상황에서 인증된 방식, 그의 아들이라는 증표를 증명해야 하는 조건적인 사랑을 베풉니다.

만일 신화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면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적당히 만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들이 자신이 왕의 아들임을 알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을 보내야 합니다. 품에 낀 아들이 아니라 남자로서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결국 어머니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p. 103)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그랬고 고대그리스의 아이게우스 왕의 아들 테세우스가 그랬다. 그러고보니 정말 옛날 신화에서 부터 아들은 어머니를 떠나야 성장했다. 아들의 손을 잡고 걷다가 어느날 아들이 손잡고 다니기를 거부할때 엄마는 슬슬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하나보다. 모험의 세상속으로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심리학자 칼 로저는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때 아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양육되면, 아이는 부모의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도 어린 시절을 생각해볼 때 자신의 부모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대했을 때 즐거웠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p. 125)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양육한다는 것이 아이가 해달라는 데로 다 해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이에게 맞고 아이가 편안해 하는 방법의 양육방식을 말하는 것일 텐데, 예를 들어 아이에게 운동을 시키고 싶을때 밖에서 몸을 부딪히며 뛰어다니는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을 것이고, 먼지 없는 실내에서 몸싸움없이 단독승부를 벌일 수 있는 탁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아이가 원하는 종목으로 운동욕구를 충족했을때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 들 것이다.

양육법에는 정답이 없고 어떻게 해도 미진한 것 같아서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이의 마음을 잘 따라가고 싶어서 아이가 이것저것 해달라고 하는 대로 하다 보면 결국 한계에 이르게 되어 아이를 다그치게 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또 아이에게 잘못한 것 같아서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p. 185)

희생적인 엄마에 대해 아이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정서적인 짐을 지게 될 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채무 관계가 됩니다. 아이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엄마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아닌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자녀에게 벗어나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 192)

저자는 <엄마의 주례사> 라는 책을 쓴 김재용 작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이야기해주고 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갈등이 심화되어 갈때 이 작가는 자기만의 공간인 책상을 마련했다. 책상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듬어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가는 필요한 사람들과의 만남만을 이어갔다고 한다. 만나서 힘이 되고 서로가 성장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면 정리했다. (아이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고 난 후인 오전시간에 동네엄마들과의 만남은 해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마지막으로 거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부당한 시댁의 요구에 거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을 지키면서 가족을 지켰고 작가가 되었다.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은 결국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딸을 키우건 아들을 키우건 자녀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고 배려이다. 특별한 내용도 아니고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지만 차분하게 읽히는 분위기가 좋은 책이었다. 아이를 낳는 순간 엄마의 나이는 아이와 동갑이 된다. 그렇게 아이가 성장하면서 엄마도 성장한다. 다만 엄마는 이런 책을 읽으며 자신의 성장을 먼저 주도할 수 있다. 아이와의 아들과의 관계가 힘들다고 생각될때 나 자신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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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이향규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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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제임스 그리고 아버지...

오래된 사진과 일기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이야기

잊힌 전쟁을 살아낸 이들에게 보내는 진솔한 마음 (표지 中)

 

이 책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픽션처럼 읽히는 논픽션인데... 일기도 아니고 다큐도 아닌데...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이 느껴지는 이 책은... 진심이라고 해야할까...

저자는 함경도에 고향을 둔 실향민 아버지 의 딸이고

1987년 민주화의 뜨거운 열기를 대학교2학년일때 경험한 세대이며

북한교육사를 연구한 북한전문가로

현재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영국가정의 한국인 며느리이다.

저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됐을때인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는 장면을 영국에서 티비뉴스로 본 저자는 마음이 몹시 들떴었다. 곧 정전이 선언되고 통일준비를 할 것만 같아서 잔치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고, 친정아버지의 생애가 유언이 떠올라 마음이 분주해졌다. 저자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잊혀진 6.25전쟁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은 역사에 묻힌 개인사의 고난을 묘한 울림으로 전하고 있었다.

2018년 2월 26일, 아버지는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음이다. 그는 1950년 12월에 어머니와 남동생을 집에 두고 고향을 떠났다. 열다섯살 난 소년은 부산항에서 부두노동을 하면서 전쟁을 넘겼다. 가난한 이에게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모질게 공부했고, 온전히 혼자 힘으로 훗날 대학교수가 되었다.

겨우 2년전에 눈치를 챘다. 그에게 무슨무슨 교회에서, 무슨무슨 단체에서 보내는 카톡 알림음이 끊임없이 울린다는 것을. 알림음이 나고 몇초 후에는 늘 대한민국을 빨갱이들로부터 구하자는 날선 웅변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때마다 슬그머니 방문을 당았다.

아버지가 의식없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그의 핸드폰을 열어봤다. 그에게 지난 몇년 간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던 것이 그들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이 그들의 생경한 목소리로 채워진 것이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다. 그런데 그들에게 화가 나는 건지 나에게 화가 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생전에 남북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하지 않았다. ... 혹시라고 남쪽에 형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서 '월남자의 가족'으로 불이익을 당할까봐 걱정해서였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다. 너무 오래 걸렸다. 70년 세월, 그건 정말 한평생이다. 많은 이들이 그 시간을 다 기다리지 못했다.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누가 '열일하는 대통령'이라고 썼다. 나도 내 몫의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게 뭘까?

저 멀리 있는 멋진 일을 꿈꾸면서 정작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상의 실천은 소홀히 하는 것, 익숙한 함정이다. 그래,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한국전쟁 영국군 참전군인'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게 '한국' '전쟁' '영국' 을 조합했을 때 가장 쉽게 떠오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곳에서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전쟁터에 나갔던 노인들과 그런 이야기를 같이 나누는 것이 종전을 염원하는 제 나름의 의식이라고 믿었습니다.

(p. 20, 21, 22, 23, 24, 28, 29)

 

실향민 아버지의 죽음과 판문점에서의 남북정상의 만남은 그렇게 저자에게 뭐라도 해야할 것만 같은 자신의 몫을 찾게 했고, 그렇게 찾아다닌 저자의 발자취는 이 한권의 책이 되어 나왔다.

저자는 템즈강변에 '런던 한국전쟁참전기념비'를 찾아가 본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희생에 감사한다는 문구를 보자 어릴 적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수호 이런 말들 때문입니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수호라는 것은 지킨다는 뜻인데, 무엇을 지키려면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1950년 대한민국에, 수호할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었을까?

그렇다고 이 젊은이들의 희생이 무용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참전군인들에게 빚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만약 기념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면 제 마음속의 저항은 훨씬 적었을 것 같습니다. "영국군 장병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발전할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p. 39, 40)

 

저자가 처음 만난 영국군 참전군인은 짐 그룬디씨이다.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있고 죽으면 부산의 유엔공원에 묻히고 싶다는 노병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시신수습팀으로 6.25를 겪었다.

세계1,2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는 영국에서도 의무징집을 하던 때였다. 영국 청년들은 열여덟살이 지나면 입영통지서를 받았고, 한국전쟁에 파병된 장병 대부분은 의무징집병이었다. 많은 이들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지만, 국내의무복무가 아닌 해외파병의 급여가 높았던데다, 먼나라 전쟁터에 대한 모험적 상상력을 지닌 많은 청년들이 한국전쟁을 선택했다. 하지만 영국내 어느 신문이나 텔레비전에도 한국전쟁은 보도되지 않았고, 가족들조차 그 전쟁에 대해 잘 몰랐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물었다. "한동안 안 보이던데 어디 갔었어?"

"한국에 있었어"

"아, 그랬구나"

그것뿐이었다. 아무도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관심이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국은 전사자를 본국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미국과 필리핀은 시신을 고향으로 데려갔는데 영국군 전사자는 모두 부산에 묻혔다. (p. 58, 59)

 

짐 그루디씨가 힘겹게 수습했던 영국군 병사들은 모두 부산의 유엔공원에 묻혔고, 본인도 그곳에 묻히고 싶어한다. 한국인에게는 아직까지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는 한국전쟁은 한발짝만 떨어져 바라봐도 이렇게 잊혀진 전쟁이었다. 당연한 현실일텐데도 기분이 묘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병사에 대한 수소문을 하던 중 저자의 딸이 다니는 학교의 졸업생중에도 참전군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저자는 그렇게 참전군인 '마이클 호크리지' 에 대한 자료를 모으게 되고, 짐 그루디씨가 전사자의 사진을 모아 유엔기념공원에 얼굴없이 묻힌 묘지에 사진을 붙이는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이클의 사진을 전해주게 된다.

짐그루디씨는 '어차피 죽은 사람인데 시신을 수습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 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전장에 나간 병사들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기쁜 것처럼, 우리에겐 시신을 수습하는 게 '빅토리'였습니다. 그건 전쟁터에 시신을 버려둔 북한군에 대한 우리의 빅토리였고,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어머니를 위한 빅토리였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수한 것에 대한 빅토리였습니다" (p. 98)

저자는 검색한 신문기사에서 알게된, 한영수교 130주년 및 한국전쟁 휴전 60주년을 기념한 한국전 참전용사 수기 공모전에서 수상한 데이비드 해먼드씨를 만난다.

"저는 이곳에 와서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는데요, '잊힌 전쟁'이라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예, 그럼요!"

"여기서는 잊힌 전쟁이에요. 한국정부는 영국군 참전 군인을 한국으로 초대하고 기억해주는데, 정작 군인들을 전쟁터로 보낸 영국정부는 이를 잊은 것 같아요.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내 손자도 증조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싸웠다고 하면, 한국전쟁이 뭐냐고 물어요. 그거 제2차 세계대전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학교에서는 1,2차 대전에 대해서만 가르쳐요. 그건 아주 자세히 가르치고 그 주제로 에세이도 엄청 많이 쓰게 하지요. 손자는 얼마 전에 프랑스와 벨기에에 현장학습도 다녀왔어요. 전적지도 가고 영국 장병들이 묻힌 묘지에 참배도 하고요. 한국전쟁은 그후에 일어난 일인데도 배우지 않습니다." (p. 112)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전쟁은 왜 시작된 겁니까? 그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습니까?" (p. 115)

 

영국군 참전용사들은 귀국해서 그 어떤 환영인사도 받지 못했다. 그 어떤 특별대우도 받지 못했다. 그저 직업군인으로 어디 먼 나라 다녀온것 뿐이었다. 그렇게 한국전쟁에서 살아돌아온 영국인 노병이 한국인에게 '그런데 그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외국인으로서 나라의 명령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그들에게 한국인으로서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6.25는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저자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피난시절 일기장을 읽으며 추억하는 아버지는 어린 소년이었고 가난한 시절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개인사에 미친 영향은 죽음이후 남겨진 딸이 아버지를 이해하는데 큰 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진정한 추모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영국에서 11월11일은 추모일 입니다. 영연방국가들과 미국, 프랑스 등 다른 많은 나라도 이날을 기념합니다. 우리로 치면 현충일입니다. 이날이 추모일이 된 것은 1918년 11월11일11시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매년 이 시각이 되면 2분간 묵념을 합니다. (p. 175)

이곳에서는 '전쟁'이라고 하면 제1차 세계대전을 떠올리는 사람이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게 처음에는 이상했습니다. 100년도 전에 일어난 그 오래된 전쟁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기억하는지, 2차대전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1차대전인지... 그건 1차 대전이 사람들에게 준 충격때문일 거라고 했습니다. 현대식 무기 개발로 과거의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량살상이 벌어진 전쟁, 그전까지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전쟁이 끔찍한 참호 속의 지옥임을 알게 된 전쟁, 정규군으로 시작했으나 중간에 징병제가 실시되어 모든 젊은이가 전쟁터로 나가야 했던 전쟁, 국가간동맹 때문에 뛰어들어서 별다른 명분도 없었던 전쟁, 그래서 1차대전이야말로 전쟁의 비극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일 거라고요.

저는 처음에 '추모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뭔가 빠진 느낌이었습니다. '무엇을' 추모한다는 내용이 없어서 그랬나봅니다. 현충일에는 '충'자가 들어 있어서인지 저는 묵념을 할 때도 자꾸 국가에 대한 충성이 떠올랐는데, '추모'라는 말에는 그저 기억하는 행위만 있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무엇을 추모하는 지 궁금해졌습니다. ... 사람들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 대답은 다 달랐고, 가장 많은 답은 그저 '그들'을 기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문이었습니다. 무얼 기억할지는 기억하는 사람의 몫인 것을,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는' 정답 같은 것을 찾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지난해부터 저는 포피를 달면서 한국전쟁 참전군인을 기억합니다. 청년 마이클을 추모하고, 그룬디 씨와 해먼드 씨를 생각합니다. 그 끝에 부두에서 일하는 소년도 따라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p. 177, 178)

 

봄에 영국에서 시작한 저자의 설레임은 여름에 청년병사 마이클을 찾고 가을에 아버지의 일기를 거쳐 겨울에 한국에서의 광화문 촛불집회 참여 와 부산의 유엔기념공원 참배로 잔잔이 가라앉는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이 전쟁에 대한 기억찾기 여정은 우리에게 6.25는 어떤 전쟁이었는지 다시 되묻게 한다. 종전과 통일을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서 지나간 전쟁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적어도 11월11일이 막대과자의 날이 아니라 어디선가는 추모의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맨체스터에 있는 제국전쟁박물관에 가려고 생각한 것은 '우리가 잊지 않도록?' 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특별전시를 보고싶어서였습니다.

제가 이날 본 전시는 '적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에 맞서 우리가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가 아니라 이 전쟁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줬는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한국전쟁을 이렇게 볼 때가 오겠죠. 전투가 아니라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날이, 적의 잔혹함이 아니라 전쟁의 가혹함을 이야기할 날이,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던 전쟁이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를 이야기할 날이, '평범하지 않은 시대를 산 평범한 사람들' 의 이야기를 할 날이요. (p. 200,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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