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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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에서 유다는 악마가 되어야만 했나?

유다 또한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유다는 정말 예수를 배신했을까?

아무도 들려주지 않은 유다의 진실을 찾아간다!

기독교를 아는 사람이라면 "유다"라는 이름을 모를 수 없을 것이고,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유다"라는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을 만큼,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의 다른이름같은 고유명사에 오래도록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왜 의문을 품지 않을까? 유다라는 존재에 대하여 과연 그가 배신했는가 라는 지점에 대하여 정말 그랬나? 하며 왜 아무도 따져보지 않는 것일까? <유다>라는 소설을 읽고나서 나는 '유다'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옥성호 라는 저자를 알게 된 후 그의 주장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에 대해 검색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옥한흠의 장남이자 비기독교인이며 그의 아버지 옥한흠은 한국 기독계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옥한흠은 '사랑의 교회' 창설자이며, '사랑의 교회'는 국내 대표적인 메가톤급 거대교회이다. 또한 거대교회 목사들이 대부분 편파성을 드러내어 비기독교인들에겐 좀 안티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없잖아 있는 것에 비하여 드물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아울러 존경받을 만한 목회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교회들이 무슨 왕위 물려주듯이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시키는 것에 비해 옥한흠 목사는 후임 목사에게 교회를 맡겼다. 이는 아들 옥성호가 종교인의 걸을 걷지 않은 것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아들을 종교인으로 키워내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옥성호가 아버지의 길을 걷지 않은 것에 이어 기독교의 논리 및 부패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심장하다. 저자의 행동이 아버지가 이룬 업적?에 어떤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것 아닐까? 그러니 그의 주장들에 한번쯤이라도 귀기울여 봐야 하지 않을까? 그 시작으로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존재인 '유다'에 관련한 해석들을 읽는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일 수 있다. 더구나 '음모론'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이야기들은 얼핏 스릴러소설을 읽듯이 새로운 지점이 밝혀질때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주기까지 한다.

아니,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뭔 의문을 갖고 뭔 음모냐 할 수도 있지만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라, 아마 혹 하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부터 헐, 정말 그럴듯한데?! 싶어질수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로 시작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유명하다. 하나님의 사랑, 그런데 사랑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구원교리, 죄 없는 이가 무고한 피를 흘려서 죄 있는 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하고 불합리하다 사랑이 아니라 불의한 폭룍이다. 그건 희생양에게도, 수혜자에게도 공정하지 않다. 어쨌거나 기독교의 희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예수 하나로 끝났다면 문제 될 게 없다. 예수의 희생은 해피엔딩이니까.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예수처럼 찬란한 보상을 받은 희생양도 없으니까. 문제는 갸롯 유다, 그리고 그로 상징되는 유대민족이라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진짜 희생양.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다. (p. 22)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가 유다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에게 깨달음을 주거나 뒤늦게라도 회개시켜주거나 하기는 커녕 마지막까지 저주를 퍼부었다. 왜 유다는 구원하지 않았을까? 세상 모두를 구원해야 하는 사랑의 종교라면서. 어쩌면 예수는 유다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성경은 예수가 직접 쓴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쓰여졌다는 점이다.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후대에 쓰여진 기록은 쓰여진 사람과 시대적 배경에서 무관하게 쓰여질 수 없다. 그렇다면 쓴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을 시대적 배경을 당연히 캐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도 감히?!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희생양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시대를 2천년 거듭했어도 유다같은 존재가 없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가? '가록 유다가 아니었다면, 예수의 십자가가 불가능했을까요? 왜 십자가 구원에 유다의 배신이 필요했지요?' (p. 24) 더구나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마다 십자가와 유다의 관계성에 대해 말하는 바가 다르다. 무엇이 진실인가?

신앙 여부를 떠나서 성서를 연구하는 거의 모든 학자가 인정하는 예수에 관한 유일한 역사적 팩트를 딱 하다만 꼽자면, 단연 십자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 십자가가 무엇인가? 페니키아인의 잔인한 고문방식이다. (...) 역사상 십자가형을 받은 로마 시민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이 형벌은 오로지 반역자에게만 시행했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은 그 자체로 메시지를 갖는다. 반로마라는 정치성이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p. 29)

바울이 선교할 때만 해도 굳이 나올 필요가 없었던 예수의 '구체적 생애', 복음서 집필이 절박한 당면 과제가 되었다. 예수의 삶과 어록이 아예 없는 바울의 일방적인 교리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시대가 끝났다. 교리를 뒷받침하는 예수의 구체적인 인간됨이 필요했다. (p. 31)

복음서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번째로 평화주의자 예수를 강조했다. 두번째로 예수를 죽인 게 악마의 하수인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 그래서 예수를 유대민족과 대적하고 로마를 사랑한 인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p. 32)

본토 유대민족은 이미 전쟁에 패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야말로 무슨 말로 해도 괜찮은, 뒤탈 걱정이 없는 희생양이었다. 그래서 유대민족을 상징하는 인물로 가록 유다가 선택되었다. 이게 이른바 복음서라고 불리는, 신약성서의 문을 여는, 예수의 생애를 담은 네 권(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의 정체다. '복음', 즉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일 수 있겠지만, 유대민족에게는 날조와 저주로 가득한 기소장이다. 결과적으로 완전범죄를 노리며 증거를 지운, 살인자의 진실 은폐 기록이다. 역사는 진실 여부에 관심이 없다. '언제나' 승리자의 편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서구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복음서가 은폐한 범죄현장은 아예 성지로 탈바꿈했다. (p. 33)

성서는 기독교의 교리를 담은 핵심 서적이므로 그저 종교적인 해석만 하면 되지 않냐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성서는 역사서로서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의 기적이고 그 기적이 그저 신화가 아니라 실재적으로 일어난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상 성경에 쓰여진 기록은 역사적으로 진위를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거대종교가 된 이후로 감히 누구도 의문을 표현할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희생양의 범위는 점점 넓어져서 결국 세계대전에서 학살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닐까. . '로마를 사랑하고, 유대민족을 저주하는 예수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핵심주제다. (p. 46)' '살아남아야만 했던 기독교인에 의해서 그나마 예수와 관련한 '유일한' 역사성, 십자가가 왜곡되었다. 그 결과 한 민족을 향한 집단적 증오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이 탄생했다. (p. 47)' 로마시대의 역사서로서 성경을 파고든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논리들은 굉장히 타당하게 이해되어지는 면이 컸다.

희생양이라는 원시 시스템, 누군가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내가 산다는 구원의 교리로 움직이는 기독교는 언제라도 새로운 가롯 유다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도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희생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DNA다. 인류 문명을 거스르는 상상을 하나 해보자. 행여 기독교의 손에 과거 서구세계를 지배하던 무소불위의 중세시대 권력이 다시 쥐어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21세기라고, 이단사냥, 마녀사냥이 없을까? (p. 49)

선입견만 벗어던질 수 있다면, 1장에서 소개한 내용만으로도 복음서가 어떤 책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종교 관성에 맞서서 이성과 논리가 승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성과 더불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텍스트가 분명하게 드러내는 진실 앞에서, 2000년 권력의 아우라가 만든 사랑의 예수와 거룩한 정경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정직해야 한다. (p. 50)

이 무슨 불경한 소리냐고 버럭하기 전에 정말 자신의 믿음에 자신이 있다면 왜 이런 소릴 하는지 꼼꼼이 따져보는 게 올바른 태도 아닐까? 복음을 전파하는 다양한 모습들 중 좀 괴이하다 싶은 사람들을 거리에서 볼 때마다 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저 사람들 중 과연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까?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고민하고 해석해본 사람이라면 단 몇문장에 의지해 저런 행태들을 보일 순 없지 않을까? 그러니 저자의 논리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채 집어던지지 말고 숙고하며 읽어본 후 반박하는 성숙한 모습을 가져볼 것을 권한다. 1부와 2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2부는 4종류의 복음서 내용을 바탕으로 심층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져묻고 있기에 그 하나하나에 제대로 조목조목 대응해 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나같은 비종교인조차 기독교에 성심을 다해 반하게 되지 않을까.

오로지 예수의 죽음만이 인류의 구원을 가져온다고 치자. 구원자답게 죽는 방법이 배신당해 죽는 길밖에 없었을까? 그것도 배신자를 향해 저주하며 죽는 방법밖에 없었을까? 예수가 정녕 구원자라면, 거기에 걸맞은 죽음은 수도 없이 많다. 인류를 위한 금식기도를 하다가 굶어 죽는 것,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유대 땅을 해방하라며 외치다가 순교하는 것, 훨씬 구세주다운 죽음 아닌가?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이 선택한 방법은 한때 선택했던 민족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잠시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와 비교도 안 되는 '진짜 희생'을 치르도록 만들었다. 마비된 이성을 흔들어 깨워, 정신을 차릴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건 증오에 눈이 먼 누군가의 창작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비극은 역사가 되어 버린 증오의 창작이 인류의 재앙을 불렀다는 것이다. (p. 275) 이 책은 독자가 이야기를 이야기로, 신화를 신화로 보도록 하는 데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다. (p. 276) -에필로그 中-

그야말로 가시밭길일 것 같은 저자의 걸음걸음이 분명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에게 의미있을 것이기에 앞으로도 당당한 행보를 이어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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