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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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의 설레는 이름, 최은미가 선사하는 깊은 아름다움

"두려움을 껴안고서라도 마주 보길 바랐다"

예전엔 책에 쓰여있는 소개문구를 통해 그 책의 선택여부가 정해지곤 했는데 언제가부터 그 책을 소개한 누군가의 문장으로 인해 책을 읽게 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관심있어 하던 소설가가 추천하는 작품이라면 일단 믿고 읽어보고 싶어진달까. 조해진 소설가는 이 책에 대해 '<마주>는 소중히 읽혀야 한다' 라고 했다. 그 한 문장으로 나는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결혼식 전날 밤, 내 전생의 마지막 날이자 현생이 시작되기 직전의 밤 (p. 18)' 이라던가 '나는 포토라인 앞에 선 적이 있다. 평일이었고 대낮이었다.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p. 11)' 라는 식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초반부는 있지도 않았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시작해서 이 책이 판타지 장르인가? 의심하게 했고,

"얘가 그 비탈과수원집 딸? 참하게도 생겼네. 천상 여자네, 천상 여자야 (p. 23)" 라던가 '나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여자답다는 말을 들었고 아무리 귀엽게 보이고 싶지 않아도 이미 생긴게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귀여워지곤 했다 (p. 24)' 라던가 '내가 다가가보고도 싶었던 학교 내 모 단체의 여학우들은 이런 나에게 어떤 틈도 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내가 타도해야 할 여성성의 재현물 그 자체인 것처럼 대했다. (p. 51)' 라는 식의 문장을 보면 이 소설은 여성성을 주제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이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었고 지극히 인간애적인 인간애를 다루고 있었다. 묘하게 비껴나가게 읽혀지긴 하지만;;;

그리고 의외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자여자하고 소설의 화자이기도한 나리도 아니고 나리가 줄창 얘기하는 수미도 아니었다.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인물은 '만조 아줌마'라고 할수 있었다. '마주'함을 알려준 인물, 만조 아줌마.

이웃해 산다는 심리적 가까움 때문인지 내 부모는 부근의 어떤 과수원보다도 만조 아줌마에게 많은 걸 의지했다. 남한테 신세를 지거나 폐가 되는 걸 어지간히 싫어했던 아빠도 만조 아줌마한테만은 조언도 구하고 부탁도 했다. 내 눈에 과수원에서의 대장은 누가 뭐래도 만조 아줌마였다. (p. 32)

결핵을 앓은 적이 없는데 병원에선 예전에 결핵을 앓은 적이 있는 폐라며 잠복결핵균 보균자임이 확인된 나리, 호흡기의 주요 기관인 폐에 문제가 없었음에도 호흡에 문제가 생긴 나리 그 중심에 '수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딸 은채와 나리를 걱정해주는 남편 오종수와 가족을 이루고 있던 나리는 캔들 공방을 하고 있었고, 바야흐로 기침 한번 잘못하면 눈총을 사던 코로나시국 초반이었다. 하지만, '"그럼 엄마는 알고 있었단 말이야?" "뭘" 무언가를 계속 튕겨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뭘 물어야 할지 모른채로 전화를 끊었다. (p. 34)' 라는 문장처럼 소설은 왠지 무언가를 계속 튕겨내는 것처럼 읽혀져서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무엇을 읽고 있는 건지 잘 모르는 상태가 되어갔다. 어쨌든, 중요한 사람은 만조 아줌마였다.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

수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고 사는 감각 하나가 깨어나 무언가가 열리면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온 것들을 더는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깨어나 삶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면 겨우 살아내고 있던 하루가 뒤집힐 수도 있다. (...)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 '니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의미니?' (p. 86)

나리가 '전생'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결혼전, '현생'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결혼후 의 시기를 일컫는 것 같다. 전생때 나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만조 아줌마 였고 현생에서 내내 나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인물은 수미였다. 결혼후 자리잡고 살게 된 기정시에서 딸 은채의 놀이터 친구로 수하를 자주 만나게 가까어진 수하의 엄마인 수미.

그때까지도 나는 '딴산'이라는 지명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만조 아줌마의 발효 항아리와 여안의 비탈밭을 여름내 떠올리면서도 여안을 전부 떠올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p. 98)

코로나시국의 초반 상황이 나리를 긴장시키는 사이사이 나리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나리의 표현대로 하자면) '전생과 현생'은 자주 교차된다. 그때 여안에선 나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기정시에서 나리가 갑자기 여안의 기억을 만조 아줌마에 대한 기억을 자꾸 떠올리려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상관이 있길래?

종수랑 결혼을 해서 평생 단짝이 되면 나는 지겹고 불편했던 여자들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고 맛집에 가는 것들을 종수랑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종수가 나를 사랑해주는데 다른 여자들이 내게 뭐라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종수랑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자 내 앞에 펼쳐진 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촘촘한 여자들의 세계였다. 나는 이제 내 아이까지 옆에 세운 채 다시 그 세계를 뚫고 들어가 자리를 틀어야 했다. 여자들과 좀 멀어지고 싶어 종수랑 가까워졌는데 그게 빼도 박도 못하도록 나를 다시 여자들한테로 데려갔던 것이다. 종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종수랑 있고 싶어서 종수랑 살기로 한 건데, 종수는 간데없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키 크고 눈을 잘 안 맞추고 슬랙스가 잘 어울리는 어떤 어려운 여자와 롯데월드 투썸 테이블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p. 151)

그 어색하고 어려운 여자가 수미였고 은채와 서하가 함께 노는 시간이 잦아질수록 둘도 자주 만나고 길게 만나게 되었다. 수미를 보면서 나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뭔가 현생의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을 놓치고 살았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되고 점점 더 과거의 기억을 더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기억이 났던 것이다. 만조 아줌마라는 인물과 딴산이라는 장소가.

나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만조 아줌마를 현생으로 등장시키고 수미와 함께 찾아가면서 '딴산'도 세상으로 불려나와지게 된다. 하필 코로나 시국에.

그들은 하나만을 알았다. 어떤 이유로 들어왔든 딴산에 들어왔다는 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겐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한 몸을 누일 장소가 없었다. 있을 자리가 없었다. 죽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딴산으로 들어갔다. (p. 224)

수미는 만조 아줌마한테 물었다. 이웃집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마음일 수 있었는지. 그런 친절은 어떨 때에 가능한지. (p. 282)



만조 아줌마는 딴산에 사는 그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했다. 만조 아줌마가 이웃집 나리에게 '그런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었던 것처럼 (p. 262)' 수미와 서하 사이에 그런 시간과 공간을 경유하게 해주고 싶었던 나리는 삼십년이 지난 후에도 만조 아주머니의 항아리를 통해 또다시 예전의 '그런 시간과 공간'을 느끼고 깨닫는다. '아이를 낳은 날짜가 적힌 항아리 옆에 앉아서야 나는 그 말이 지난 삼십년간 내 어딘가에서 숨죽인 채 살아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p. 255)' 잠복결핵균처럼. 전염성이 있지만 잠복기에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숨죽인 잠복결핵균처럼. 그런 시간과 공간의 따스함또한 숨죽인채 나리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수미와 수하 모녀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만조 아줌마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서하를 보고 있는 어른이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수미가 체감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말해줄 수 있었다.

보라고, 서하는 해변에 가려 한다고. 마음을 접어버리지 않았다고. 너한테 계속 자기 자신을 얘기하고 있다고. 너한테 순응하지 않았다고.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p. 304)

아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그런 마음들이 소설 곳곳에 있었다. 또한 '엄마'의 마음이라고 좁히기보다는 그런 마음을 넓혀서 '연대'의 마음으로 가고자 하는 것또한 어렴풋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건 '나리' 였다. 철부지에서 성인으로 엄마의 역할에서 엄마의 마음으로 나리는 자라고 있었고 그 과정을 든든이 지켜주는 존재가 만조 아줌마 였다. 그 만조 아줌마에게는 술항아리가 있었다.

통기성이 있는 항아리나 참나무통에 술을 넣어놓으면 술은 그 안에서 조금씩 증발된다. 증발된 술이 날아올라 공간을 채우고, 밖으로 새어나가 그곳 일대의 허공에 흩어진다. 그렇게 날아간 술을 천사의 몫이라고 한다고, 그래서 양조장 근처에 사는 천사들은 다 조금씩 취해 있다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p. 243)

코로나 시대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균 때문에 온 사람이 죄다 숨죽이며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들숨과 남의 날숨이 섞이는 것에 공포를 느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결국 사람은 따로 떨어져 살수 없었다. 사회라는 관계는 끊어질 수가 없었다. 그 삭막한 공기 속에 누군가 살짝 술을 뿌려놓았다면 그래서 누군가 살짝 기분 좋은 취기를 뿌려놓았다면 그랬기에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던 그 시절도 그럭저럭 덜 삭막하게 넘길 수 있었던 거라면 우리는 과연 서로를 '마주'했던 것일까. 어디선가 그런 술항아리를 숙성시키고 있을 그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마주>는 202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여기 우리 마주>에서 출발했다. (p. 317) 횡단보도에서 사람들과 무심코 스쳐지나가다가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건물과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과 마주칠 때면 거기 있는 모두가 2020년을 겪고 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문득문득 놀라기도 한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의 오늘에, 내일과 모레에, 이 소설이 못 다한 이야기처럼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p. 318)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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