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서 - 고전으로 읽는 성서 EBS CLASS ⓔ
김학철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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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전을 서양역사를 읽다보면 기독교 라는 벽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나는 종교가 없으므로 종교에 대한 이해기반이 부족했다. 성서를 역사서로서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두께와 그 어색한 문체가 늘 선택장애를 가져오곤 했다. 신학자들이 쓴 책을 읽어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전도를 위해 믿음을 종용하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미루고만 있던, 비록 개인적이긴 하지만 숙제같았던 부분에 대해 조금은 할 수 있게 한 이 책을 만났다.

기독교 성서를 전공하고 이에 관해 여러 편의 책과 논문을 냈지만 이후 저는 기독교를 교양교육으로 가르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중략) 이 책은 [마태복음서]라는 기독교 성서 중 한 권의 책을 교양인에게 해설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 총 열 번의 강의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강의 현장감을 살리려 책에 구어체를 유지했습니다. 저는 [마태복음서]를 기독교인만이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류의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p. 4) 여러 훌륭한 성서 번역본이 있지만 이 책의 [마태복음서] 본문은 제가 그리스어 성서를 번역한 것입니다. (p. 5)

저자는 신학을 전공했고 기독교교양학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신학을 공부했으나 목회자는 아니고 기독교를 가르치고 있으나 종교가 아닌 교양으로 가르치고 있는 학자다. 그리고 EBS에서 강의됐던 프로그램이 바탕이 된 책이다. 여러모로 신뢰가 가는 책이었고 무엇보다 얇아서 부담이 없었다. 무엇보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나 원전번역 이라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었다. 기존의 한글성서를 바탕으로 한 책은 결국 중역본일 수 밖에 없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원전에선 조금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종교인이 아니라 '고전으로서' 읽는 첫 성서로 이만한 조건을 갖춘 책은 드물지 않나 싶어 반가웠다.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경전인 성경에 있는 문서 중 하나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그리스도교'는 로마카톨릭, 프로테스탄트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신교, 그리고 동방정교회를 모두 포함합니다. 앞으로 그리스도교 혹은 기독교라 부르겠습니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경전 문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교파를 불문하고 경전에 속합니다. 기독교 경전을 흔히 '성경' 혹은 '성서'라고 합니다. 성경은 전서 입니다. 전서란 어떤 분야에 관련한 사실이나 지식을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엮은 책이지요. (p. 13)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마태복음서]는 고전입니다. (중략) 제가 직접 번역을 해봤는데요, 200자 원고지로 약 400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분량입니다. A4용지로 하면 50쪽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얇은 책이 서양 세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고전의 지위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p. 14) [마태복음서]는 이스라엘 바로 위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기원후 80~90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p. 15) [마태복음서]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기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옹호하거나 강화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지요. (p. 16) [신약성서] 중 제일 앞에 나오고 중요한 것이 바로 [마태복음서]입니다. 세계 인구 중 3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안다는 것, 그들의 삶과 생각을 형성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마태복음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p. 17)

나는 성서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1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차근차근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니 첫장부터 바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종교서를 읽고 있지만 고전으로서 느끼게 해주는 적당한 거리감과 적절한 요약이 편하고 좋았다. 동시에 적당한 설득력도 갖추고 있어서 읽을수록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마태복음서]를 역사비평적으로 읽으려고 합니다. 역사비평은 문헌이 기록될 당시 저자와 청중을 고려해서 텍스트를 읽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지중해에서 기록된 문헌을 21세기 한국 사람이 쓴 것인양 읽으면 필연적으로 오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대에 살더라도 다른 지역에 있으면 문화가 다릅니다. 같은 지역이라도 시대가 다르면 이해가 다릅니다. 역사비평은 그때 그곳의 사람들에게 [마태복음서]는 어떻게 들렸을까, 저자는 당시 그곳에서 어떤 의도로 글을 썼을까를 물으면서 문헌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p. 29)

딱 좋았다. 내가 찾던 방향의 책이었다. 저자가 성서를 통째로 역사비평적으로 번역해주면 당장 사서보고 싶은 마음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당대의 문화에 맞춰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줄의 명문장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표현된 문장을 직접적으로만 해석하여 지금의 현실에 끼워맞히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종교서는 더더욱 위험하다. 그렇기에 종교관련 책들 중 읽을만한 책을 찾기가 어려웠었는데 이렇게 반가울수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 두 문헌은 무의 세계, 무력의 세계입니다. 이른바 사내들의 세계고, 전쟁의 세계고, 명분의 세계입니다. 다른 한편, [마태복음서]의 두번째 단어 '게네세우스'를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들었을까요? 아마도 유대인 경전의 제일 처음에 있는 [창세기]를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유대인에게 [마태복음서]는 새로운 창조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기주장을 하는 책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p. 30)

요약하면, [마태복음서]는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누가 이 세상을 통치해야 하는 사람들인가, 라는 오래된 그리스 철학의 질문에 답을 줍니다.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철학자이자 통치자라는 것이지요. 예수와 제자들은 지혜로 이 세상을 건설해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선언이 [마태복음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p. 31)

 

열번의 강의로 서술되는 이 책은 첫번째 강의부터 흥미진진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그리고 [마태복음서]의 첫 단어를 비교함으로써 당대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이해를 도우면서, [마태복음서] 가 단순히 종교서를 넘어 왜 고전이 되고 철학이 되고 나아가 혁명서가 될 수 있었는지 호기심도 불러일으켰다.

[마태복음서]는 '읽는' 책이 아니라 '듣는' 책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역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책이었습니다. 누가 들려줬을까요? (중략) [마태복음서]도 한 사람이 낭독하고 그것을 듣는 형식으로 '공연'되었습니다. (p. 35) 첫 장 첫 구절을 '족보' 로 시작합니다. (p. 36) 예수는 누구인가? 그것을 알려면 일단 족보부터 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번여간 [마태복음서] 1장 1절과 달리 다른 번역본에서는 대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나올 겁니다. 순서가 바뀌어 있을 거예요. 그러나 헬라어 원문의 순서는 '다윗과 아브라함'입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다윗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p. 37) '다말', '라합', '롯', 이 셋은 여성 이름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남자 이름이고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족보에는 혈통주의, 정통성, 남성우월주의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중략) 혈통이 중요한 유대인의 족보에서 중요한 건 유대인과 남성인데, 예수가 유대인 왕가의 후손임을 자랑하려는 이 족보에 비유대인 여성이 등장하다니, 어떤 아이러니가 숨어 있을까요. (p. 39) 족보는 혈통주의, 정통주의, 남성우월주의,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 마태는 족보의 한 측면에 그 이데올로기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해체해버리지요. 전통과 보존이 있고, 동시에 해체와 전복이 있습니다. (p. 41)

누가누구를낳고 또누가누구를낳고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장부터 읽기힘들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성서였다. 그런데 단순한 나열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디에사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는 습관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로마제국 고전에서도 익숙한 표현 방식이었다. 단순히 같은 이름이 하도 많으니 그렇게 위로 거슬러올라가야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것이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예수의 족보는 길이도 길이지만 남다른 인물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사연많은 여인 셋, 그리고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가 솔로몬을 낳았다' 라는 문장에서 고발한 죄악, 무엇보다 기껏 누가누굴낳고를 주욱 나열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정작 예수는 왕가 혈통인 요셉과 관계가 없어진 마무리. 이 기나긴 족보는 예수라는 인물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하는 전복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라웠다.

태어난 '유대인의 왕'은 '난민'입니다. (p. 55) 아기들을 죽인 사람이 예수는 아니지만 예수 때문에 죽은 건 맞지 않나? 베들레헴의 수많은 어린아이가 죽었잖아. 이게 왕이고 구세주인가? 당시 사람들도, 죽은 아이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수는 바로 이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나 때문에, 내가 태어난 탓에 사람들이 죽었다면 나는 그 죽음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중략) 난민이 되었지만 자신과 관련하여 목숨을 잃은 저 많은 베들레헴의 아이들, 그리고 그 부모의 절규에 예수는 삶으로 응답해야만 하지요. (p. 57)

예언된 아기, 헤롯왕의 아기 학살, 왕의 탄생..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평생 짊어졌어야 할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자신의 탄생이 수많은 죽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어찌 고민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찌 열심히 성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예수의 삶이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회개하라는 말부터가 그러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뭔가 기분이 나쁘지요.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잘못한 것도 별로 없는데 회개하려니 언짢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가 말한 '회개하라'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 법적 죄를 돌이키라는 뜻 이상입니다. '삶의 방식 자체를 돌이키라'는 의미이지요. (p. 66) 3장2절은 간략히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방향을 전환합시다. 신의 질서가, 신의 통치가 바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천당 불신지옥"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훨씬 더 그러하지만, [신약]에는 사후 세계에 관한 관심이 크지 않습니다. 기독교 문화권의 사후 세계에 관한 이미지는 단테의 [신곡]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p. 67) 신의 통치가 이 땅에 '온다'는 것이지, 죽어서 '가는' 저곳을 바라보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신의 질서가 여기로 옵니다. 그러니 그 새롭고 정의로운 질서에 편입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제에 길들어 살던 우리 삶의 방향이 전환되어야 하겠지요. (p. 68)

왠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회개하라가 모두가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니, 기독교라는 종교가 천당에 가기위한 기도를 드리는 종교가 아니었다니. '예수천당 불신지옥' 은 성서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니.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 성서를 읽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읽었더라도 보고싶은데로 보고 이해하고 싶은데로만 이해한다면 그렇게 됐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하지만 여하튼 나는 이제야 기독교에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오해와 편견을 넘어 굉장히 좋은 논리였구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예수는 현실적으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민중을 앞에 두고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러한 가르침은 민중을 향해 통치자와 철학자로 스스로 간주하고, 그 윤리를 실행하라는 촉구입니다. 그것이 신의 질서, 신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뜻을 풀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모두 주체가 되어 신의 자녀임을 깨닫고 연대하며 서로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철학자와 통치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신의 질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p. 93)

에픽테토스와 세네카의 가르침과 연결된다는 예수의 가르침들을 보면서 고대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예수에게는 고전이었을테니까 그렇게 영향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겠구나 싶다. 그리스철학이 중세기독교시대로 넘어가면서 끊기거나 사라졌다가 보다는 철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삶에 대한 근본 질문을 던지는 철학은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그대의 오른쪽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 대라'

당시 사회는 오른손잡이 문화였습니다. 공공연하게 공중에서 왼손을 사용하면, 왼손을 사용한 사람에게 모욕적인 눈길을 보내는 사회였지요. 오른손잡이가 다수이기도 하니, 누군가 다른 이의 뺨을 친다면 오른손으로 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내가 오른손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뺨을 치면 그 사람의 어느 쪽 뺨을 치게 됩니까? 왼쪽 뺨이지요. 그런데 왜 '오른쪽 뺨을 치거든' 이라고 했을까요. 오른손의 손등으로 때려서 그렇습니다. 고대 유대인의 한 문헌은 같은 신분의 사람끼리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때렸을 경우에는 벌금이 4전인 반면, 손등으로 때리면 벌금이 100배인 400전을 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손등보다는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이 더 고통을 줄 텐데요.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주인과 종, 장군과 부하, 왕과 신하 등 신분의 격차가 확연할 때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분인데도 손등으로 상대방을 때리면 그것은 폭력과 모독의 죄를 동시에 범한 것이기에 벌금의 차이가 크게 나는 것입니다. 윗사람에게 손등으로 뺨을 맞은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있지요. 사죄하며 고개 숙이고 물러나는 겁니다. 당시 사회는 그렇세 신분이 주는 절망을 학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고 합니다. 일단 예수의 청중들은 모두 웃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었거든요. (중략)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p. 99~100) 왼뺨을 대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사람이야, 너와 같아. 때리고 싶으면 때려. 하지만 네가 신분으로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어' (p. 101)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어라 하는 말이 그저 비폭력을 나타내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겉옷을 뺏는 예도 '강제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하는 말도 그 직접적 문장의 의미가 다가 아니었다. 역사비평적으로 저자가 알려주는 문장의 의미들은 보다더 깊고 진지한 의미가 들어있었다. 알면 알수록 멋진 철학이었다.

예수가 일으켰다는 기적의 의미와 예수가 했다는 은유적 표현속의 숨은 뜻 그리고 당대를 향한 비판과 전복적 상상력이 모두 새롭게 다가왔다. 번역에서 빠지고 왜곡되고 악용되는 일부 사례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되는 부분들도 좋았다.

우리는 예수가 견고한 상징체계, 그러나 어떤 열매도 굶주린 이들에게 주지 못하는 옛 질서에 도전하고 전복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새 세상을 그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추구해나갈 때 한계나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고, 또 지헤로웠던 청년 예수, 젊은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p. 183)

종교인으로서 성인으로서 어쩌면 신으로서 접하는 예수라는 이미지보다 고민하는 선구자로서 앞선 생각의 철학자로서 민중의 리더로서 접하는 예수의 모습이 의미있게 다가왔다. 역시 종교로 읽는 것보다 역사로 읽었어야 했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더 넓게 나와줘야 한다.

그리스의 오래된 정치철학 담론, 누가 이상적인 통치자인가 하는 담론의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것이 좋은데, 철학자 왕이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두번째는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기꺼이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과 지혜를 사랑한 삶이 철학자, 통치자의 이상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에수가 바로 그러한 통치자임을 잘 이애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226)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들과 주변 인물들의 심리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특히 부활과 관련해서 [안티고네] 및 당시 로마황제가 죽으면 신격화했던 '아포테오시스' 와의 연결은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항상 소외된 사람들 가까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논리를 펼쳤던 고대의 철학자들과 달리 종교성을 획득하기에 자연스럽기도 했다. 예수의 삶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자리잡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예수는 당대 필요했던 진정한 왕이었다.

그들은 [마태복음서]를 보며 살아갈 힘을 얻지 않았을까요.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요. 많은 사람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폭력과 모욕을 안기며 생채기를 내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생명이 발가벗긴 채 놓여 있는 듯한 이 차가운 현실 앞에, [마태복음서]는 변함없이 유효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절망을 이겨낼 아름답고 멋진 세상을 펼쳐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에게 [마태복음서]가 고전이자 교양으로 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 228)

좋은 책이었다. 고전으로 읽기에 충분한 깊이가 있는 책이었다. 종교도 어찌보면 삶의 철학이다. 삶은 그렇게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가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종교에서 혹은 철학에서 혹은 돈에서 혹은 또다른 길에서 답을 찾고자 할 것이다.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은 좀더 분명한 길을 보여주리라 생각한다. 고전으로서 읽는 [마태복음서]는 그런 과정에 의미를 더해준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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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smsqpdht 2021-12-2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 단계
http://www.godnara.co.kr/bbs/board.php?bo_table=03_01&wr_id=119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단계를 배워야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데 천국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배워서 참 하나님께 나아 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섯단계을 모두 깨달으신분들은 참 하나님을 알게되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비밀들과 구원의 해를 알게 되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