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매스 - 세상을 바꾼 천재 지식인의 역사
피터 버크 지음, 최이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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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융합형 인재, 폴리매스

한계를 넘어 지식의 최전선에서 역사를 새로 쓴 천재들의 연대기

다빈치, 수전 손택, 천재, 지식인 ... 새롭지 않은 명사들이다. 그런데 폴리매스? 시대를 앞서간 융합형 인재라... 천재와 다른 말인가? '폴리매스'라는 생소한 단어에 흥미를 느꼈다. 사전상의 의미로는 '박식가, 박식한 사람' 이다. 이러한 폴리매스들에 대한 책이라... '세상을 바꾼 천재 지식인의 역사' 라는 부제에도 끌렸다. 나는 연대기적 역사읽기를 참 좋아하므로. ㅎ

저자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미술사·사회학·영문학·불문학 협동과정을 가르쳐온 교수이다. 교수시절 강의를 하면서 학문의 큰 그림과 세부 사항을 비롯해 한 학문에서 익힌 사상과 경험을 해석하거나 다른 학문으로 전달하는 데 관심이 있는 개인과 집단에 관한 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바로 이 책이 그 결과물이라고 한다. 저자는 또한 '들어가는 글'에서 '폴리매스는 그들이 이룬 많은 업적 중 단 한가지 혹은 몇 가지 성과로만 기억된다. 이제는 오해를 바로잡을 때다. (p. 20)' 라고 말한다. 대체 폴리매스가 어떤 사람들이고 무슨 일을 했기에 저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미국 폴리매스 연구회라는 독립 연구자 모임에서는 폴리매스를 '많은 주제에 관심을 갖고 배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과거에 학식으로 알려진 학문적 지식에 집중할 것이다. 즉, 지적 '과정'이나 '교육과정' 전체 또는 적어도 주요 범위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백과사전적' 관심을 가진 학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p. 21) 이 책은 주로 인물 연구에 기반을 두었다. 15세기부터 21세기까지 서구 사회에서 활약했던 500명을 선정해 그 명단은 뒤에 따로 정리했다. (p. 24)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단히 매력적이기는 하나, 나는 이 책이 단지 초상화 전시장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 이 책의 한 가지 주된 목표는 지적·사회적인 경향을 파악해 박학다식해지려는 노력에 호의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사회 조직의 형태와 여론이 무엇인지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p. 25)

그러니까 폴리매스는 단순하게는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자는 역사 속에서 뚜렷한 학문적 성과를 남긴 사람들 중에서 다방면에 걸친 사람들을 추렸고 그 사람들이 어떤 사회분위기 속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나를 살펴보면서 지금 이 시대에 폴리매스라 불릴 만한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봐야 할지를 시대흐름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책의 주된 관심은 전문화가 확대되는 문화 속에서 폴리매스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다. (p. 26)'라는 말처럼 현대적 폴리매스 존재를 새삼스레 강조하고 싶어한달까. 왜냐하면 시대적 천재라고 하면 항상 존경받았던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았었기 때문에...

다빈치는 회화·물·해부학·광학·비행·역학 등에서 저술 계획을 세웠지만 그중 어느 것도 완성하지 못했으며 어떤 글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역대 최고는 아니라도 당대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였던 다빈치는 40대 후반에 '붓놀림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수많은 폴리매스가 분산된 관심과 에너지 때문에 작업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레오나르도 증후군 이라는 용어를 만들게 된 이유다. (p. 81)

'천재'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가장 흔하게 떠올려지는 사람 중 하나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일 것이다. 하지만 따져들어가 보면 다빈치의 완성작은 회화를 비롯해서 그닥 많지 않다.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던 만큼 이거하다저거하다 하느라 뭐하나 제대로 완결짓지는 못했다. 그래서 저자는 벌려놓은 일은 많은데 마무리는 못하는 모습에 '레오나르도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 폴리매스들의 특징 중 하나로 이 레오나르도 증후군 적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만능인' 처럼 보였는데 실상은 '박학다식한 괴물' 일수도 있었달까.

17세기를 폴리매스의 황금기로 부르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그 자신도 학문에 정통했던 헤르만 부르하버가 '박학다식한 괴물들'로 표현한 사람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많은 책을 썼다. (p. 102) 17세기는 광범위한 지식과 독창적 기여라는 상반된 요구가 비교적 힘의 균형을 이룬 시기였다. 출판되는 책이 늘어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압박도 커짐에 따라, 1700년 이후에는 폴리매스가 되기 점점 어려워졌다. 이미 몇몇은 힘의 균형이 조금씩 깨지면서 지식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p. 128)

사실 폴리매스들의 연대기를 읽어가는 과정은 지식의 분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대시절 학문별 이름도 없고 철학이자 수학이자 과학이자 역사학이자 수사학이었던 그 모든 과정을 그저 뭉뜽그려 하나로 배울 수 있던 시절에서 지식이 쌓이고 발견이 늘어나면서 모두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시대가 되어갔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넘쳐났고 각각의 분야로 전문성을 띠어갈 수밖에 없었다. 즉 전문가의 시대는 다른 말로 지식의 파편화를 가중시키는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 분야에 정통하지 못하고 잡다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 폴리매스 들에 대한 평가는 점점 더 야박해졌다.

지식 폭발에 대한 주요 대책은 지식을 전문화해서 필수 정보의 양을 줄이는 것이었다. 전문화는 정보의 홍수를 막는 제방으로 일종의 방어책으로 간주되었다. (p. 205)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들기 어려워지면서 학문에 파벌과 영역이 생겨났다. 이것은 지식이 영역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며 '내 분야' 혹은 역사가의 경우 '내 시대' 같은 포현들의 사용이 증가했다. 일부 학계는 경쟁자들로부터 자신의 분야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극도로 예민해졌다. (p. 209)

하지만 지식이 점점 더 전문화되었다고 해서 폴리매스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문화 시대에 폴리매스에게 주어진 역할은 임시적이거나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학문을 창시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당연히 다른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역성의 시대에 새로운 학문은 순차적 폴리매스, 즉 유목민형 학자가 필요하다. (p. 231)' 폴리매스들은 늘 있어왔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나면 그 분야는 전문화가 진행되고 그러고 나면 또다른 폴리매스들이 새로운 학문을 창안해 왔달까. 이러한 과정은 물론 폴리매스라 부를 만한 한 개인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적 집단적 대중적 다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했다.

오늘날은 집단과 개인 모두에게 상황이 복잡해졌다. 지금 우리는 분과 학문간 학제간 융합이 공존하는 시대, 혹은 단순한 실존보다 상호작용의 의미를 강조한 스페인어 단어를 사용해서 좀 더 정확히 표현해서 그 두가지가 공동 생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구획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학과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캠퍼스에서는 학과 옆에 수많은 학제간 융합 연구소가 세워졌다. (p. 351)

얼마전부터 가장 핫한 단어 중 하나가 '융합'이 아닐까 싶다. 대학학과만 보더라도 전통적인 학과들이 사라지고 생전 처음 보는 듣보잡 학과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 중심에 '융합'이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과잉의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은 뒤쳐지기 십상이다. 지식이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시대이지만 이런 시대에 다시한번 폴리매스 존재들을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연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열 명 이상의 몫을 할 수 있다. (p. 360)' 라는 저자의 말에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만 제대로 알기도 힘든데 만능이 되야 살 수 있는 시대라니 참 먹고 살기 힘든 시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뭐 모두 다 천재일 수 없는 것처럼 모두 다 박학다식할 수도 없다. 다만 노력형 천재라 할 수 있는 폴리매스에 좀더 긍정적인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라는 식으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ps. 저자가 앞서 밝혔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500명의 폴리매스는 모두 서양인이고 특히나 영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인들이다. 하지만 천재가 어디 유럽에만 있었으랴. 폴리매스가 어디 서양인만 있겠는가. 우리가 얻어야 할 메시지는 그저 융합형 인재, 박학다식형 인재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라는 걸 인지하는 정도이면 될 터이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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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의 기원 - 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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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역사라는게 지금부터 과거로 쫓아 올라가게 되기도 하고 과거 어느 시점부터 현재로 따라 내려오게 되기도 하는데 그모든 방향에서 종국에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분야가 고고학인것 같다. 신화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시대에 대하여 구체적인 물증으로만 밝혀내는 고고학적 사실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들과는 좀 다른 기분으로 읽게 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런저런 역사책들을 읽다가 고고학적 책들도 좀 읽게 되었는데 그러다 만난 책이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이었다. 아! 이 한권만으로도 나는 단박에 강인욱 님의 팬이 되었다. 국내에도 이런 고고학 학자분이 계셨구나 알게 되어 너무 반갑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강인욱 님의 글은 남다르다.

[ 강인욱 교수는 고고학자로서 발굴과 연구뿐만 아니라 대중과 교감하는 강연과 글쓰기에도 적극적이다. 이는 우리나라 학문 풍토에서 드문 일인데 실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진정한 대중성이란 낮은 수준의 전문성이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을 대중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또 다른 노력과 능력이 있어야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라는 유홍준 교수님의 추천사는 아주굉장히딱! 적당한 추천사다. 정말이지 강인욱 님은 진정한 대중성과 진정한 전문성을 두루 갖춘 고수 중의 고수! 다. 그러니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어찌 손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집필 과정이 굉장히 자유로웠습니다. 어떤 체계적인 틀을 잡고 시작했다기보다 '기원을 알려주는 유물 이야기'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잡은 뒤, 여기에 걸맞은 자료나 주제가 보이면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글을 써나갔습니다. (...) 이 책에서는 서른두 가지의 유물을 '잔치', '놀이', '명품', 그리고 '영원'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나누었습니다. 각각의 키워드는 우리 삶의 커다란 네 가지 축인 '먹고' '즐기고' 욕망하고' '죽음을 대하는' 모습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한 것입니다. 고고학 유물들과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오래전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음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p. 8,9) - 프롤로그 中-

프롤로그에서 잘 설명되고 있듯이 이 책은 크게 네 파트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서 먹고 즐기고 바라고 떠나는 인간의 생이 다 들어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자연스럽게 먹고 있는 음식과 술이 과거 그 옛날 역사시대 이전의 고고학적 시대에도 먹고 즐겼다는 사실 그 자체도 신선할 수 있지만 그 사실들을 뛰어넘어 인류를 하나로 묶어내는 통찰력어린 관점까지 깨닫고 나면 아하! 무릎을 치며 이 쉽고 재밌게 읽히는 글이 얼마나 깊이 있는 글인지 새삼 깨닫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뒤로 이어지는 좀더 고고학적인 이야기들 속 인간의 놀이와 유희와 죽음이 어떤 기원들에서 지금으로 이어져왔는지 더욱 빠져들어 읽게 되어 그때나지금이나 하는 심정이 자연스레 공감되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의 동물입니다.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내다보기 때문이죠.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과거 주가의 등락을 근거로 앞날을 예측합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릴 때 반드시 이전 판례를 참고하고 현재 상황을 고려합니다. 의사도 진찰과 치료를 할 때 이전의 임상을 토대로 삼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미래를 판단하고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바로 우리가 지나온 과거입니다. (p. 10)

흔히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고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고학자는 과거를 발굴하지만, 그 목적은 단순한 과거 자료의 수집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있습니다. (p. 345) 객관적인 과거는 변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대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느끼고 배우는 과거는 변합니다. (p. 346)

고고학은 은근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학문 분야이다.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리다' 라는 말을 새로운 유물이 발굴되고 새로운 해석기법이 발달하면서 자꾸 하게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들은 얼마나 제대로 분석해낼 수 있는 기술이 있느냐에 따라 좀더 일관적이면서도 단단한 무언가, 인간 자체에 대한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그 과거를 제대로 알아내는 과정은 결국 인간의 기원에 한걸음씩 다가가 인간적 프레임을 새롭게 다시 제시해줄 수 있다. 그러니까 고고학은 생각보다 굉장히 미래적인 분야랄까?! ㅎㅎ

'너 내가 누군줄 알아'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꼰대라며 비웃는 경우가 많지만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기원을 생각하다보면 '너 네가 누군줄 알아' 라며 도찐개찐이라는 심정으로 좀더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허허 웃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수천년간 굉장히 많이 변해온것 같지만 인간은 그 기원부터 지금까지 수천년간 그닥 변한게 없다. 그 사실이 이 시대에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 있는 역사읽기가 널리널리 많이 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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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 역사, 형식, 이론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1
한스 포어랜더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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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체(政體)가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도 거의 무의식적이다할만큼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다 라고 모두들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가? 하면서 의문점이 꼬리를 남기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과연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시대인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일단 민주주의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너무나 근본적 질문 같지만 혼란스러울 수록 다시 근본부터 차근차근 따져봐야 하니까.

민주주의 시대는 1989, 90년에야 진정으로 시작된 듯 보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주의는 개가를 불렀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모델은 체제 경쟁에서 경쟁자를 물리친 듯 보였으며 많은 이들이 보기에 이데올로기적 논쟁의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 했다. 현실 사회주의 독재가 종식되면서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와 같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홉스봄)로 만든 역사적 대안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개선 행진은 멈출 수 없었다. 민주주의 정부 형태는 몇 차례의 물결 속에서 반대자들에 맞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p. 5) 하지만 이 같은 양상은 최근 퇴색되었다. -서문 中-

'민주주의 정부 형태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이 문장에서 눈길을 끈 것은 과거형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란 얘기, '서문'에서 제시한 몇몇의 사례들 만으로도 그 승리감은 '퇴색된'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가 과연 올바른 방향이었나? [플라톤에 따르면 아티게 민주주의가 그토록 위대했을지언정 소크라테스 한 사람도 감내하지 못했다. 아티케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p. 8)]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무엇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는가? [고대로부터 제기되어온 오래된 문제가 근대에 새롭고도 더욱 시급하게 떠올랐다. 민주주의란 모든 시민이 정치의 심의, 결정, 집행 과정에 포괄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의미하는가? (p. 11)] 민주주의는 사실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그러니 이제라도 우리는 되짚어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가'

도시에 독재자보다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네.

무엇보다도 그런 도시에서는 공공의 법이 없고,

한 사람이 법을 독차지하여 자신을 위해 통치를 하기

때문일세. 그리고 그것은 이미 평등이 아닐세.

하지만 일단 법이 성문화되면 힘없는 자나

부자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네.

그러면 부유한 시민이 나쁜 짓을 할 경우

힘없는 자가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약자도 옳으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네.

자유란 이런 것일세. "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공론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이 나라의 독재자요?'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탄원하는 여인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18 (<민주주의> p. 17)

위와 같은 테세우스의 웅변에 테바이에서 온 전령은 아래와 같이 군주정에 대한 찬가를 부른다.


(...) 나를 보낸 도시에서는 군중이 아니라

단 한사람에 의해 통치권이 행사되며, 허튼소리로

우롱하며 순전히 제 이익을 위해 도시를 때로는 이리로,

저리로 끌고 다니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 제대로 연설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백성들이 어떻게 도시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겠어요?

지식이란 단기간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설사 가난한 농부가 멍청한 바보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에 쫓기다 보면 정치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지요. (...)

[에우리피데스는 테바이 전령을 민주주의 비판의 대변자로 삼았다. 인민은 '천민'으로, 민주주의는 선동가와 수다꾼들의 행사로, 평범한 사람은 정치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p. 19)] 테세우스의 말도 테바이 전령의 말도 다 논리적이지 않은가? 이래서 어떤 사상이나 개념에 대한 근본부터 차근차근 짚어보려면 고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하지만 아테나이에 거의 200년 동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테바이인의 몰이해로 바뀌지 않는다. (p. 19)] 라고 말하지만 글쎄... 요즘 사람들은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들에 피곤이 쌓인 요즘 사람들은 어느 쪽에 더 마음이 갈까? 나는 왠지 테바이 전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시대가 민주주의도 아닌 독재도 아닌 어중간한 폭력의 시대로 변해가고 있는게 아니겠는가... 흉악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는건 그런 죄를 저질러도 아니 그보다 더한 죄를 저질러도 아무 처벌 받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렇다면 나도 혹은 나쯤은 하며 범죄를 저지르는게 아닐까... 범죄의 악순환이 시작된거 같아서 무서운 시대가 되버렸다. 요즘은...

아테나이의 폴리스 집회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도 아니었고 현대 민주주의국가들과 같은 정당 민주주의도 아니었다. 폴리스 민주주의의 중심에는 논쟁, 즉 숙의 행위를 통한 결정의 저울질이 있었다. 따라서 숙의 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을 통한 그 르네상스가 시사하는 것처럼 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자기 이해와 작동 방식을 나타낸다. (p. 45)

저자는 민주주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아테네 민주주의부터 차근차근 설명한다. [아테나이인들이 이해한 평등은 개인적 권리, 특히 인격적으로 이해된 권리의 평등과 동일할 수 없었다. 개인은 아테나이 폴리스의 구성원으로서 정의되었으며 폴리스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했다. (p. 50)] 폴리스 민주주의는 경계가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발전에 이바지하는 많은 조건이 전제되어 있었다. (p. 52)] 수천년전의 정체와 지금의 정체가 '민주주의'로 퉁쳐질 수 있는 게 아님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민주정과 과두정의 결정적 차이는 민주정은 빈민의 지배를, 과두정은 부자의 지배를 반영했다는 데 있다. (p. 57)] 지금 시대가... 과두정인줄 ㅋ 여하튼,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매 시대마다 그 모습을 변형시켜왔다. 하지만 그 어느 시대에서도 최선의 혹은 최고의 정치체제로 인정받지는 못한것 같다. 고대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혼합정체를 제안했다. 민주주의는 태동부터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정체였다. 그러니 고대그리스 이후 민주주의 맥이 끊겼다가 새롭게 다시 등장한 근대 민주주의 시대가 되어서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마 자체는 민주정이 아니었다. 공화정 시대의 정치에서 시민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로마공화정은 귀족 지배라기보다 과두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p. 60)] 미국은 로마의 공화정을 이은 것처럼 보이던데... 역시 지금 시대는 과두정이었나...ㅋ

공화정은 무엇보다도 제후의 지배와 군주정에 대한 제한 및 반대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그 자체로서 합의에 의해 보호되는 시민 통치라는 중세 말의 이상을 가리켰다. 그것은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에 기반한 통치였다. 한편으로는 군주의 통치를 받지 않고 제후의 군주적 개입으로부터 독립성을 지키고자 하는 자유국가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시민의 자치를 의미했다. 이 두 가지가 자유로운 삶이라는 이상에서 결합되었다. (p. 70)

루소는 폴리스 정통을 이어받았으며 사회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자신의 공동체를 '공화국'개념으로 정립했다. 민주주의 개념의 역사에서 아이러니는 이처럼 근대 민주주의를 확립할 때 민주주의가 실제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p. 75)

[르네상스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 뿐만 아니라 특히 표현 예술을 통해 이미 낡은 세계상을 뒤흔들어놓았고, 개인을 그의 자연적, 정치적 환경의 형성자로 보는 새로운 이해의 단초를 마련했다. (p. 81)] 민주주의 발전사에서도 르네상스는 획기적 변혁의 시점이었다. [모든 정치 질서, 특히 민주적 질서는 이제 개인과 그 자유의 관점에서 사유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개인들의 다양한 이해 관계와 가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p. 82)] 그랬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 관점에서만 다뤄질 수 없었다. 바야흐로 상업의 시대가 오고 있었고 그렇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로 함께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는 시대로 되어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제 그 경계가가 불분명해 보인다...

북아메리카에는 아테나이의 모범에 기초한 집회 민주주의인 '순수 민주주의'가 아니라 온건한 대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다른 체제가 확립되어야 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온건한 옛 공화주의 전통 안에 서 있었다. (p. 95)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공동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직접적인 인민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의제 기구와 '이중으로 안전한' 수직적, 수평적 권력분립 체계를 통해 해결하려 했다. '야망을 상쇄하기 위해서 야망이 만들어져야 했다.' (p. 98) 연방주의자들은 견제와 균형의 체계, 즉 연방 수준 개별 기관들 사이의 그리고 연방 국가와 연방주들 사이의 권력 억제와 권력 균형의 체계를 고안했다. (p. 100)

겉으로만 봐서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의 정치체제가 다 비슷비슷해 보였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연방제는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민주주의 역사를 훑어오는 이 책에서 미국의 연방제가 왜 그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나 역사를 알아야 정치든 철학이든 경제든 뭐든 역사를 통해서야 이해가 된다. 미국 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대표격이라 할만한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민주주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나라별로 살펴보니 이또한 역시 케바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고 하나로 그저 퉁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코뱅의 '덕'의 테러는 독일의 많은 사람이 프랑스식 급진적 민주공화주의와 거리를 두는 이유가 되었다. 독일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p. 112) 독일에서는 공화주의를 반군주정 통치의 한 형식이 아니라 개혁적이고 합법적인 정부 운영 방식으로 이해하는 길이 구상되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칸트는 '진정한 공화주의'의 합법적 정부와 전제정치 사이의 오래된 구분을 다시 채택한 급진적 민주공화주의의 완화된 버전을 표명했다. (p. 113)

미영프에 이어 독일에서의 민주주의가 설명되어질 때 저자가 독일학자라서 그런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관계가 구성적이었지만 독일에서는 그것이 해체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 특징적이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에는 법치국가가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없었다. 독일 신민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누렸지만 국가권력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p. 119)] 독일에서의 민주주의가 따로 다루어져야 했던 이유는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변화를 독일은 보았다. 그 장단점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바이마르헌법은 위기에 대비하여 대통령 독재의 예비 헌법을 준비해두었다. 이러한 대통령식 해법은 반의회적이고 반정당 국가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위기 시 정부를 구성하는데 주요 의회 정당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p. 125)] 나라를 자꾸 위기에 처해있다고 설파하는 대통령은 그렇게 독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도 맨날 위기라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ㅎㄷㄷㄷ

민주주의가 정당 민주주의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사회문제의 정치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정당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갈등 상황을 정치체제 수준에서 묘사한다. (p. 12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의 민주주의국가들은 장기적으로 안정화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에 기여한 것은 유럽 분할의 결과로 서유럽 자유민주주의와 동유럽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재 사이에서 발생한 거대한 권력과 안보의 갈등이었다. (p. 137)

서구 민주주의국가들은 20세기 후반에 경제적, 정치적 주변 조건들을 통해 진전된 내적, 제도적 안정성을 발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방식, 가치관, 정치적 방향을 둘러싼 상당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고 예전에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었던 문화적, 인종적, 소수자들을 통합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 문화적 역동성도 발전시켰다. (p. 140)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수용된 정부 형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이 되었다. (p. 141)

안정화된 서구의 민주주의는 사실 반대편의 불안정한 체제들의 덕을 보고 성장한 셈이었다. 민주주의는 정부 형태일 뿐만 아니라 생황양식이 되었지만 이러한 민주주의에는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고대그리스식 민주주의에 필요한 전제조건과 다를지라도 조건은 필요했다. [안정적이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는 사회에서의 다원성, 문화에서의 다양성 그리고 경제에서의 경쟁이다. 이 사회 영역들의 광범위한 자율성, '국가로부터의 거리' 역시 자주 언급되고 있다. (p. 153)] 하지만 요즘 시대는 어떤가? 다원성, 다양성, 공정한 경쟁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세계화'는 자국의 경제를 더욱 봉쇄화 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인터넷발달에 따른 무분별한 미디어의 정보들은 더욱 시대적 위기를 커지게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위기일까?' (p. 184)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1947년 11월 11일에 하원 연설에서 했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는 모든 정부 형태 중 최악이지만 그보다 나은 형태도 없다"

민주주의가 차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매우 많은 장점을 겸비하고 있기에 알려진 최선의 지배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p. 194)

[시민이 정치체제 자체를 제거하지 않고도 통치자를 제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배 형태가 민주주의이다. (p. 196)] 라는 저자의 문장에 희망을 갖고 싶지만... 요즘 시대 굴러가는 걸 보면 솔직히 좀 절망적이다... [민주주의의 모든 질병은 어쩌면 더 많은 민주주의에 의해 치료될 수 있을지 모른다. (A. 스미스) p. 205] 라는 옮긴이의 말에도 여전히 그리 희망이 생겨나진 않는다. 하지만 [현대민주주의가 마주한 도전과 위기 상황을 성찰하기 위해 역사의 여정에서 구성되어온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들을 검토 (p. 206)]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은 있다. [<민주주의>에서 포어랜더가 개관한 민주주의의 개념사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능과 작동 조건에 관한 분석은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독자에게 제공해줄 것이다. (p. 207)] 라는 역자의 말에 그나마의 기대를 걸어본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과 독자가 아닐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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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철학 입문 - 후설에서 데리다까지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2
토마스 렌취 지음, 이원석 옮김 / 북캠퍼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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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철학, 그 경계를 넓히다

짧지만 강력한 20세기 철학 안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 말을 바꿔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철학을 논하지 않는 시대에 희망은 없다 라고.

역사란게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온 이력이고 그 시간들엔 인간들의 판단이 있었다. 역사를 만든 그 판단들의 근본에는 무엇이 있었나? 철학이 아니었을까? 격변하던 시대마다 그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있었고 그 시대정신은 철학의 산물이었다. 철학을 말하지 않는 이 시대에 <20세기 철학 입문>은 어떤 의미를 줄지 궁금했다.

현대는 기술, 사회, 과학의 획기적 혁신과 유례없는 파괴를 동시에 경험하며 발전했다. 이 책은 20세기를 거치며 한편으로 치우치고 세분화된 비판적 성찰들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생산적으로 서로 결합하여 상호 보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p. 5) 이를 통해 우리는 극단적 상대주의나 합리성의 자기 파괴적 형식에 매몰되는 대신 특정 학파의 강제에서 벗어나 모든 비판적 성찰과 접근법을 구성적으로 배울 수 있다. (p. 6) -서문 中-

철학은 어렵다. 특히나 현대철학은 철학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나름 심플했던 고대철학에서 시대를 거쳐 점점 세분화되고 고도화되어 이제 갈래를 다 잡을 수도 없어 보이는 현대철학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 책은 일단 작고 얇다. 그래서 감히 용기를 내어 현대철학책을 손에 들 수 있었다. 이렇게 작고 얇은데 책속에서 20세기 철학자들을 대부분 거론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 어려운걸 저자가 해냈다. 현대철학에 대한 제대로 된 겉핥기?!

20세기 철학의 출현과 발전을 이해하려면 먼저 철학의 밖을 살펴야 한다. 19~20세기에 철학 외적으로 어떤 중요한 모색과 성과들이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야 한다. 근본적 변혁과 급진성은 이 시기 사유의 특징이다. 사회와 문화, 기술, 과학, 개인의 자기 이해가 때로는 극단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p. 9)

앞서 잠깐 말했듯이 그래서 역사와 철학은 따로 떼어 말할 수 없다. 역사적 사건이 시대적 철학을 논쟁시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와 철학은 서로 문답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다.


20세기 철학은 실존 철학이나 마르크스주의, 프래그머티즘의 언어분석과 논리적 개념 분석 없이, 문명 비판이나 도덕 비판, 저인분석, 상대성 이론 없이 이해될 수 없다. (p. 9)

20세기 철학에서 과학사의 과정은 특히 중요하다. 철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출현한 이래로 꾸준히 개별 과학들, 예컨대 물리학이나 정치학, 경제학, 동물학 등이 철학에서 분리되어 나왔는데,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분리된 것이 심리학과 사회학이다. 두 개별 과학의 분리는 현대의 이행에서 심오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 우선 인간은 스스로 실증적 탐구 가능성과 함께 점점 더 사유와 과학의 중심에 선다. (p. 26) 철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이 분리되면서 현대 철학은 새로운 상황을 맞는다. (...) 철학은 심리학과 사회학의 연구로 그 위상이 바뀔 때마다 자기 성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p. 29)

역사가 발전하면서 학문의 갈래로 다양해졌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을때 그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철학적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철학은 인간의 삶과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그 철학이 아무리 분화되고 다양해져도 중요한건 어쨌든 여전히 철학은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아주 크게.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이 창시한 현상학은 오늘날 까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철학 사조 중 하나다. (p. 43) 현상학은 세계의 모든 현상을 그것이 무엇이든 그 본질을 제한 없이 분석하는 새로운 철학 방법론이다. (p. 44)

실존철학과 실존주의는 20세기 철학에서 중요한 흐름 중 하나다. (p. 77)

해석학은 이해의 학설이다. (...) 이해하는 기술로서 해석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묻고 대답하는 대화 구조를 갖는다. 질문을 통해 항상 새롭게 전승되며 이는 우리가 전통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p. 92)

20세기 세계 정치의 발전은 마르크스의 분석과 비판적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형식으로 동유럽의 정당화 이데올로기가 된 역사결정주의의 정통적 형태로 변모한다. (p. 104)

20세기 후반 실천철학과 정치철학, 법철학, 사회철학에서 상당한 진보와 혁신적 기획이 이루어진다. (p. 151)

구조주의는 사회철학적 그리고 타당성 추구의 해석학적 차원에서 당시의 의식철학과 인식론적 주관주의를 배제한다. (p. 169)

프랑스에서는 들뢰즈, 리오타르,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이 현대성의 전통을 의심하고 곧바로 강령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통고함으로써 상대주의와 보편적 진리 주장의 철회를 추구한다. 이 새로운 시대는 방법적으로 현대에서 성공적이었던 방법론, 특히 프랑스에서 지배적이었던 구조주의와 결별을 요구한다. 그 결과 후기구조주의가 뒤따르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문화적 유행으로 번지는 동안 거의 모든 고전적 패러다임은 종말이나 몰락, 죽음을 고하게 된다. (p. 179)

20세기 후반 철학 학파의 방향은 국내 및 국제 차원에서 세분화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다. 고대 철학, 형이상학, 초월철학, 변증법적 전통의 고전적 사유는 체계적으로 다시 이어지며 재구성되고 변형된다. 현상학, 해석학, 언어철학은 서로 관련을 맺으며 전통 철학적 계획의 생산적·혁신적 해석과 습득에서 입증되는 새로운 사유를 형성한다. (p. 186)

부제인 '후설에서 데리다까지'에서 알수 있듯이 저자는 20세기 철학을 후설에서 데리다까지의 흐름으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간략하긴 하지만, 중심적 학자들과 그 학자들 사이사이에 있었던 크고작은 굴곡들을 빠짐없이 소개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름과 이론은 때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기도 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의미 있던건 나름대로 현대철학의 흐름에 대한 개요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20세기 철학 입문>은 이런 의미에서 우선 19세기의 몇몇 중요한 철학자 및 학파(키르케고르와 니체, 신칸트학파와 마르크스)와 철학 외적인 새로운 개별 학문(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아인슈타인의 이론, 사회과학)의 출현과 함께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대전, 러시아혁명과 냉전시대, 소비에트 붕괴와 세계화 등 여러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사유와 다양한 학파의 생성을 중심으로 20ㅅ기 철학을 기술한다. 그리고 저자는 20세기 철학에 관한 새로운 의미 연관의 제시로 앞으로의 철학을 생산적으로 만들기를 희망한다. (p. 203) -옮긴이의 말 中-

역자는 '저자의 의도와 기대가 타당하다면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20세기 철학 입문>은 철학적 지식을 다양하게 '빌드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여 흥미 있는 지적 모험의 길에 들어서게 할 것이다. (p. 205)'라며 저자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철학이 논의되지 않는 시대에 그 희망과 기대가 어느정도 현실성을 가지고 있을지 잘 모르겠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철학이 없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불행하다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늘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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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는 요일 (양장)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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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사람이 하나의 신체를 공유하는 미래

사랑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여정이 시작된다


창비 소설Y클럽을 통해 박소영 작가의 <스노볼>을 재밌게 읽었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신작이 또다시 소설Y클럽을 통해 내게 닿았다. 소설Y클럽 서평단 참여시 가제본과 함께 받게 되는 작가의 특별한 편지와 함께.

이번 작품의 프롤로그에선 독특한 서식이 눈에 띈다. 바로 '인간 7부제 사전 동의서'


주요 내용: 일곱 명이 신체 하나를 하루씩 돌아가며 사용한다. 공유되는 신체 외의 나머지 신체는 (뇌를 제외하고) 폐기한다.

시행 목적: 인간 개체 수를 적정하게 유지해 환경 파괴와 식량난 등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인류의 공멸을 막는다.


그렇다. 일곱명의 자아가 하나의 신체를 공유한다는 일종의 각서 같은 동의서가 '인간 7부제 사전 동의서' 였다. 가상의 어느 시대, 더이상 많은 인간 개체 수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개발해 낸 기술은 하나의 신체를 공유하여 일주일에 한번만 현실 세계에서 살고 나머지 6일은 뇌를 업로드 시킨 가상의 낙원에서 사는 것.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7부제'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신체로 평생을 살아가는 일명 '365'가 존재했다. 결국은 재력, 돈이 곧 힘이었다.


일곱 사람이 공유하는 신체가 임신을 하면 어떻게 될까? 간단하다. 임신의 주체만 남고 나머지는 방을 뺀다. 보딜리스 신세가 된 이들에게는 새로운 신체가 배정되고, 임신부는 출산할 때까지 매일 오프라인에서 지내게 된다. 보디메이트들이 사라진 신체를 오롯이 혼자 사용하면서, 환경 부담금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각종 혜택을 지원받으며. 출산 이후에는 아이를 바로 공공 보육원에 보낼 수도 있고, 36개월까지 직접 양육할 수도 있다. (p. 55)


김달과 젤리 그리고 현울림은 공공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절친들이다. 각자의 사연들로 부모를 잃고 공공 보육원에서 친해진 그들은 열일곱이 되어 7부제에 소속되었을 때 각자의 다른 공유신체의 모습으로 만나서도 여전히 절친이었고 이들은 모두 수요일에만 현실세계를 살 수 있는 수인들이었다. 늘 그랬듯 일주일만에 수요일에 다시 모였을 때 김달은 임신했음을 알렸고 아기와 함께 365로 살기위한 인생계획을 친구들에게 밝혔다. 하지만,


'현실'이라 부르는 이 세계가 굴러가는 법칙은 간단했다.

노력은 쉽게 틀어지고 간절한 바람은 가볍게 짓밟힌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은 찰나의 순간. 사랑하는 것에도 반드시 끝은 있다. (p. 61)


김달은 공동양육자로 현울림을 선택했다. 현울림은 가상의 세계보다 현실에서의 삶을 더 좋아했고 누구보다 김달을 아껴줄 존재였기에.

하지만 울림과 신체공유를 함께 하는 화요일의 자아 강지나 가 문제였다. 강지나와 현울림은 고등학교 시절 지독한 악연으로 얽혀 있었는데 7부제로 인해 하나의 신체로 엮이는 그것도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이어지는 기막힌 인연으로 다시 얽히고 난 후 불화를 거듭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기에 공동양육자로 김달과 함께 현실세계에서 쭉 살게 된다면 더이상 강지나와 으르렁 거릴 이유도 없어지므로 울림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드라마라는게 다 그렇지 않나, 가장 행복해지기 직전에 가장 큰 불행이 닥친다. 강지나가 현울림을 정확하게는 공유신체를 살해한다. 당연히 울림과 김달, 젤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판을 시작했으나...


비행기 추락 직전 혼만 낙원으로 탈출한 사람도, '묻지마 칼부림'에 찔려 죽어가며 가까스로 혼이 빠져나온 사람도 신체를 잃어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보디메이트에 의한 사망은 다른 차원이었다. 이는 7 부제 시스템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였다. 오프라인에서 사망 처리가 확정되기 전 문제의 보디 메이트끼리 재판정에 서서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기회가 주어졌다. (p. 83)

"나도 네가 당한 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쳐서 이러다 유산하는 거 아니가 싶을 정도야. 근데 우리가 뭘 어쩔 수 있어? 걔네 엄마는 낙원코리아 대표고 걔네 아빠는 학계에서 내로라하는 뇌과학자라며. 걔 부모한테는 돈, 사회적 영향력, 인맥이 다 있어. 네가 걔 건드려 봐야 다치는 건 너라고. 너랑 걘 출발선이 다르다는 거 정말 아직도 모르겠어?" (p. 104)


사실 강지나는 7부제에 속하지 않아도 될 최상위계층의 365 였다. 하지만 365에서 7부제에 속한 신체로 살아가게 된 사건에 현울림이 엮여 있었기에, 다분히 계획적이었고 그렇기에 재판은 시작부터 이미 울림이 이길 수 없는 판이었다. 억울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울림은 이제 현실 세계에서 어느 요일의 사람으로도 살 수 없게 되었고 낙원에서의 삶도 점차 감각을 잃어가게 될 상황이 되었다. 그때 '여울시'에 대해 알게 됐다. 불법적인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곳, 심지어 신체도 살 수 있다는, 알려지지 않았고 찾을 수도 없는 곳, 여울시.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그 여울시에서 울림은 강이룬을 만난다.


"이룬이는 아빠 연구소랑 파트너십을 맺은 미국 연구소의 과학 특기생인데, 특별 교류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왔어. 너희가 학교에 갈 때 이룬이는 아빠랑 같이 연구소에 가서 이런저런 연구와 실험을 진행할 거야"

강지나는 강이룬을 향한 아빠의 다정한 눈빛을 빤히 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아빠가 저 유기견을 꽤나 아낀다는 것을. (p. 169)


사실 현울림은 어린시절 강지나의 집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사고로 현울림의 부모가 세상을 뜨자 엄마의 친구였던 강세영이 울림을 자신의 집에 데려갔고 딸인 강지나와 잘 지내라고 학교도 같은 곳으로 옮겨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지나는 울림을 자신이 길들인 유기견 대하듯 했고 유기견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현울림에게 은밀한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던 중 강이룬의 등장은 새로운 변곡점이 되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현울림에게. 그 시절 갑자기 사라진 이룬이 여울시에 있을 줄이야.


울림의 복수는 가능할까, 이룬은 왜 갑자기 사라졌던 것일까, 강지나는 왜 그토록 현울림을 죽이고 싶어했나, 낙원이라 불리는 가상세계의 삶이 과연 낙원일 수 있을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이 솟아나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읽어 나갈수록 사건은 장면을 거듭 빠르게 전환한다. 이 흡인력 강한 작품이 디스토피아와 스릴러에서 어느 순간 로맨스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슬며시 웃음도 짓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이유들을 제치고 일단 재밌다. 쉽게 읽히면서 재밌는 영어덜트 소설을 찾는다면 창비의 소설Y 시리즈는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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