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103 소설Y
유이제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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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하기 위해 아무도 열지 않던 문을 열었다

창비의 소설Y시리즈는 이제 영어덜트소설에서 믿고보는 시리즈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것 같다. 매 작품마다 꾸준히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것도 놀라운데 매 작품마다 새로운 판타지 세계가 펼쳐지니 매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엔 액션의 크리처 스릴러물이다.

검은과부거미섬이라는 곳의 지하터널에 한 마을이 존재한다. 원래는 섬에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무피귀라는 괴물이 나타나면서 육지로 연결된 해저터널을 통해 탈출하다 육지쪽에서 터널을 봉쇄하는 바람에 섬으로도 육지로도 못가고 그대로 터널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 수십년째 살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해저터널에 바닷물이 새기 시작한 것이다.

"터널입구를 막아 무수한 생명을 구한 황선태의 손자 황필규의 부름에, 척박한 터널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새로운 생태계를 만든 서주필의 손녀 서다형이 답하다, 카아! 이거야말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 아닌가?" (p. 20)

섬쪽으로 나가려면 무피귀의 출입을 막고있으면서 해저터널에 공기를 전해주고 있는 거대환기팬을 뚫고나가야 하는데 만약 그럴 경우 무피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거고 한번 뜯어낸 거대 환기팬을 다시 달 수 있는 기계가 마을에 없다.

육지쪽으로 나가려면 위급한 탈출시기 군대가 막은 차폐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단 섬으로 올라가 반대편의 항구를 통해 육지로 일단 넘어가야 하는데 누가 그 목숨건 도전을 하겠는가, 게다가 배도 없을 것인데.

그때 마을의 무능력한 촌장이 열여섯 소녀 다형에게 몰래 제안을 한 것이다. 다형이 그 도전을 한다고 자원하면 폐렴으로 위독한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약을 주겠다고.

촌장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 준 채 현재의 삶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은 것이었다. (p. 19)

황필규는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던 이의 딸을 사지로 몰아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 페니실린으로 목숨을 구해도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었다. (p. 23)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 의협심 강한 소녀, 이기적인 어른이 파놓은 함정, 무엇보다 상상초월적 괴물의 존재

액션어드벤처판타지크리처물의 뼈대가 완벽히 세워졌다. 이제 펼쳐질 이야기는 당연히 휘몰아치는 전개와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가 될 것 ㅎㅎㅎ

아, 여기서 무피귀를 잠깐 살펴보자면,

무피귀의 키는 성인 남성의 두 배에 육박해고 피부가 없는 탓에 근육, 힘줄, 인대, 뼈 등이 고스란히 밖에 드러나 있었다. 특히나 눈꺼풀 없이 그대로 돌출된, 하얀 구슬같은 안구와 그것을 움직이는 빨간 실타래 같은 근육들 (p. 29)

다형은 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촌장의 생각대로 영웅적 시늉만 하다 올 생각은 없었다. 진심으로 마을을 구하고 싶었기에 한 선택이었다. 그랬기에 마을에 남아있을 친구들에게 촌장 모르게 이런저런 지시들도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섬으로 올라가자마자 무피귀로부터 도망을 쳐야했는데 더욱 예상치 못했던건 다른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섬위에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이 존재했다니! 그런데 여기서 알게된 터널 속 마을의 진실은 더욱 다형의 예상을 벗어났으니...

자! 페이지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다형의 모험이 어떻게 펼쳐질지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지 않은가? 그 재미는 책을 읽으며 찐~하게 느껴보기를. ㅎㅎㅎ

역시 창비! 역시 소설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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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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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아픔에 대한 가장 진정성 있는 고민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낸 공감과 연대, 치유의 이야기

<로기완을 만났다> 라는 소설은 이미 읽었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된다고 했을때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됐었는데 개봉시즌에 맞춰 리마스터판으로 책도 새로 나왔다.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 책을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긴한데 책을 먼저 읽게 되버렸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L에 지나지 않았다.

종종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로 표현될 때도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이기도 했다. (p 7)

소설의 첫 문장이다. 로기완 이라는 이름 석자도 나중에야 익숙해질 그는 처음에 그저 이니셜L 이었다.

소설의 현재 시점은 2010년 이다. 오래됐다면 꽤 오래전의 시점이니 그당시와 지금의 탈북자 입지가 달라졌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L, 로기완 그는 생면부지의 땅 벨기에에 떨어진? 스무살 청년 탈북자였다. 서울에서 방송작가를 하던 '나'에게 이니셜L은 자료수집차원에서 읽어본 한 잡지의 기사에서 발견한 낯선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나'의 상황이 그 이방인의 행적을 쫓아 현실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그의 모습을 나는 상상의 영역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커다란 천가방을 메고 허름한 청바지에 두툼한 파카를 입고 있다. 색이 바랜 갈색 모자를 썼고 유리에 금이 간 시계를 찼다. 보풀이 인 장갑, 목을 칭칭 감은 촌스러운 색의 모도리, 실밥이 터지고 때가 탄 운동화... 버스에서 내린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그의 눈동자는 경계심으로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두려움으로 흐려지곤 했을 것이다. (p. 9)

화자인 '나'는 김작가로 불리는 베테랑 방송작가였다. 낯선 기사 속 인물도 현실감 넘치는 영상으로 옮겨 담는 일을 하던 김작가가 오히려 상상의 영역에서 더욱 완성시킬 수 있을 낯선 이방인의 행적을 쫓아 서울을 떠나게 된 것은 기사 속에서 그가 했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한마디에 어쩌면 희망을 걸고 어쩌면 변명으로 삼고자 사표를 내고 벨기에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도망이었다.

나는 아직 로기완에 대해 무언가를 쓸 자격이 내게 있는 건지 자신할 수가 없다. (p. 32)

그렇게 도망처럼 벨기에에 와서 로기완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와중에도 중요한 건 사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있는 한 질문이었다. 그 대답을 이니셜L이 미리 해준것만 같아서 일단 오긴 했으나 아직 질문조차 던지지 못한채 발자국만 따라 밟고 있는 중이었달까...

재이가 기획하고 우리가 5년 동안 함께 만들어온 그 프로그램은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25분짜리 미니다큐로 만들어 한회에 두꼭지씩 방송으로 내보내는 동안 실시간으로 전화ARS시스템을 통해 후원을 받는 것이 전체 프레임이었다. (p. 59)

수년간 스크립터로만 있다가 처음으로 메인작가로 발탁된 이 프로그램에 김작가는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할수록 게다가 프로그램 PD였던 재이와 가까워질수록 '연민'에 대한 고뇌가 커져갔다. '어떻게 저런 쓰레기를 만들었지? 입에 올린 적은 없었지만 우리의 눈빛은 매번 그런 질문을 하고 싶다는 듯 우울하게 빛났다. (p. 63)' 그러다 윤주를 만나 여느때처럼 미니다큐를 찍던 도중에 윤주에게 더욱 마음을 쏟던 김작가의 노력이 오히려 윤주에게 더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렸을 때 그 미안함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김작가는 도망쳤던 것이다. 이니셜L에게로.

이니셜L은 이제 더이상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주는 암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내가 내 인생 속으로 더 깊이 발을 들여놓도록 인도하는 마법의 주문에 가까웠다. (p. 77)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가며 알게된 그의 현실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처참했다. 서울에서 홀로 병실에 있는 윤주의 상황만큼이나.

L의 행적을 쫓는 와중에 알게되는 고통과 아픔은 윤주의 과거를 통해 알게됐던 고통과 아픔을 다시 상기시켜주기도 했고 어쩌면 서로 상쇄시켜주기도 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눈물까지 애틋함의 시선으로 완성하는 것, 언젠가 나는 재이에게 대본이든 대본 이외의 글이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면 좋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p. 141)' 김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벨기에에 왔지만 아직 글을 쓰진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p. 152)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 그것뿐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p. 152)'어서 김작가는 일단 현실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장소만 떠나왔을 뿐 실은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가며 더욱 그 현실 고뇌속으로 더 깊이 빠지고 있었다. 정작 로기완은 자신의 짧은 인터뷰가 자신의 짧은 인생사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도 못해겠지만... 덕분에 김작가는 윤주에게 다시 연락할 요기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방송용 대본이 아니라 후회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다고, 너무도 외로웠던 한 사람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내 여정을 담은 글이며 소설이라기보다 일기에 가까운 글이라고도 말한다. 열심히 쓰고는 있지만 종종 내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괴로워지곤 한다는 말도 어렵게 꺼낸다. (p. 220)

누가 누구의 인생에 대해서 감히 연민을 드러낼 수 있을까? 참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척 외면하기 보다는 괴롭더라도 어떻게든 여러 사람에게 드러내보여주는 것이 더 나은 선택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김작가의 여행을 두번째로 또 읽기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p. 222)

'작가의 말'에서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 인간으로서나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저를 성장하게 해준 작품인 셈입니다. (p. 238)] 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을 쓰면서 '공감을 믿게 됐다'라고도...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연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공감'이 아니었을까...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다시 우리가 최선을 다해 공감해야 하는 것의 전제가 될 것입니다. (p. 239) -작가의 말 中-

알게 되면 알기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 먼저고 알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각자도생 이라는 말이 너무도 익숙해지고 있는 요즘 시대에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삶에 대한 공감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에 좀더 시간을 썼으면 좋겠다. 그런 시간이 결국 나에게 위로와 응원의 손길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긴 인생의 끝엔 알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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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해설과 그림이 있는 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 릴랜드 라이큰 글, 오현미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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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단테의 <신곡>을 읽고 나서 이른바 기독교3대소설이라고 불리는 다른 두 소설에 대한 관심이 생겼었다. 신곡 → 천로역정 → 실락원 순서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새로 나온 <천로역정>을 알게 됐다.

고전읽기를 할때 어떤 번역본이냐에 따라 원본의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는지가 정해지기 마련인데, 이번 책은 원전번역본에 대한 사전조사 없이 읽은 터라 타 번역본과 비교를 못해본 것이 개인적으로 좀 아쉽다... 원작자 존 버니언의 정본을 번역했고 그림도 있고 해설도 있으며 가이드북까지 합본으로 새로 나온 책이라고 하니 혹하는 마음에 일단 집어들었달까;;;

<천로역정>의 원제는 The Pilgrim's Progress 이다.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순례자의 진보'라고 나오는데, 줄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인물의 영적 순례체험을 담고 있는 것이다보니 한 순례자가 순례길을 여행하며 점차 (종교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진보라고 한다면 원제는 말그대로 작품의 줄거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제목이라고 하겠다.

우리말제목 <천로역정>도 한자풀이를 하면 원제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수도 있겠으나 번역그대로 원제를 살렸어도 됐을텐데 왜 굳이 한자어제목이 되었을까 궁금했다. 혹시 옛날 번역문학이 주로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이다보니 이 작품도 그러했나 싶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1678년에 존 버니언이 쓴 이 작품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선교활동에도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그 흐름을 따라 1895년 구한말 선교사로 조선땅에 온 캐나다 선교사에 의해 영어원본이 한글로 바로 번역이 되면서 '텬로력뎡' 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근대번역문학사에서 일본어판 중역이 아닌 원어원본에서 바로 번역된 최초의 소설이라는 의의도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원작자 존 버니언(1628~1688)은 정규교육을 거의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탁월한 설교자이자 작가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다. 청년시절, 종교적자유를 주창한 크롬웰 군대에 입대후 청교도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고 영국국내 상황이 다시 국교회 주도로 돌아갔을 때에도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종교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12년의 감옥생활을 보냈으며 이후 죽을때까지도 자신의 신념이 담긴 종교활동과 집필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작품은 수감당시 자신의 영적 투쟁과 성장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천로역정>은 2권이라고 한다. 1부는 1678년에 2부는 1684년에 나왔는데, 1부는 크리스찬이라는 인물의 순례기이고 2부는 그의 아내의 순례기이다. 두 권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고 비슷한 구조로 각각의 순례체험을 통한 성장을 담고 있어서인지 주로 1부만 번역되고 널리 알려진 편이라고 한다. 이번책도 1부의 내용만 담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쓰려고 펜을 들었을 때, 나는 이런 식의 책을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다른 책을 쓸 생각이었는데, 책을 거의 다 쓰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책을 쓰고 있었습니다. 요즘 같은 복음 시대 성도들의 인생행로와 생애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들의 여정과 영광으로 이르는 길에 관한 우화로 빠져들었습니다. 스무 가지도 넘는 사건들까지 더해서 말입니다. (p. 25)

존 버니언은 소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변'을 풀어놓는다. 이 작품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로서는 새로웠을 종교문학에 대한 작가 자신이 독자에게 전하는 간곡한 당부랄까. 또한, '나는,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썼을 뿐입니다. (p. 26)' '이런 스타일로 글을 쓰면 안 되나요? 이런 방식으로 써도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유익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이렇게 쓰지 못할 이유가 뭘까요? (p. 28)' 지금은 이상할게 없지만 당시로서는 온갖 비유들로 영적 성장을 소설처럼 써낸다는 것이 나름 큰 모험이었나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있게 말한다. '구구절절 온갖 지혜를 써 내려가는 성경에도 모호한 비유와 풍유가 도처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에서 우리의 어두운 밤을 낮으로 바꿔 주는 광채와 광선이 나옵니다. (p. 33)' 그러니 자 이제 온갖 모호한 비유와 풍유가 가득한 <천로역정>에서 어떤 광채가 나올지 읽어봐야겠지?! 작가가 말하듯 '이 책의 지시를 잘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거룩한 땅으로 안내받을 것입니다. (p. 37)' 를 과연...?!

이 세상 광야를 두루 다니던 중, 우연히 동굴이 있는 어떤 곳에 이르른 나는, 그곳에 몸을 눕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을 자던 중 꿈을 꾸었다. (p. 40)

소설의 시작은 이러하다. 작가가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서 크리스찬이라는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순례기를 체험하는.

"선생님, 제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을 읽어보니, 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그 후에는 심판받을 거라고 합니다. 저는 죽기도 싫고 심판도 감당 못 합니다." (p. 43)

"선생님, 저는 저기 저 앞에 있는 좁은 문으로 갑니다. 듣기로는 저곳에 가면 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내와 자식은 있습니까?"

"있지요, 하지만 이 짐이 너무 무거워서 아내와 자식에게서 전처럼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전, 마치 아내도 자식도 없는 사람 같아요" (p. 60)

"처음에 어떻게 그 짐을 짊어지게 된 거요?"

"내 손에 들린 이 책을 읽고 나서부터입니다." (p. 62)

소설의 시작에서 크리스찬이라는 남자는 어느날 갑자기 어떤 책(아마도 성경일 책)을 읽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그닥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류하는 가족도 뿌리치고 혼자 다른 세상을 찾아 길을 나서는 모습은 일면 너무 개인주의적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책속의 해설에 의하면 열여섯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크롬웰의 군대에 들어가 잉글랜드 내전에 참전했는데 '이 전쟁에서 크롬웰은 (다른 자유와 정치적 권리 중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찰스 1세와 싸우고 있었다. 군 복무 중에 버니언은 개인의 은혜 체험을 일반적 종교 전통보다 소중히 여기는 청교도 사상가들을 접하게 되었다. (p. 69)' 고 한다. 크롬웰의 집권시기는 7년 정도였는데 (크롬웰은 버니언이 기포드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후 7년 동안 권좌에 있었는데, 이는 개신교 교회들이 그 기간은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는 의미였다. 버니언에게 이 기간은 영적으로 성숙해 가며 사역을 전개해 나가던 시기였다. (p. 139)) 이 기간 동안 그의 신앙은 견고해졌고 그후에도 버니언은 이때 깨달은 종교적 방향을 일평생 유지했다고...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이는

먼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려야 하며,

두드리는 사람은 들어가게 될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고 그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으므로" (p.76)

작품 속에선 성경의 인용구가 아주 자주 나온다. 줄거리를 성경구절로 요약하자면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라고 할 수 있을듯.

그러나 그 문으로 가는 길을 당연히 험난할 터, 그러니 천로역정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크리스천은 마침내 구원의 땅에 이른다. 하지만 소설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빛나는 이들은 무지를 공중으로 데리고 올라가 전에 언덕 옆에서 본 문으로 가서는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내가 보니 그곳엔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그때 나는 멸망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천국 문에도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잠이 깨어, 이 모든 게 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p. 409)

잠들어 꿈꾸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잠에서 깨는 것으로 마무리는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갖은 고생끝에 크리스천이 구원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과 의견이 달라 뒤에 쳐져 오던 무지라는 인물에 대한 응징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종교적 방향을 더욱 실감하며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게 된다.

책속의 책 이라고 뒤편에 보면 파란색 종이로 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릴랜드 라이큰의 천로역정 가이드> 이다. 영문학교수이자 기독교적 관점의 고전문학에 대한 전문가인 릴랜드 라이큰 교수의 가이드북을 합본한 것이다. 문학의 본질부터 고전의 중요성을 간략히 요약설명해주고 <천로역정>의 특징과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 그리고 본문 각 장의 줄거리와 해설 및 묵상이나 토론을 위한 지침까지 꽤 알찬 가이드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표지에도 쓰여 있는 '캐리 마스의 정련된 해설' 이라는 부분이 내게는 읽는 내내 좀 걸렸다. 일단 캐리 마스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그의 해설에 얼마만큼 신뢰를 가져야할 지도 모르겠는데 해설이 본문 아래 따로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 중간중간 본문과 같은 글자크기로 섞여 있다보니 본문만 집중해서 읽기가 어려웠다. 책의 앞뒤 어디에도 캐리 마스와 그의 해설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것이 아쉽다.

책은 두툼하지만 동화책처럼 큰 글씨가 성기게 편집되어 있고 중간중간 그림도 있는데다 내용 자체가 우화적이라 어렵지않게 호로록 읽히긴 한다. 하지만 내가 종교가 없다보니 너무 쉽게쉽게 넘어가서 그럴 수도 있다. 성경을 알고 그 문구들을 연상하며 이 작품을 읽을 경우 이 책은 좀더 천천히 좀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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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조배준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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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근대 자본주의 문화의 토대를

종교적 근원에서 찾은 현대 사회학의 고전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로 다양한 철학의 안내를 받아왔다. 이 작고 얇은 책으로 그 두껍고 어려운 철학서들을 얼마나 알았겠느냐마는 그저 제목만 알고 있던 것보단 그래도 조금은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며 뿌듯한 마음이 들게 하는 나의 애정하는 시리즈! ㅎㅎ

시리스에서 새로 나오는 족족 모두 읽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고... [순자], [대학·중용],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모어의 유토피아], [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헤겔의 정신현상학].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을 거쳐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까지 왔다. 칸트나 헤겔까지는 뭐 그렇다쳐도 베버는 솔직히 좀 낯설었는데...

종교사회학을 창시한 것으로 평가받는 베버는 통합적이고 합리적인 근대 사회과학 연구방법론을 정립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주장하기 위해 먼저 주관적인 가치판단으로 제시되는 특정한 '이념형'이라는 틀을 통해 논증을 전개하지만, 그것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때에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가치중립적인 논증을 펼쳐야 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사회학에서 베버의 현재적 영향력은 당시 그도 존경했던 19세기 독일 철학의 거인들인 마르크스와 니체의 무게감에 비견되기도 한다. (p. 4)

모든 사상가들의 사상이 그렇듯이 베버의 '사상적 지평은 그의 출신 배경과 집안 환경, 처음으로 통일된 국가로 발돋움하던 당시 독일의 사회 상황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19세기 후반 여러 유럽 강대국에 비해 낙후된 독일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고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급속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후진적인 정치구조와 시민사회의 자유주의적 발전에 대한 억압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p. 5)'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철학사를 살펴보다보면 혼란한 시대에 특출난 사상가의 등장이 종종 눈에 띄는 것 같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당시까지의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체계적 해명을 정리한 결과물로 우선 이해할 수 있다. (p. 6) 마르크스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가 자본주의의 본질적 요소라고 설명했지만, 베버는 노동의 합리적 조직 방식이 핵심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베버에게 중요한 물음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에 대한 경제학적 원리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뿌리 즉 '문화적 가치의 근원에 무엇이 놓여져 있는가'라는 것이다. (p. 7)


베버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주류 종교인 기독교를 분석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보니 자칫하면 오독하게 될 여지가 곳곳에 있는 것 같다. 하다못해 자본주의 정신 어쩌고 라고 하니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두 이론은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사회를 주제로 삼고 있지만 파악하고자 하는 본질적 요소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베버는 '종교적 윤리 기획의 내용이 자본주의의 문화적 기원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를 추가적으로 해명하려고 한다. (p. 9)' 베버는 당시의 자본주의 발달의 원인 중 하나를 기독교 중 한 분파인 청교도적 문화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종교가 자본주의 사회를 촉발시켰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발달한 이유중에는 청교도적 문화도 한 몫했다 정도 라고나 할까.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적 종교의 문화와 연결지어 이해하고자 시도했고 증명해냈다는 점이 베버 철학의 특별함이라고 할까.

베버의 부모 및 가정환경, 인간관계와 경제적 상황 등은 그가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볼 때 왜 물질적 요인보다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요인에 집중했는지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p. 20) 베버는 기업 경영으로 자수성가한 시민 계급 정체성을 가진 부계와 신앙의 엄격한 원칙 안에서 자유분방한 기독교 공동체를 추구하는 외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p. 21)

베버는 경제적으로 윤택했고 종교적으로 독실했으며 당시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한 기업원리와 문화를 알고 있었다. 또한 여행을 자주 했고 특히나 미국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신흥 자본주의 사회의 장단점을 주의깊게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젊은 나이부터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았고 다양한 지식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했으며 당시 혼란스러운 독일 사회의 특권층의 모습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독일 지성계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문화주의적 해석 경향이었다. (p. 41)' 독일 지식인들은 서유럽에 비해 뒤쳐져 보이는 자신들의 조국에 대한 이해를 다른 조건들보다 그저 문화적 특성에서 찾으려 했고 베버 또한 그랬다고나 할까. (다른 조건들은 독일이 하나도 뒤쳐질 것 없는데 그저 마인드의 문제이므로 문화적 이해 프레임만 제대로 파악하면 독일도 서유럽 못지 않게 발전할 수 있다 라는 바람이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개인적 생각... 그러니까... 뭐랄까... 배부른 철학이라고나 할까...ㅋㅎ)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를 전혀 다른 지평에서 조망한다. 그는 자본주의를 경제적 생산양식으로서만 바라보는 관점이 팽배하여, 그것의 형성과 지속에 혁혁한 자본을 갖고 있는 정신사적 원동력에 대한 논의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유물론적 내지 경제학적 경향에 대해 한탄했다. 베버의 관심은 당대 자본주의 일반 체제의 전모를 청교도 윤리로 밝힐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의 근대 자본주의가 초기에 발전할 때 '합리적 경제 윤리' 또는 '건전한 노동(직업) 윤리'가 중요한 규범적·종교적·문화적 요인으로 작동했다는 점을 해명하는 데 있다. (p. 62)

베버가 이 책을 쓸때 대중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니라 학자 대 학자로 논문으로 쓴 것이라 원저작은 본문 못지않은 방대한 주석에 눈이 핑핑 돌아가는데 본문도 그에 못지 않게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자본주의가 발달하는데 청교도 문화가 큰 역할을 했었다 가 전부이다. 아무 상관도 없어보이는 종교적 문화가 자본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증명해 낸 것이 엄청 중요한 학문적 성과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 간단한 요약으로 읽는 나로서는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인가 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는;;; 하지만 베버가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기독교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분석했다는 것엔 큰 의의가 있어 보인다. 특히나 루터에 대해서.

종교적 소명으로 인식되어 널리 확산된 개신교 특유의 직업 노동 개념은 베버의 분석을 따르자면, 루터의 독일어 번역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 루터는 원래는 '너의 일에 머물러라'는 의미의 구절을 옮기면서 Arbeit 대신에 'beruf'라는 독일어를 활용했다. 즉 '너의 직업에 계속 머물러라', '네 직업에서 떠나지 말아라'로 번역한 것이 된다. 이것은 '일'에 대한 두 가지 의미 구분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즉 원래 20절에서는 '일work' 또는 '과업'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곤ergon'이라 되어 있고, 21절에는 '고통스러운 일' 또는 수고하고 애씀이라는 '노고'의 의미를 가진 '포노스ponos'로 되어 있다. 이처럼 어감이 다른 두 단어를 순차적으로 쓴 것은 '복음을 위한 일'과 '생계를 위한 일'을 각 절에서 강조하여 의미의 차이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루터는 이 두 맥락을 모두 당시에는 '(신의)부르심'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beruf'로 번역한 것인데, 이를 통해 개신교 성서에서 일에 대한 'calling' 또는 'vocation'의 맥락이 강하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p. 132)

서양 역사관련 책을 읽다보면 성경의 번역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될 때가 있다. 지금도 번역서를 읽을 때는 믿을만한 번역인지 알아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루터의 번역도 루터의 주관적 판단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었구나... 종교개혁의 중심이었던 그 성경이... '루터 번역 의도에 대한 의심' 이라고 책속에 있는 내용을 읽으면 더욱 루터와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루터에 대한 이 새로운 발견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하겠다.

베버의 주장을 살펴본 독자들은 자본주의의 문화적 원형이라는 그 주장에 대한 타당성이나 정당성에 대해 검증하기 이전에, 그가 탐구하는 자본주의 정신과 독자들이 떠올려볼 수 있는 자본주의 정신의 개념이 너무 달라서 혼란스러운지도 모르겠다. (p. 207) 이 책의 주장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아주 낡고 너무 미시적인 분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p. 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베버의 이론과 베버의 책이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갖고 있을까? 일단 베버 자신도 '자신의 연구가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한 다소 거창한 시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발휘된 종교의 영향과 그 정도를 소박하게 살펴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p. 214)'는 것을 알아두어야 겠다. 그런데 왜 후학들은 베버의 철학을 그토록 위대하게 설명하고 있을까에 대해서 이 책의 앞부분에 나왔던 내용이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베버는 인류가 이룩한 근대 문명사를 보편적인 견지에서 그리고 독창적인 시각의 사상 체계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는데, 19세기 특유의 이런 광범위한 지식 지평은 그를 끝으로 사실상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 베버는 넓은 시야의 역사 의식을 통해 자신이 디디고 서 있는 시대의 독특한 성격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p. 70) 베버의 연구대상은 근대 서구 사회가 품고 있는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힘, 그리고 그것에 내재된 문화적 가치의 정체였다.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에게 베버의 연구 내용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매우 주관적으로 포착한 연구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철저히 객관화시켜 선명한 논증으로 정당화하려는 학문 탐구의 '방법'이었다. (p. 71)

미국의 한 저명한 사회학자는 베버의 이 책을 '20세기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만큼 베버의 대담한 가설과 꼼꼼한 분석은 학문적으로 큰 매력을 느끼게 하는 논증과정을 보여준다고 하니 후학들에게는 두고두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학자인가 보다. 하지만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 베버의 논리에만 포인트를 두고 읽자면 글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다만, '당신의 시대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자본주의 정신이란 무엇이냐고 묻는 베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p. 211)' 라는 저자의 바람에는 응원의 마음을 보태고 싶긴 하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해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건 분명 문제가 있으므로.. 고전이 건네는 질문에 한번쯤 진지하게 다가가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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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실천이성비판 -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정하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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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철학의 완성자, 칸트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내가 참 좋아하는 시리즈다.

제목을 들으면 알법한 철학고전들, 하지만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은 철학고전들에 대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는, 철학고전에 대한 입문서로 아주 제격인 시리즈다. 이 시리즈의 책들을 몇 권 읽었었는데... 읽을때마다 저자들에게 어찌나 감사한 마음이 들던지. ㅎㅎ

그렇게 거치고거쳐 칸트까지 왔다. wow 내가 (비록 입문서이긴 하나) 칸트 철학에 대한 책을 읽게 될 줄이야!

흔히들 하는 말을 빌리자면 칸트의 철학은 서양 철학사의 중앙에 자리잡은 가장 큰 저수지이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흘러들어갔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약간의 과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정하기도 힘든 평가이다. 여하튼 칸트가 철학의 전 영역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최초의 '프로'철학자이며 철학 사상의 한 시대를 연 위대한 철학자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실천이성비판]은 칸트의 책 중에서도 계몽주의적 완성자이며 철학의 모더니티를 성숙시킨 칸트 철학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칸트 윤리학의 내용이 집약된 책이다. (p. 4)

칸트 철학서의 대표작은 [순수이성비판] 과 [실천이성비판] 이다. 원작도 마치 소설의 상,하권 느낌처럼 순수이성비판이 상권이라면 실천이성비판이 하권 같은 느낌인데, 소설도 두껍고 어려운 책은 앞에 권만 읽고 뒤에 권은 손도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칸트의 책도 순수이성비판에 비해 실천이성비판은 약간 홀대받는 느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칸트 본인이 하고자 했던 일, 즉 새로운 형이상학, 요즘 말로 하자면 새로운 철학을 확립하는 일에서 보면, [순수이성비판]은 예비 작업이자 중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고 [실천이성비판]이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출발점에 해당한다. 여기서 얻은 내용을 디딤돌로 하여 칸트는 자신의 실천 철학을 더 본격적이고 구체적으로 넓혀나갔기 때문이다. (p. 5)' 따라서 칸트의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실천이성비판]에 꼭 입문해야 한달까. ㅎㅎㅎ

책의 구성은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동일하다.

학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성장과 인생 배경을 알아야 할 터 1부는 칸트라는 사람에 대해 알려주고, 2부에서는 [실천이성비판]이라는 이 책의 주요 화두에 대해 요약 설명한 다음 3부에서 곁들여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하면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나는 늘 그랬듯 1부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는다.

[순수이성비판]의 진정한 의도는 철학을 올바르고 확실한 길에 올려놓으려는 것이었다. (...)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진정한 도덕의 체계를 제시하려고 했다. (...) [판단력비판]을 통해 미의 문제와 자연의 목적론을 다루면서 비판철학의 체계를 완결한다. (p. 17)

칸트의 비판철학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비판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근대 철학의 논쟁과 대립을 종합함으로써 근대 자연과학의 철학적 기초를 밝혔다. 그리고 유럽 사상계는 칸트의 출현으로 일대 혁명기를 맞아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을 낳았고 이후 신칸트학파를 거쳐 현대에 이르도록 철학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p. 20)

칸트의 대표저작은 위 3비판서 라고 한다. 이 3비판서로 칸트는 '근대의 이성을 완성한 철학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칸트는 평생동안 학자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지만 그는 태어난 곳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를 단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다른 곳에서 초빙의 기회가 왔어도 거절했다. '그는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가기를 더 원했다. (p. 16)' 고는 하지만 글쎄... 세계적 사상들을 아우르는 철학을 세우고자 한 사람이 평생 한곳에서만 지냈다는 것이 약간 우물안개구리 처럼 느껴지는 점도 있긴 하다. 하지만 칸트는 '근대의 이성을 완성한 철학자'라고 불리는데...흐음...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이렇게 두 개의 이성이 등장해서 칸트가 이성을 왜 둘로 나눈 것인지 궁금해진다. 둘은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 같다면 왜 이름을 달리 쓰는지 등이 궁금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해 두 이성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름을 둘로 나누어 달리 부를까?하나의 이성이 서로 다른 관심과 영역에서 사용되면서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역할이 어떻게 달라질까? 이성은 이론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실천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 하나의 이성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앎의 가장 근본적 틀과 원리를 제공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의지가 선을 추구하도록 규정해주는 전혀 다른 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런 이성의 두 기능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구할 수밖에 없다. 이 중 첫째 과제를 [순수이성비판]에서 탐구했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둘째 과제를 탐구한 것이다. (p. 28,29,30)

이성이란 단어에 대해 쉽게 생각하자면 사고력, 판단력, 인식력 뭐 이런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아주 초보적으로 이해하자면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과 주체에 대해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실천이성비판은 그런 이성이란 능력이 인간을 어떻게 행동하게 만드는지 얼마나 행동하게 만드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지 등의 행동력에 대해 철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려나...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을 튼튼하게 성립시킬 수 있는 주춧돌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인식 능력, 앎의 능력, 다시 말해 이성의 이론적 능력 자체를 비판해본 작업이었다. (p. 31)'

'[실천이성비판]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 접근함으로써 어떻게 실천 이성이 의지를 규정하여 우리가 의무를 지키게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p. 37)'

칸트는 이러한 이성비판들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윤리학에 대해 고민한 것 같다. 그런데 '칸트는 도덕 법칙을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것으로 본다. (p. 79)' 이러한 측면에서 '실천이성'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되고 그렇게 '자율적으로 도덕법칙을 지킬 때 정말 인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p. 80)' 고 자신의 철학과 인간에 대한 이성적 비판을 완성하지만 문제는 그런 '인간다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남는 것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더욱 큰 문제로 여겨지는 것은 이러한 철학의 종착역이 칸트에게는 종교인것 같다는 점이...

종교는 바로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이다. 최고선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의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 그런데 이 선택에서 순수 실천 이성의 자유로운 관심은 현명한 세계 창조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 판단을 규정하는 원리는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객관적으로 실천의 차원에서 최고선을 추구하기 위핸 수단으로 도덕적 의무를 받아들이는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상이다. 이 순수한 실천적 이성 신앙을 명령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에 의한 것으로서, 신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성 사용의 기초에 두도록 하는 도덕적 마음씨에서 저절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신앙과 관련해서 건전한 사람도 가끔은 동요할 수는 있지만 절대로 무신앙에 빠질 수는 없다고 칸트는 생각한다. (p. 178)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무종교자로서 칸트의 위와 같은 결론은 조금 당혹스럽다. 나는 스스로 건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신앙자에 가깝다보니 나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할꼬... ㅎㅎㅎ

하지만 칸트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 철학서를 읽을 때 주의해야 겠다고 깨달은 점이 있었으니, 철학은 답을 주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의문이 생기고 답답해지고 이제 어떡해야 하나 싶어지는 그럴때 철학을 찾게 되지 않나? 하지만 막상 철학서를 읽어보면 철학은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줄 뿐 미래에 대해선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다. 칸트만 해도 그동안의 철학들을 아우르며 그시대가 왜 그렇게 됐는지 그시대의 인간이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하려고 탐구하고 그 탐구결과로 이해완료! 하고 끝냈을 뿐... 앞으로 이렇게 해야한다라느니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라느니 하는 전망같은 건 없다. 그러니 삶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하여 성급한 마음으로 철학서를 읽으면 안 될 것 같다. 철학이란 지금,여기,나 에 대해 좀더 학문적으로 분석해줄 수는 있으나 답을 주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책 역시 좋았다. 철학에 대한 입문서로는 역시 <EBS 오늘 읽는 클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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