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아픔에 대한 가장 진정성 있는 고민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낸 공감과 연대, 치유의 이야기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가장 진정성 있는 고민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낸 공감과 연대, 치유의 이야기
<로기완을 만났다> 라는 소설은 이미 읽었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된다고 했을때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됐었는데 개봉시즌에 맞춰 리마스터판으로 책도 새로 나왔다.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 책을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긴한데 책을 먼저 읽게 되버렸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L에 지나지 않았다.종종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로 표현될 때도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이기도 했다. (p 7)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L에 지나지 않았다.
종종 무국적자 혹은 난민으로 명명되었으며,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나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로 표현될 때도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교신을 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했고,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이기도 했다. (p 7)
소설의 첫 문장이다. 로기완 이라는 이름 석자도 나중에야 익숙해질 그는 처음에 그저 이니셜L 이었다.
소설의 현재 시점은 2010년 이다. 오래됐다면 꽤 오래전의 시점이니 그당시와 지금의 탈북자 입지가 달라졌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L, 로기완 그는 생면부지의 땅 벨기에에 떨어진? 스무살 청년 탈북자였다. 서울에서 방송작가를 하던 '나'에게 이니셜L은 자료수집차원에서 읽어본 한 잡지의 기사에서 발견한 낯선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나'의 상황이 그 이방인의 행적을 쫓아 현실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그의 모습을 나는 상상의 영역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커다란 천가방을 메고 허름한 청바지에 두툼한 파카를 입고 있다. 색이 바랜 갈색 모자를 썼고 유리에 금이 간 시계를 찼다. 보풀이 인 장갑, 목을 칭칭 감은 촌스러운 색의 모도리, 실밥이 터지고 때가 탄 운동화... 버스에서 내린 뒤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그의 눈동자는 경계심으로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두려움으로 흐려지곤 했을 것이다. (p. 9)
화자인 '나'는 김작가로 불리는 베테랑 방송작가였다. 낯선 기사 속 인물도 현실감 넘치는 영상으로 옮겨 담는 일을 하던 김작가가 오히려 상상의 영역에서 더욱 완성시킬 수 있을 낯선 이방인의 행적을 쫓아 서울을 떠나게 된 것은 기사 속에서 그가 했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 한마디에 어쩌면 희망을 걸고 어쩌면 변명으로 삼고자 사표를 내고 벨기에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도망이었다.
나는 아직 로기완에 대해 무언가를 쓸 자격이 내게 있는 건지 자신할 수가 없다. (p. 32)
그렇게 도망처럼 벨기에에 와서 로기완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와중에도 중요한 건 사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있는 한 질문이었다. 그 대답을 이니셜L이 미리 해준것만 같아서 일단 오긴 했으나 아직 질문조차 던지지 못한채 발자국만 따라 밟고 있는 중이었달까...
재이가 기획하고 우리가 5년 동안 함께 만들어온 그 프로그램은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25분짜리 미니다큐로 만들어 한회에 두꼭지씩 방송으로 내보내는 동안 실시간으로 전화ARS시스템을 통해 후원을 받는 것이 전체 프레임이었다. (p. 59)
수년간 스크립터로만 있다가 처음으로 메인작가로 발탁된 이 프로그램에 김작가는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할수록 게다가 프로그램 PD였던 재이와 가까워질수록 '연민'에 대한 고뇌가 커져갔다. '어떻게 저런 쓰레기를 만들었지? 입에 올린 적은 없었지만 우리의 눈빛은 매번 그런 질문을 하고 싶다는 듯 우울하게 빛났다. (p. 63)' 그러다 윤주를 만나 여느때처럼 미니다큐를 찍던 도중에 윤주에게 더욱 마음을 쏟던 김작가의 노력이 오히려 윤주에게 더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렸을 때 그 미안함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김작가는 도망쳤던 것이다. 이니셜L에게로.
이니셜L은 이제 더이상 새로운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주는 암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내가 내 인생 속으로 더 깊이 발을 들여놓도록 인도하는 마법의 주문에 가까웠다. (p. 77)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가며 알게된 그의 현실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처참했다. 서울에서 홀로 병실에 있는 윤주의 상황만큼이나.
L의 행적을 쫓는 와중에 알게되는 고통과 아픔은 윤주의 과거를 통해 알게됐던 고통과 아픔을 다시 상기시켜주기도 했고 어쩌면 서로 상쇄시켜주기도 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눈물까지 애틋함의 시선으로 완성하는 것, 언젠가 나는 재이에게 대본이든 대본 이외의 글이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면 좋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p. 141)' 김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벨기에에 왔지만 아직 글을 쓰진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p. 152)
'누군가 나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해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사는 것, 그것뿐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p. 152)'어서 김작가는 일단 현실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장소만 떠나왔을 뿐 실은 로기완의 행적을 따라가며 더욱 그 현실 고뇌속으로 더 깊이 빠지고 있었다. 정작 로기완은 자신의 짧은 인터뷰가 자신의 짧은 인생사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도 못해겠지만... 덕분에 김작가는 윤주에게 다시 연락할 요기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방송용 대본이 아니라 후회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다고, 너무도 외로웠던 한 사람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내 여정을 담은 글이며 소설이라기보다 일기에 가까운 글이라고도 말한다. 열심히 쓰고는 있지만 종종 내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괴로워지곤 한다는 말도 어렵게 꺼낸다. (p. 220)
누가 누구의 인생에 대해서 감히 연민을 드러낼 수 있을까? 참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척 외면하기 보다는 괴롭더라도 어떻게든 여러 사람에게 드러내보여주는 것이 더 나은 선택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김작가의 여행을 두번째로 또 읽기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p. 222)
'작가의 말'에서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 인간으로서나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저를 성장하게 해준 작품인 셈입니다. (p. 238)] 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을 쓰면서 '공감을 믿게 됐다'라고도...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연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공감'이 아니었을까...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다시 우리가 최선을 다해 공감해야 하는 것의 전제가 될 것입니다. (p. 239) -작가의 말 中-
알게 되면 알기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 그렇기에 아는 것이 먼저고 알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각자도생 이라는 말이 너무도 익숙해지고 있는 요즘 시대에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삶에 대한 공감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에 좀더 시간을 썼으면 좋겠다. 그런 시간이 결국 나에게 위로와 응원의 손길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긴 인생의 끝엔 알수 있게 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