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숲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갈색 낙엽들 사이에 붉은색 측량지표가 천연덕스레 함께 있었다. 얼핏 봐서는 서로 어우러진 광경 같지만… 그렇지 않다. 측량지표는 숲 전체를 뒤흔들어버릴 실세(實勢). 저런 측량지표가 박히면 머지않아 그 일대에 큰 공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부근의 낙엽들이 오늘 따라 더 덧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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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에 문외한이다. 문외한답게 전태원 화백의 'STONE' 감상평을 말하고자 한다.

 

 

(1)

내가 그의 'STONE'을 처음 보기는 200310월 어느 날, 춘천미술관에서다. 'STONE'들을 본 순간 난감했다.  

‘평면인 캔버스에 그린 그림도 아니고 만지거나 허공에 매달 수도 있는 입체적 돌들이라니… 도대체 뭐지?

하는 의문에서 내 감상이 출발한다.

그의 'STONE'들은 산에서 볼 수 있는 바위부터 동네 길을 걷다가 발부리에 차이는 돌멩이까지 그 모습이 다양했다. 하지만‘딱딱하거나 무겁거나 한 ’것들이 아니었다. 종이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낸 아주 가벼운, 인위적인 암석이었다. 그런데 인위적인 바위로써 인조석(人造石)이란 게 있지 않은가? 시멘트에 모래 화강암 석회암 등을 섞어서 자연석 비슷하게 만든 인조석은,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데 많이 쓰인다.

하지만 그의 'STONE'은 인조석과 다르다. 우선 훨씬 가벼운데다가, 건물 외관용으로 만들지도 않았을 뿐더러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도록 하는 미술작품인 거다. 혹 누가 나한테‘저는 돌들을 외관에 잘 붙인 건물만 보면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다가 갑니다. 그렇다면 전태원 화백의 STONE과 그런 돌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건물 외관에 붙이는 건축용 돌은 돌가루들을 짓이겨서 만든 걸 겁니다. 즉 구성 성분인 돌가루들의 개성이 다 사라졌지요. 하지만 전태원의 STONE은 종이를 하나하나 잘라 붙여서 만든 거라 자세히 보면 낱낱의 종이조각들이 다 살아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힘들게 작업한 까닭은‘하나의 돌도 수많은 모래알들이 쌓여 굳어진 결과물이다’라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가 작품 STONE들을 전시하면서 낸 팜프렛에 ‘A Short Story of Eternity'라는 설명을 붙인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A Short Story of Eternity'를 번역한다면 ‘영겁의 편린’이겠는데 바로 그런 뜻임을 명백히 한 거죠. 당연히 그의 STONE들은 퇴적암입니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갑자기 생성된 화산암 따위가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 그래서 전태원의 STONE들은 우리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곰곰이 감상하며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가령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휙 보고 지나간다면 그 STONE들이 속으로 이런 욕을 할지도 모른다.

“미술전시장을 롤러스케이트 타는 장소처럼 아는 돌대가리 같으니라고!

 

(2)

전태원 화백의 STONE들을 살펴보면 특별한 무늬 하나 없이 담백한 것들과, 무언가를 첨가한 것들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들을 본다. 커다란 나무가 있었던 자국을 보이기도 하고, 갖가지 영상 사진들이 띠처럼 붙어 있기도 하고, 책상에서 빠져나온 서랍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생뚱맞게도 만화영화의 한 장면이 들어 있기도 한 STONE. 심지어는 그믐달이 떠 있거나, 북두칠성의 한 부분이 그려져 있기까지 한다.

영겁의 편린을 보인다면서 이런 장난꾸러기 같은 짓이라니. 어떻게 봐 주어야  할까?

나는 이렇게 해석해 봤다. STONE이 먼 데 있지 않고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있음을 일러주는 거’라고.

길 가다 발길에 차이는 하찮은 돌조차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무한에 가까운 세월 속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데에 전태원 장난의 목적이 있다는 풀이이다.  

 만일 이런 내 풀이에 누가‘황당하게 둘러대기는!’하며 빈정댄다면 나를 대신해서 STONE들이 이렇게 나무랄 것이다.

“당신이 돌을 알아? 당신이 이렇게 진짜 돌과 구분하기 힘들게 조형물 돌을 만들 수나 있어? 없으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라고.

 

 

(3)

전태원의 STONE들은 그의 부단한 저항(抵抗)을 보여준다.

 

서양화, 수채화 같은 그림은 캔버스라는 평면에 존재한다. 즉 평면적 존재물들이다. 오랜 세월 평면적 존재들을 다루는 자신에 어느 날 불끈 시작된 저항 형태가 STONE이라는 입체적 조형물인 것이다.

평면적 그림들도 질감이 있으되 눈으로 느끼는 질감이었다. 하지만 STONE들은 눈은 물론 손끝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질감이다. 질감 상의 저항만 있지 않았다. 색감에서도 저항은 이뤄졌다.

그림에서 화가가 다루는 색은 원칙적으로 유채색이다. 검거나 희거나 잿빛은 무채색으로서 금기에 가깝다. 하지만 전태원은 금기에 가까운 무채색을 STONE 창작 핑계로 마음껏 다루고 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거나, 혹 안다고 해도 모른 체하고 있다. 왜냐면 예술에서의 저항은 창조적 저항이며 창조적 저항이, 거창하게 말해 인류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의 저항적 창조물로써 등장한  STONE들이 어언 10여 년이란다. 세월 무상, 인생무상을 실감케 한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만큼 긴 세월 STONE들에 골몰한 전태원. 그렇다면 그는 이제 STONE들에 대해 저항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 자신의 자식들 같은 STONE들에게 전태원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2018 강원문화재단 지원으로 올가을 어느 날 이상원 미술관에서 연 ‘THE WAVE'이 그것이다. 제 자리에 붙박이처럼 고정돼 있는 STONE들에 대하여 시작도 끝도 없는 움직임… ’결‘이 시작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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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지인과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진 시각이 밤 830분경이었다. 지인이 택시라도 잡아주려 했지만 사양했다. ‘저녁 식사 후 한 시간 걷기’를 건강관리 차원에서 실천하고 있기에 사는 집까지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20분은 걸어서 집까지 30분쯤 거리가 남았을 때다. 가까운 도로 변 공원에서 누가 K를 불렀다.

“어이, 여기 좀 와 보쇼.

밤 시간에 공원 숲 벤치에 앉아 일방적으로 K를 부르는 사내 목소리. 솔직히 사내 체구가 크고 목소리도 굵직한 느낌이었다면 K는 못 들은 척 그냥 가는 길을 계속 걸었을 게다. 세상이 날로 험해져서‘한밤중에 낯선 이’란 경계의 대상이니까. 하지만, 좀 어둡긴 하지만 체구도 작아 보이고 목소리도 가냘프게 들려서 K는 발길을 사내 쪽으로 바꾸면서 반문했다.

“저를 불렀습니까?

“그럼요.

가까이 다가가자 사내가 벤치에서 일어나는데 왠지 느린 동작이다. K가 까닭을 알았다. 사내는 술 취해 있었다.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K에게 비틀거리는 몸으로, 반쯤 꼬부라진 혀로 말을 이었다.

“여기가 어디요?

K는 어이가 없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만취한 뒤 귀갓길에 나섰다가 길을 잃은 사내가 아닐까?

“여기는 말입니다.

하면서 K는 부근에 있는 큰 건물들을 가리키며 현재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사내가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요?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걸, 길을 가던 K가 어찌 안단 말인가. 말문이 막혀 멍하니 있게 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내가 침묵을 깨고 다시 말했다.

"그럼… 목욕탕이 어디 있소?

맥락이 잡혔다. 사내는 아마도 오랜만에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친 뒤 기분 좋게 소주를 마신 듯했다. 목욕 후 음주하면 만취하기 십상이라는데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머지않은 가까운 곳에 목욕탕 건물이 있었다.

“저기 목욕탕이 있는데요.

K가 그 건물을 가리키며 말하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원, 우리 동네 부근이잖아. 허허허”

 

K는 사내와 헤어져 다시 집으로 걸어오면서 그 어이없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요?

당사자는 무심결에 한 말이지만 얼마나 철학적인 물음인가! 왜 내가 여기 있는지를 알기 위해 수많은 지성(知性)들이 나서지 않았을까. 인류의 성인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고행 끝에‘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써 답을 냈다. 예수크리스트는 십자가에 매달려 절규함으로써 답을 냈다. '하나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올해 밭농사도 끝나가고, 아들도 장가가서 여러 모로 한가해진 K. 그래서일까 며칠째 같은 질문에 골몰하며 지내고 있다.  

  “왜 내가 여기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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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선생을 오래했던 때문일 게다. 나는 국어사전에 없는 말들이 횡행하는 데 저항감이 크다. 그런 말들 중에는 ‘웃픈’이란 말도 있다. ‘웃기지만 슬픈’이란 뜻이란다. 세상에 별 이상한 말도 다 만들어낸다고 여겼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 말을 마냥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체험했다.

춘심산촌의 농막에서다. 더러는 혼자 춘심산촌에 가 밭일을 하다가 농막에서 쉬기도 하는데 그럴 때 라디오 음악 방송을 즐겨듣는다. 특히 흐린 날이거나 바람 부는 날 같은 스산한 날씨의 날에 농막에서 듣는 음악이 가슴에 와 닿는다. 개그맨 최양락이 부르는 ‘엄마 찾아 삼만 리’노래가, 스산한 날씨 탓일까 내 가슴에 와 닿을 줄이야.

돈 벌러 먼 이국으로 떠난 엄마한테서 소식이 뚝 끊기자, 어린 아들이 엄마 찾겠다며 길을 나서는 슬픈 내용을 배경으로 한 노래란다.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섧고 물길 섧어도

  나는 찾아가리 외로운 길 삼만 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 소식 전해다오

  엄마가 계신 곳 예가 거긴가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오세요

  아 외로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삼만 리”

 

분명 우스꽝스런 창법의 노래인데 … 노래 듣는 중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까지 나려 했다. 1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부지불식중 났던 걸까. 어쨌든 그 순간‘웃픈’이란 신조어의 쓰임을 통감했다.  

최양락은 천부적인 개그맨이다. 그가 부르는 ‘엄마 찾아 삼만 리’노래 감상을 나는 지인들에게 감히 추천한다. 그렇다고‘웃픈’ 이란 신조어가 국어사전에 등재하는 데 찬반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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