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때 도내 실기 대회에서 시 장원을 한 학천이. 화가나 소설가를 꿈꾸는 동기들에게 예술가의 참 모습(?)이 무언지 생생하게 보여주던 그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3학년 2학기 때부터라고 나는 짐작한다. 1969년 초겨울 어느 날 예비고사가 끝나고 5명이 모여 소주 파티를 벌였을 즈음에 이미 학천이는 문학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놀랍게도 원인 제공자는 바로 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 자랑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50년 전 학창시절 얘기이니까 이제는 털어놓아도 될 게다.

1969년 가을에 글 쓰는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적인 현상 공모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13회 학원문학상이었고 다른 하나는17회 우석대학교 현상 문예였다.

나는 사실 그런 공모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단지 여름방학 들어 별스레 소설 쓰고 싶은 욕망에 불타올라 만사 제치고 밤마다 다락방에 올라가 소설 쓰기에 전념했던 거다. 예비고사를 코앞에 둔 3학년이라 여름방학 중 보충수업은 물론이고 밤에도 교실에 남아 야간자습을 해야 했다. 나는 낮의 보충수업은 참을 수 있었지만 밤의 야간자습은 그 시간에 소설이 쓰고 싶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았다. 석간(夕刊)신문을 배달하는 경우에는 야간자습 불참을 학교에서 허용했다. 마침 친구들 중에 신문 배달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한테 부탁했다. 말도 안 되는석간신문 배달 학생 증명서한 장 얻기다. 그 친구가 신문보급소 총무한테 부탁해서 그런 증명서를 받아다가 내게 건넸다. 나는 담임선생께 그 서류를 제출한 뒤 밤마다 집의 다락방에 올라가 소설을 썼다. 그러느라 학천이를 만나 볼 생각도 못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소설 두 편이 완성됐다.‘황사(黃砂)’3월의 이사(移徙)’. 때마침 학원사와 우석대학교에서 전국 고교생 대상으로 문예작품을 공모한다는 걸 알고는 '3월의 이사'는 학원사에, ‘황사는 우석대학교에 우송한 뒤 개학을 맞았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0월 초순경 나는 잇달아 당선 통지를 받았다. ‘3월의 이사는 우수작에, ‘황사는 당선작에 뽑혔다는 내용이었다. 반면에 학천이는 둘 다 좋은 소식 하나 못 듣고 만 것이다. 나한테 그 두 군데 공모에 응모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왠지 침울해진 표정만으로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학천이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게 됐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 같은 경우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청출어람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낭패감과 굴욕감에 문학에 대한 자신감이 무너져 버리고 만 듯싶다.

돌이켜보면 학천이의 그런 좌절이 결국은 85년경 30대 중반을 막 넘은 한창 나이에 세상을 쓸쓸히 뜨게 된 원인(遠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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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년도 초겨울, 예비고사가 끝난 날 자취방에 모여서 소주 파티를 벌였던 미술 문학 연합 팀 5명 중 둘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종열이와 학천이다. 그나마 종열이는 친구들의 애도 속에 삶을 마감했지만 학천이는 그렇지 못했다. 85년경 낙향해서날마다 술만 마시다가 병을 얻어 급작스레 세상을 떴다는 안타까운 소문이 그의 마지막이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이학천’.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의 한자 이름은 李鶴川이었다. 우리보다 한두 살 위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나기는 춘고에 입학한 67년도 봄 문예반에서다. 처음부터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우선 고향과 출신중학교가 달랐다. 나는 춘천 토박이에 춘중을 거쳐 춘고에 들어왔고 그는 인제 출신으로 인제의 어느 중학교를 거쳐 춘고로 들어왔다. 외모만 봐도 나이가 나보다 훨씬 위로 보여서 친근감을 갖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계기로 급격히 친해졌으니 그 해 가을 도교육위원회에서 주최한도내 고등학생 대상 예능 실기대회, 문예 부문에 학교 대표로 함께 선정된 일이다. 대개는 2학년이나 3학년 생 중에서 학교 대표를 정하는데 그 해는 달랐다. 담당교사인김병덕 선생님이 이런 선정 원칙을 발표한 것이다.

선배라 하여 선정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실제 실력으로 선정돼야 한다. 문예부원들은 이번 주 내로 각자 쓰고 싶은 글 한 편씩 써서 내게 제출해라. 그 글들을 보고서 산문과 운문 별로 각 한 명씩 학교 대표를 선정하겠다.”

그랬더니 뜻밖에 산문부로는 내가, 운문부로는 학천이가 선정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1학년생이었으니 문예반 23학년 선배들의 체면이 한순간에 꾸겨지고 말았다. 김병덕 선생님의 특별한 선정에 부응하듯 얼마 후 홍천에서 열린 대회에서 학천이는 운문부 장원 상을, 나는 산문부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학천이와 나는 급격히 친해졌다. 아니, 수정한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학천이를 내 문학수련의 모델로 삼고 따랐다. 같은 1학년이긴 하지만 도 실기대회 첫 번 참가에장원이라니. 게다가 학천이 사는 모습은 소문으로나 들었던 문학하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태원이도 나와 똑같이 기억한다.

우선 학천이는 가난했다. 우스운 얘기 같지만 당시가난은 문학인의 첫 번째 필수조건처럼 여겨졌다. 학천이는 인제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부쳐주는 월() 생활비가 넉넉지 못했고, 그마저도 늦을 때가 잦아서 효자동에서 하는 자취생활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일요일에 그의 자취방을 찾아가면 밥 대신에 간장을 몇 방울 떨어뜨린 냉수 한 사발을 끼니 삼아 들이키고서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방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가난한 모습으로만 일관했다면 나는 교동 우리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가까이 걸리던 그 자취방을 그만 다녔을 게다. 학천이는 그런 모습으로 문학하는 이의 풍모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배를 굶주리면서도 담배 피우기를 잊지 않았고 게다가, 소주나 막걸리도 틈틈이 마셨다. 그럴 때 방 한 구석에는창작과 비평같은, 전문문학인이 구독하는 잡지들과 습작시를 가득 적어놓은 대학노트가 사법고시생 대학노트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 쌀이나 연탄을 못 사더라도 문학을 향한 일념만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니 막연하나마 소설가가 되는 꿈을 품은 내가 어찌 학천이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점은 태원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만난 태원이가 한 말이다.

춘고 시절 학천이야말로 어떤 모습이 예술가의 모습인지를, 우리 미술반 친구들한테 보여주었지! 정말 그 친구가 꿈도 못 펴보고 그리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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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에게는 절대 금할 게 몇 있다. 그 중 하나가피부병 약복용이다. 만일 임산부가 실수로 피부병 약을 먹었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낙태수술을 받아야 하는 불행을 겪는다.

우리는 자식을 살붙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살갗병을 다루는 피부병 약이 뱃속의 아기한테 해악이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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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8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9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로 변 산이 깎여나갔다. 그 바람에 숲과 나무가 사라지자, 우천 시 산이 허물어지는 걸 예방하기 위함인지 배수로 공사가 시작됐다. 순간 치과에서 하는 임플랜트가 떠올랐다.

임플랜트(implant)는 소실된 생물학적 조직을 대체하거나 조직으로서 동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의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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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몇 번 죽을 뻔했다. 그 중 한 번이 영월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인 1990년 겨울이다. 88올림픽 해에 운전면허를 따자 바로 차까지 구입했으니 차 운전 2년째 되던 때다. 돌풍처럼 휘몰아친 마이카 붐 탓이다. 돌이켜보면 초보 운전이라 조심 운전을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1990년 겨울 그 날 모처럼 가족들을 차에 다 태우고 청령포 쪽으로 운전해 갔다. 춥던 날씨가 이틀간의 화창한 햇살에 많이 누그러진 듯싶었다. 읍내 중심도로로 차를 몰고 나설 때만 해도 도로에 있던 얼음이 모두 녹아 있어서 방심할 만도 했다.

청령포로 가는 도로도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눈앞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가느라 편하게 속력을 냈는데 아뿔싸! 고개 너머 도로는 음지였던 탓에 얼음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던 것이다. 차 사고는 순간이다. 차바퀴들이 접지력을 잃으면서 차가 얼음판 도로를 크게 돌기 시작했다. 빙빙 도는 주변 풍경에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갔다. 그 때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솔직히, 그 비명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 시끄러워.’

다행히 도로 난간의 나지막한 시멘트 구조물에 차바퀴가 걸리면서 벼랑으로 추락하는 참사를 모면했다. 차는 망가졌지만 가족들은 무사했다. 천운이었다.

 

몇 년 후 춘천의 모 학교로 전근 와서다. 어느 날 동료교사가 여선생들 앞에서 자신의 차 사고 순간을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내용이었다.

차가 빗길에 전복되는 순간 내 눈앞에 가족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더군요.”

모성애가 본능인 여선생들을 감동시킬 의도로 하는 얘기 같았다. 즉각 내가 한 마디 했다.

아니, 나는 그런 순간에 가족들 얼굴이 떠오르기는커녕 옆에 앉은 아내가 지르는 외마디 비명이 시끄럽다는 생각만 들던데.”

여선생들이 내 말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글쎄 그 웃음들이 내 말에 동감한 건지, 그냥 재미나 웃은 건지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나는 결코 꾸며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 내가 가족 사랑이 남보다 못한 걸까?

절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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