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2월말이다. 동해안의 소읍에 있는 양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 발령받은 때가.

새 학기는 32일부터 시작되니 사나흘 양양읍 사거리에 접한 모 여관에서 하릴없이 머물러야 했다. 그 여관에서 첫날 밤 잠잘 때다. 얼마나 강풍이 밤새 부는지 나는 놀라서 잠 한 번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밤새, 양동이 세숫대야 깡통 화분 등등이 강풍에 날아가거나 뭐에 부딪쳐 깨지거나 하는 소리들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밖으로 나와서 그런 광경을 목격한 건 아니다. 하지만 밤새 그런 소리들을 들으면 누구라도 그 정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양양에서의 첫날을 그리 보낸 후 나중에 알았다. 그 강풍이 양강지풍이라고. 낯선 한자성어에 어리둥절한 내게 동료교사가 설명해 줬다.

예로부터 봄철마다 태백산맥을 넘어 부는, 양양과 강릉 사이로 부는 바람이 유명하다니까! 그래서 양강지풍 하면 알아주지.”

 

이번 4월초에 간성, 속초 지역을 강타해 주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바람을 양간지풍이라 하여 나는 처음에는양강지풍을 잘못 말하는 게 아닌가우려했다. 설명도 따랐다. ‘양간지풍은 봄철마다 태백산맥을 넘어 부는, 양양과 간성 지방 사이로 부는 바람이란다.

양간지풍이라 하거나 양강지풍이라 하거나 어쨌든 우리 마음을 속상하게 만든 자연현상이다.

지금 양양에는 40여 년 전 제자들이 지역의 원로가 돼 살고 있다. 내 젊은 날 사제지간의 연을 맺어 작년만 해도 양양중고총동창 모임에 나를 초대하기도 했다.

태백산맥을 넘어 부는 건 못된 강풍만 있는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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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를 처음 본 건 1973년이었다.

모두들 잠 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혼자 잠 못 이루나

하면서 시작되는그건 너노래가 전국을 강타하던 그 해 봄, 흑백 TV에서 처음 본 것이다.

이장희 그는 등장부터 남달랐다. 대개의 가수들이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고 TV화면에 나오는 데 비해 그는 오토바이를 타다 막 내린 차림 그대로였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콧수염까지 길렀으니.

 

그건 너가 전국을 강타하면서 뒤늦게 나는 그의 뛰어난 다른 노래들까지 알게 되었다. ‘그 애와 나랑은’‘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촛불을 켜세요.’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등등.

어떻게 거친 오토바이 사내가 그런 감성 풍부한 노래들을 만들고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노래 부르기도 하는지, 참 불가사의했다.

 

그런 그가 2019330, 내가 사는 춘천의 이웃동네 가평에 왔다.

가평뮤직빌리지 음악역에서이장희 콘서트, 나 그대에게콘서트가 열린 것이다.

우리 며느리가 그 귀한 표를 두 장이나 마련해 줘, 나는 아내랑 오랜만에 부부동반으로 이장희를 보았다. 아니 다시 고쳐 말하겠다.

나는 아내랑 오랜만에 부부동반으로1970년대 감성을 만났다.”

 

이제는 오토바이 대신 기타를 곁에 둔 변한 모습이지만 그 마초적인 감성은 여전했다. 해거름의 노년에도 지칠 줄 모르는 이장희 감성.

이 짧은 단상만으로는 그의 감성을 다 표현 못한다. 그렇다고 마냥 표현하자니 끝이 없을 듯싶다.

어제 그의 콘서트를 보고 뮤직 빌리지를 나왔을 때 가평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난 이제도 그 말밖에 못하겠다. 벅찬 감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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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2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심이병욱 2019-04-02 11:31   좋아요 0 | URL
가수 이장희는 천재입니다. 노랫말도 짓고 곡도 쓰고. 그리고 그 노래도 잘 부르다니, 정말 기가 막힙니다.
어언 해거름 나이에 다다른 그를 보며 인생의 짧음을 한탄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 자신도 만만치 않게 늙었으니 나 참!-----.
 

 

7년 전이다. 무심이 척박한 골짜기 땅 800평을 장만했다는 사실을 모임자리에서 털어놓자, 지인(知人) 봉명산인이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그 땅의 풍수지리를 봐 드릴까요?”

약속한 날에 현장에 나타난 봉명산인. 전문 지관(地官)처럼 둥근 풍수 지남침까지 지녀서 무심은 내심 놀랐다. 하긴 봉명산인은 세상사 모르는 게 없는 도사 같은 사람이다.

그는 풍수 지남침을 들고서 골짜기 땅의 방위와 형세를 유심히 살피더니 이튿날 A4용지 두 장 분량의 글을 써 이메일로 보냈다. 이를 테면 무심이 모처럼 장만한 땅에 대한풍수 보고서이다. 전문은 나중에 기회가 될 때 블로그에 올릴 예정이며 그 중 일부만 발췌해서 여기 옮긴다.

 

(상략)

2. 밭의 위치가 대룡산 구봉산의 지기와 오봉산의 원기를 모두 받아 대와 기운이 적당히 세며, 땅의 모양새와 구릉이 마치 공작이 알을 품어 부화시킨 후 푸드득 날아간 이른바 '공작포란형'이라 포근하게 안겨있는 풍수라서 사람의 성정을 또한 부드럽고 안돈시키게 하는 지풍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3. 일조(햇볕)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산세가 아주 높지 않아 동남향의 해를 크게 가리지 않고 서북 방향으로 부채꼴 모양 툭 터져 있어 서남향 쪽 일조를 대부분 끌어들이면서 지는 해까지 볼 수 있으므로 아침 8~석양까지 충분히 하늘 기운을 담아낼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만, 앞쪽이 지세의 기운(地氣)을 함부로 방출하기 쉬운 부채살모양이라 안팎으로 탈이 나기 쉬운 형상이니 입구의 적당한 곳에 비보(備補) 풍수 차원에서 밭에서 나오는 돌을 모아 돌탑을 쌓거나 솟대나 장승 모양이라도 두세 개 해두면 보기도 좋고 그런 문제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하략)

 

 

요약한다면 장만한 땅이 길지(吉地)가 분명한데 다만 복이 밖으로 새나갈 우려가 있으므로 한 군데 비보(裨補)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심은 얼마 후 골짜기 땅에 중장비를 동원해 밭으로 만들 때 부수적으로 나온 돌들을 밭 입구에 따로 모아놓음으로써 춘심산촌 농장의 비보 문제를 해결했다.  

비보 풍수.

풍수지리 상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준다는 개념이다. 이런 비보가 잘 이뤄진 곳 중 하나가 양양의 조산(造山) 마을이다. 낙산 옆 조산리. 그 지역 땅의 기운이 좋은데 다만 바다 쪽으로 새나갈 우려가 있으므로, 마을 주민들이 협동으로 작은 산 하나를 만들어 놓아 그 우려를 불식시켰단다.

 

춘심산촌의 비보로써 농장 입구에 돌무더기가 만들어진 지 어언 7년이다. 돌무더기가 높지 않지만 비보는 상징적인 활동이라 그 정도로 충분하다.

비보가 이뤄지자 묘목도 심지 않았는데 나무 하나가 그 옆으로 자리잡더니 잘 자라고 있다. 그뿐 아니다.  농장에 작은 컨테이너 창고를 들일 일이 생겨, 처음에는 농막 옆에 두려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비보 돌무더기 옆에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가로등까지 비보 가까이에 세워지게 돼 돌무더기 일대는 저절로 막강한 기세를 띤다.

여하튼 비보의 중심은 돌무더기다. 돌무더기 자체에도 놀라운 일이 생겨 여기 소개한다.

어느 날 춘심산촌 이웃에서 농사짓는 분이 무심한테 놀란 얼굴로 말했다.

글쎄, 어제 길이가 두 발은 될 무서운 독사 한 마리가 저 돌무더기 속으로 유유히 들어가더라니까! 훤한 낮에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놀랐겠소!”

그가 말한 우리, 그의 농막에 자주 놀러오는 분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목격한 객관적 사실임을 강조한 거다.

무심은 그 얘기를 듣던 순간 그 무서운 독사가 지킴이임을 알아챘다. 지킴이까지 자리 잡은 춘심산촌 입구의 비보 돌무더기. 밭의 복됨이 한 치도 새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후로 무심은 그 돌무더기 옆을 지나갈 때마다 각별히 조심한다. 특히 여름에 잡초가 무성해질 때 발아래를 조심한다. 자칫 그 독사를 밟았다가는 큰일 나기 때문이다. 어디, 지킴이 독사가 밭주인을 알아보랴. 그저, 서로가 조심하면서 일대의 평화를 유지하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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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경이면 사실 그리 머지않은 시기다. 100년이 채 안 된다. 그 즈음 춘천에는 호랑이가 살았나 보다. 김유정의 산골 나그네’란 단편에호랑이가 두 번이나 언급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지문에서, 또 한 번은 대사에서다.

먼저 지문을 본다.

 

"요새 날씨가 차지니까 늑대, 호랑이가 차차 마을로 찾아 내린다.”

 

산골 나그네의 계절적 배경이 가을이다. 겨울이 가까워지니 산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이 굴속에서 움츠려 지내는 시간이 늘기 마련이다. 겨울잠을 준비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때 그런 작은 짐승들을 잡아먹고 살던 늑대나 호랑이가 하는 수 없이 가축들이 있는 사람의 마을(훗날 김유정 문학촌이 들어선 마을?)로 내려오는 상황을 위의 지문이 선하게 보여줬다. 

이번에는 대사에 등장하는 호랑이를 본다

 

  괜시리 산신령이 노하면 눈깔망나니 내려보낸다.”

 

호랑이를 눈깔망나니로 표현한 것이다.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원래 망나니란 조선시대에 사형수의 목을 베는 사형 집행수. 사형 집행수처럼 무서운 존재 호랑이를눈깔망나니라 부른 것이다.

상상해 보자. 컴컴한 밤에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의 첫 인상은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은 눈동자가 전부가 아니었을까? 어두운 밤에 이웃 마을로 마실가던 사람이 그런 불길과 맞닥뜨렸다면 이미 혼이 반 이상 나갔다. 그 결말은 상상에 맡긴다.

뛰어난 대유법(代喩法)이다.

 

밤이면 늑대나 호랑이가 출몰하던 100년이 채 안 되는 춘천의 한 풍경을 그려본다. 무섭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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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동해곰치라는 식당 간판이 좋다. 절대 나는 이 식당 주인과 아무런 관련도 친분도 없다.

 

내 기억으로는 동해곰치라는 간판을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다. 왜 그럴까, 이제 곰곰이 헤아려본다.

첫째. 우선동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좋다. ‘동해는 우리나라 바다다. 우리나라 바다에 남해, 서해도 있으나 나는 동해가 이미지 상으로는 아무래도 제일 낫지 않나 싶다. 해가 밝아오는 동쪽에 있는 바다라는 점에서 남해나 서해보다 귀하면서 친숙한 느낌을 주는 때문이 아닐까. 하물며 애국가의 첫 구절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인 데에서는 더 말할 게 있으랴.

둘째. ‘곰치라는 단어의 이미지도 좋다. ‘곰치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이렇게 풀이했다.

흐물흐물한 살집과 둔한 생김새 때문에 물텀벙, 물곰이라고 불린다. 몸은 길며 탕으로 끓이면 담백하고 깔끔한 맛을 내서 음주 후 속 풀이에 좋다.’

과연곰치는 술꾼들이 술 마신 다음 날 해장하러 찾을 만했다.

더 쪼개서 살핀다.‘곰치는 이렇게 풀이된다. ‘일정한 모양이나 형태, 속성 따위를 나타내는 일부 명사 혹은 서술어의 어간 뒤에 붙어, 그러한 모양이나 형태, 속성 따위를 띠는 물고기임을 나타내는 말.’

따라서 곰치는 곰 닮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풀이해도 될 듯싶다.

우리에게 얼마나 친숙한 단어인가. 우리의 단군신화에서부터 곰은 등장한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그 부분을 소개한다.

여자의 몸이 된 곰(웅녀)은 혼인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이에 환웅이 잠시 인간 모습으로 바꾸어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 ‘은 우리 민족의 어머니 같은 고귀한 존재이다. 고귀하지만 그렇다고 거리감이 있지는 않다. 그 예로써 이란 말 앞에 미련한이란 수식이 잘 붙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눈치 빠른 사람보다는 미련한 사람에 더 정감이 가지 않나?

그런 곰을 연상시키는 물고기가 곰치인 거다.

 

셋째. ‘동해곰치는 발음하기 좋다. 쪼개서 살핀다. 우선 각 글자에 쓰인 모음들의 배열이다. ‘= = ㅏ ㅣ = = 임을 봤을 때 동해곰치란 발음은 ,모음의 반복임을 깨닫게 된다. 같은 모음의 반복은 리듬을 낳는다. 비록 네 글자에 불과한 식당 이름이지만 발음했을 때 친숙하게 입에 붙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 글자에서, ‘이라는 격음이 주는 청각인상의 강조를 빠트릴 수 없다. 귓전에 남은 격음는 기억으로 이어졌다.

 

넷째. ‘동해곰치라 할 때 그 시각적 이미지가 아주 좋다. 우리에게 동해는 늘 푸르고 맑은 바다이며 곰치또한 얕은 하천이 아닌 깊은 바다에서나 잡는 물고기이다. 두 단어 모두 바다 그 자체이거나, 바다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전 날 술을 마셔 쓰린 속을 동해곰치가 바다처럼 시원하게 풀어줄 거란 희망을 가질 만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동해곰치식당 사장과 아무런 친분도 관계도 없다. 그저 간판 이름이 좋을 뿐이다. 60년대 대중가요에 노란샤츠 입은 사나이가 있다. 그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맞다. 곰치는 결코 잘난 물고기는 아니지만 그 씩씩한 생김생김이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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