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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었다. 200434일이다. 춘천에 때늦은 폭설이 내렸다. 그 날 일을 당시 일기에서 찾아냈다.  

‘태원이한테 전화해서 저녁 630분에 후평동 투다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6시가 넘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최종걸이가 강촌에 있는 작업실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우리 집 앞에 차를 세우기로 한 약속을 지켰다. 그의 차에 동승해 후평동 향군회관 동네로 갔다. 차를 동네 뒷골목에 주차시켜 놓고 투다리에 들어가 태원이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셋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2차로, 부안시장 부근의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생태찌개를 안주로 술을 더 마셨다. 술자리를 끝내고 헤어졌는데 초저녁부터 시작된 눈이 어느 새 폭설로 변해 있었다.(하략)

최종걸은 조각가다. 1969년 예비고사가 끝난 뒤 모여서 소주 파티를 벌일 때 함께했던 미술반 친구다. 종걸이는 대학에 강의 나가는 신분이고 태원이는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처지고 나는 막 사흘 전에 명퇴한 입장. 오랜 인연의 미술반 친구들과 부안시장의 막걸리집 앞에서 헤어진 뒤 애막골 고개 너머로 귀가하려할 때 그 엄청난 폭설. 평소라면 껌껌했을 밤하늘이 눈발로 희뿌옇게 보일 정도였다.

후평동이 춘천에서 지대가 낮은 ‘뒤뚜루임’을 깨달았다. 가파른 애막골 고개를 피해 8호 광장 쪽의 덜 가파른 고개로 가는 귀갓길을 생각해 봤지만 그만큼 거리(距離)가 마냥 길어지는 데 따른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면 두 고개를 그만 두고 강변도로로 가는 귀가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봉의산의 그늘진 뒤편인 데다가 소양강에 밀접한 도로라 빙판길로 변했을지 몰랐다. 결국 처음 생각대로 가파른 애막골 고개 쪽으로  귀가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내리는 폭설은 습설(濕雪)이었다. 내 머리고 상의고 이내 눈에 젖어갔다. 천운처럼 그 방향으로 가는 빈 택시 하나를 잡았다. 차 문을 후닥 열고 타며 말했다.

“남춘천역 부근 동네까지 갑시다.

운전기사가 운전대를 잡고서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이거 참! 영업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참이었는데.

이럴 때 내가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손수건으로 눈에 젖은 내 몰골을 훔치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길바닥에 얼어붙는 눈은 아니니까, 가죠. 저 고개만 넘으면 될 것 같은데요. 나오는 요금보다 더 드리겠습니다.

“요금이 문제가 아니라… 좋습니다. 다만, 가다가 길이 더 안 좋으면 손님이 중간에 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모습을 기사가 룸미러로 보았다. 출발했다. 신호등이 점멸등으로 바뀐 채 위에 얹히는 눈발로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어느 곳에선가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시내버스와 자가용차가 접촉사고를 낸 채 도로변에 있었다. 버스에 탔던 손님들이 다시 내리면서 흰 눈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들로 우왕좌왕했다. 인공폭포 부근 사거리를 지나 애막골 고개 밑에 다다르자, 바퀴가 눈길에 묻혀 헛도는 차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내가 탄 택시가 아직은 별 일 없으나 과연 저 가파른 고개를 올라갈 수나 있을지.

이제 돌이켜보면 폭설 내리던 200434일 밤의 막막함이 내 명퇴 후 방황의 암시 같았다.


 

*알립니다. 지난 20167월에 첫 번째 소설집으로 ‘숨죽이는 갈대밭’을 발간한 바 있습니다. 올해 말경에 두 번째 소설집 ‘K의 고개(가칭)’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강원문화재단의 전문예술창작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일입니다. 기한이 두 달여 남았습니다. 그에 따라 당분간 관련 원고 정리 차 ‘친구 전태원 화백’ 수필 연재를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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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세상 좋아졌다.

나는 아직 서현종 화백을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 ‘동네’를 보고 감동 받았다. 작품을 화실에서 본 게 아니다. sns를 통해서, 사진을 통해서 본 것이다. 그림을 보려면 그 그림이 걸린 곳에 가야 할 텐데 이렇듯 sns를 통한 영상기술로 볼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러니‘세상 좋아졌다’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게 아닌가.

서현종 화백을 알게 되기는 내 블로그에‘친구 전태원 화백’수필을 연재하면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사연을 따로 적어 블로그에 올릴 것이다.

 

본론을 말한다. 나는‘동네’그림 사진에 감동 받았다. 까닭이 있다.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1960년대의 내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춘기였던 그 시절 나는 춘천의 어느 달동네에서 살았다. 집 주인의 아들로 산 게 아니다. 세를 든 가족의 큰아들로 산 것이다. 어린 나이였고 가족을 부양할 의무도 없었지만 참, 사는 게 힘들었다.

나는 달동네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도시계획과 전혀 상관없이 생겨난 동네.

반듯하게 나지 않은 골목, 녹슨 양철지붕이나 함석지붕 집들, 외부로 드러나 있는 변소들(‘화장실’이 아니라 ‘변소’다.), 낡은 간판의 구멍가게. 이런 것들의 조합이 달동네다.

 

이제 서화백의‘동네’그림에 대한 감상을 말하고자 한다. 사실 나는 그림에 문외한이다. 하지만 문외한이라서 감상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동네’그림에서 내 눈길을 첫 번째로 끄는 것은 밤하늘 왼편에 뜬‘달’과 동네에서 전등불을 켠‘집들’과의 연관성이다. 양쪽 다 노란색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지자 하늘의‘달’과 사람 사는 동네의 ‘집들’이 같은 노란색으로 접속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 결과 차갑게 느껴져야 할 달빛마저 따스하게 여겨졌다.

그 다음이‘달’과 불을 켠‘집들’과의 배치다. 아무래도 달이 상대적으로 커서 그림의 무게 균형이 왼쪽으로 기울 수 있었는데… 동네 아래 쪽 구멍가게의 불을 크게 그려 넣고, 살며시 그 오른쪽에 가로등 불까지 첨가함으로써 무게 균형의 안정을 취했다.

 

나는 삭막한 비교도 해 보았다. ‘동네’ 그림을 수직으로 반으로 나눠본 뒤 오른쪽과 왼쪽의 ‘노란빛’의 양()들을 비교한 것이다. 놀랍게도 양 쪽의 노란빛들은 그 양이 똑같았다.  무질서하게 들어선 집들의‘동네’ 그림이 의외로 구도상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밤을 표현하는 화가의 남다른 솜씨다. 밤하늘도 그렇고 동네도 그렇고 무채색 조(調)로 일관했으되 차이를 두었다. 밤하늘은 무거운 잿빛이지만 사람 사는 동네는 그보다는 밝은 잿빛인 것이다. 잿빛으로 일관한 동네의 집들이라 자칫했다가는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에 빠질 수 있는데 화가는 몇 집에 노란 불들을 밝히도록 배려함으로써 그런 부정적 분위기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우리가 그림 속 동네를 잘 살피면 두드러진 불빛들 외에 아주 조그만 불빛들도 숨바꼭질하듯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얼핏 보면 구멍가게와‘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기와집’집 두 채만 불을 켠 듯싶지만 잘 살피면 그 외에 두 집이 더 있는 것이다. 그런 집들의 숨바꼭질에 호응하듯 전봇대의 가로등도 오른쪽 가로등 말고 왼쪽의 것으로 흐릿하게 밝혀져 있다. 자그마하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화가의 잔정이 엿보인다.        

서 화백은 본래 디자인 전공이었다고 얘기 들었다. 그래서일까 ‘동네’ 그림은 직선들이 많다. 하지만 자로 잰 듯 그려진 직선이 아닌 맨손으로 그린 직선들이라 그 느낌은 결코 삭막치 않다. 가난한 동네와 달은 머지않고 가까운 거리에 있다. 비록 궁핍하게 살지만 마음만은 하늘의 달을 매만질 듯 여유 있게 산다는 뜻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11월 하순의 밤 10시경 달동네 풍경’이라고.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고, 한결같이 문이나 창들을 닫고 있으며, 전등불을 켜고 있는 집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데 그 근거를 둔다.  

 

우리 춘천에서 이제는 이런 모습의 동네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렇다. 그림으로라도 부지런히 남겨야 한다.

서현종 화백의 ‘동네’그림 한 점. 가난하지만 따듯한 마음을 잊지 않는 민초들의 모습이 우회적으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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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는 일’과 ‘뱃속(창자)을 비우는 일’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답 대신 당장 이런 반발이 나올 듯싶다.

“그게 말이 되는 비교입니까? 전자는 정신적인 문제고 후자는 육체적인 문제인데 차원이 다른 것들을 놓고 어느 게 더 어렵냐고 묻다니 말입니다.  

어쨌든 나는 모처럼의 물음을 물리고 싶지 않다. 이런 내게 2차 반발이 나올 듯싶다.

“아니 그럼 당신은 어느 것이 더 어렵습니까?

내 경험에 비춰 답하겠다.

“둘 다 어렵습니다.

 

사실 내가 에둘러 하는 말의 뜻은 ‘뱃속을 비우는 일도 마음 비우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는 것이다. 지상에 수많은 다이어트 방법들이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한 위 절제수술까지 제시되는 것만 봐도 우리 몸의 뱃속 하나를 비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이어트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어떤 의사 분이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다이어트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일단 살이 찌면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다 하거든요.

이제 내 결론을 말하겠다. ‘육체적인 문제는 정신적 문제에 못지않다.

 

괜히 서두가 길었다.

나는 올해 춘심산촌에서 농사를 짓다가 두 번 벌에 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벌에 한 번 쏘이기만 해도 목숨이 경각에 이르는 특이체질의 분들이 있다는데 나는 다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그 점 하나만은 잘 태어났다.

어쨌든 나는 벌에 쏘인 순간 머리에 짧은 벼락을 맞은 듯했다. 그 강렬하고 순간적인 통증이란! 수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 같은 인위적인 발전소에서 공급하는 전기가 아니라, 순수한 자연의 발전소(?)에서 공급하는 전기에 순간적으로 감전된 거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강렬한 통증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감히 말하건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젊었을 때에는 쾌감의 순간들이 수시로 존재했다. 하지만 늙어서는 그런 순간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데 뒤늦게 농사짓다가 벌에 쏘인 순간 통증이면서도 아주 강렬한 쾌감을 경험한 듯싶었다.

이런 내게 누가 물을 수 있다.

“그러시다면 자주 벌에 쏘이는 게 어떻습니까? 구체적으로는 아예 땅벌 벌집 가까이서 지내는 게 어떻냐는 얘기입니다.

나는 영어로 답한다.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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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6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심이병욱 2018-10-06 18:02   좋아요 1 | URL
저는 그냥 견딥니다. ㅎㅎ
 

 

희미한 불빛아래/마주앉은 당신은/언젠가 어디선가/본 듯한 얼굴인데

고향을 물어보고/이름을 물어봐도/잃어버린 이야긴가/대답하지 않네요

바라보는 눈길이/젖어있구나/너도나도 모르게/흘러간 세월아

어디서 무엇을 하며/어떻게 살았는지/물어도 대답 없이/고개 숙인 옥경이 

 

무명가수였던 태진아를 우리나라 톱 가수로 만들어준 노래가 바로 위의 노래 옥경이.

경쾌한 리듬으로 돼 있지만 사실 내용은 슬프다. 슬픈 기미는 첫 부분부터 보인다. ‘희미한 불빛아래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밝지 않은 희미한 불빛 아래라는 공간 설정은 밤의 유흥업소 불빛을 떠올리게 한다.

 

이 노래의 화자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회사를 다니며 사는 3,40대 사내라 보면 무난하다. 사내는 어느 날, 봉급쟁이의 고달픔을 잠시라도 잊고자 퇴근 후 맥주나 양주를 파는 술집에 갔다. 희미한 조명불빛 아래 손님을 대우하겠다며 여 종업원이 마주 앉았는데 분명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싶은 얼굴이다. 그녀에게 고향을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봤지만 잃어버린 이야기인 듯 대답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녀의 잃어버린 이야기를 짐작해본다.

그녀는, 어릴 적 시골고향에서 함께 자란 초등학교 동창이다. 자식을 일찍부터 도시로 유학을 보낼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내의 집안형편과 달리, 그녀의 집안형편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 안 돼,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영등포의 옷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얼마 안 되는 봉급이지만 시골에 있는 동생들 학비도 대고 그랬는데…… 열악한 환경의 근무라 몸이 병들면서 결국 사표를 내고 공장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꼬인 그녀의 도시 생활은 이제 유흥업소에서 손님을 맞아, 마주앉아 술을 따르는 종업원 신세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남자 동창이 손님으로 온 것이다. 남자 동창사내가 분명 어디서 본 듯하다고 고향을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보지만 아무 답을 할 수 없이 억장이 무너지는 그녀. 결국은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구나란 표현이 정말 문학적이다. 바라본다는 시각적인 표현과 젖어 있다는 촉각적인 표현이 어우러진 공감각적 표현의 절구(絶句)가 아닌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사라질 운명에 처한 노래라고 유행가라 일컫지만, 나는 옥경이란 유행가가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면 바로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구나란 기막힌 표현 덕분일 거라 믿는다.

 

사내는 마침내 너도 나도 모르게 흘러간 세월아라고 속으로 절규한다. 그녀보다는 나은 삶이지만 그러나 처음 서울로 올라와 유학생활을 시작할 때의 희망찬 포부를 떠올린다면 초라한 봉급쟁이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다. 그래서 가수 태진아는 이 부분에서 절규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소설의 구성단계로 친다면 절정에 속한다.

 

옥경이 노래에는 대한민국 민초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도시화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전통적인 농촌이 붕괴하는 데 따른, 가슴 아픈 모습들이 역력하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슬픈 리듬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경쾌한 리듬으로 이끎으로써 옥경이 노래는 대중들에게 부담 없이 전달돼 절묘한 성공을 이루었다.

경쾌한 리듬의 슬픈 사연’. 이것이 옥경이 노래에 대한 내 정의(定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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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인네가 춘심산촌에  또 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당뇨악화로 거동이 더 편치 않게 된 노인네가 평평치 못한 산촌 길에서 발걸음을 떼다가 넘어지는 사고라도 날까 걱정돼, 침묵함으로써 짐짓 모른 체했다.

그런데 오늘 노인네가, 내가 다른 일로 경황이 없는 새 춘심산촌을 다녀갔다는 게 아닌가. 아내가 나서서 차에 노인네를 태우고 20여리 되는 그곳까지 운전하는 노고를 아끼지 않은 모양이었다. 외출했다 밤늦게 귀가한 내게 아내가 말했다.

“꽃들을 보며 몹시 좋아하시더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랬다가는 넘어져서 골절사고가 날지도 몰라, 그냥 제자리에서 화초들에 물이나 주라고 고무호스를 건넸지. 그랬더니 시키는 대로 호스로 물을 주면서 내게 지난번처럼 또 그러대.‘네가 내 소원을 이뤘구나!’”

노인네는 본래 꽃들을 돌보는 게 낙이었다. 병석에 눕게 되면서 그 소박한 낙조차 제약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수많은 화초들을 다시 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을‘네가 내 소원을 이뤘구나!

노인네는 아내의 친정어머니, 내게는 장모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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