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80일 앞으로 다가왔다. 어찌보면 대선보다 더 큰 한판승부가 바로 총선인 바, 지금부터 하는 일은 모두 총선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맞을 거다. 노무현이 4월 1일 만우절날 고속전철을 개통하겠다고 하는 거나, 한창 수사중인 대통령 측근비리를 가지고 한나라당에서 청문회를 하겠다는 거나, 총선이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김대중이 대통령을 할 때 총선 사흘전 남북정상회담을 발표했다가 역풍을 받아 참패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을 겨냥해 한탕 하려는 버릇은 여전한 것 같다.

1) 이만기
누구나 다 아는 대선후보에 비해, 총선후보는 대개 알려져 있지 않다. 정치신인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각 당에서는 지명도가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다. 박원순, 최열같은 시민운동가는 물론 이계진 같은 아나운서도 각 당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이만기. 천하장사를 열번이나 한 그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경남에서 나온단다. 그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씨름선수 출신이어서가 아니다. 난 씨름선수 출신도 얼마든지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믿으며, 특히 몸싸움을 많이 해야하는 우리 국회의 특성상 이만기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와 원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4년전을 생각해 보자. 이만기는 그때도 경남에 공천신청을 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말이다. 막판에 김호일한테 밀려 공천이 취소되자 "업어치기를 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그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공천을 낸다?

열린당과 한나라당은, 물론 별 차이가 없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념적으로 제법 차이가 있다. 예컨대 국가보안법의 존페여부나 햇볕정책에 관한 관점 등은 두 당이 다르다. 그렇다면, 두 당에 모두 공천 신청을 한 이만기의 소신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최소한의 소신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당 저당을 왔다갔다 하는 철새도 수두룩하지만, 이제 막 정치를 시작하는 신인이 그래서야 되겠는가? 열린당도 그렇다. 힘들게 민주당을 깨고 나온 이유가 '새로운 정치'라면, 그에 걸맞는 새로운 인물을 공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소속인 김혁규 지사를 영입하고, 강금실의 출마를 목놓아 바라고, 한나라당에서 공천 탈락한 이만기를 끌어들이는 걸 보면 당을 왜 따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2) 황수관
난 그가 싫지도 좋지도 않다.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가 나오는 TV프로를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별로 웃기지도 않는 그가 왜 그리 TV에 자주 나오는지 이해가 안간다.

그런 그가 4년 전 내 터전인 마포을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왔다. 마포을은 사실 몇십년 전부터 전통적인 야당지역이었고, 그 유명한 신성일마저 공화당 공천을 받았다는 이유로 낙선시킨 곳이다. 그 전통은 봉두완이 민정당 후보로 전국 최다득표를 하면서 깨어졌지만, 그래도 난 나름대로 마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노승환이란 사람이 마포의 터줏대감이다). 그런데... 황수관이 구야당을 계승한 민주당 후보로 나왔다고? 그땐 내가 다른 곳에 살고 있어서 투표를 못했지만, 거기 계속 살았다면 아마도 기권했을게다 (당시 민노당은 후보를 안냈다). 정치에 대한 아무 철학도, 소신도 없는 사람을 단지 TV에 나왔다는 이유로 마포에 공천한 건, 적어도 내게는 마포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졌다.

박주천에 밀려 낙선했던 그는 이번에 한나라당에 비례대표 신청을 냈단다. 정치에 관한 철학이 없다는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었다. 그래서 씁쓸하다.

3) 누굴 찍지?
박주천은 마포에서 3선을 했다. 국회의원 대부분이 그렇지만, 박주천도 집이 부자다. 그냥 부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지역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그가 3선을 한 것도 그 점을 높이 산 것이리라. 하지만 난 국회의원을 지역발전을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국회의원이 자기 지역구만 챙기려고 예산을 끌어간다면 이 나라는 도대체 누가 지킬까? 하지만 조순형의 지역구에서조차 "지역에는 신경안쓴다"고 욕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자기 지역을 따지는 유권자들은 아직도 많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해도 난 박주천이 싫다. 그가 한나라당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기업을 잘 봐주겠다며 돈을 받아먹은 게 탄로가 나, 감옥에 있어서도 아니다. 별의 별 국회의원이 있긴 하지만,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국회의원을 하기에는 자질이 너무 떨어진다.

김현철의 주치의였던 박경식이 청문회에 나왔을 때, 그의 행태는 가관이었다. 박경식에게 쩔쩔 매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이렇게 땀까지 흘리는데 잘 좀 답변해 달라"는 소리나 하고... 박경식이 그랬다. "그러는 의원님은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냐"고. 그 얘기를 듣고도 박주천은 찍소리 한번 하지 못했다. 그때 난 체육사에서 테니스 라켓의 줄을 매고 있었는데, 줄을 매던 사람이 이랬다. "으이그, 저거 어느 동네 출신이야?"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걸 반사적으로 답했다. "우리 동네요!" 그 후부터 그 아저씨는 날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 듯하다.

감옥에 있긴 해도 그는 옥중출마를 한단다. 군사독재 시절 옥중출마가 아주 멋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이 그런 시절인가? 모르긴 해도, 한나라당 역시 세간의 화두인 물갈이를 외면할 수 없을테고, 비리로 감옥에 간 그를 공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나올까? 모르겠다. 우리집에 걸려온 ARS 전화에서 후보를 쭉 불러 줬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물론 앞으로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누굴 찍을지 아무 생각이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당보다는 인물을 보고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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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4-01-27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만기같은 사람들이 국회우원을 하려고 할까요? 그러고보면, 우리는 국회우원들 항상 욕하지만 국회우원되면 그 권력이 정말 대단하겠죠. 욕 암만 먹어도, 비리 혐의로 교도소에 처박혀 있어도 뻔뻔하게 국회우원을 해먹으려는 걸 보면.. 그 우수운 국회우원이 정말 너무너무 괜찮은 권력의 자리인가봐요.
저도 열린우리당이 당선가능성이나 대중인기도에만 집착하는것 같아 무척이나 우려가 됩니다. 더군다나 개혁적인 마인드가 검증되지도 않은 한나라당 출신들까지도 가능하다는게 정말 이해되지 않습니다.
열린우리당 선대위쪽에서도 모르는바가 아닐텐데... 왜 이런거때문에 이미지 실추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정말로 지역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그 사람들을 띄울 수 있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는 개혁당에서 열린우리당 당원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저같이 당원이면서 아무것도 안하는 당원이 많은게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인데... 정치 욕만 하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니 정말 웃긴 일입니다. 뭘 하자니.. 뭘 해야하지 모르겠고, 그것마저도 "열린우리당이 다른 당과 다른 점이 뭐야? 뭘 할 수 있게 멍석이라도 좀 깔아줘야하는가아냐?"식으로 있답니다.

마태우스 2004-01-28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원이 되신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야말로 하는 일이 없는 거죠T.T
 

 

 

 

10만원권을 발행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10만원짜리 수표를 한번 쓰고 버리는 게 아깝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수표 발행비용이 연간 4천6백억원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수표의 특성상 낼 때 괜히 미안해해야하고, 심지어 수표를 안받는 곳도 있고, 뒤에다 이서를 일일이 해야 하는 것도 영 귀찮은 일이다. 10만원짜리 지폐의 평균수명이 4년으로 추측되는 데 반해 수표의 유통기간은 겨우 7.9일이란다. 미국에는 100달러 짜리가 있는데 우리는 1만원이 가장 고액이라니 이것도 웃기지 않는가? 그런데 10만원권을 발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는 뭘까? 인플레이션이 생겨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 그것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5만원권 지폐는 생각하지 않는 걸까? 500원짜리가 있고 1천원짜리가 있으며, 5천원짜리가 있고 1만원짜리가 있는 것처럼, 5만원권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10만원권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5만원권만 있으면 웬만큼 큰 거래도 현찰로 지불이 가능할텐데 말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의문을 말했더니 다들 "생각해 보겠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한다. 5만원권이 안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하여간 언제가 되었든 10만원권이 생기는 건 기정사실일 것 같아, 거기에 누구 얼굴을 실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까지의 등장인물을 보면 1천원이 이황, 5천원이 이이(맞아요?), 1만원은 세종대왕, 모두 조선시대 사람이고, 다들 남자다. 그러니 10만원권에는 기필코 여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그간 우리 사회가 워낙 남성중심이어서 여자 중에는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것. 기껏 생각나는 사람이 유관순 정도? 글쎄다. 만세 한번 불렀다고 지폐에 얼굴이 새겨진다는 건... 조금 더 생각해보면 춘향이도 있고 논개도 있지만, 춘향이는 시대착오적인 정절 이데올로기를 더 강화할 것이고, 논개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국가주의의 표상, 지금처럼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꼭 옛날 사람만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효리, 만만치 않은 안티 세력이 있긴 하지만, 그녀만큼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없지 않는가?

문제는 수명이 짧다는 것. 10만원짜리 수표가 8일도 안되는 것처럼, 이효리의 인기 역시 그리 오래갈 것 같진 않다. 20-30년 후에 "아빠, 이효리가 누구야?"라고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이효리, 아주 섹시한 스타였단다"라고 답하는 건 영 이상하지 않는가? 허난설헌은 어떨까? 얼마전 도전 골든벨을 보니 "조선에서 태어난 게 한이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지폐에 얼굴이 찍히기는 부족한 듯싶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런 걸 고민한담?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남자든 여자든 누굴 정한다 해도 만만치 않은 반대가 있을 것이라는 것. "그사람이 뭐 그리 대단하냐" "그사람이 세종대왕보다 열배 더 훌륭하다는 편견을 버려라" "그인간 친일파다" "팔삭둥이더라" 등등의 비난이 쏟아지겠지. 지폐의 인물을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천만 다행이다. 참, 호랑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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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의꿈 2004-01-2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리나라에도 여성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들이 많았겠죠-;.. 뭐. 옛날사람들이 남녀차별이 심했었다는 일은 다 알던 사실이니까 넘어가고, 이효리씨는.. 좀.... 연예인으로서 조금 인기있다고 지폐에 얼굴찍히는건-_-;(그리고 생각하기에 전국민의 사랑을 그렇게 열렬히 받고있다는 것도 아닌듯 싶고;)... 음,, 하여튼(-ㅁ-) 저도 여자고.. 우리나라 고액 지폐에 여자가 실리면 좋기는 하겠지만,, 요즘에는 광개토대왕님께서 상당히 인기가 좋으시고...저도 중국때문에 일단은 광개토대왕님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려고 생각중이었답니다;;...
10만원권 나오면 한번 만져나 봤으면 좋으련만...
 

생각해보니 그간 술일기를 전혀 쓰지 않았다. 일기를 쓰면서 술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술마시는 횟수는 좀 낮춰 보자는 취지였는데, 1월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해이해진 것 같다. 그간 마셨던 세번의 술자리를 몰아서 정리한다.

1월 22일:

장소: 큰집 (진짜로 크다)

종목: 더덕주, 맥주

양: 마시고 집에 간 게 오후 1시인데, 그때부터 뻗어 잤다.

차례를 지내러 사촌형의 집에 간 건 오랜만이다. 3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부터는 우리 집에서도 아버님을 위한 차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정을 세고 큰집은 구정을 세기로 했는지라, 올해부터 구정 때마다 큰집에 갈 생각이다.

내 사촌형 효진이형은 이런 사람이다.

[효진이형은 큰아버지의 아들이니 내게는 사촌이 된다. XXX였던 아버님과는 달리 큰아버지는 김제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그나마도 간암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 형제들이 별 어려움 없이 자란 반면, 큰어머니는 변두리를 전전하며 어렵게 자식들을 키우셨다. 효진이형은 너무도 화려한-형님의 기준으로 보면-우리집에 올 때마다 시골쥐, 서울쥐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귀부인의 자태를 갖춘 어머님에 비해, 큰어머님은 고생을 많이하신 흔적이 외모에서부터 드러난다.

극진한 정성으로 길러진 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시골에선 제법 공부를 잘했던 효진형은 재수 끝에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후 먹고 노느라 젊음을 탕진한 나와는 달리, 효진형은 회사에 다니며 모은 돈으로 조그만 아파트를 사 어머님을 모셨다. 난 어버이날이나 부모님의 생신 때 약간의 돈을 드리며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 반면, 효진형은 그 와중에도 여러번의 미담을 선보여 날 부끄럽게 했다.

그건 시작이었다. 회사를 나와 조그만 사업체를 차린 효진형은 사업의 번창과 더불어 나와의 격차-효도 면에서-벌려갔다. 어머님께 그럴듯한 아파트를 사드렸고, 나중에 한채를 더 사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이 아파트 월세로 생활비 하세요. 용돈 모자라면 얼마든지 드릴께요" 해외 여행을 보내드렸고, "고모들에게 한턱 쓰시라"면서 돈을 드렸다. 자신의 형에게 고급 승용차를 선물했다. 그 능력보다, 마음 씀씀이가 난 훨씬 부럽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걸 받으며 자랐던 난 왜 그러지 못할까. 아직도 난 "내 앞가림도 힘들어!"라며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어머님과 할머니를 모시고 식사대접을 한것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돈이 있다고 다 효진형처럼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잘 알기에,더더욱 부끄럽다. 더 부끄러운 건 집안을 일으킨 효진형이 나와 한살 차이라는 것...]

착한 효진형의 사업이 쭉 잘 되기를 빌어본다.

 

1월 24일

장소: 집구석

종목: 소주 한병, 산사춘 약간

집에서는 웬만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데, 그날은 술이 좀 마시고 싶어 어머니와 대작했다( 어머니는 포도주를 마셨다). 내 지도교수 뒷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셨는데, 어머님은 너무너무 즐거워하셨다.

이건 다른 얘긴데, 7년째 날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다. 물론 난 그녀에게 한번도 이성이란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다. 절세의 미인이 아니라서 그런 것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그녀가 중3 때라, 세월이 흘러 제법 여자의 모양새가 갖춰진 뒤에도 난 그녀를 여전히 중3 때의 모습으로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 누군가가 날 좋아한다는 건 생각처럼 즐거운 일은 아니다. 아니, 너무 마음이 아픈 일이다. 그렇게 포기를 종용해도 영 말을 듣지 않는 그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으니, 그 안에서 남자가 생기지 않을까?  그녀에게 그간 남자가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남자가 있건 없건, 그녀는 날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래,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어서 그런 걸꺼야. 올해는 그녀에게 꼭 남자가 생기기를, 그래서 내가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나 아버지 혹은 오빠로서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아, 이 얘기를 왜 했냐면, 그날 얘가 술사달라고 하기에 거듭 튕겼더니 삐졌는지 그냥 집에 내려갔고, 그래서 갑자기 내가 술생각이 나 집에서 술을 마신 거다.

1월 26일

장소: 천안

종목: 소주 7잔에 맥주 두병

다이어트를 열심히 한 결과 남들로부터 온갖 찬사를 받았다. "너무 날씬해졌다" "얼굴이 반쪽이다" 등등. 그 말을 들으니 왜 이렇게 배가 고파지는지. 긴장이 풀려서일까? 영화를 보고나서 고기집에 가서 열심히 먹어댔다. 물론 소주와 함께. 약간 미진한 것 같아 맥주를 마셨고, 덕분에 집에 가서 잘 잤다. 현재 26일까지 13번이면 이틀에 한번꼴, 그럭저럭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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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1-2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향후3년간 먹을 술 작년에 다 먹어서 앞으로는 조금 쉬려고 합니다.^^
 

 

 

 

<페이첵>을 봤다.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원작이 필립K딕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도 재미있게 봤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이기도 한 그사람. 물론 원작이 훌륭하다고 영화가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걸 절실히 깨닫게 해준 사람이 바로 배창호 감독이다. 어릴 적 TV에서 하명중이 만든 <최후의 증인>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재미있는 영화가 있는가 감탄을 했었는데, 몇년 전 김성종이 쓴 동명의 책을 영화화한 <흑수선>을 보고는 아무리 좋은 작품도 감독에 따라 형편없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던 거다. 난 그 영화를 대학 친구들과 봤는데, 그 영화가 보고 싶었던 난 이렇게 친구들을 꼬셨다. "원작이 워낙 훌륭해서, 누가 만들어도-하다못해 내가-재미있을 수밖에 없거든? 그거 보자"

영화가 끝난 후 난 너무도 미안해서 친구들에게 밥을 샀고, 그러고도 미진한 것같아 술까지 샀다. 꼭 <흑수선>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날 이후 영화모임은 한번도 성사된 적이 없다.

스필버그가 만든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정말 훌륭했다. 비디오로 봤는데도 끝날 때까지 숨이 막힐 지경-우리집 공기가 좀 탁하긴 하다-이었으니까, 극장에서 봤다면 까무라쳤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오우삼은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까? 내게 묻는다면 '그런대로 훌륭했다'는 답을 할 것 같다. 물론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더 재미있었지만, 그건 원작이 더 재미있어서가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페이첵>의 원작 역시 매우 훌륭했다. 9천만불을 포기하고 받은 잡동사니들이 그토록 멋진 역할들을 해내는 장면이나, 자신이 왜 암살당할 지경에 놓이는지가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 마지막까지 쓰임새가 없던 시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등이 손에 땀을 쥐게 했는데, 이 정도 원작이라면 내가 감독을 해도 흥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또다시 든다. 필립 K딕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기에, "원작의 무게는 사라지고 주인공의 동분서주만 남은 영화"라는 혹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깊었던 점을 몇가지만 써본다.

1) 벤 애플릭: 처음 보는 배우로, 매력이 물씬 넘친다. 앞으로 크게 될 것 같다 (이미 컸나?) 그래도... 공학박사라는데 뭐 그렇게 싸움을 잘한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은 좀 지나쳤다. 평소 오토바이가 취미였다면 모를까.

2) 우마 서먼: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처음 보는 것 같다.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몽땅 안봤다. 주연을 맡기에는, 특히나 벤 애플릭같이 멋있는 남자의 파트너가 되기에는 많이 안이쁘던데, 그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싸움을 잘해서일 것이다. 보진 않았지만 <킬빌>에서 현란한 액션을 보였다고 하던데, 이 영화에서도 생물학 박사라는 직업이 의심스럽게 잘 싸웠다. 헬멧을 던져 차 한대를 격파하는 장면이 압권.

3) 기억: 벤 애플릭은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그 기간 동안의 기억을 몽땅 삭제당하는 사람이다. 3년간의 기억을 삭제당한 뒤, 우마 서먼이 울면서 묻는다. "나 기억 안나요?" 벤 애플릭은 물론 모르겠다고 한다. 왜? 안이쁘니까! 예컨대 내가 기억을 삭제당했는데 이미연이 자길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무조건 기억난다고 대답하겠지. 반대로 안이쁜 여자가 그런 질문을 하며 눈물을 글썽인다면, 설사 기억이 난다해도 "글쎄 기억이 안나는걸"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이, 이건 재, 재미있으라고 쓴 거지, 내, 내가 시, 실제로 그런다는 건 아니다.

4) 비둘기: 오우삼 작품에서 비둘기는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이다 (이번엔 잉꼬도 나왔지만). 우리가 보통 보는 비둘기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토사물을 쪼아먹고, 먹을 것에 환장하고, 몸도 드럽고, 그래서 '평화의 상징'이라는, 어릴 적 가졌던 좋은 기억을 날라가게 만드는 존재들인데, 오우삼의 비둘기들은 새하얗고, 날개도 아주 크고, 기러기처럼 날라간다. 정말로 평화의 상징처럼. 어디서 그런 멋진 비둘기를 구했을까?

필립 K딕이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원작으로 했다면 일단 보는 걸 원칙으로 해야겠다. <낭만자객>의 윤제균이 감독을 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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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1-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 딕 소설 번역되어 나왔는데 한번 읽어보세요. 영화와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죠.

진/우맘 2004-01-28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첨 필립 K 딕을 읽게 된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제일 존경하는 작가로 꼽았기 때문이었답니다. 단편집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후 아직 다른 작품은 읽어보질 못 했지만, 여하간 그 책 한 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먹었지요.
님의 책과 영화평, 멋지네요. 특히 왜? 안이쁘니까! ㅋㅋㅋ 페이책도 읽어봐야겠어요.

진/우맘 2004-01-30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책, 알라딘에 주문했답니다.^^

진/우맘 2004-02-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서는 시계가 마지막 물건인가봐요? 책에서는 물품 보관증인데...

sooninara 2004-02-07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ㅐ?안이쁘니까...에서 넘어갔습니다...너무 웃겨셔요
 

 

 

 

* 저희 학교 교지에 실으려고 썼습니다. 남의 글을 짜깁기한 수준이라, 갑자기 내기가 싫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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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관한 오해들

평소 xx 교지를 즐겨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지에는 이따금씩 페미니즘을 다룬 글들이 실립니다. 다른 글들은 대부분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수준높은 것들이지만, 페미니즘에 관한 글들은 전혀 동의할 수 없더군요. 젊은 분들이 어쩌면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고맙게도 편집부에서 제게 반론을 실을 지면을 주신다고 해, 나름대로 열심히 써 봤습니다. 저보다 훨씬 많이 아시는 분들의 말씀을 주로 인용했으니 제 글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이 글이 페미니즘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페미니즘이란?
흔히 페미니즘을 '여성만 잘 살자'는 주장으로 몰아붙이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페미니즘은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잘살자는 주장입니다. 경희대 강사인 정희진님의 말을 인용합니다. "페미니즘은 타협,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래요, 타협하고 공존하잡니다. 이게... 나쁜가요? 알렉스 슈바르쳐의 말처럼, 생물학적으로 구별되는 아주 작은 차이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빚어서는 안되겠지요?

2. 페미니즘은 왜 생겼을까?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듯, 페미니스트도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구요. 그러니까 여성 억압적인 사회가 페미니즘을 잉태하는 거지요. 우리나라보다는 덜하지만 외국도 여성차별적인 현실은 마찬가지기에,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살았던 나혜석은 이렇게 말했었지요.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영어로 페미니즘이라고 하니까 거창한 이론이 필요한 것 같지만, 여성 자신이 사는 현실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 그게 페미니즘으로 가는 첫 발입니다. 나혜석을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것은 이렇게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히 표현할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떤가요? 20세기 초 조선의 풍경과, 100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은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3. 우리 페미니즘은 과격합니까?
교지에 글을 쓰신 어떤 분의 말입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극단적 페미니즘에 빠진 여성운동가들의 목소리가 크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과연 그럴까요? 시네21 편집장이었던 조선희의 말을 들어보죠. "한국에서 여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과격해져야 한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여성 자신들이 얼마나 기막히게 낙후된 여성인권 후진국에 살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말입니다. "우리 현실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오버하고 편파적일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그들은 편파적일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떻기에 이런 말을 할까요? 실례를 하나 들지요. 1988년, 30대 주부 변모씨가 골목길에서 20대 청년 2명에게 붙잡혀 성폭행을 당할 뻔했습니다. 범인들에게 가슴과 옆구리를 발로 차이고, 바지를 벗기운 채 한명이 강제로 혓바닥을 밀어넣는 상황에서 변씨는 혀를 깨물어 3분의 1 정도를 잘라버림으로써 위기를 탈출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변씨에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를 적용, 징역 1년을 구형...검찰은 성폭행을 피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는데 혀를 잘라 불구자로 만든 것은 과잉방어라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변씨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혀를 자른 행위는 결코 정당방위가 될 수 없다는 유죄판결이 나온 것이다"
2심에 가서야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게 말이 됩니까. 혀를 자르는 거 말고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쓸 수 있는지 검사님께 묻고 싶어지네요. 너무 오래 전 얘기라고요? 이건 어떤가요. 손광기 (이경실 남편) 사건에 대한 대전대 권혁범 교수의 한탄입니다.
"신문 제목에 불륜이 나와있는 것을 보고 숨이 막혔다. 항상 피해자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전형적인 가해자 중심의 관점이다. 설사 어떤 여자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자. 그렇다면 야구방망이로 좀 맞아도 정당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논리라면 대한민국 남편의 60%는 아내에게 매월 최소한 한번 정도는 야구방망이로 구타당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래요, 이경실처럼 잘나가는 여자도 가정 내에서는 그저 매맞는 아내에 불과했습니다. 여성권한척도 순위가 케냐와 더불어 세계 최하위라는 사실이 여러 차례 언론에 공표되도, 다른 순위에는 민감하면서 그런 보도에는 꿈쩍도 하지 않더군요.
다른 얘기를 하지요. 2년 전 장상씨의 총리인준이 부결되었지요. 거기에 대해 권혁범 교수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장씨가 보여준 문제들이 특권층 모습인 건 맞다. 그런데 그 흠결이 총리가 되는데 결격사유인가. 원래 총리는 특권층적인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늘 가던 자리 아닌가. 그동안 역대 남자 총리들은 무슨 대단한 민중적 행태를 보이셔서 그 자리에 갔던가...장상에게 제기된 문제는 여성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과 적용방식은 분명 여성문제다" 지금 총리를 하고 있는 고건 씨는 과연 장상씨보다 도덕적으로 많이 우월한가요? 거친 목소리와 핏대 선 얼굴, 이건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수단입니다. 한국 여성운동가들의 목소리가 과격하다면, 그건 우리나라 여성의 현실이 워낙 척박하기 때문인 겁니다.

4. 오버하지 맙시다
일전에 연대에서 여자 총학생회장이 탄생한 적이 있습니다. 여학생 비율이 37%에 달하니, 여자 회장이 하나쯤 있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그때 대학관계자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디다. "여학생 강세가 계속돼 남학생들이 위축된다면 앞으로 학교위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그래봤자 남학생은 63%로 훨씬 더 많습니다. 남자교수의 비율은 더 압도적이며, 총장은 100% 남성입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여자들이 사회를 쥐고 흔드는 것처럼 엄살을 피우는 남자들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심지어 역차별을 제기하는 사람까지 있더군요. 여기에 대한 권혁범 교수의 진단입니다. "간큰 남자 시리즈에서 암시되듯, 여성의 힘을 일부러 과장함으로써 남성중심 질서에 대한 여성의 도전이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논리와 정서 또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마디로 남성들은 약간의 변화에도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성에게 취업의 문은 아직 좁습니다. 비정규직의 대부분은 여성이고, 그들은 남성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임금으로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요. 현대차 노조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밥.꽃.양>에서 나타나듯, 정리해고의 1순위는 언제나 여성입니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는 아직은 남성, 그러니 제발 오버하지 맙시다.

5. 페미니즘은 교육받은 중산층 여성들의 소일거리일까?
교지에서 어느 분이 한 말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여성들로서...저학력 여성까지 모두 포함하지는 못한다"
좌파논객으로 유명한 손석춘이 한 말을 보죠. "역겹다. 페미니즘은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없는 중산층 여성들의 주장"
모택동, 맑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비거리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희진의 말입니다.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창녀일 뿐, 지식인이나 중산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위와 같이 말하는 남성도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이면서"
현실에 대한 자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이론화하고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배운 사람의 몫이지요.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져야지, 중산층이니 엘리트니 하는 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페미니스트 최보은이 시네21에 쓴 글을 읽어보면 "중산층"이자 "엘리트"인 여성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주소를 복사해 놨으니, 한번 읽어 보세요. 전 마음이 아프더군요
http://www.cine21.co.kr/kisa/sec-002100101/2002/05/020527153719033.html)

6. 페미니즘은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의 대의를 거스르는가?
여성의 이익보다는 계급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자는 얘기, 수없이 나오는 말이지요. 지난호 교지에서 본 말입니다. "그늘에 가려진 힘없는 여성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를 외면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특징은, 평소 저소득층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십상이지요. 여기에 대해 권혁범 교수가 멋지게 반박을 했습니다. "그 보편과 인간해방을 그동안 누가 규정해 왔는가? 모든 억압에 대항해야 한다는 말은 전체주의적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억압이 있고 그걸 한줄로 꿸 수 있는 운동도 논리도 없다...여성주의는 절대적 선도, 이 세상의 모든 정의를 포괄하는 진리도 아닌 매우 제한적인 담론이며 이념이다. 여성주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은 이미 그것에 대한 무지 혹은 근원적 거부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죠. 장애인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데, "왜 너희는 니네 이익밖에 모르냐. 지금 서울역에 가면 노숙자가 얼만데..." 말이 좀 안되죠? 그런데 그런 걸 왜 여성운동에만 요구하는 걸까요? 여성운동가가 무슨 슈퍼맨인가요?

7. 여성의 적은 여성?
흔히 여성이면서도 여성에게 더 가혹한 경우를 볼 수 있지요.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을 조롱합니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니 뭐니 해가면서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셋이서 커다란 파이를 먹을 땐 화기애애하게 먹을 수 있어도, 남은 부스러기를 먹을 때는 싸울 수밖에 없는 거죠. 여성에게 주어진 권력은 그야말로 파이의 부스러기밖에 안되는 수준이며, 큰 파이를 먹고 이를 쑤시고 있는 남성보다는 자기가 먼저 발견한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여성이 더 얄미울 수밖에 없는 거지요. 페미니스트는 못생긴 여자들이 하는 거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 팔자는 남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옆에 있는 남성에 의해 여성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젊은 여성이 내면화하기를 거부하고 그런 중독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 여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때문에 여성들은 여성들끼리 서로 지지하는 자매애를 갖기 어렵다" 여성 스스로가 열등하다고 세뇌가 되면, 모든 문제를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풍조가 생겨납니다. "열등한 집단이 가진 모든 것은 그들이 겪는 부당함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여성의 적은 정말 여성인가요?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니, 맨날 싸움질만 하는 건 남자들끼리던데.

8. 여성 차별에는 보수, 진보가 없다?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맑시스트들이 전선에서 총을 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이렇게 말한답니다. 메리, 수잔, 빨리 밥해! 여성 차별에 있어서는 정말이지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극우논객 이문열의 말입니다. "내가 비판한 페미니즘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일부 페미니즘" '그 페미니즘'을 써서 화제가 되었던, 스스로를 B급 좌파라고 말하는 김규항의 말을 볼까요? "내가 비판한 것은 건전하지 못한 페미니즘"이랍니다. 대척점에 서 있는 이념적 좌표와 달리, 페미니즘 비판에는 이렇게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죠. 김규항은 스스로를 '노력하는 마초'라고 표현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죠. 다시 권혁범의 말을 들어 보지요. "노력하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가. 여성을 얕잡아보는 평상시의 무례함이 드러난다...그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것은 나머지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는 뜻인가? 여기엔 저항적 사회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하려 할 때마다 등장하는 논리, 즉 지식인 리더를 보통 사람과 분리시켜 그들의 주장의 근거를 빼앗으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여성운동의 어느 부분이 천박한지 실례를 들어서 비판합시다!

9. 모성의 신비
우리 사회는 유난히 모성을 강조합니다.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울먹이곤 하죠. 사실은 그게요, 몸의 기능을 근거로 사회적 역할을 고정시키는 참 위험하고 치사한 계략이랍니다. 다음 말을 들어봅시다. "아이는 물론 여자가 낳죠. 그러나 여자 혼자서 아이를 배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보내는 열달이야 어머니 혼자서 감당하는 기간이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기를 돌보는 기쁨과 노고는 엄마 아빠 두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몫입니다. 아기가 살았던 자궁이 어머니 뱃속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이의 양육은 모두 어머니 몫이라는 얘기는 정말 터무니 없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어디 그런가요? 직장이 있으나 없으나 양육과 가사는 몽땅 여자의 몫, 그러니 조선희가 이런 말을 했겠지요. "이 시대 한국사회에서 성공한 전문직 여자들은 모두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프로의 여자는 백조처럼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지만, 물밑에서는 두발을 x나게 휘젓고 있는 것이다"
신문을 보니까 이규태 논설위원이 대처를 열심히 칭찬해 놓았습디다. 남편과 딸을 돌보는 가정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네요. "쇠약한 남편 돌보기를 이유로 포클랜드 승전 20주년 관련행사 초청을 거절하고, 딸네집 도배와 페인트칠을 마다하지 않는 그녀, 남편 식사를 손수 마련하는 그녀..." 이런 주장까지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부덕을 고스란히 체질화한 인간 대처" 아니 슈퍼우먼이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의 전통이었죠? 권혁범의 말입니다. "가정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남성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가? 도배하고 밥하고 애보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당신들부터 일찍 귀가해야 하지 않는가? 여성들이 가정 일 때문에 급하게 귀가할 때 여자라서 책임감이 부족하다고 외치면서..." 모성 강조하고, 어머니 하면서 울먹이는 사람을 조심합시다.

10. 최보은은 왜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했을까?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비판했습니다. 여성단체 내에서도 반발이 많았구요. 하지만 그분들은 최보은이 왜 그런 주장을 했는가 하는 데는 눈을 감습니다. 조선희의 말입니다.
"여성운동도 결국 권력을 나누자는 운동이다. 우리도 권력 좀 가져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효과적인 여성운동은 여자가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영국에서 11년이나 집권한 대처 총리가 보수당 출신 매파고, 여성같은 소외집단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해도, 그가 총리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영국 국민들에게 여성 해방에 관한 교과서 10권씩을 읽는 효과를 가져왔음에 틀림없다" 조금은 이해가 되시나요?

11. 호주제는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
호주제가 없어지면 가정이 파괴된다는 분들, 그럼 호주제가 우리나라밖에 없는데 남들은 어떻게 가정을 유지하는지, 호주제가 있는데 왜 이혼율은 그렇게 급증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호주제 폐지의 전도사 고은광순님의 말을 들어보지요. "...손자가 엄마와 할머니의 호주가 되고, 바람피워 낳은 아들이 법적 아내와 딸들을 젖히고 호주승계를 하는" 호주제, 좀 웃기지 않습니까? 호주제 폐지 주장이 과격한 게 아니라, 여성을 수단으로, 종속물로 여겨온 그간의 제도와 문화가 엄청나게 과격했던 거지요.

12. 페미니스트 남성은 있는가?
변정수에 의하면 페미니스트 남성은 '착한 자본가'만큼이나 무의미한 말이랍니다. "자본가는 그가 악독하든 착하든 자본가일 수밖에 없으며, 남성 역시 그가 페미니스트이건 무엇이건 남성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난 페미니스트지만" 혹은 "페미니즘의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은 특히 조심해야 해요. 그게 결국은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기 위한 appetizer를 먹이는 거니깐요. 남성 페미니스트는 없으며, 여성해방은 여성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13. 역지사지를 합시다!
남자가 월경을 하고 여자는 하지 않게 된다면, 월경이 부러움이 대상이 되었을 거라는 게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입니다. 정력을 가지고 비교를 하듯이,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생리량이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댈 것이며, 초경을 한 소년들은 이제야 진짜 남자가 되었다고 좋아할 거라나요. 지난호 교지를 보니 '사이버 공간에서 한국남성 역차별 논쟁'이라는 기사와 함께 말도 안되는 통계가 실려 있더군요. 이런 허접한 글이 대학 교지에 실렸다는 것 자체도 놀라운 일이지만, 역시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이에 대한 반박글을 같이 싣는 형평성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xx대의 페미니즘, 이대로는 곤란합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딸도 다 여성이지 않습니까? 역지사지를 합시다!

참고문헌
-지승호,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조성관, <딸은 죽었다>
-조선희,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알렉스 슈바르쳐, <아주 작은 차이>
-이휘현 외, <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
-김규항.김어준, <쾌도난담>
-글로리아 스타이넘,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일상의 반란>
-글로리아 스타이넘,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변정수, <나는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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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2-2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오래 전 글인데 퍼갑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부정적인 시각은 정말... 휴~ 이 글을 새삼 퍼가서 조금이라도 더 이 글을 읽도록 만들어야겠어요. 마태우스님!

마립간 2004-03-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듯' - 이말이 맞는 말인가요.

연우주 2004-03-0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막 추천했습니다. 아무래도 추천 눌러야 할 것 같아서. 뒷북이라 죄송.

조선인 2004-06-0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말씀 잘 읽었습니다.
다만 페미니스트 남성은 없다... 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착한 자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페미니즘은 '권리회복' 운동이 아니라 성적 정체성과 권력관계에 대한 정치적 입장으로
더욱 광범위하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너부리 2005-06-1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읽었습니다. 실은 저는 여성이고, 또 직업상 마이너리티에 속합니다. 얼마전 편한자리라고 생각된 모임에서 현재의 문제의 얘기를 하다가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공격적이고 불만만 얘기한다'는 소리를 듣고 매우 상처를 받았습니다. 속이 너무 상해서 바보처럼 울고 말았는데, 정말 나 자신이 그런가 싶어 슬펐습니다. 그런데 오늘 '거친 목소리와 핏대선 얼굴, 이건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수단입니다'라는 글을 보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보다 싶어 맘이 많이 위로가 됩니다.
정말 좋은 글이라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 퍼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