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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화가 뭉크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가 한때 도박에 빠졌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도박장에 갈 때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너는 여기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다"

물론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며칠 후의 일기다.
[나는 내 작업-그림-을 시작했다. 일을 하다가 갑자기 몬테카를로-도박장-를 생각했다. 더 계속할 수도 있었는데, 그랬더라면 돈을 더 딸 수 있었을텐데...나는 더이상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시계를 본다. 그리고 나서 도박장으로 모셔다줄 급행열차의 포근한 의자에 앉는다]

그래서 땄을까? 물론 아니다.
[내 적은 자본이 더 줄어들었다. 어제는 많이 잃었고...아마 오늘은 잘될 거다. 어김없이 나는 기차 칸막이 칸에 올라탄다]

이러다 중독이 되는거다.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아침마다 나는 기차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막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래도 지금이라도 가면'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오른다....갑자기 열이 달아오른다. 니스에서 몬테카를로까지의 거리가 한없이 길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잠도 못이루는 상태가 된다.
[나는...잠을 잘 수가 없었다....잠을 자다가 깨었을 때 나는 그 초록 탁자가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탁자엔 금화들이 수북했고, 이번에는 계속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지난번에는 실수였다. 이번에는 올바른 방법을 찾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나는 급행열차를 타고 몬테카를로로 간다]

결국 돈이 떨어진다.
[나는 은행에서 잔고의 일부분을 찾아야만 했다....오늘 생활비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찬찬히 계산해 보았다. 더이상 카페에 가서는 안된다. 또 이제부터는 싸구려 식당에서만 끼니를 떼워야 한다. 하루에 2프랑 반을 쓰지 않아야 하는데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뭉크는 도박을 멈추지 못했는데,  도박이란 건 이렇듯 무섭다. 살다보면 도박에 접할 기회가 누구나 있겠지만, 대부분은 거기에 중독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독이 되버린 그 일부분은 거의 인생이 끝장난다. 학생 때, 지하라커에서 카드를 치던 학생들이 있었다. 그때 난 그들이 이미 중독이 된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이 지금은 직장인으로서 건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 다른 일로 거기 들릴 때마다 안본 날이 없을 정도로 지하라커를 사수했던 xxx 형에게서 그 시절의 기억을 찾기는 힘들다.

내 주변에도 도박을 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중독이란 걸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빠져드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난 아직 진정한 중독을 만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허영만의 '타짜'가 전혀 없는 걸 그린 건 아닐게다. 한손을 자르고 나면 남은 손으로도 도박을 한다고 할만큼 중독이란 무섭지 않는가.

나도 도박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간혹 '중독이 아닐까' 걱정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내가 중독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간이 작아서다. 누군가가 "1만원 받고 2만원 더!"라고 하면 겨울에도 땀이 나고 손이 떨린다. 파란색 지폐가 수북히 쌓여 있으면 아무런 판단력도 발휘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한 가장 큰 판은 군대 재직 시절, 보건원 사람들과 한 거였다. '매너가 좋아 보여서 널 지목했다'는 말에 혹해서 판돈으로 요구한 20만원을 들고 그 판에 꼈었다. 돈을 거는 내내 손이 떨렸고, 마음이 불안했다. 두시간쯤 했는데, 도저히 못견디겠어서 양해를 구하고 나왔다. 집에 가면서 3만원을 딴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리고는 다신 그 판에 낀 적이 없다. 

난 일년에 두번쯤, 내 친구들과만 포커를 친다. 다 잃어봤자 2-3만원이 고작인 판이고, 딴 애가 개평도 주는 화기애애한 판이다. 담배를 안배운 것과 더불어, 도박에 빠지지 않은 건 내게 별로 없는 장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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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난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남자는 세번 운다. 태어났을 때, 부모님을 잃었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커가면서 의문이 생겼다. 태어났을 때 한번만 우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동시에 돌아가시는 것도  아닌데다, 나라가 꼭 망하는 것도 아니잖는가. 그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난 여간해서는 잘 울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싸우고 난 뒤에도 울면 지는 거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울면 안됐다. 십대 시절을 회상해 보면 운 기억이 거의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난 눈물이 멋지게 느껴졌다. 예컨대 슬픈 영화를 보고나서 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헤어진 여인을 잊지못해 어깨를 들썩이는 남자의 모습은 멋지지 않는가? 20대 시절의 난 그래서 의도적으로 운 적이 많다. 슬픈영화를 볼 때면 눈을 깜빡이지 않아 눈물을 유도한다든지, 괜히 휴지를 꺼내 눈가를 닦는다든지 하면서. 슬픈 상황이 되면 그와는 관계없는 슬픈 기억들을 총동원해 눈물을 짜내곤 했다. 곁에 있던 여자가 그렇게 우는 날 멋지게 봤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삼십대가 되자 내가 좀 이상해졌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사흘 내내 울기만 했던 거야-가족들 중 제일 많이 울었다-이해할 수 있다. 벤지가 아플 때 운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도전 골든벨>에서 마지막 학생이 탈락하는 걸 볼 때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슬픈 드라마를 볼 때 우는 엄마를 놀리곤 했었는데, 지금의 난 안슬픈 드라마를 보고서도 곧잘 눈물을 흘린다. 어젠 가족 대항 노래자랑을 보면서도 난 울었다. 남매팀의 남동생이 얼마 전 유산을 했다는 얘기도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이미 2승을 거둔 삼촌-조카팀의 삼촌이 휠체어를 타고 나와 <사랑으로>를 부르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나이가 많아지니 저절로 눈물이 많아진 것일까, 아니면 눈물에 대한 젊은 시절의 동경이 꿈을 이룬 것인지 모르겠지만, 막상 눈물이 많아지고 나니 멋있기는커녕 스스로가 청승맞아 보인다. 눈물 없던 시절로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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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1-05-2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은 토끼같은 아내와 강아지같은 자식들 덕분에 많이 안우시죠?ㅋㅋ
 

2년 전, 난 딴지일보 기자가 되었다. 주위 분들의 추천에 의해서 된건데, 임명장을 받는 순간 엄청난 고민과 부담이 나를 짓눌렀다. 임명장 말미에 씌어 있는, "기사를 써서 제출할 것"이란 대목 때문. 그래서 난 어줍잖은 기사 몇편을 딴지에 썼고, 욕과 칭찬을 절반씩 들었다. 나중에 알았다. 딴지 기자 중 제대로 기사를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그 뒤부터 난 기사는 안쓰고 임명장에 나온 말 중 "딴지 기자를 사칭해도 된다"는 구절에만 충실하고 있다.

어제 술을 마신 분들은 딴지 분들이다. 출중한 내공을 지닌 분들과 지내면서 난 많은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가식없고 순수한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그분들 중 한분의 집에서 모였기에, 뭘 사갈까 고민하다 식혜를 사갔다. 그랬더니... 어떤 분은 '오렌지 쥬스' 다른 분은 '망고쥬스'  또다른 분은 '아침 햇살'... 무슨 병문안 왔나? 내공이 높아도 취향은 촌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줬다. 그래서 난 내가 사온 식혜를 들고가서 소주 열병과 바꿨는데, 아무도 소주를 안먹어서 나 혼자 두병을 비웠다. 퍽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술마신 양에 비하면 별 실수를 하지 않은 채 집에 왔다.

술이 알딸딸하게 취할 때면 내가 하는 안좋은 버릇은, 프리챌에서 포커 하이로를 치는 것과, 라면을 먹는 것. 어젠 다행히 라면을 먹진 않았지만, 한시간 가까이 포커를 쳤다. 9천만원쯤 있던 돈을 1억5천까지 불려 놨지만, 기분이 영 안좋다. 잠을 깨고나면 일찍 잠이나 잘 걸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오니까. 술이 덜 깨서 오전 12시까지 누워 있었으니, 하루의 절반이 날라간 셈이다. 어떻게 하면 그 나쁜 버릇을 고칠 수가 있을까 고민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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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KCC를 응원하는지라 다른 팀의 경기는 잘 안본다. 하지만 어제 오후 우연히 TV를 틀었더니 삼보와 전자랜드가 숨막히는 접전을 벌이고 있기에, 가부좌를 틀고앉아 TV를 봤다. 전자랜드가 10초를 남기고 공격권을 쥔 챤스를 무산시켜 연장에 돌입했다.

1. 문경은

문경은은 고교 시절부터 유명했고, 대표팀에 단골로 뽑히는 국내 제일의 슈터다. 하지만 그는 감독이 좋아할 선수는 아니다. 삼성 시절 김동광 감독은 문경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결국 그를 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에 들어온 우지원은 감독에게 더 큰 고민을 안겨줬지만). 뭐가 문제일까? 그는 수비가 약하다. 김영만이나 양경민, 추승균 등 다른 팀의 슈터들은 슛 실력에 걸맞는 수비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문경은이 기용되면 선수 한명은 그냥 풀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장기인 외곽슛 역시 그리 믿을만한 건 아니다. 기복이 워낙 심해, 못넣는 날은 비참하게 못넣는다. 한 경기 안에서도 기복이 있어, 어제처럼 1, 2쿼터에서 잘넣었다 해도 3, 4쿼터를 무득점으로 보내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난 그 이유를 스스로 챤스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최고의 가드인 이상민과 한 팀이었고, 그가 내주는 패스를 받아 어렵지 않게 슛을 쐈다. 삼성에서 같이 뛴 주희정이나 현재 가드인 최명도는 그런 챤스를 만들어 주지 못하니, 슛을 쏠 기회 자체가 없는 것.

연장전 도중 해설자가 이런 말을 했다. "문경은 선수가 하나 해줘야 해요!" 그 말을 들은 걸까. 공을 잡고 공격을 하던 문경은은 그만 어이없는 트레블링을 범한다. 라이벌 양경민은 그 공격을 3점 슛으로 연결시켰고, 그 다음에 문경은이 던진 먼거리 3점슛은 림을 외면했다. 결국 전자랜드는 고배를 마셨다.

2. 유재학

하지만 어제 전자랜드가 진 게 전적으로 문경은 때문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유재학의 닭짓이 더 큰 이유를 제공했다. 선수시절 유재학은 '꾀돌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재치있는 플레이를 펼쳤다. 그러나  감독이 된 뒤 그 재치는 어디로 간걸까?

연장 19초를 남기고 스코어는 동점이었다. 공격권은 삼보. 유재학은 선수를 둘 바꾼다. 해설자의 말, "파울을 하기 위한 교체지요" 그 말대로 둘은 하나씩 파울을 기록한다. 문제는 15초를 남기고 저질러진 두번째 파울이 자유투를 헌납하고 만 것. 삼보의 데릭스는 자유투 둘을 모두 성공시켜 2점차 리드를 이끈다. 전자랜드는 15초 동안 득점을 하지 못해, 결국 패배의 수렁에 빠진다. 파울작전이란 건 뒤지는 팀이 시간이 모자랄 때 쓰는 작전, 동점일 때 파울작전을 하는 팀은 내가 알기에 유재학이 처음이다. 스코어를 착각한 것일까, 아니면 파울 갯수를 헷갈린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작전을 편 걸까. 유재학의 의도를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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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펜

NBA 경기를 보다보니 관중들이 "디펜!"을 외치는 걸 보았다. 그 경기가 마침 시카코 불스의 경기였기에, 그 팀의 스몰 포워드인 스카티 피펜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으로 알았다. 물론 이런 생각은 들었다. '왜 팀의 간판인 마이클 조던의 이름은 부르지 않을까?' 나중에 알고보니-스스로 깨우친 건 아니고, 미국있는 친구에게 물어봤다-관중들이 외친 건 '디-펜(스)', 즉 수비를 하라는 거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에서도 홈팀의 수비 때 어김없이 "디-펜!"이라는 구호가 관중석에서 나온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좀 씁쓸하다. 리바운드나 앨리웁 덩크 등의 전문용어를 쓰는 거야 어쩔 수 없다쳐도, 응원구호마저 미국 껄 그대로 따라하는 걸까? 미국인들이 쓰는 말이니 무조건 멋있어 보이는 걸까? 자신의 나라에서 말해지는 응원구호를 한국에서 들었을 때, 미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2. 박한 시리즈

미국을 일방적으로 따라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긴 했지만, 미국 스포츠방송의 상업주의 정신은 배울 만하다. 포수가 얼굴에 쓰는 프로텍터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덕아웃에서 감독의 표정과 하는 한마디 한마디까지 TV에서 방영하는 걸 보면서 혀를 내두른 적이 있는데, 그 영향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감독이나 선수의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중의 하나가 농구의 작전타임 장면을 리얼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다보니 가끔 웃기는 일도 생긴다. 몇년 전, 엘지의 매덕스란 선수가 자꾸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자 김태환 감독이 작전타임을 불렀다. 가드인 조우현에게 하는 말, "야, 재 (공) 주지마!" 외국인 선수인 매덕스가 그 말을 알아들었을까?  
 
박한이 고대 감독을 하던 시절, 고대는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선수 개개인의 기량을 따져보면 연대보다도 나은 수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는 연대에게 번번히 깨졌다. 그게 바로 박한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 작전타임 도중 박한이 하는 말은 대개 이런 식이다. "'야 수비 좀 잘하란 말이야. 타이트하게...좀 잘할 수 없니..." 아니 누군 잘하기 싫어서 그러는가? 그의 언행을 모은 게 바로 '박한 시리즈'다.

사례 1. 작전타임을 부른 박한 감독, 열이 받은 얼굴로 선수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두가지가 안되고 있어. 공격하고 수비야!"

사례 2. 작전지시용 종이를 꺼낸 박한 감독, 한쪽에다 동그라미를 크게 그린다. "이게 골대야" 다른 쪽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 "이건 공이야" 공에서 골대로 화살표를 그린다. "넣어, 응?"

사례 3. 한양대와의 경기도중 고대는 막판에 3점차로 뒤졌다. 노련한 전희철은 딱 1초를 남기고 3점슛을 시도했고, 거기 속은 수비수의 파울로 자유투 3개를 얻게 되었다. 다 넣으면 연장전에 돌입하는 순간, 박한이 작전타임을 불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봤더니 놀랍게도 박한은 이렇게 말한다. "희철아! 세개 다 넣어!"

사례 4. 경기에서 크게 뒤지자 열이 받은 박한 감독, 작전타임을 불러 김병철을 야단친다.
"병철아, 너 전담수비가 누구야?" 김병철, 아무 말이 없다. 더더욱 다그치는 박감독,  "아니 네 수비도 모른단 말야?" 그러자 옆에 있던 전희철의 대답, "감독님, 저희 지금 지역방어인데요?" 

고대를 응원하는 입장에서 박한이 고대 감독에서 물러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그늘이 워낙 커서인지, 고대는 아직까지도 정상권 밖에서 헤매고 있는 중이다. 하기사, 프로농구가 생겨 대학농구가 많이 위축되기도 했으니, 이상민, 우지원, 현주엽과 김병철이 활약하던 시절만큼 인기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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