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그간 술일기를 전혀 쓰지 않았다. 일기를 쓰면서 술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술마시는 횟수는 좀 낮춰 보자는 취지였는데, 1월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해이해진 것 같다. 그간 마셨던 세번의 술자리를 몰아서 정리한다.

1월 22일:

장소: 큰집 (진짜로 크다)

종목: 더덕주, 맥주

양: 마시고 집에 간 게 오후 1시인데, 그때부터 뻗어 잤다.

차례를 지내러 사촌형의 집에 간 건 오랜만이다. 3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부터는 우리 집에서도 아버님을 위한 차례를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정을 세고 큰집은 구정을 세기로 했는지라, 올해부터 구정 때마다 큰집에 갈 생각이다.

내 사촌형 효진이형은 이런 사람이다.

[효진이형은 큰아버지의 아들이니 내게는 사촌이 된다. XXX였던 아버님과는 달리 큰아버지는 김제에서 농사를 지으셨고, 그나마도 간암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 형제들이 별 어려움 없이 자란 반면, 큰어머니는 변두리를 전전하며 어렵게 자식들을 키우셨다. 효진이형은 너무도 화려한-형님의 기준으로 보면-우리집에 올 때마다 시골쥐, 서울쥐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귀부인의 자태를 갖춘 어머님에 비해, 큰어머님은 고생을 많이하신 흔적이 외모에서부터 드러난다.

극진한 정성으로 길러진 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시골에선 제법 공부를 잘했던 효진형은 재수 끝에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후 먹고 노느라 젊음을 탕진한 나와는 달리, 효진형은 회사에 다니며 모은 돈으로 조그만 아파트를 사 어머님을 모셨다. 난 어버이날이나 부모님의 생신 때 약간의 돈을 드리며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 반면, 효진형은 그 와중에도 여러번의 미담을 선보여 날 부끄럽게 했다.

그건 시작이었다. 회사를 나와 조그만 사업체를 차린 효진형은 사업의 번창과 더불어 나와의 격차-효도 면에서-벌려갔다. 어머님께 그럴듯한 아파트를 사드렸고, 나중에 한채를 더 사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이 아파트 월세로 생활비 하세요. 용돈 모자라면 얼마든지 드릴께요" 해외 여행을 보내드렸고, "고모들에게 한턱 쓰시라"면서 돈을 드렸다. 자신의 형에게 고급 승용차를 선물했다. 그 능력보다, 마음 씀씀이가 난 훨씬 부럽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걸 받으며 자랐던 난 왜 그러지 못할까. 아직도 난 "내 앞가림도 힘들어!"라며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어머님과 할머니를 모시고 식사대접을 한것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돈이 있다고 다 효진형처럼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잘 알기에,더더욱 부끄럽다. 더 부끄러운 건 집안을 일으킨 효진형이 나와 한살 차이라는 것...]

착한 효진형의 사업이 쭉 잘 되기를 빌어본다.

 

1월 24일

장소: 집구석

종목: 소주 한병, 산사춘 약간

집에서는 웬만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데, 그날은 술이 좀 마시고 싶어 어머니와 대작했다( 어머니는 포도주를 마셨다). 내 지도교수 뒷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셨는데, 어머님은 너무너무 즐거워하셨다.

이건 다른 얘긴데, 7년째 날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다. 물론 난 그녀에게 한번도 이성이란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다. 절세의 미인이 아니라서 그런 것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그녀가 중3 때라, 세월이 흘러 제법 여자의 모양새가 갖춰진 뒤에도 난 그녀를 여전히 중3 때의 모습으로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 누군가가 날 좋아한다는 건 생각처럼 즐거운 일은 아니다. 아니, 너무 마음이 아픈 일이다. 그렇게 포기를 종용해도 영 말을 듣지 않는 그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으니, 그 안에서 남자가 생기지 않을까?  그녀에게 그간 남자가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남자가 있건 없건, 그녀는 날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래,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어서 그런 걸꺼야. 올해는 그녀에게 꼭 남자가 생기기를, 그래서 내가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나 아버지 혹은 오빠로서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아, 이 얘기를 왜 했냐면, 그날 얘가 술사달라고 하기에 거듭 튕겼더니 삐졌는지 그냥 집에 내려갔고, 그래서 갑자기 내가 술생각이 나 집에서 술을 마신 거다.

1월 26일

장소: 천안

종목: 소주 7잔에 맥주 두병

다이어트를 열심히 한 결과 남들로부터 온갖 찬사를 받았다. "너무 날씬해졌다" "얼굴이 반쪽이다" 등등. 그 말을 들으니 왜 이렇게 배가 고파지는지. 긴장이 풀려서일까? 영화를 보고나서 고기집에 가서 열심히 먹어댔다. 물론 소주와 함께. 약간 미진한 것 같아 맥주를 마셨고, 덕분에 집에 가서 잘 잤다. 현재 26일까지 13번이면 이틀에 한번꼴, 그럭저럭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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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4-01-2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향후3년간 먹을 술 작년에 다 먹어서 앞으로는 조금 쉬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