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주의를 돌릴 만한 대상은 거의 없었고, 모든 것을 흡수하는 여행의 단조로움은 매일의 깊이를 전부 빨아냈다. 바뀌지 않는 풍경에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직전의 발걸음과 닮아 있었다. 모든행동은 아무 생각 없이 벌이는 반복이었다. 모든 남녀가 머리로는 잊었으나 여전히 기능적인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 - P165
그리고 일행과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지평선 사이에는 먼지가 있었다. 언제나 먼지가 있었다. 그 먼지가 사람들의 눈에 불을 붙이고 콧구멍을 틀어막고 입을 말렸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목구멍이 부식되고 폐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빨갛고도 불확실한 태양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구름 뒤에서 질식해갔다. 하루에 몇 번씩, 날씨가 잔잔할 때도 먼지 때문에 수레에서 황소를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는 느낌, 아무 변화가 없는 느낌이 완벽해지며 공간과 시간 모두가 파괴되는 것만 같았다.주위에서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모든 흙을 알갱이로 바꿔놓고 일행이 눈을 감은 채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 때는더욱 그랬다. - P165
비는 축복이었다. 비로 인해 가끔 발생하는 곤란한진창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비가 내리면 먼지가 가라앉고 더러운 냄새가 씻겨나갔으며(젖은 옷, 짐승, 식량이 햇볕에서 김을 뿜기 시작하면 복수하듯 돌아오긴 했으나), 그들에게 잠깐이나마 작은 동물이 우글거리지 않는 마실 물을 주었다. - P165
15 벌. 벌은 말의 귀 주변을 맴돌고 호칸의 목뒤에서 윙윙거리더니 한동안 그들을 따라오며 안장주머니와 당나귀의 짐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호칸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제야 봄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즉시, 몇 년 동안 벌을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는 깨달았다. 사실 호칸이 스웨덴을 떠나온 이후로 마주친 첫번째 벌이었다. 지금까지 미국의 황야는 극도로 다른 여러 환경에서 사치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생물 종이 번성하는 와중에도 뭘 한 마리를 내지 못했다. 호칸은 다양한 기후에서 모든 계절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 초원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말을 타고 지나온 초원과 똑같았다. 적어도 행렬에서 이민자들과 처음 만난 이후로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와서 왜 갑자기 벌이 나온단 말인가? 농장, 호칸이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었다. - P211
호칸은 지금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살인 이후로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자신이 잊혔기를 바랐다. 때로 기분이 아주 좋을 때면 자신이 그 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소식이 이 지역까지, 행렬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토록 낮은 가능성이 실현되더라도-호칸이 저지른 부끄러운 짓에 대한 소식이 계절과 평원을지나 전달되었더라도-호칸은 자신이 더 강해졌으며, 진실을 알고 있는 누구와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장에 설득되지 않을 때면, 호칸은 자신이 미치거나 길을 잃은 채행렬과 사막 사이의 거대한 초원에 갇혀 있으며, 리누스를 다시보고 싶다면 조만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것이고, 가는 길에 다른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한들 뉴욕이라는 큰 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해야 할 게 분명하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 P212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벌이-또 그 벌에 뒤이어 나타난 수많은 다른 벌들이-문명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농장이나 마을은 없었고 호칸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 P212
게다가 위협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음에도 벌들은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첫번째 표본을 발견하고 며칠 뒤,호칸은 쓰러진 통나무 위를 날아다니는 벌떼가 공기 중에 빽빽한것을 보았다. 벌들은 나무둥치에 난 구멍 위로 줄지어 날아다녔는데, 알고 보니 그곳에 벌집이 있었다. 호칸은 엄청나게 조심했지만 몇 번 쏘이는 건 피하지 못한 채 야생 벌꿀에 손을 뻗었다. 벌집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안 아래팔은 둥그스름한 노란색 물집으로 화끈거렸다. 호칸은 그 맛을 벌꿀맛이라고 거의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맛보다 촉감, 냄새, 생김새였다. 밀랍으로 이루어진 매끈한 페이스트가 즉시 호칸의 코로 들어갔고, 호칸은 천송이의 꽃을 보았다. ᆢ ᆢ ... 봄이 자리잡은 지금, 동료 피조물들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 이었다. - P213
17 "피곤하다." 호칸이 조용히 신음하며 말했다. 눈물 너머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이서가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피곤하다." 호칸은 흐느끼며 에이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너무 피곤하다." 에이서는 다른 팔을 호칸의 가슴에 둘렀다. "너무 피곤하다." 그것이 호칸의 첫 포옹이었다. - P250
그들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대체로 침묵하며 이동했다. 하지만 때로는 각자의 말에 탄 채 서로를 보며 아주 잠깐 미소 짓곤 했다. 아무도 호칸에게 그런 식으로, 아무 이유 없이 미소를 지어준적은 없었다. 기분이 좋았다. 얼마 후 호칸은 마주 미소 짓는 법을 배웠다. 매일 저녁, 야영하면서 불을 피우고 저녁을 만들 때면 호칸은 누군가의 눈에 보인다는 것, 누군가의 뇌에 들어간다는것, 누군가의 의식 안에 살아간다는 것을 거의 기적이라고 느꼈다. 게다가 에이서의 존재는 평원에도 영향을 주었다. 평원은 더이상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호칸의 외로운 시선에 존재 여부가 맡겨져 있던 위압적인 광활함이 아니었다. - P250
땅을 잘 아는 사람, 추적자로서의 눈을 가진 사람과 함께 여행하면서 평원에 대한 호칸의 인식은 바뀌었다. 호칸이 한때 위협과 만연한 적들의 흔적을 보았던 곳에서 에이서는 아무것도 보지•않았다. 고기를 훈연하는 데 이상적으로 쓰일 향기로운 나무의일종이나 귀한 뿌리채소, 에이서가 임시로 구덩이 오븐을 만들때 쓰려고 언제나 집어드는 동석 비슷한 돌멩이를 보면 모를까. 역으로, 호칸은 에이서가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장소 한가운데에서 멈출 때마다 놀랐다. 호칸이 보기에 그곳은 아무것도 없다는점에서 사방의 여느 땅과 비슷했다. 에이서는 말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고 새로운 방향을 가리켰으며, 희미하긴 하지만 자신이보기에는 기수의 존재를 설득력 있게 나타내는 흔적으로부터 두사람을 빠르게 빼냈다. 이처럼 갑작스러운 멈춤과 방향 전환으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복잡하게 구불구불 나아가는 패턴을 그려야했지만, 에이서는 나침반이 없는데도 틀림없이 서쪽으로 방향을잡았다. - P254
이처럼 갑작스러운 멈춤과 방향 전환으로그들은 어쩔 수 없이 복잡하게 구불구불 나아가는 패턴을 그려야했지만, 에이서는 나침반이 없는데도 틀림없이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평원을 해독하는 능력과 완벽한 방향감각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많은 여행을 통해 얻은 땅에 대한 에이서의 지식 덕분에 그가 여행의 모든 단계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 P254
지금까지 호칸은 과거로부터 멀리 여행해왔으나 미래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속적인 현재에 남아서, 풍경과 사람들을 떠나되 결코 예견할 수 있는 특정한 목적지로 향하지는 못했다. 그의 유일하고 진정한 목적지인 뉴욕은 어느 머나먼 달의 도시처럼 추상적이고 환상적일 뿐 머릿속 눈으로 내다볼 수 있는 뚜렷한 장소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는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뿐이었다. 제임스 브레넌은 흙에서 찾은 금의 흔적을 따라가며 지방을 헤맸다. 존 로리머는 호칸처럼 이 지역에는 처음 온것이었다. 자비스 피킷의 길안내는 믿을 만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반복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에이서뿐이었다. 내일은 강에 도착할 거야. 사흘쯤 지나면 좋은 장작을 구할 수 있어. 저쪽으로 말을 달리면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거야.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것과 세상을 한 바퀴 돌 수 있다는 것을 배웠을 때 세상의 생김새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변했다. 사실, 이 점을 생각할 때마다 호칸은 자신의 정신이 이 새로운 생각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느라 휘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미래를 예견하는 에이서의 능력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 현실은 더이상 지평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 P256
호칸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누군가와 함께 잠을 잔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등뒤에서 깨어 있는 에이서가 비슷한 생각을 침착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이렇게 하나?" 호칸이 물었다. "뭘?" 호칸은 에이서의 부드러운 숨결을 느꼈다. 그 숨결이 처음에는호칸의 목에, 그다음에는 코에 닿았다. 따뜻하고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이거." "뭐?" 에이서가 숨죽여 웃었다. "이거. 나를 도와준다. 보안관에게서. 그런 다음 나와 함께 도망친다. 모든 것을 떠난다. 그리고 이젠 여기에 있다. 왜?" "너 때문에." "하지만 왜?" "널 보고 알았으니까." - P260
수없이 많은 서리와 해빙을 지나, 그는 국가보다도 넓은 원을 그리며 걸었다.
그런 다음 멈추었다. - P284
단조로운 삶에서는 한 해와 한순간이 같았다. 계절은 지나갔다가 돌아왔고, 호칸의 일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도랑이 넘쳤다. 타일이 빠졌다. 상하기 전에 고기를 육포로 만들어야 했다. 버려진 도랑은 메워야 했다. 마실 물이 필요했다. 참호가 무너져 황폐해졌다. 바닥에 깔아놓은 돌이 헐거워졌다. 옛 통로를 연장해야 했다. 더 많은 아교풀을 끓여야 했다. 지붕을 덜 새게 만들었다. 덫을 놓아야 했다.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야 했다. 코트를 수선해야 했다. 가죽 굴뚝이 너무 썩어 있었다. 장작을 모아야 했다. 이런 일 중 하나가 마무리되기 전에 다음 일이 호칸의 주의를 끌었으므로, 그는 언제나 잡일 중 하나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런 잡일들은 호칸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알아서 반복되는 일종의 순환주기 혹은 패턴을 이루었다. 호칸은 이런 일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벌어진다고 확신했다. - P290
이처럼 반복되는 임무가 모든 하루를 그전의 하루와 비슷하게 밀들었고, 각 하루의 안에서는 해긴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구분할 표지가 거의 없었다. 호칸은 심지어 규칙적인 시간에 식사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의 식단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절대적 최소량으로 줄었다. 에이서가 죽은 이후로 그는 음식을 싫어하게 되었다.
*에이서의 죽음이후 호칸이 캐니언의 동굴에서 떠나지 않고 은둔생활을 계속했기 때문에 290-291쪽에서 보이는 호칸의 일상을 보여주는 문장들이 296-297쪽에 걸쳐 거의 같은 문장으로 반복이 된다. - P291
선장은 스웨덴어로 말했는데 호칸이 모르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리누스를 잃은 이후로 오직 머릿속으로만 스웨덴어를 들었기에 호칸은 유일하게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생각에따라 그 언어를 만들어왔다-호칸은 그런 단어들을 선장의 목소리와 조화시키고, 그런 단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뭔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믿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호칸 자신이 모국어를 말한다고 해서 더 자신감 있거나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그는, 자신의 수줍음과 우유부단함, 침묵에 대한 선호가 언어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스웨덴어를 쓸 때도 똑같았다. 이조용하고 머뭇거리는 존재는 그냥 호칸의 원래 모습. 또는 호칸의 변화된 모습이었다. - P340
나중에, 본채에서 선장은 호칸에게 지구본으로 알래스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회사가 해변을 따라 세운 다양한 거점과 사업소를 짚어주며 각각의 이점을 이야기했다. - P344
그런 뒤 선장은 지나가는 말로 알래스카와 러시아가 무척 가까우며 두 땅이 좁은 해협으로만 나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핀란드를 거쳐 스웨덴으로 곧장 이어지는, 거대한 땅을 가로지르는 선을 그렸다. "선생에게 딱 맞는 장소요." 알텐바움 선장이 손가락을 다시 알래스카로 가져오며 말했다. 전에는 한 번도 지구본을 본 적 없는 호칸은 걸어서 지구본 주위를 돌며 자신의 긴 여행길을 따라가보았다. 그렇게 그는 모든땅이 어떻게 원이 되는지를 보았다. - P344
"지금은 걸어서 바다를 건널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내년 겨울이어야겠지. 그런 다음 곧장 서쪽으로 간다. 스웨덴으로" 소년은 어리둥절해져 고독하고 광활한 공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평적 광대함에 방향감각을 잃은 듯했다. 그 광활함은 하늘아래 또다른 하늘처럼 무한하고도 헐벗은 것처럼 보였다. 돌아보니 호칸은 이미 눈이 래커처럼 칠해진 난간에 두 다리를 걸치고있었다. 소년은 뭔가 말하고 싶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호칸은 잠시 멈추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P352
잠시 후 소년은 갑판 너머로 몸을 숙이고, 그 거대한 남자가 짐꾸러미를 집어들고서 눈앞의 얼어붙은, 확장된 공간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람은 아직 그에게 닿지 않았으나 호칸은 머리에 사자 후드를 걸쳤다. 땅에서부터 불어올라온 깃털같은 눈 뒤에서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호칸은 자기 발을, 그다음에는 다시 위를 보더니 백색 안으로, 가라앉는 태양을 향해 길을 나섰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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