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욜로욜로 시리즈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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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는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의 대표작 <시녀들>에 등장하는 개의 정체를 상상해보는 가상 역사 소설, 이른바 팩션(fiction과 fact의 합성어)이다. 스페인도 아닌 오스트리아 국적의 작가 라헐 판 코에이는 이 개의 정체에 대해 아주 참신한 해석을 내놓는다. 불구의 몸을 가진 장애인인 바르톨로메를 내세우면서 독자로 하여금 당시 스페인의 극단적인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당시 스페인에서 장애인이란 신도 외면한 사람들이란 인식이 있어 날 때부터 죄를 짊어진 존재, 아무렇게나 하대해도 상관이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간주했으며 장애인 자녀의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숨겨야 하는 처지에 시달렸다. 아니, 차라리 사랑이라도 하면 다행이지, 이 작품 속 바르톨로메의 아버지 후안처럼 장애인 자식을 아예 없는 자식 취급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궁정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몇몇 그림에서 알 수 있듯 장애인이나 흑인 노예라 할 지라도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대우와 존경을 받아가며 살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은 당연히 왕가의 선택을 말하는데 주로 두 가지 기준으로 선택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재능, 가령 그림이나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왕가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 작품에선 아직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사랑'을 받는 난쟁이들, 시녀들, 그리고 공주의 명으로 인해 인간개가 된 바르톨로메가 해당된다. 바르톨로메는 곱사등이의 몸 그대로 공주를 알현할 순 없고 개로 분장해야 했다. 아무리 불구의 몸이고 친부에게도 외면당한 존재이며 한 나라의 공주의 명이라지만 친부의 손에 직접 몸이 씻겨져 공주에게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는 과정은 절로 눈살 찌뿌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마르가리타 공주 같은 왕가의 사람들을 마냥 악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마르가리타 공주의 경우 왕가의 피를 물려받았다 뿐이지 아직 부모의 관심이나 자기 또래의 친구가 필요한 철부지 아이인데 왕족이란 이유로 체통을 지켜야 해서 남들 모르게 외롭게 자랐고 그 탓에 어딘지 괴팍한 취향이 형성돼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요지경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악인이라고 하면 왕가의 사랑을 받기 위해 과도하게 명령에 충실하거나 타인에게 비도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후안이나 니콜라시토 같은 작자들을 꼽을 수 있겠다. 후안은 당시 기준으로 매정하고 부모 자격도 없는 인물이지만 차츰 죄책감을 느끼며 바르톨로메를 부끄러이 여긴 걸 뉘우치고 나아가 아들을 직접 구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1부가 다른 가족들이 가장인 후안의 눈을 피해 바르톨로메에게 몰래 글을 가르치는 내용인 걸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변화다. 이 변화의 과정이 이번에 이 작품을 두 번째 읽음에도 급작스럽게 느껴졌던 건 아쉽지만, 한편으론 너무 신파스럽지 않고 입체적으로 후안이라는 인물을 그려낸 것도 같아 눈길이 가기도 했다. 사극을 접하다 보면 가끔 과거의 인물이 너무 현재 우리 기준에서 봤을 때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급진적이라 오히려 현실성을 반감시키거나 혹은 우리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미개하고 극악무도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후안은 문제가 많긴 해도 작품 외적인 측면에선 당시 시대상을 잘 가늠하게 해주는, 이른바 고증이 잘 된 인물상이라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니콜라시토는 바르톨로메와 같은 난쟁이지만 선배로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르톨로메를 배려하긴커녕 자신이 공주의 유일한 난쟁이고 다른 난쟁이는 방해물로 간주하며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장애인이라고 다 같은 성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끼린 동지가 아닌 경쟁자로 여기면서 추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음을 잘 역설한 캐릭터이며 이런 현실감 있는 악역은 이야기에 적잖게 몰입도를 선사한다. 늘 느끼지만 악역이 등장해야 이야기에 긴장감이 조성되며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공식이다. 바르톨로메가 니콜라시토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 궁금해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다. 이 미치도록 비정하고 현실적인 상황은 기대보다 싱겁게 마무리되지만 그래도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긴 보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요번에 스페인 여행 때 직관한 <시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감상하고자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허나 <시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보단 스페인의 시대상과 마드리드의 분위기, 장애인에 대한 인식에 더 눈길이 갔는데, 집필의 시작이 <시녀들>의 개라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판이 커진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는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는데, 고전 명화의 배경을 살펴보면 필연적으로 당시 시대상, 화가의 삶을 살펴보게 된다. 개에 주목했다고 해서 정말 개 이야기만 하려고 했다면 이 정도로 깊이 있는 이야기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바르톨로메의 의지를 드러내는 문학적 장치로 개라는 동물을 접목시킨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용감하고 충직한 개'보단 장애인의 삶을, 장애인이란 이유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바르톨로메의 선택은 눈물 없이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서양도 그랬지 몰랐는데 동양에선 '개 같다'는 말은 결코 좋은 표현이 아니다. 서양은 그래도 내가 미국이나 노르웨이, 이번에 간 스페인에서도 느낀 거지만 사람들이 개를 정말 좋아해 막연하게 그 나라들엔 개를 활용한 욕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론 내 생각과 다른 모양이다. 개가 아무리 인간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이라지만 인간에게 직접 '개 같다'고 말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욕설로 통하는 듯하다. 하긴 인간은 인간일 뿐 다른 존재로 비유당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겠다.


 엉뚱하고 참신한 상상에서 비롯된 팩션의 정수를 보여준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는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역사나 장애인 인권, 그리고 청소년 성장문학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는 작품이다. 시대의 한계 탓에 바르톨로메가 꿀 수 있는 꿈에도 제약이 걸리지만 그래도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지지하는 이들을 만나고 오히려 꿈을 꾸는 것에 제약이 있기에 그 꿈이 더욱 소중해지기도 하는 등 성장문학 특유의 뭉클한 장면과 감정선이 많은 작품이라 삶에 지친 분들에게 추천한다.

 장애인 이야기를 보고 지친 마음을 달래라고 하는 것은 좀 불건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바르톨로메가 장애인이란 것에 집중하지 말고 일종의 은유로 생각하고 읽으면 한 명의 장애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기도 하다며 더욱 공감하며 읽게 것이다.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과 흔치 않은 장애인 주인공이 등장함에도 공감할 수 있다니... 다시 읽어도 대단한 작품이다.

물론 이것은 해석의 오해일 수도 있지만, 역사라는 것이 해석의 산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행복한 오해‘라는 이름을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 행복한 오해일 테니까. - 3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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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편지
조현아 지음 / 손봄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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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아기자기하고 서정적인 그림체와 미스터리를 쫓는 이야기의 동력, 그리고 기분 좋은 결말이 일품인 굵고 짧은 작품이다. 짧은 분량 때문에 완성도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올해 안에 애니메이션 영화로 개봉된다고 하니 그때 화제를 모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본심을 말하자면 영상화를 굳이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만큼 자체적인 완성도가 매우 뛰어난 나머지 행여 기대가 배신당할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연출이라든가 성우 캐스팅이라든가 막상 영상으로 보면 내가 느낀 감성이 깨질까 두려워하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어느 순간부터 실사화, 영화화, 2차 창작이 기대되긴커녕 긁어부스럼처럼 느껴진다. 아직 영화 포스터도 나오지 않은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하지만 말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주인공의 여정도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작중 내내 시선을 끈 부분은 일상을 매우 아름답게 감미롭게 조명한 점이다. 학교 풍경이나 정원 관리인이나 비밀 장소들을 일상적이면서 조금은 환상적인 연출을 가미한 묘사가 굉장한 설렘을 자아낸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감탄한 동시에 반대로 나는 세상을 시큰둥하게 턱을 괸 채로 다소 탁하게 바라보고 있진 않은가 하고 반성도 해보았다.

 작중에서 호연이의 말에 의하면 모든 장소와 인간은 관심을 가지고 인지하는 순간 내 앞에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모든 의미 있고 환상적인 순간과 장소는 어디 멀리에 있어서 힘겹게 찾아가야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산재한데 내가 알지 못할 뿐인 걸까. 얼마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굉장히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를 경험한 내게 일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호연이의 말은 제법 울림을 안겨줬다.


 멀리 가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있듯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아름답다고도 여기지 못하는 감정도 있을 것이다. 여행 중엔 이런 생각을 못해봤다. 누군가가 여행은 걸어서 읽는 책이고 책은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여행으로 얻는 것도 있고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얻는 것도 있다. 여행이 곧 책이고 책이 곧 여행이라는 말이 지금 불현듯 진심으로 와 닿았다. 여행하느라 한동안 소홀히 했던 독서에 다시 본격적으로 매진하자는 다짐이 일었다. 앉아서 하는 여행도 설렌다.

모든 장소는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 달라. 사람도 마찬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인지하는 순간 내 앞에 존재하게 되는 거야. - 여섯 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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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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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스페인에 여행을 떠나기 전 피카소나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출신 화가들과 관련된 책도 많이 읽어봤는데, 마침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 중에 이렇게 달리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기에 찾아 읽어봤다. 제목만 봐선 무슨 내용일는지 가늠이 안 됐는데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다. 일본의 어떤 독자는 '추리소설로도, 연애소설로도 손색이 없다'고 했던데, 추리소설로는 사람마다 평이 갈릴 수 있지만 손색이 없는 연애소설이란 말엔 퍽 공감했다. 그나저나 역시 추리소설엔 치정이 어울리는 소재인 건가. 소재가 특이해도 하나도 이질적으로 읽히지 않은 데엔 치정이 살인의 강력한 동기가 되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피해자가 달리 애호가인 것도, 피해자가 죽은 장소가 밀실의 고치인 것도 아니다. 열렬한 달리 애호가인 나머지 콧수염도 달리처럼 기르던 피해자가 어째선지 시체로 발견됐을 땐 수염도 말끔히 밀린 상태였다. 도대체 얼마나 원한이 깊길래 살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소중히 기르던 콧수염까지 자른단 말인가. 예전에 신경 써서 수염을 길러본 사람으로서 말하는 건데, 콧수염은 수염 중에서도 그럴싸하게 기르기 까다로운 털이다. 그런데 달리만큼 길렀다는 건 그만큼 애정과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일인데 그걸 잘라간다는 건, 그것도 살해를 저지르고 빨리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굳이 다른 사람의 수염을 면도하는 번거로운 짓을 한다는 게 여간 기괴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의문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아 소설의 초반이 굉장히 지루함에도 결말은 반드시 읽겠노라고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히 중반부부터 피해자의 딱한 사정, 운명의 사랑을 만났음에도 짝사랑에 그치고 만 사연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몰입도가 올라갔다. 이윽고 과거 회상 장면에선 피해자가 실연 직전인 탓인지 어딘가 광기에 차있으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초라한 면모를 드러내는데, 화자인 아리스의 과거도 마찬가지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은 정말 인륜지대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에 좌절당하지 않고 쟁취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을 쟁취한다는 표현엔 어폐가 있겠다. 내 경우엔 늘 사랑이 일방통행이어서 비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 말하자면 사랑은 상대와 쌓아나간다는 말이 훨씬 적절하겠다.

 왜 수염이 밀렸고, 어떻게 고치 안에 시체가 방치될 수 있었는지 등의 수수께끼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차츰 밝혀진다. 사건의 진상에 비해 지나치게 폼을 들였고 분량도 많이 소모한 감이 있지만 설명과 개연성이 명쾌하며 해당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와 완전히 인상이 달라지기도 해 새삼 반전에 살고 반전에 죽는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이런 거지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초반이 특히 지루하고 소재 자체도 달리라는 키워드를 빼면 완전히 통속적이라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겐 이런 화려하지 않으며 잡다한 요소마저 좋았다. 예전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풍과 세계관이 뭔가 애매하다고 여겼는데 이젠 분량이 더 길어도 좋으니 히무라와 아리스의 잡담이나 그들이 진범을 잡기 위한 시행착오를 더 빈번히 겪었음 좋겠단 생각마저 든다. 일상적이라서 더 빠져들게 되고 특히 진범을 찾고자 헤맨 시간이 길수록 히무라가 진범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이라든가 진범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서술의 임팩트가 올라가 다 읽고 난 다음의 여운에 크게 이바지한다고 본다. 특히 여운에 있어서 아리스가와 아리스만한 추리소설가가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달리 관련 이야기가 다뤄진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한 여자에 일편단심이었던 달리에 대한 해석, 사랑을 받은 여자보다 그만큼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던 달리가 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해석도 인상적이었고 - 여담이지만 작중에서 마성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사기오 유코가 방금 말한 해석을 내놨는데 이 해석을 보고서야 왜 그토록 많은 남성이 반했는지 납득이 갔다. 캐릭터는 설명보다 한 마디의 대사로 드러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 짝사랑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잘 알던 피해자의 내면,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의 애정을 얻으려는 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라는 대사도 마찬가지로 인상적이었다. 위의 두 말에 적잖이 공감하기도 했고, 자신만의 갈라(달리가 사랑한 여인)를 찾지 못해 '고치'라고 불릴 만한 특수 기계에서 위안을 찾는 모습이 특히 애처롭게 느껴져 사건의 진상과 무관하게 피해자를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착잡한 마음이 앞서게 되는 것 같다.

 내일 떠나는 3주간의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에서 바르셀로나 근교인 피게레스라는 소도시도 방문할 예정이다. 그곳에 있는 달리 미술관을 가기 위함인데, 그 미술관엔 비록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은 없지만 - 그 작품은 뉴욕의 모마MOMA에 있고 여담이지만 그 작품은 이미 봤다.ㅋ - 달리의 평생동안 보여준 예술 세계의 진수, 갈라를 향한 애정의 증표 등 달리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다고 해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달리가 뛰어난 예술가지만 작품 중엔 가끔 과하거나 일반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결과물도 있어 과연 100% 만족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래도 이렇게 <달리의 고치>로나마 달리 이야기를 접한 만큼 꼭 방문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달리와 갈라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며 미술관을 둘러보게 될 듯하다. 과연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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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 반복되는 일상에 떠밀리다 마침내 새로운 세계에 닿다
오건호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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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4



 포르투갈은 유라시아 반도 최서단에 있는 나라로 리스본 근교에 있는 호카곶은 '세상의 끝'이라는 이명이 있다. 먼 옛날 사람에겐 드넓은 수평선의 대서양밖에 보이지 않는 호카곶이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으리라. 하지만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느니 세상의 끝이라느니 하는 표현은 다소 과하거나 혹은 편협한 구석이 있다. 그렇게 따지면 한반도 땅끝마을도 세상의 끝이지. 한반도도 결국엔 유라시아 반도의 어느 한 방향에서 끝자락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저런 이명이 붙은 데엔 포르투갈이 대서양을 통해 유럽 변두리 나라에서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돋움했다는 자부심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지금 세상에 머물기보단 저편으로 새로운 가능성 내지는 희망을 찾아 기어코 엄청난 결과를 이룩해낸 자부심과 그러한 과거에 대한 향수가 녹아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내일부터 3주간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떠나는데 호카곶도 반드시 방문할 예정이다. 그때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일주일간 포르투갈 여행을 바탕으로 한 이 에세이의 제목이 난 처음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배경이 어떻든 간에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란 수식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 첫째, 그리고 에세이의 제목으론 너무 식상한 감이 있다는 것이 둘째였다. 명색이 자기 표현의 정수로 통하는 에세이의 제목이거늘 이미 널리 알려진 표현으로 제목을 장식한다는 게 처음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작가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역량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흑백이면서 사실적인 화풍은 사진을 연상케 했는데,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만화 같으면서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인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는 점이 놀라웠다. 하루이틀 그려본 솜씨가 아닌 듯했는데 놀랍게도 저자는 그림을 따로 전공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이과 출신에다 직장도 그림과 연이 없는 곳이었는데 작금과 같은 삶에 피로감을 느끼던 와중 포르투갈의 도시 포르투가 예술가들의 도시란 말에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참 충동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는데 아무튼 처음엔 일러스트에 끌려 이 책을 펼친 것이지만 프롤로그에서부터 느껴지는 저자의 행동력과 필력에 이끌려 이후부턴 글에 집중하며 읽어내려갔다.


 책의 분량 자체는 200페이지도 넘지 않으며 개중엔 1~2페이지를 차지는 일러스트의 분량도 상당한 지라 체감상 100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책을 읽은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글의 밀도가 낮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행 중에 겪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그대로 집필한 글이라 글의 분량이 각각의 글이 단편적이고 촘촘하게 이어지지 않고 약간 따로 노는 부분이 없잖았는데, 작가의 사유나 순간순간 빛나는 감성이 깊이가 있는 만큼 책의 구성에도 고민을 해봤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가령 처음엔 리스본 공항에서 호의를 거절했다가 마지막에 자신도 리스본에 처음 온 관광객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저자가 느꼈던 감정처럼 독자로 하여금 시선을 확 잡아끄는 서사가 몇 개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포르투갈 여행 정보나 역사, 문화를 알고자 이 책을 읽는 건 아주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다. 저자 본인도 충동적으로 포르투갈로 떠난 탓인지 여행 중에 실시간으로 알아가는 느낌이 강해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되진 못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꼭 포르투갈이 아니어도 이 책의 내용은 어느 정도 성립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허나 호카 곶을 앞두고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란 이명을 저자 나름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부분은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어서 이 책을 읽은 게 후회되지 않는다.


 에세이 작가들에게, 특히 몇몇 여행 에세이 작가들에게 특히 미안한 얘기지만 사진이나 일러스트를 제외하면 텍스트의 내용만으론 차별점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필력과 사유가 별로라 다 읽고 시간 아까운 경우가 적잖았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의 경우 포르투갈을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이 여행을 통해 깨달은 여러 사유를 담담하게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둬서 적어도 시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의 끝'이라고 한들 그래봤자 바다가 보이는 곶에 불과한 장소에서 저 나름대로 희망을 발견하는 서술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작가의 여정에 빠져들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때론 담담하게 얘기하면 더욱 몰입하게 된다.

 위에서 '이 책의 내용은 꼭 포르투갈이 아니어도 성립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이 작가는 다른 나라, 포르투갈과 관련이라곤 없는 폴란드나 동남아 어디를 가도 이만한 수준의 사유의 결과물을 냈을 테니까. 중요한 건 포르투갈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의 여정이 참 부럽기도 했다. 나에게 여행이란 철저한 계획의 산물이다. 계획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완벽한 여행을 위해 많이 공부하고 여러 입장권과 투어를 예약할 때도 있다. 물론 그 과정을 꽤나 즐기는 편이지만, 정말 오래전부터 그 여행지에 방문하는 걸 너무나 고대한 나머지 그저 발길 닿는대로 느끼고 사유하는 여행과는 연이 없었던 것도 같다.


 여행엔 나처럼 계획하는 여행과 반대로 충동적으로 떠나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여행처럼 다양한 갈래가 있다. 여행은 반드시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고, 계획적인 여행이라고 사유가 없을 리 만무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라도 마냥 무계획적인 여행일 수도 없다. 문제는 내가 지금껏 여행은 이래야만 한다고 나도 모르게 규정을 지으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무척 손해 보며 살았을 것 같단 생각도 드는군.

 이번 3주간의 여행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완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여행이 될 듯해 불안하면서 설렌다. 내일 출국인데도 실감이 안 나는데 이래도 되나 싶구만. 분명히 날 당황시킬 일이 많이 일어날 텐데... 대비는 해두더라도 생각이나 판단은 그때 내려야겠다. 과도하고 생각이 개입되면 자칫 여행을 떠난 보람이 반감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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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를 위한 스페인어 안내서 - 최소한의 스페인어로 떠나는 미식 여행 자기만의 방
이지가을 지음, 허지영 그림 / 휴머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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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스페인 여행이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아 부랴부랴 스페인 관련 책을 찾아 읽고 있는 중인데, 그중 실용적이기로 이만한 책이 있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알아보게 된 결정적 계기가 스페인 음식이었던 만큼 현지 식당 방문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는데 그런 내게 딱 알맞은 책이었다. 여행 떠나기 직전에 읽게 돼 다행이구만.

 스페인어 입문용 교제로 공부 중이고 여행용으로 유용한 스페인어도 따로 습득하는 중이지만 이렇게 컨셉을 확실히 정해주니 더욱 잘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전문적인 자세로 내용을 주도하고 음식 설명, 식당에서 벌어질 법한 다양한 상황을 아주 맛깔나게 설명해줘 이 책만 정독하면 스페인 식당에서 무리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음 좋겠지만 저자도 말하듯 십중팔구 현지인 상대로 반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 퍽 헤맬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준비함에 있어 식당에 특화된 회화를 미리 알아두는 건 아주 실용적인 자세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좋든 싫든 여행지에서도 식사를 해결해야 하고 기왕이면 평소보다 더욱 실패없이 해결하고 싶기 마련이잖은가. 꼭 미식이 아니어도, 어지간히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다수의 독자가 적어도 식당에서만큼은 맛있는 걸 먹고 싶고 자기 의사를 표명하고 싶을 것이다. 음식의 기호 문제도 있고 알레르기처럼 치명적인 문제도 발생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번역 어플의 성능이 발달하고 정 급하면 영어나 바디랭귀지를 동원하면 된다지만 그렇게 삐딱선을 타버리면 여행지에서의 식당 방문은 소극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럼 여행의 재미가 반 이상 급감해버린다. 프리토킹이 아니어도 대화의 가닥이라도 잡을 정도라면 '내가 이걸 알아듣다니!' 하고 남모를 짜릿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식당에서의 어휘와 회화 숙지는 필수불가결한 준비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스페인의 요리뿐 아니라 스페인 사람들, 저자 본인이 겪은 에피소드도 짤막하게 곁들여진 것과 허지영 일러스트레이터의 아기자기한 그림체가 어우러져 입력할 정보가 흘러넘침에도 부담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노력 깨나 해야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의 행복하고 만족스런 스페인 여행을 기원하는 저자의 응원에 힘입어 나도 좀 노력이란 걸 해보려고 한다. 여행은 노력해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것도 3주 여행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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