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물쇠가 잠긴 방
기시 유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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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0



 '서 있는 남자'


 진상을 알고 나면 비교적 단순하고 오히려 범인의 지능이 의심될 만큼 작위적이기 그지없는 트릭이었지만, 작가의 연출 방식이나 이 트릭에 대한 에노모토의 표현과 범인을 압박하는 그의 추리가 인상적이었다.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발상'이 동원된 트릭이란 표현은 거창하지만 재밌었고, 욕심이 지나쳐 자가당착에 빠진 범인을 조롱하는 에노모토의 마지막 말은 제법 통쾌하기까지 했다. 책의 첫 번째 수록작으론 약한 편이었지만 이만하면 속도감 있게 잘 읽었다.



 '자물쇠가 잠긴 방'


 표제작이자 수록작 중에 도입부가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반대로 트릭과 범인을 지목하는 증거는 그렇게 흡족스럽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과학에 영 젬병이라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작가의 <악의 교전>이 연상되는 범인 캐릭터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악마의 존재는 적어도 소설 속에선 긍정적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독자에게 소설의 결말까지 지켜봐야 하는 당위성과 몰입도를 선사하니까.



 '비뚤어진 상자'


 범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도서추리 작품. 트릭도 참신하고 쫓기는 심정인 범인의 심리 묘사도 일품이었지만 범인의 동기며 인물상 등 극단적인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라 한편으로 읽는데 짜증이 나기도 했다. 동기는 수록된 네 개의 작품 중 가장 동정심을 유발했지만 범인은 도저히 동정심을 가질 수 없는 인물이다. 도서추리 작품의 특성상 범인의 시점에서 전개되기에 무사히 완전범죄를 달성하기를 응원하는 마음이 약간이나마 들 법도 한데 말이다. 새삼 기시 유스케가 악마적인 인물상을 그리는 데에 도가 튼 작가구나 하고 감탄했다.



 '밀실극장'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던 작품. 밀실의 장치가 됐던 연극의 묘사는 너무 난잡하지만 그 난잡함마저 사랑스러웠고 범인의 동기...가 아닌 사연도 짠해서 의외로 여운도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밀실 사건집'을 표방하는 이 책에서 가장 단순명쾌하고 혁신적인 트릭이어서 적잖이 놀랐다. 대놓고 웃기려고 쓴 소설인 데다 트릭을 풀이하는 과정은 약간 지루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수록작 중 가장 재밌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다. 앞선 수록작이 트릭보다 캐릭터나 연출에 더 눈길이 가는 것과 대조적인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거야말로 코미디라 할 수 있겠군.



 시리즈 다음 작품인 <미스터리 클락>은 예전에 읽었는데 확실히 두 번 읽으니까 반복되는 컨셉이 식상해져 후속작이 나와도 과연 찾아볼까 싶다. 후속작이 너무 안드로메다로 가버려서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이 어지간히 평이 좋거나 상을 받지 않은 이상 읽을 생각이 들지 않을 듯하다. 대신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 코미디도 좋지만 역시 호러가 좋겠다. 최근 작가의 호러 작품이 몇 권 출간됐으니 그 작품들을 찾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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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인 1~2 박스 세트 - 전2권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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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우라사와 나오키의 단편은 처음 읽어보는데 단편에도 작가의 장기와 동시에 단점도 고스란히 드러나 여러모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을 소재로 한 일종의 프로젝트성 작품으로 즉흥적인 설정에 살을 붙여 유쾌한 활극으로 발전시킨 작가의 서사적 기교가 돋보였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꿈을 연상시키듯 모호하게 처리하는 결말은 아무래도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주인공 부녀가 전화위복으로 행복한 결말을 맞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빌리 배트> 못지않은 허무함을 맛봤을지 모르는 일이다.

 짧은 분량의 작품이라 주제의식이 그렇게 돋보이진 않았고 읽은 지 일주일 지난 지금은 솔직히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보단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복선을 교묘히 잘 회수한 것이나 작중 등장인물은 뻐드렁니 소장의 그럴 듯했던 계획과 그 안에 담긴 낭만,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는 페르메이르의 <레이스 뜨는 여인>을 나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는 게 이 작품을 읽고 난 뒤에 남은 감상이다. 뻐드렁니 소장은 그 특유의 말투 때문에 비호감이었고 이래저래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짧은 작품 안에서 비중과 존재감은 상당하니 호불호를 떠나 제법 성공적인 캐릭터라 생각된다. 창작에 있어 주제의식처럼 관념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때론 개성적인 캐릭터와 번뜩이는 서사가 더욱 중요할 수 있음을 잘 역설하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몽인>은 작가 특유의 장엄함과 최소 2세대에 걸친 숙원 같은 것 없이도 가볍게 즐겨 읽을 만한 작품이었다. 작가가 단편도 어느 정도 잘 그린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다른 단편도 국내에 출간된 게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 이 작가의 장편은 가벼운 마음으로 펼치기엔 부담스러워서 이것도 좋은 선택일 듯하다. 작가의 단점이라 꼽히는 신파도 유치함도 허무함도 덜하니 오히려 단편이라 더욱 괜찮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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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켈리튼 키
미치오 슈스케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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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삼은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을 읽었다. 일반적으로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삼은 소설이나 영화의 경우 그들의 무자비함과 폭력성에 주목해 스릴을 연출한다. 주인공을 추적하는 살인마로든, 아니면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든 이 공식은 정해져 있다. 대개 이 경우 사이코패스는 불가해한 선천적 살인마로 그려진다. 사이코패스라고 다 살인마인 건 아니라고들 하지만 픽션에서 다뤄지는 모습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모습 일색이다.

 미치오 슈스케는 사이코패스의 정의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연구하고 그 단어가 어떻게 오용됐으며 사람들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주목하며 집필에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원래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일컫는 의학 용어에 지나지 않았던 사이코패스가 현재는 거의 극악무도한 살인마와 동의어로 여겨지는데 작가는 그 원인을 그들의 공감 능력 부족과 더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미친 계획 실행력 때문이라고 본 것 같다. 특히 '주저하지 않음'은 이 작품에서 엄청난 스릴을 안겨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작품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반전은 객관적으로 말해 약간 식상한 축에 들었다. 하지만 그를 연출하는 방식과 사이코패스라는 소재에 접목시키는 기술, 거기다 에필로그에서의 애틋한 분위기와도 이어지는 등 여러모로 완성도 높은 반전이란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거침없는 행동과 그 행동이 불러일으킨 후폭풍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이고 멈출 수 없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가게 됐다. 도입부에선 인물이나 배경, 그리고 사이코패스에 대해 작가가 연구했을 내용을 히카리 누나의 입으로 대신 설명도 해주느라 이야기의 발동이 다소 늦게 걸리는 편이었지만, 발동이 걸린 이후부턴 거의 뭐... 가독성만으로 따지만 내가 접한 작가의 작품 중 단연 최고였다.

 반대로 제목은 미묘했다. 센스 넘치지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작품이 여러모로 공을 들인 티가 많이 나는 터라 이 묘하게 잘 들어맞지 않는 제목은 약간 마음에 걸린다.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소설은 뻔하디 뻔하다는 나의 편견을 멋지게 부순 작품이기에 더 마음에 걸리는 지도 모르겠다. 신파적인 결말로 피와 폭력이 난무했던 중후반부를 씻어내는 듯한 연출이 인상적이었는데 작중에 언급되는 그림 형제의 동화 <황금 열쇠>가 여운을 더해준다.


 기시 유스케 이후로 오랜만에 사이코패스의 무시무시함과 동시에 서글픔을 느낄 수 있던 반전 어린 작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사이코패스임을 자각한 주인공이 자기 운명을 이미 정한 듯 살아가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안겨줬고 그 아이가 사이코패스일 줄 모르고 간절한 마음으로 낳았을 부모의 마음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줬다. 사이코패스는 유전인가 배경인가, 그리고 설령 유전으로 이미 정해지는 거라고 한들 그런 사람은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재고의 여지 없이 거릴 두고 격리해야 하는 건 가당키나 한가. 사이코패스인 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작품이다 보니 오히려 객관적으로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된 굉장히 의미 있는 독서였다.

 한때 미치오 슈스케는 매너리즘이 의심될 만큼 애매한 결과물의 작품을 종종 발표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잘 극복한 듯하다. 최근에도 국내에 작품이 활발히 출간되는 걸 보니 매너리즘 같은 건 완전히 나의 기우에 불과했던 것 같다. 사람의 운명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폼이 떨어지는 작가라든가 사이코패스로 판명된 사람이라든가 사람이 앞으로 가야 하는 길엔 안 봐도 비디오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다. 요새 자주 드는 생각이다. 안 봐도 비디오라니, 누가 만든 말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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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아내
시라쿠라 유미 지음, 김자경 옮김 / 제이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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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9.0



 최근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왔다. 세보니 스무 번째 일본 여행이었고, 알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이 블로그에 처음 남긴 여행기의 여행지도 후쿠오카였다. 그게 9년 전 글이고 그로부터 변한 건 방문해본 여행지의 수밖에 없다. 그런대로 많은 곳을 여행했고 그만큼 더 가고 싶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다. 지금 한창 교토 여행기를 쓰는 중이라 언제 후쿠오카 여행기까지 다 쓸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 여행은 짧지만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던 여행이다.

 <스무 살 아내>는 서른 다섯인 아내가 스무 살인 척 대학에 입학한 걸 바라보는 남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연작 소설집이다. 서른 다섯이 맞나 싶을 만큼 응석받이인 아내와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내면의 벽을 뛰어넘지 못해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남편의 연약함은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유발했는데, 내가 과연 이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은 건 11년 전이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뒤인 지금도 처음 읽었을 때보다 나는 과연 더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적어도 뚜렷한 성과랄 게 없는 10년이었음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물론 변했다.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그 변화가 미래와 노후를 대비한 초석으로, 건설적인 노력과는 결이 다르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분명 10년 전의 나완 다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은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주인공 부부의 모습이 10년 전보다 읽기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는 것인데 이는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버린 탓이겠다. 그런데 사실 이들은 내가 감히 비교 대상으로 삼기엔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선 한가닥하기에 내가 이들을 평가질하는 것은 결국 독자라는 권위를 내세운 오만방자한 행동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여행은 여전히 좋지만 이대로 살아선 안 된다는 생각에 요새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단지 해외에서 온 여행자란 이유로 사람들한테 대접 받는 느낌이 짜릿해서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다. 당연히 여행을 그런 이유만은 떠나는 건 아니지만, 여행 중에 뜻하지 않게 트러블이 발생하거나 일정이 꼬이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을 보고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같이 간 친구는 어떤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무덤덤하던데, 그 이유로 여행이란 어차피 인생에 있어서 외전이기에 일정이 조금 틀어져도 자기 인생에 지장을 주지 않기에 라고 말했다.

 내가 여행 중에 유독 일희일비하는 건 어쩌면 여행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겨서, 혹은 현실을 외면한 채 몰입할 수 있기에 조금만 트러블이 발생해도 그토록 예민하게 구는지도 모른다. <스무 살 아내>에서도 만화나, 카스테라, 교복 등 온갖 자질구레하고 쓰잘데기 없는 것에 몰두하고 현실을 외면하려는 주인공의 아내의 모습이 시도 때도 없이 묘사되는데 이 모습이 참 한심하게 여겨지다가도 여행에 집착하는 나와 뭐가 다른가 하고 반성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마음의 벽을 뛰어넘고 성장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결말 즈음엔 주인공 부부가 어느 정도 갈피를 잡고 성장할 여지를 남긴 것과 달리 나는 아직 선택의 기로에서 헤매는 중이다. 최근 심적으로 당황스럽고 허무한 일과 마주해 심란해진 나머지 블로그에도 신경을 못 쓸 정도다. 이 책을 비롯해 예전엔 즐겨 들었던 노래의 가사나 예능이나 유튜브에서 접하는 좋아하는 연예인/유튜버들의 말이 급소에 박힌 듯 나를 흔들고 아프게 한다.

 마냥 웃고 즐기기엔 인생은 너무 길고 세상은 그리 너그럽지 않다. 지금 내가 아무런 변화도 각오도 없이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나이만 먹었다간 내 미래는 안 봐도 비디오다. 그건 아는데... 이 책을 읽고 이렇게 후기를 남기는 동안에 뭔가 결심을 하기엔 너무 거대한 고민인 것 같다. 독보적인 여운과 위로를 선사한 작품의 결말이 나에게 뭔가 깨달음의 실마릴 던졌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인생의 변화를 책 한 권으로 계기 삼으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안일하고 위험한 생각일 것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또 나는 나대로 충분히 사유하며 활로를 모색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게 한숨 쉬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고 나는 지금도 고민 중이다. 과연 어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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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언어를 만나다 - 당신의 시선을 조금 바꿔줄 스페인어 이야기
그라나다 지음 / 북스토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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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외국어는 배우기 어렵지만 두 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는 외국인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외국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알게 되면서 모국어만 사용했을 때완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접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언어를 잘하는 건 타고나야 하는 일이지만 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건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다. 비록 언어를 진지하게 공부해본 적은 없는 나지만 언어 관련 책은 종종 찾아 읽는 이유는 바로 간접적으로나마 외국 문화를 접해 새로운 관점을 얻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제목에서 가리키는 '태양의 언어'란 바로 스페인어다. 스페인이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만큼 태양의 언어라 불러도 딱히 손색은 없을 듯하다. 물론 스페인어의 공식 별명은 아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스페인어를 그렇게 지칭한 이유는 스페인어란 언어가 퍽 따뜻하게 여겨져서 라고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느낀 바는 스페인어는 따뜻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정중한 언어란 것이었다. 속사포 같고 욕설도 자유롭게 뱉고 듣기엔 다소 자극적이지만 - 누군가는 스페인 사람들의 음색이 마치 누군가 목을 조른 채 말을 시키는 것 같다고도 한다... - 언어는 체계적으로 정중하단 인상을 받았다. 듣기엔 부드럽지만 냉소적이기 그지없는 프랑스어와는 사뭇 다르더군. 책 속 저자의 해석이 100% 공신력이 있진 않으나 참고 문헌의 양이라든가 출처를 부지런히 밝히기에 페이지를 넘길수록 신뢰하며 읽게 됐다.

 이 책은 특이하게 단순히 한국어와 스페인어만 다룬 게 아니라 영어와 일본어까지 다룬다. 저자의 약력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첫 번째 전공이 일본어고 두 번째가 스페인어인 듯 일본어 얘기도 자주 꺼냈다. 그런데 일본어도 정중하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운 언어인데 이 책에서 저자가 한 말에 따르면 스페인어도 일본어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정중하다. '나는 배고파' 가 스페인어론 '배고픔이 나를 괴롭게 해' 처럼 우리 기준에선 필터를 덧씌운 듯한 수동적 표현이 일상적이고 독자가 이 문장이 의문문인지 강조문인지 알 수 있도록 문장 앞에 를 적는다든가 아니면 'buenos dias'가 '좋은 아침들'이란 뜻인데 이걸 매일 아침마다 인사로 건네는 이유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너의 아침이 좋길 바란다든가 라는 해석 등 스페인어에 대해 신선하고 정겨운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스페인어를 적힌 대로 읽으면 되는 난이도를 두고 친절함과 터프함이 공존하는 멋진 언어라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젠 어디 가서 친절함과 터프함, 그리고 정중함이 공존하는 언어라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가는 스페인,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대다수의 중남미 국가들이다. 작가는 스페인에서만 생활해본 것이 아닌지 스페인 말고 다른 국가 얘기도 풀어내는 등 책이 짧지만 다채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나의 주제로 4페이지 미만으로 얘길 풀어내지만 대체로 밀도가 높고 유익하며 위에서 얘기했듯 꼭 스페인어가 아니더라도 일본어나 영어로도 예시를 들어 언어란 비슷하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하단 인상을 받기도 했다. 가령 잘 때 꾸는 꿈과 장래희망을 의미하는 꿈이 다른 나라에도 동음이의어 관계인 것도 신기하고 똑같은 뜻의 단어 같지만 무게감이 달라 완벽히 번역하기 힘든 사례들도 인상적이었다. 언어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르겠고 복잡하다.

 언젠가 일본어와 스페인어는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데 이 책을 읽고 스페인어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더욱 높아졌다. 스페인어는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발음에 있어서는 진입장벽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놈의 문법 때문에 깊이 파고들수록 어려운 언어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체 불가한 매력이 있는 언어란 건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확실히 느끼며 매료당한다. 배움은 뒤로 미루는 게 아니라고 하니 늦어도 올해 안엔 스페인어 학원을 등록할 생각이다. 부디 다짐으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힘들게 이해하고 외워서 알게(saber) 된 철학, 역사, 수학 공식은 왜 그렇게나 쉽게 휘발되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같이 공부한 친구들, 여행 등의 특별했던 경험은 지식보다는 오래 남는다.
saber는 금방 휘발되며 conocer는 무모하다. 새로운 지식과 경험에 대한 두려움보다 기대를 갖고 saber와 conocer를 조화롭게 해나가면 삶은 계속 풍요롭지 않을까. - 141~142p

생각해보면 본질적으로 희망과 기다림은 서로 통한다. 희망하며 이루어질 날을 기다린다. 희망이 없으면 더이상 기다리지도 않는다. 인생은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의 모임이다. - 154p

빈손으로 온 인간의 사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어린 시절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도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다. 설령 ‘열심히‘란 단어가 조롱으로 쓰여도 그늘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햇빛으로 나오려고 한다. ‘포기자‘보다는 ‘노력가‘라는 말이 낫지 않은가. - 2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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