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5



 스포일러 있음


 기욤 뮈소의 작품은 처음 읽은 작품이 가장 재밌다는 말이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접하는 작품은 다 처음 읽었던 작품의 복사 붙이기 같다는 말이 많은데 나 역시 거의 동의한다. 물론 이 작가도 나름대로 시도를 많이 하지만 특유의 가벼운 문체와 오그라드는 작풍 때문에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기욤 뮈소의 작품이며 무려 13년만에 다시 읽었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사이에 기욤 뮈소의 책도 몇 권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평점을 보면 알겠듯 다시 읽으니 처음의 감동이 무척이나 많이 반감됐다. 그 당시에 나는 달달함에 내성이 없었고 이 작품의 결말처럼 다소 작위적인 해피엔딩에도 감동을 받았으나 이제는 달라졌다. 이제 나는 냉소적이고 확실한 건 취향도 많이 변했다. 물론 이 작품을 단순히 취향 차이라고 둘러댈 만큼 객관적으론 괜찮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궁하지만... 그래도 13년 전에 감동을 받았던 과거의 나를 위해 이 이상은 말을 아끼겠다.


 다만 작품의 핵심 소재인 시간 여행에 대해선 좀 더 얘기하고 싶다. 과거의 엘리엇과 현재의 엘리엇이 의사로서 협동하여 일리나를 살리는 과정은 개인적으로 명장면이라 생각하고 현재의 앨리엇이 폐암으로 죽을 예정인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것엔 안중에 없고 대신 그저 일리나를 한 번 더 보는 것에 간절했던 모습, 일이 틀어졌을 때도 자신의 딸 엔지가 아예 없던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해 현재와 과거의 자신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제안을 고민하는 전개는 다 좋았다. 요새는 '과거를 바꿈으로써 미래도 바뀐다'는 고전적인 시간여행물의 법칙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은 많지만, 이야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적인 개연성이 없더라도 작가가 해당 작품만의 법칙을 준수한다면 거부감 없이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매트가 엘리엇이 죽은 다음에 시간여행 알약을 먹어 과거를 바꾸는 후반부의 전개는 사족이자 누워서 침 뱉기 아니었나 싶다. 이는 과학적인 개연성과 더불어 해당 세계관의 개연성도 저버린 전개였다. 작가가 감동적인 결말을 위해 그 장면을 넣은 건 알겠는데 그 의도가 너무 뻔히 보였다. 최초의 앨리엇과 달리 시간여행의 위험성을 알게 된 후반의 앨리엇이 어떤 경위로 알약을 얻었고 10개 중 하나만 남긴 이유가 설명이 안 되는 등 은근히 앞뒤가 안 맞는다. 현재의 앨리엇이 과거로 간 시점에서 현재와 과거의 앨리엇은 엄연히 다른 인물이므로 이렇게 디테일하게 둘의 미래가 일치하는 건 명백히 작위적이지 않은가. 13년 전의 나는 이러한 작위적인 전개를 무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된다. 그 사이에 적잖이 예민해졌나보다.


 과거를 바꿔 미래도 바꾼다는 전개는 늘 설레는 전개다. 제아무리 말이 안 되고 위험천만한 계획이더라도 한 번쯤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으리라. 나 역시도 이 작품을 처음 읽고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만큼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보편적으로 몰입할 만한 소재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재로 남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일 텐데 기욤 뮈소는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뒀다. 영화화도 이뤄졌고 이렇게 개정판으로도 나왔다.

 아까 후반부의 작위적인 전개를 꼬집으면서 차라리 새드엔딩이면 어떨까 이 생각도 해봤다. 다른 작품의 스포일러라 말을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기욤 뮈소의 작품 중 새드엔딩의 작품이 있긴 하다. 이 작품도 그랬으면 어땠을까? 아마 그러면 이 정도로 많이 회자되는 작품은 못 됐을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의 전개가 앞뒤가 안 맞는 건 너무 아쉬운데... 참 아쉽다.

조만간 기욤 뮈소의 몇 안 되는 새드엔딩 작품도 읽으려고 한다. 그 작품 포스팅에서 이 작품에 대한 얘기도 해볼 예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 제4권 부패와 자각의 시대 - 믿고 보는 신일용의 인문교양 만화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4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6


 나는 지금까지 동남아시아 국가로 여행을 네 번 떠났다. 말레이시아 한 번, 태국 한 번, 작년에 베트남 두 번. 은근히 많이 가본 편이지만 그렇다고 동남아에 대해 아는 거라곤 얼마 되지 않는다. 물가가 싸고 덥고 휴양하기에 좋은 곳이란 인상이 강하고 그 나라의 역사나 언어에 대해선 수박 겉 핥는 수준으로만 알고 있었다.

 배탈이 거하게 났던 말레이시아, 코로나 직전 마지막 여행지 방콕, 코로나 이후 처음 간 여행지 하노이...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여행지들이기에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러한 나의 갈증을 제대로 해소시킨 만화로 저자는 최대한 밀도 있게 압축을 해도 4권이나 나왔다고 서두에서 미안한 듯 말하지만, 읽다보면 오히려 두세 권은 더 나와도 될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책에서도 나오는 얘기지만 동남아시아가 워낙에 미국 뺨칠 만큼 여러 인종과 문화가 혼합된 곳이라 역사도 다채롭고 깊이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밀도를 유지하고 분량을 더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필리핀의 호세 리살과 베트남의 호찌민이 왜 죽어서도 그 나라 국민들한테 절대적인 지지와 예우를 받는지, 싱가포르는 어쩌다 말레이시아한테 독립을 '당하고' 이내 리콴유라는 독재자가 어떻게 나라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는지, 미얀마와 태국의 복잡하고 연민이 느껴지는 근대사와 동병상련이 느껴지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근대사, 무수히 많은 독재자 중 가히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캄보디아의 폴 포트...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인물과 역사적 사건이 너무 많아 약간 부끄럽기도 했고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게 됐다.

 <먼나라 이웃나라> 스타일의 학습 만화긴 하지만 이 책은 정치/문화/역사에 관심이 지대한 성인 독자가 아니면 그 재미와 유익함이 어필되기 힘든 만화였다. 그만큼 취향에 맞으면 이만한 만화가 없을 테고, 나 역시 일부 파트는 생각보다 내용이 깊어서 읽기 버거웠지만 그건 내가 연달아 읽어서 그런 거지 생각날 때마다 파트별로 끊어 읽으면 지식 습득의 효과는 상당할 터다.


 개인적으로 세계일주에 성공한 사람이 마젤란도 마젤란의 선원 12명도 아닌 그 배에 올랐던 말레이시아인 노예라는 것과 내가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단편소설인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이 언급된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유럽과 일본의 식민지 시절을 겪었고 아직도 선진국, 특히 서구의 시선에서 보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지지리 궁상맞고 결점이 많은 나라들이 많긴 하다. 그 시선은 일리가 있으며 자국 사람들도 그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지들이 본인들 이득에 따라 이용한 탓에 동남아 국가들이 아직도 피해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역겹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인구의 힘일까 문화의 저력일까 힘든 역사를 견뎌낸 끈질김 덕분일까? 책에서 접하는 근대사를 보면 진작 나라가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극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일부 국가에선 현재진행형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외세에 시달리고 남북으로 분단되기까지 한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역사를 가진 국가라고 자평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동남아시아 국가들만 봐도 우리와 비슷한 공감대의 역사를 가진 나라는 많다. 우리 역사가 힘들지 않다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처절하고 힘들었던 시절이 어느 나라에나 보편적으로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가 롤모델로 삼았던 미국, 일본, 유럽의 선진국들은 식민지 신세를 겪지 않고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들이라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초라하고 한스럽게 느껴지는 것일 터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역사를 가진 나라이건 뭐건 그걸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걸, 그렇다고 우리와 비슷하게 힘든 나라들이 결코 열등해서 극복하지 못하는 게 아니란 걸 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와 선입견을 없애고자 기획했던 신일용 작가의 책은 내용적으로나 만화적으로나 훌륭한 책이었다. 만화치고 글이 너무 많이 더디게 읽히지만 그만큼 밀도가 높았다. 또 글이 많다고 만화적 재미나 그림이 후달리는 것도 아니니 - 유려한 화풍은 아니긴 하지만 - 만화를 좋아하고 동남아에 관심이 있거나 동남아로 여행을 계획 중인 사람은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책을 읽고 동남아 어딘가로 여행을 떠고 싶어졌는데... 어디로 갈까? 어디든 가기 전에 이 책을 다시 읽고 갈 것이다.


 p.s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단편소설은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 장편소설은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범 협박 시 주의사항 - JM북스
후지타 요시나가 지음, 이나라 옮김 / 제우미디어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6



 스포일러 : 10%


 이 작품의 원제는 '그녀의 공갈'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온 제목보다 원제가 선입견을 만들지 않아서 더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제목은 마치 주인공이 겁도 없이 살인범을 협박했다가 피의 보복을 당하는 내용으로 연상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협박을 결심하기까지 고뇌와 협박을 하고 난 다음에 갖는 뉘우침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개가 중요한 작품이기에 '살인범 협박 시 주의사항'은 작품 분위기와 미묘하게 따로 노는 감이 있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저 제목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살인범을 협박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이 작품의 내용에 의하면 살인범을 협박할 때 과연 그 사람이 정말 살인범인지 확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일 터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은 헛다리를 짚어도 제대로 짚은 셈인데, 아쉬운 점은 이 주인공의 오해가 사건의 커다란 변수를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는 작가의 섬세한 묘사력은 흥미로웠지만 주인공에게 협박을 당한 쿠니에다의 시점을 생각하면 돈을 뜯긴 것을 제외하면 그의 신변에 당장엔 커다란 변화가 일지 않는다. 그로 인해 협박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생긴 걸 빼고 순수하게 범죄소설의 관점에서 주인공의 오해와 협박이 무슨 역할을 했는가, 그 점이 한 번에 와 닿지 않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간단히 말해 심리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적인 짜임새와 결말의 의외성은 기대보다 부족한 작품이었다. 결말은 먼 길 돌아온 것치고 급작스럽고 여운과 동시에 허무함도 그에 못지않게 안겨져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가련한 처지이면서 악녀에 가까운 면모도 보인 주인공 케이코의 캐릭터성은 많은 질문거리를 낳지만, 개인적으론 케이코는 절박함이나 악녀스러움이 내가 예상보단 2% 부족해 그녀의 선택이나 그녀의 자책 모두 과하게 느껴졌다. 만약 같은 플롯과 같은 인물을 가지고 기리노 나쓰오나 기시 유스케가 집필했다고 생각해보자. 훨씬 더 음습하고 악마적인 작품이 탄생했을지 모른다.

 20대 여성과 50대 남성의 플라토닉 러브도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 30대 남성의 내 경우엔 그래도 서로가, 특히 남성 쪽이 선을 지키며 감정을 교류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성 독자들도 같은 생각일까? 일본 특유의 유흥 업소 종사자 여성을 부적절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불쾌해하지 않을까. 내가 내 감상에 젖으면 그만이지, 굳이 여성 독자들의 시선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으나 등장인물과 비슷한 연령대와 처지에 있는 독자들의 반응도 내심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만 애잔함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필력을 겸비한 작품인 것인지... 나의 감상과 타인의 감상이 극히 다를 때가 많아서 어느 순간부터 내 감상을 함부로 밀어붙이지 못하겠더라. 더군다나 말 한 마디에도 검열을 해대는 시대가 됐으니 원;;


 안타깝게도 작가는 이미 고인이 됐다고 한다. 유명 작가인 것에 비해 국내에 출간작이 이 작품이랑 <텐텐>밖에 없던데 나오키상 수상작을 비롯해 여러 작품이 소개되길 바란다. 소개되는 일본 소설가들이 다 거기서 거기다 보니까 이젠 일본 소설이란 것만으로 식상하게 다가올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네자와 호노부와 고전부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0


 요네자와 호노부를 대표하는 시리즈 '고전부'의 팬을 위한 책으로 미공개 단편소설과 작가의 인터뷰, 창작 노트 등 팬이라면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다른 추리소설가들과의 대담도 있고 소설가 지망생을 위한 강연 내용도 있고 시리즈 집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고전 추리소설도 소개돼 여러모로 흥미로웠지만, 정작 가장 기대한 미공개 단편소설의 완성도는 다소 썰렁해 전반적인 만족도는 그닥이었다. 만약 이 책이 단편집이었다면 다른 수록작이 그 썰렁함을 만회해줬을 테지만, 딱 한 편만 수록된 지라 실망감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전에 나온 단편의 플롯을 반복해 참신함마저 떨어졌으니 내가 너무 박하게 평하는 건 아니리라.

 소설은 물론이거니와 만화와 애니로도 섭렵했으니 나는 이 시리즈의, 나아가선 작가의 팬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읽다보니 내가 생각보다 작가의 팬을 자처하기엔 읽지 않은 작품도 많거니와 읽었으나 감동은커녕 실망한 작품도 상당해 작가의 팬이라 할 순 없을 것 같다. 심지어 모든 발언이나 창작관이 달갑게 들리지 않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를 비롯해 기시 유스케, 하라 료, 요 네스뵈 등 여러 작가들의 팬이 됐다가 실망을 거듭한 경우가 다반사이며 현재로선 이사카 코타로 정도가 아닌 이상 내게 있어 작가 이름만 맹신하고 작품을 고르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개개의 작품을 평가해야지 작가의 이름에 현혹돼 평가가 흔들리면 그 즉시 인지부조화에 시달릴 확률이 크니까 말이다. 아닌 건 아닌 거고 좋은 건 좋은 거다. 한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할 때 명심해야 할 태도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을 다 읽으니 내가 작가의 열렬한 팬은 아닐지언정, 그럼에도 신작이 기대되는 작가라고 느끼게 됐다. 책에서의 작가의 말이 유달리 촌철살인이거나 감동적이서 그리 느낀 건 아니다. 작가라면 말 같은 건 얼마든지 멋들어지게 할 수 있잖은가. 중요한 건 작품이지.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읽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몇몇 작품이 큰 울림을 줬으니 여전히 이 작가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상오단장>,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보틀넥>은 그야말로 작가에 대한 충성도가 솟아오를 만큼 짙은 여운을 자랑하는 작품들이었다.

 현재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가장 주가가 높은 작가이지만 최근에 상을 받거나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은 아직 한 작품도 읽지 못했다. 큰 호평을 받았던 <야경>이 그냥 저냥이어서 최신작들이라고 무조건 봐야지 하는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간 읽을 것이다. 그 작품들을 읽을 때 이 책에서 읽은 이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 갖고 있는 일종의 자긍심을 떠올려야지. 그럼 이야기가 더욱 묵직하게 읽힐 듯하다.

‘그냥 그런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말하자면 독자가 이야기를 돕는 꼴이다. 양자는 협력 관계라고도, 공범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타협은 드문 일이 아니다. 아니, 일반적이다. 뮤지컬 배우가 갑자기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것도, 시대극 관리가 악독하기만 한 것도 이상하다면 이상하지만 그런 건 무의미한 비판이다. 공범 관계가 전혀 없는 이야기를 보고 싶으면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 - 30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택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권일영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8.8


 한때는 완성도와 무관하게 정말 우후죽순 소개됐던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작품을 오랜만에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저택섬>은 작가의 작품 중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인데 나는 그 당시에 출간되지마자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너무 시리즈화돼서 뒤로 갈수록 감흥이 떨어진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뒤에' 보다 이 작품이 더 좋았다. 호불호는 갈리지만 유머나 형사와 탐정인 두 주인공의 캐미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인 저택의 비밀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만큼 독특해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굳이 단점이라고 할 만한 점을 얘기하자면 저택의 평면도를 봤을 때 비밀의 정체를 눈치챌 만큼 정말 단순한 아이디어라는 것인데, 그 아이디어를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동안 무시할 수 없는 복선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게 만들었던 연출도 아이디어 못지않게 재밌었다. 어떤 사람들은 복선을 위해 우연이 남발됐다고도 말하지만 난 그 정도 우연 없이 어떻게 추리소설이 가능할까 싶어 괜한 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불가사의한 범죄였다고 생각한 현상이 범인의 빈틈, 혹은 하늘이 훼방을 놓은 듯 범인이 범한 각종 실수를 통해 내막이 밝혀지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작품의 연출이 특별히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작품의 배경은 일본의 혼슈와 시코쿠 섬 사이의 내해인 세토내해에 속한 가상의 섬이며 시간 배경은 세토내해를 오가는 대교를 막 건설하던 즈음이다. 섬과 섬을 잇는 다리가 아닌 섬 위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건설되는 다리인데, 난 2018년에 갔던 마츠야마 여행 때 이 다리를 보려고 했지만 일정상 짬이 나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그때 왜 그렇게 그 다리가 보고 싶었을까 그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다시 읽으니 아마 그 여행 몇 년 전에 이 작품을 읽은 기억이 나서 실물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세토내해의 대교를 보고 싶은 한편으로 작중에 묘사되는 건물도 실제로 있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건축적으로 가능한 형태의 건물일지는 차치하고, 그런 건물이 있다면 관광 측면에서 정말 대단한 물건일 테니까 말이다. 작품 후반부에 건물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생전에 이 건물을 건축한 건축가의 스케일 큰 면모를 짐작하게 되면서 묘한 여운을 안겨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섬과 섬을 잇는 것이 아닌 섬 위를 지나는 다리는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뒤흔들었지만 작중 등장하는 저택은 그보다 더한 아이디어로 맞서는 격이라 왠지 읽고 있다가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마저 받았다. 그림 없이 글로 묘사된 것만으로도 작중 스케일 큰 풍경이 머릿속에서 생생히 그려졌다. 어떻게 보면 생각보다 시시하고 뜬금없던 범인의 동기보다 결말부에서 묘사된 풍경이 훨씬 압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저택을 무대로 의외의 완성도을 선보인 작품으로 이젠 절판돼 더 이상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중고서점이나 도서관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을 텐데, 호불호는 갈릴 수 있어도 가벼운 추리소설만 쓴다는 작가의 선입견을 어느 정도는 뒤집을 만한 스케일을 가진 작품이라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길 바란다. 작가의 신작이 무려 7년째 국내에 소개되지 않고 있는데 이런 숨은 수작을 읽으니 작가의 시든 인기가 못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