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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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박민정 작가의 출세작, 최신작이 모두 수록된 대망의 소설집을 드디어 읽었다. 일찍이 인상 깊게 읽었던 '세실, 주희'와 '모르그 디오라마', 그리고 표제작인 '바비의 분위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밖에 다른 작품들은 기대에 못 미쳤으나 만듦새나 공통된 주제의식은 높이 살 만했다. 아쉽게도 패턴이나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비슷했던 게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문학이 은근히 획일적인 경향이 있다는 주장의 슬픈 반증이란 생각도 든다. 이 발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특히 박민정 작가의 경우는 꽤 다양한 시도를 보이는 작가이므로 이런 평가가 부당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지만, 국경 밖 사례와 인물들을 통해 조명한 여성 문제가 처음엔 신선하다가도 매 단편마다 조금씩 반복되고 닮아있으니 끝에 가선 질리게 됐다. 같은 소설집의 수록작들이므로 공통점이 있는 건 그러려니 했지만, 대신 이 다음 작품들을 주목해봐야 할 듯하다. 이 다음에도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면 매너리즘을 의심해봐야 한다. 이것이 내 쓸데없이 과한 기우이길 바란다. 



 '세실, 주희' 


 이 작품은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접했고 아마 이번이 세 번째 읽은 것일 텐데 읽을 때마다 감탄스럽다. 다른 작품에 비하면 주제의식이 꽤 뻔하게 읽히지만 오히려 그 단선적인 구조가 마음에 든다. 소위 문학 좀 한다는 사람들이 숨기는 것이 훨씬 세련된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드러낼 때는 확실히 드러내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한다. 그런 내 평소 지론에 대단히 잘 부합하는 소설이 바로 '세실, 주희'였다. 

 맹목적인 반일 감정을 앞세우지도 않고 반대로 친일적인 내용도 없다. 국가 감정을 조장하지 않고 서로가 자기 아는 범위 안에서만 개념적이고 남들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 이 시대의 아이러니를 잘 강조했다. 아무래도 내가 한국인이므로 세실이 상대적으로 탐탁지 않게 비쳐질 만했으나 내가 봤을 때 주희도 나름의 딱한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이 가지 않았다. 세실을 향한 은근히 탐탁치 않아 하는 속내가 그다지 모범적으로 보이지 않은 탓이다. 이 정도면 양반이라 생각이 들다가도 작가의 주제의식,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사람들의 관계가 과연 괜찮은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면 끝까지 수동적인 주희도 결국엔 작가이 비판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주희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걸 의미했던 것도 같고. 


 '모르그 디오라마' 


 사진과 영상 기술의 발달로 인한 여성 폭력의 교묘한 진화에 대해 심도 깊게 들여다본 작품. 주인공이 과거에 당한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살짝 모호하게 묘사된 게 답답했지만, 또 무언가 큰일을 당한 것치고 은근히 멀쩡하게 대학 나오고 회사까지 다니네 싶었지만, 사실 그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험한 꼴을 당해 회생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정말 많지 않을까 하는 반문이 들기도 했다. 죽어서도 구경거리로 전락한 파리의 모르그 거리의 시체들처럼 사진과 영상 기술 특유의 대상을 영원히 박제시키는 듯한 기능은 사람에 따라서 정말 위험한 무기로 악용될 수 있음을 다시금 명심하게 만들었다. 요즘 세상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소재와 접근 방식이란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바비의 분위기' 


 사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크게 새로울 게 없었지만 특유의 정신 나간 설정과 분위기, 그리고 개연성 때문에 뒷맛이 씁쓸하면서 강렬했던 작품이다. 여성을 인간이 아닌 하나의 판타지의 대상으로 대하는 남자가 전공을 살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대목은 쓴웃음을 넘어 소름을 끼치게 만들었다. 같은 남성이 보기에도 역겨운데 여성분들은 오죽할까. 새삼 여성분들이 느끼는 공포감이 무엇인지 실감이 갔다. 혐오해 마땅한 쓰레기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인정 받는 세상, 그게 어쩌면 진정한 공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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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0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별 관심없이 제쳐두었던 책인데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