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시에이션 러브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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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7


 스포일러 강함


 예전에 소설과 영화로도 후기를 남겼고, 영화가 제법 흥행하기도 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우리나라에도 <새콤달콤>이란 이름으로 영화화됐으니 스포일러 없는 후기를 간단히 남기려고 한다. 다시 읽은 <이니시에이션 러브>는 '반드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소설'이란 평이 무색하게 막상 다시 읽으니 전보다 밋밋하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반전를 연출하는 기술적인 정교함과 대담함은 여전히 놀랍고 그 반전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질문을 던지는 것도 대단하지만 정작 그 주제의식이 처음 읽었을 때만큼의 감흥이 일지 못했다.

 아무래도 첫사랑의 환희와 좌절의 과정은 사람이 성장함에 있어 통과의례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통찰은 지금에 와선 새삼스럽기도 했고 반전을 의식하며 읽으니 결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유치하거나 뜸들이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1, 2부의 스즈키 모두 어떤 의미에서건 호감형 인물이 아니었던 터라 그들의 깨달음과 후회가 감정 이입이 덜 된 것일 수 있다. 차라리 어장관리녀라 욕을 먹는 마유가 관점에 따라선 지혜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렇기에 속을 알기 힘들어 상상하는 재미가 있어 내겐 더 흥미로운 캐릭터로 다가왔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설 속 캐릭터기에 흥미롭다는 것이지 현실에서 여자친구가 저런다고 생각하면 배신감에 식음을 전폐할 테지만...


 연출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호감이긴 해도 양다리를 걸치는 과정에서 겪는 내적 갈등을 알 수 있던 2부의 스즈키와 다르게 마유는 얼마나 내적 갈등을 했는지 여부는 반전을 극대화한 작가의 연출에 의해 전혀 알 수 없으므로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완성도 있는 작품이지만 두 번 읽다 보니 여러 질문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아무튼 작중에서 마유가 당한 수모가 있기에 적어도 2부의 스즈키에겐 한 방 제대로 먹여줬다고 생각돼 혼란스럽긴 해도 여전히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반전이었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마유 역할을 누가 연기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캐릭터가 좀 더 매력적으로 재해석됐다면 찾아볼 의향이 있다.


 끝으로 작품에서 나오는 '통과의례'란 단어를 읽고 떠오르는 질문을 간략하게 적어보도록 하겠다. 사랑이란 전부 통과의례적인 것일까, 아니면 통과의례적인 사랑도 있는 것일까? 전자는 사랑에 대한 환멸을, 후자는 그래도 희망을 가져봄직한 질문인데 난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놓지 못하겠다. 내가 지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사랑에 크게 좌절하면 심신이 다 무너지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의 후일담이, 정확히는 마유와 1부의 스즈키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둘은 결실을 맺을 것인가, 아니면 마유는 또 양다리를 걸칠 것인가. 만약 그 여부에 따라 사랑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텐데 이 또한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나는 그래도 마유가 2부의 스즈키에게 상심이 큰 나머지 1부의 스즈키로 갈아탄 것이었고 이번엔 그 둘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데, 너무 낙관적이고 순진한 바람일까?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든 적은 처음인데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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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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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류>를 읽고 푹 빠진 작가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다른 작품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을 읽었다. 그것도 무려 작품의 주요 배경인 타이베이 여행 때 읽었다. 삼총사가 브레이크댄스를 연마했던 시먼과 셋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방문하곤 했던 룽산사 근처에 숙소를 잡아놨는데, 덕분에 소설의 내용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류>와 비교하자니 아무래도 2% 부족했지만 현지에서 읽었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작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작가 스스로도 이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연쇄살인범을 미화하는 것으로 읽힐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해서도 안 되는 범죄 때문에 세상이 전보다 흉흉해졌구나 느끼는 와중이라 이와 같은 작품의 색채는 다소 거부감이 들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것이다' 하고 밀고 나가는 작가의 태도에 결국은 수긍하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훈을 준다기보단, 혹은 통쾌한 반전이나 인과가 딱 맞아떨어지는 스릴러도 아니지만, 삼총사의 우정과 그 우정이 뒤틀리게 되는 사건과 아이러니한 결말 등은 적잖은 여운을 안겨줬다. 다시 말하지만 <류>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나 두 작품을 다른 순서로 읽었다면 다른 인상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는 주인공이 일본과 중국으로 가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던 <류>와 비슷한 듯 다른데, 이 작품에선 그 이상의 심각한 외상을 입은 주인공이 대만에서 미처 해소하지 못한 문제를 엉뚱하게 미국에서 풀어버리는 양상을 띄고 있다. 현실과 픽션을 막론하고 항상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범죄의 이면을 접할 때면 늘 범죄자들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번지수를 잘못 찾았도 한참 잘못 찾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이 작품의 경우엔 특정 인물에게 과거의 어떤 사건의 인과나 책임을 따지기 까다로워 어떻게 하면 범인이 살인자로 전락할 수 없음을 방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아 더욱 답답하다. 작품을 다 읽은 지금도 이 작품이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임은 부정하기 어렵고 살인범의 딱한 과거를 살펴보고 연민을 유발하는 것에 성공한 작품인 건 인정하겠으나, 딱 거기까지인 작품이었다. 여운은 있지만 교훈은 없는, 요즘처럼 이해 못할 살인이 범람하는 세상에선 약간은 공허하게 다가올 마무리였다.


 작가의 작품이 국내에 <류>와 함께 딱 두 작품만 소개됐는데 앞으로도 더 소개되길 바란다. 소개되는 텀이 길어 조금 불안하지만 문장력과 분위기가 압도적인 작가인 터라 앞으로 소개될 작품도 기대된다. 대만 여행을 계기로 아주 좋은 작가를 알게 돼 기쁘기 그지없고 다음에 대만에 여행갈 때 이 작가의 책을 또 가져갈 생각이다. 역시 소설의 실제 배경 속에서 읽으니 더 몰입이 잘 되더라. 흔치 않은 분위기와 배경, 그리고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이기에 간만에 여행 중임에도 호텔이나 비행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모든 실패와 모든 후회가 탄생한 빛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열세 살로, 브레이크댄스와 도둑질의 연장선 위에는 살인도 있었다. -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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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추락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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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흔히 중국인은 무슬림과 더불어 가장 현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한편으론 중국인은 그 수가 어마어마해 가장 일반화해선 안 된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사회주의의 강력한 통제로도 20억에 근접한 중국인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차피 중국인들은 거기서 거기, 그놈이 그놈이라 단언하는 사람도 적잖다. 아니 대부분이다.

 <멋진 추락>을 집필한 작가 하진은 본래 미국에 유학 목적으로 입국했다가 자국의 천안먼 사태에 절망하고 그대로 타향살이를 하게 됐다고 한다. 작가의 다른 저서 <자유로운 삶>에선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다면 이 소설집에선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다종다양한 중국인 이민자들의 애환이 그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의 애환은 미국이 이민자들한테 행하는 부조리가 아닌 같은 중국인들끼리 벌어지는 경우뿐이란 것이다. 중국 본토에 있는 가족이, 때론 같은 고향 사람이, 미국으로 함께 건너온 조부모나 시어머니가 중국인 이민자들의 가장 큰 적으로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각의 수록작에선 놀라울 만큼 미국보다 중국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하다.


 수록작 대부분의 갈등이 기성 세대의 유교적 사고나 사회주의 국가 출신다운 쓸데없고 허황된 자부심에 아래 세대가 신음하면서 비롯된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 독자들한테도 공감 섞인 탄식을 유발할 만큼 꼰대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작품에선 블랙 유머로, 어떤 작품에선 비극적으로 갈등이 해소돼 묘한 여운이 남는다. 작가의 담백하면서 깊이 있는 문장력 덕분인지 해피엔딩조차 해피엔딩으로 머물지 않거나 새드엔딩도 마냥 새드엔딩이 아닌 경우가 있다. 확실한 건 타국에서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같은 국적, 고향의 사람은 동지이거나 원수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대체로 후자인 경우가 많고 특히 가족은 그보다 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내일의 희망도 갖기 힘든 노동자부터 승려, 창녀, 학비를 벌어야 하는 대학원생이나 가방끈 긴 학자 등 다양한 처지의 등장인물들이 뉴욕 퀸즈에 있는 플러싱을 배경으로 각각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4년 전 미국에 여행 갔을 때 마지막 숙소가 플러싱 근처여서 이번에 다시 읽은 <멋진 추락>의 분위기가 보다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 동네는 작품에서 묘사된 것 이상으로, 정말 미국이 아닌 아예 중국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건물부터 공기까지 중국인 천지인 거리였다. 이처럼 폐쇄된 공간이기에 엄연히 기회와 자유의 나라인 미국 안에 있음에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소설에서도 그때 받은 인상을 배신하지 않는 묘사가 일관적으로 나와 어딘지 뿌듯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거두기가 힘들었다.


 나는 인구가 10억을 넘어가면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수도, 하나의 선입견으로 일반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중국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입견을 고수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중국인들은 그 선입견에 화를 내기보단 문제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 선입견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기까지 한다. 어떤 중국인들은 외국에서 힘겹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나는 중국인이다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들만의 망상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중국인은 자신의 출신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자신을 둘러싼 중국 본토와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기도 할 것이다. <멋진 추락>은 많든 적든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주인공들이 등장하며 작가 역시 본인이 직접 보고 들었을 부끄러운 중국인들의 면모를 솔직히 그려냈다. 이거야말로 멋진 추락이 아닌가. 표제작 '멋진 추락'에서 추락은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그 작품의 결말이 가장 희망적이라 표제작으로 선정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이 무엇이 됐든 '중국적인 것'에서 벗어나 결과적으로 의도와 무관하게 중국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이미지가 강렬하게 그려져 책의 제목이 퍽 어울리지 않나 싶다. 추락이 어울리는 제목이라니,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중국만큼 추락이 절실한 나라가 없잖은가... 자존심을 세우느라 추해질 것인가 자존심을 세우지 않음으로 인해 비로소 멋있어질 것인가. 작품의 모든 수록작이 그렇게 단순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지만 한 번쯤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책의 악당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숭배해마지않는 중국이란 나라를 향해.


 이 작품의 이야기가 비단 중국 이민자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터지만 이번만큼은 중국에 박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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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크라티아 5
마세 모토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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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헤드>와 <이키가미>로 독보적인 작풍을 선보인 마세 모토로 작가의 신작 <데모크라티아>는 작가의 여느 작품처럼 절판됐던 지라 어렵게 찾아 읽었다. 아무래도 작풍이나 그림체가 어둡고 작가가 묻지마 범죄나 방구석 폐인 등 인간의 추악하고 찌질한 민낯을 자주 그려서 대중성과는 동떨어진 편이긴 한데 그래도 신작을 찾아 읽으려는데 절판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씁쓸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전작 <이키가미>보다 화제성은 떨어질는지 몰라도 개인적으론 그 작품보다 진일보한 측면이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일단 분량과 속도가 그렇다. 다소 반복적이었던 <이키가미>에 비해 이 작품은 전개도 시원시원하고 결말까지 금방 도달한다. 물론, 화제성이 없어서 연재 종료를 '당한 것'일 테지만 그런 것치고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수습하지 못한 설정도 없다. 조금 뜬금없는 반전이 있긴 했지만 주제의식의 측면에선 필요한 반전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집단지성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고, 붕괴 직전인 집단지성이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지 작가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여 생각 이상으로 결말이 산뜻하기까지 했다. 개인적으로 난 답이 없는 캐릭터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개심하여 결정적인 한 방을 보여주는 전개가 참 좋더라. 만약 악인을 악인인 채로, 선인을 선인인 채로 끝까지 규정한 채 진행했더라면 지금처럼 여운이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민주주의 방식으로 휴머노이드를 작동시켜 최대한 선한 일을 도모한다는 설정도 참신하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찰, 휴머노이드가 마주하는 사회의 문제들도 흥미롭지만 사건의 규모 하나하나가 스케일이 작고 일부 캐릭터가 너무 비호감인 작품이라 영상화가 이뤄진다거나 이 이상 회자되긴 힘들 것 같다. 작가가 <이키가미> 이상의 작품을 내놓지 않으면 작가의 모든 작품이 묻히게 생겼는데... 대중성과 거리가 먼 작품만 그리지만 반대로 그렇게 꾸준한 개성을 지닌 작품을 그리는 작가도 흔치 않아서 부디 머징낳아 작가의 신작을 또 접할 수 있길 바란다.


‘다수결‘로 선별된 인류의 집단지성이 ‘궁극의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허황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본디 인간은 개개인의 존재 자체가 이미 기적이며 ‘궁극‘이니까. - 5권 3rd season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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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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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7.5


 기리노 나쓰오의 데뷔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탐정으로서 퍽 유능하지 않아도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는 무라노 미로가 첫 등장하는 작품이자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해 나름대로 이름을 떨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의 풋풋함을 엿볼 수 있었으나 전매특허인 날카로운 칼날 같은 문장력이 아직 덜 벼려진 즈음이라 상대적으로 흡입력이 떨어졌다.

 작품의 반전도 마찬가지다. 사실 반전이라기엔 다소 뻔한 측면이 없잖았으나 어쨌든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미로가 열심히 머릴 굴리고 발품을 팔았으니 반전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읽고도 감흥이 덜한 건 참 아쉬운 일이다. 일이 크게 벌어진 것에 비해 실상은 여러 우연이 겹친 결과였고 진상에 접근하기 위해 지나치게 돌아가는 면이 있어 집중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미로의 친구 요코가 르포라이터로서 보인 행적이 어딘지 현실감이 떨어진 구석이 있던 탓인 것 같은데... 차라리 요코의 글을 원본으로 직접 읽을 수 있었거나, 아니면 가능한 한 많은 챕터를 할애해 요코의 시점에서 쓴 글이 병렬식으로 전개됐으면 내가 요코의 내면에 집중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통일된 독일의 혼란스런 상황이나 BDSM조차 귀엽게 보일 만한 엽기적인 취향(이라 쓰지만 병세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함)을 가진 사람들을 작가가 묘사하는 방식도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다분히 흥미 위주의 무책임한 묘사는 아니었으나 엽기적인 결말을 위해 채택된 엽기적인 설정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고, 요코가 베를린에서 겪은 일은 흥미롭지만 분량이나 비중이 미묘해 궁금증이 생기다 말았다. 이 부분이라도 더 집중했더라면 작품 전체의 인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그럼 작품이 좀 더 무겁고 깊이 있게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은 남편과의 과거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미로가 감정적이고 미덥지 못한 인물인 것은 작품의 흥미를 깎아먹는 요소라고도, 혹은 시리즈의 고유한 매력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라고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그대로 묻힐 뻔한 사건을 재구성해 해결하기까지 했으니 그만하면 유능하지 않나 싶겠지만, 하라 료의 사와자키나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의 탐정에 비하면 프로패셔널함과는 어딘지 거리가 멀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봐야 했다.


 이런 미덥지 못한 탐정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작품은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물의 잠, 재의 꿈>, <로즈 가든>, <다크>까지 얼마 되지 않는데 일단 다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그녀가 이후 어떤 탐정으로 성장할는지 궁금한데 작품마다 평가가 들쑥날쑥해 불안하다. 뭐, 결국 직접 봐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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