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러시아 - 일리야의 눈으로 ‘요즘 러시아’ 읽기
벨랴코프 일리야 지음 / 틈새책방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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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짧지만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줬던 일리야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찾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책의 출간 시기가 러시아에 대한 전세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던 즈음이라 나도 조금 눈치가 보여 결국 반년이 흐른 이제서야 읽게 됐다. 지금이라고 러시아의 인식이 좋아지긴커녕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러시아에 좋은 감정이 많다. 당장 일리야의 고향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할 적에 생각보다 친절했던 러시아 사람들이나 노르웨이 여행 때 새벽녘 베르겐 기차역에서 나처럼 혼자 여행온 러시아 아저씨와 코인로커를 어떻게 사용하지 같이 머릴 맞대며 이리저리 헤매다 우리 둘 다 깔끔히 사용을 포기하고 서로 좋은 여행을 기원하며 헤어진 추억 등이 있어 뉴스 속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만으론 좀처럼 러시아에 대한 악감정이 싹트지 않았다.


 일리야는 서두에서 시기가 시기인 지라 눈치가 보이긴 하나 오히려 지금처럼 러시아에 대한 온갖 안 좋은 편견이 난무할 때가 이 책을 출간할 적기란 생각이 든다고도 말한다. 언젠가는 러시아도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우니 언제까지고 벽을 쌓기보단 교류하게 되는 순간이 올 텐데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문화나 정치 등 조금이라도 무지한 점을 줄이고 서로 사람 사는 곳이란 인식을 자신이 쓴 책이 심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고 겸손하면서도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어 신뢰감이 갔다.

 아울러 러시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은 나라이고 그렇기에 일리야 본인이 아는 러시아는 간혹 본인이 겪은 범위 안에 국한됐거나 최대한 한국인 눈높이 맞추려다보니 러시아만의 세계관이 자칫 왜곡될 수 있을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시사하는 태도도 도리어 신뢰감을 더해줬다. 첫장에선 러시아의 다양한 지리와 기후 같은 가벼운 주제로 시작해 소비에트와 러시아가 전혀 다른 나라이며 어쩌다 푸틴 같은 독재자에 열광하고 왜 정치에 무관심하게 됐는지 역사적 배경 같은 것을 꽤 그럴싸하게 설명한다.


 물론 지면의 한계와 자료 조사 및 독자를 배려한 탓인지 설명이 불충분하게 느껴진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다. 간혹 그토록 무능하고 쓰레기 같은 정치인에 당했다는 이유로 같은 쓰레기지만 유능하다는 이유로 그 정치인의 허물과 비리까지 용인하거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음에도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후진적인 여성 인권 등은 책을 읽은 지금도 이론적으로나 알겠지 진심으로 와 닿진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컬쳐쇼크의 순간은 일리야도 처음 한국에 와서 살 때 많이 겪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선 서로 인종이 달라도 언어와 국적이 같다면 같은 러시아인으로 여기는 반면 단일민족 국가인 탓에 좁은 땅덩어리에서 어디 지역 출신이냐 갖고 차별하는 등 조금만 다르면 배척해버리는 우리나라의 정서 등 처음엔 이론적으로나 알겠지 진심으로 와 닿진 않은 순간이 많았고 어떤 점은 지금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익숙해졌다고 얘기한다.


 중요한 점은 그 나라가 그런 문화와 인식을 갖게 된 데엔 다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으나 서로 완전히 이해하거나 존중하긴 힘든 일이란 걸 인정하는 것 아닐까. 진정한 의미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자기기만일는지 모른다. 대신 최소한 사전 지식을 갖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나 러시아나 지금보다 더욱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을까 하고 우리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게 일리야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개선의 여지가 없는 와중에 일리야가 쓴 비판적이면서 묘하게 팔이 안으로 굽는 듯한 내용의 책을 읽으니 러시아를 향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기어코 왕따의 길을 걷고자 하는 러시아의 꼬라지를 생각하면 고개를 젓게 되지만 그 나라의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 찬란한 유산이나 고난의 역사를 버텨낸 사람들의 저력,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그 나라의 따뜻한 첫인상을 떠올리면 국가감정과 개인과 개인의 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별개의 일로 치부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다소 낙관적이고 무책임한 생각까지 든다.


 저자 일리야는 우리나라로 귀화한 한국인이라 보다 러시아에 비판적일 수 있지만 러시아에서 나고 자라 러시아식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그가 완전한 의미에서 한국인이라 하기엔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여겼는지 대신 자신은 러시아계 한국인이란 표현으로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을 정의내린다. 우리에겐 아직 생소하게 들리는 단어일 수 있지만 러시아와 한국 두 나라에 깊은 인연의 뿌리를 내린 일리야의 족적을 살펴보면 완전히 러시아인이 아니라기에도 한국이라 보기에도 미묘할 만큼 두 나라 문화에 빠삭한 그에게 이보다 적합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처음 <비정상회담>에 출연할 때보다 진보한 한국어 구사력과 폭넓어진 세계관으로 중무장했기에 이 책이 단지 방송에서 못다한 이야길 길게 풀어내거나 러시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어내는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한 나라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는 것과 별개로 그 나라의 문화나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해하려는 길은 어렵고 까다로우며 그 길을 걷게 되면 필시 이질감 못지않게 동질감도 느끼게 돼 애증이 생겨버린다는 걸 이 책을 읽는 내내 깨닫게 됐다. 참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러시아, 일본만큼이나 참 곤란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졸지에 러시아에 좋은 인상을 가진 모든 외국인들을 한꺼번에 갈 곳 잃고 할 말도 잃게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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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 - 손으로 만든 표정의 말들 딴딴 시리즈 1
이미화 지음 / 인디고(글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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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제목이 수식어나 미사여구 없이 딱 '수어' 한 글자여서 수어에 대한 엄청난 성찰이 담겼겠거니 기대하고 읽었지만 얇은 분량에 맞게 기대보단 얄팍한 책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저자는 성실하게 자료도 조사해가며 열심히 글을 썼지만, 작가 본인이 인정하듯 아직 수어를 배우게 된 기간이 일천한 나머지 수어로 시작하다가 다른 얘기로 전개해버리는 탓에 책이 얇음에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수어의 역사나 매력에 대해 얘기하거나 수어를 배우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맛깔나게 담긴 에세이일 줄 알고 읽었으나 수어에 얽힌 잡다한 이야기나 저자 자신의 뇌피셜 내지는 사회에서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겪는 소외감 등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얘기로 방향이 틀어져 애당초 이럴 거면 책의 제목을 왜 '수어'로 지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됐다. 큰 틀에선 다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지만 조금은 전문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길 듣고 싶었는데 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를, 저자 본인이 감명 깊게 읽거나 본 책과 영화를 소개하고 있어 이래저래 불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작가의 본래 직업이 영화 에세이스트라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소개하고 설득시키는 솜씨는 탁월했는데, 그 솜씨가 수어라는 키워드와 엮는 데엔 미치지 못해 뒤로 갈수록 시큰둥하게 읽혔다. 사실상 맨 뒤에 실린 몇몇 수어들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수어에 대한 내용은 적은 편이라... 이러니 제목을 잘 지어야 한다. 이렇게 미사여구 없이 단어 하나로 이뤄진 제목은 본인에게 조금 과분하리라 생각은 안 해봤는지 묻고 싶다.

 물론 한 분야에 완전히 통달한 작가만이 글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제목이든 뭐가 됐든 속았다고 여긴 독자에게도 실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 모른다. 책이 그닥이었으면 끝까지 읽지 않으면 될 일이니까. 글의 내용이 기대보다 전문적이지 않다고? 글이란 모름지기 전문적이어야 한다며 기대한 독자도 일정 부분 잘못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백 번 양보해서 그렇게 내 탓을 하며 넘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말만은 해야겠다. 다 좋은데, 수어를 공부하려는 작가의 포부나 인간애 넘치는 것도 다 좋은데, 결국 이 글이 독자들로 하여금 '나도 수어를 배우고 싶다'는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글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가 어떤 계기에서건 수어에 관심을 갖고 배우기에 이르렀는가는 잘 알겠고 훌륭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 일을 독자에게 어필하기보다 내면의 이야길 꺼낸 것에 의의를 두고 있는 터라 아무래도 호소력이 부족했다.

 작가의 실제 경험보다 머릿속 생각이 비중을 많이 차지해 벌어진 안타까운 상황이 아닌가 싶다. 작가 소개란에 '수어 초급자'라 적혔을 때 미리 알아봐야 했는데...

이 세상에 가장 평화로운 단어가 있다면 그건 ‘누구나‘가 아닐까.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사랑할 수 있고, 누구나 살 수 있는 세상. - 1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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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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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카렐 차페크의 전설적인 희곡 <R.U.R>을 만화화한 작품, 아니 이 경우엔 그래픽 노블화했다고 말해야겠다. 책의 크기이나 가격, 작화의 퀄리티 등 전반적인 만듦새가 딱 그래픽 노블이다. 나도 정확히 그래픽 노블을 뭐라 정의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유명 소설이 원작이거나 일본이 아닌 서양 국적의 작가가 올컬러로 그린 다소 가격대가 나가는 만화를 흔히 그래픽 노블이라 부르지 않나 싶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런데, 나는 편의상 만화라고 호칭을 통일하겠다. 그래, 명칭은 둘째 문제고 중요한 건 그래픽 노블이라 칭해지는 책들은 하나같이 접근성은 높으나 읽었을 땐 대체로 그에 걸맞는 만족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책의 만족도는 조금 미묘하다.

 원작이 100년이 훌쩍 넘은 과거에 집필됐고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무대를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작중 상황이나 비주얼을 상상하기 까다로운 부분이 없잖았다. 그렇기에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의 세계는 어떨지 무척 기대됐다. 그런데 내 기억에 내용은 하나도 손댄 구석이 없고 희곡의 특성상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공장에서만 펼쳐지는 제한된 장소 제공조차도 변함이 없다. A부터 Z까지 원작과 판박이인데 원작의 서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독자에겐 좋은 일이지만 원작과 색다른 연출을 기대했을 독자에겐 좀 멋없는 2차 창작이라 여길는지 모르겠다. 그림체가 워낙 독창적이고 유려해 눈은 즐겁지만 그게 다라면서 말이다.


 원작에서 의문이거나 아쉬웠던 부분, 헬레나가 도민의 청혼을 받아들인 부분이나 로봇을 만든 로숨의 과거가 짧게 설명되거나 하는 등 만화로 2차 창작되면서 충족되길 원했던 부분조차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진 건 김새는 부분이었고 후반부에 아담과 이브를 연상시키는 두 로봇 헬레나와 프리무스를 놓아주면서 알퀴스트가 쏟아내는 방백도 만화보다 희곡에서 더 전율과 웅장함이 느껴지게 연출됐다. 실제 무대에서 상연된 걸 보더라도 이런 느낌을 받으려나. 희곡의 집필할 때 반드시 무대에서 상연되는 걸 전제로 하니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연극보다 훨씬 표현의 자유가 폭넓은 만화이기에 희곡이 표현 못한 세계를 무궁하게 펼쳐주겠거니 기대했지만, 껍데기가 유려한 것 그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희곡보다 먼저 만화로 접했어도 그때도 똑같이 스토리에 갈증 비슷한 아쉬움을 느낄 테니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로봇에 의지해 생식 능력마저 잃은 인간의 종말도 신문 기사 몇 구절로 설명을 대신해버리는 이 여백 많은 세계관에 몰입하고 사유를 생성해내려면 그림으론 표현되지 않는 뭔가가 더 필요했으리라 본다.


 누군가는 이만하면 훌륭한 만화화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너무 원작을 그대로 재현해버리면 완성도와 별개로 늘 멋대가리 없는 일이라는 날것의 감상이 먼저 튀어나와버린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마지막화 같은 무리수만 아니라면 2차 창작은 언제든 환영인데... <R.U.R>을 원작으로 한 다른 2차 창작 작품으론 뭐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더 있으면 좋으련만, 아니 있다면 그 작품만의 뭔가가 있길 바란다.

비생산성이 인류가 달성할 수 있는 마지막 과업이지요. - 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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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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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1


 많은 사람들이 <중력 삐에로>를 이사카 코타로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는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대사, 사유가 다소 장황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고 특히 신파를 신파스럽지 않게 전달하는 원숙미가 돋보여 그것만으로도 엄지를 치켜드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가족애, 특히 형제애가 압권인 이 소설은 작중 세세한 단점들을 모조리 뒤엎을 정도라 책장을 덮은 뒤에 몰려오는 여운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굳이 세세한 단점들을 몇 가지 얘기해보자면, 우선 장황스럽고 개연성이 헐거운 전개를 들 수 있겠다. 분량도 긴데 초반부터 사건의 진상을 유추하는 것이 가능하단 점도 마이너스적인 요소고 이야기의 미스터리적 요소들이 허무하고 약간은 억지스러운 원리로 작동하고 있어 독자에 따라선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뭘 그렇게 논리니 개연성이니 따지냐, 그만하면 설득력 있지 하고 말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려나? 이에 대해선 확언하기가 어렵다.


 또 어떤 사람은 밝고 급하게 난 결말을 아쉬운 점으로 꼽던데, 나는 그 의견에 대해선 생각이 다르다. 감동과 여운이 남는다는 점에서 좋은 결말이라 생각하는데, 다만 몇몇 인물이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고 완수하는 일련의 전개가 지금껏 읽어온 추리소설들과는 다르게 허술하고 얼렁뚱땅식인 나머지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일이 그렇게 유리하고 깔끔하게 흘러갈 리 없는데... 그래서 어째 동화를 읽은 느낌까지 든다.

 희대의 강간마에 의해 자신과 씨다른 동생이 생긴 형 이즈미와 자신의 유전자를 증오하는 동생 하루,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하루도 아들로 키우는 형제의 아버지, 작중에선 이미 고인이 된 형제의 어머니 이 네 사람의 가족애를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것은 <중력 삐에로>의 거룩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후에 집필하는 또 다른 대표작 <골든 슬럼버>에서도 강간은 살인보다 악질적인 범죄라 일갈하는데 그때 그 구절은 <중력 삐에로>를 집필하면서 사유한 것이 그대로 반영된 구절일 것이다.


 강간을 저지르는 쓰레기의 쓰레기 같은 사고회로를 그럴싸하고 소름 끼치게 묘사한 작가는 여느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악을 묘사하는 탁월한 재능을 여지없이 뽐낸다. 기본적으로 유쾌한 작풍에다 등장인물도 유쾌하기에 이런 악인들의 등장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강간이 나쁘지 않은 이유가 다치는 건 상대방이고 나는 그걸 즐기기 때문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인간은, 아니 그보다 더한 인간이 현실에 무척 많을 듯해 읽으면서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이런 쓰레기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음에도 엇나가지 않은 사람도 있으며, 사람의 인생은 유전자로 전부 설명되지 않음을 작가는 온몸으로 역설하고 있다. 나 역시도 유전자가 모든 걸 설명하지 못하며 사람은 유전자보다 후천적인 성장 배경이 중요하다 믿기에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접근에 몇 번을 고갤 끄덕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직도 과학자의 말보다 소설가의 말을 더 신뢰하는 이유를 책에서 읽어낼 수 있어 정말 더없이 반가웠다.


 제목만 봐선 무슨 이야기인지 유추가 되지 않는데 개인적으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중력 삐에로>은 엉뚱함과 진지함을 둘 다 겸비한 작가만이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동화이자 복수극이었다. 어쩌면 작품의 제목은 엉뚱함과 진지함 두 개념을 겨냥하며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정말로 심각한 것은 밝게! 이 작가는 거의 신인 시절부터 이런 어마어마한 스킬을 작품을 녹여낸 것이다. 새삼 천재가 괜히 천재가 불리는 게 아니구나 하고 감탄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다음엔 작가의 신작을 읽게 될는지, 아니면 이전에 읽은 작품을 다시 읽을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 작품도 적잖이 기대된다.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기가 죽는 법이다. - 14p


자신을 천재라 부르는 천재는 별 볼일 없어. - 54p


정말로 심각한 것은 밝게 전해야 하는 거야. - 109p


근거 같은 걸로 자신감을 가지면, 좀 비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 2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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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마카롱 수수께끼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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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는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고전부' 시리즈와 닮았으면도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추리력에 대한 자신감이나 다뤄지는 사건의 스케일 등 두 시리즈는 차이가 뚜렷한 편이다. '고전부' 시리즈가 전형적인 일상 미스터리라면 '소시민' 시리즈가 더 강력한 사건이 다뤄진다. 그리고 또 하나 큰 차이로, '고전부' 시리즈는 꽤 많이 집필된 반면 '소시민' 시리즈는 다루는 사건이나 전개가 굵직하기 때문인지 당최 신작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들 수 있겠다. 시리즈 4편인 '겨울~'의 출간 소식 대신 단편 소식만 들리고 있다.

 전편인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을 읽은 지 꽤 돼서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가물가물하던 와중에 읽게 된 내 눈에도 이번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는 시리즈에서 조금 이질적인 축에 들었다. 일단 스케일이 '고전부' 시리즈에 비견될 만큼 아기자기하며 그간 곁가지에 불과했던 디저트들이 이번 수록작들에선 보다 비중있게 다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었던 '뉴욕 치즈 케이크 수수께끼'에선 아예 치즈 케이크 레시피의 한 부분이 작품의 핵심 트릭과 직결돼 남다른 쾌감을 선사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 기준에선 그 트릭이 퍽 기발해서 나도 한 번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요리는 과학이라던데 정말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추리소설 중엔 저렇게 국명이나 지명이 앞에 나오고 그 다음에 키워드가 나오는 형태의 제목인 작품이 꽤 많다. 엘러리 퀸이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처음 선보인 제목인데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곧잘 패러디되곤 한다.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의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제목에 들어가 있는 파리 마카롱이나 뉴욕 치즈 케이크, 베를린 튀김빵과 피렌체 슈크림이 작품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하는 역할이 천차만별인 것이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디저트의 레시피가 아주 요긴하게 활용되는 경우는 극소수고 대개 사건 해결의 실마리보단 사건을 접한 계기 정도로 다뤄진다.

 이런 제목을 가진 추리소설이 의외로 제목이 흥미로운 것에 비해 내용은 그저그런 경우가 허다한데,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 정도면 적어도 반타작은 하지 않나 싶다. 시시한 단편 둘, 흥미로운 단편이 두 편 수록됐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는데, 다만 아쉬운 점을 굳이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시리즈의 스토리라인에 큰 전환점을 제시하지 못하는 아주 외전격인 내용들이었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오랜만에 나온 신작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란 것이다. 그렇게 기대를 하지 않은 나도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으니 다른 독자는 더욱 실망을...... 아닌가? 애당초 요네자와 호노부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시시함과 작은 스케일을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오히려 반색하려나? 글쎄, 이 부분은 애매하다. 내 경우엔 작가 특유의 사색 짙은 문장이 적어서 작가답지 못한 작품들이라 생각했는데... 독자마다 평가가 다를 것 같다.


 아무래도 빠른 시일 안에 시리즈 4편을 읽긴 힘들어 보이니 그 사이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소시민' 시리즈의 전편을 재독하는 게 나을 듯하다. 시시하긴 했어도 오랜만에 읽으니 다시 정주행하고 싶어졌다. 아, 정말 여담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과반수 이상이 나고야에서 진행된다. 내가 곧 나고야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 작중 배경이 반가웠고 다가올 여행이 퍽 기대됐다. 나고야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줄 알았으면 아예 현지에서 읽을 걸 그랬다고 짧게 후회도 하면서. 

훌륭한 파티스리와 제과 동호회를 함께 비교하는 건 시시한 일이야. 백 엔짜리 초콜릿을 먹으면서 고디바 초콜릿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우스꽝스럽잖아.

파티스리는 파티스리에 어울리게, 홈메이드는 홈메이드답게, 주전부리 과자는 주전부리로 훌륭하다면 그걸로 족한 거야. 언제나 최고의 디저트를 원하는 건 구도자 같아서 멋져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뭘 먹어도 ‘거기에 비하면‘이라고 말하는 속물에 지나지 않아. - 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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