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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수사 2 : 수사의 재구성 - 果斷 ㅣ 미도리의 책장 15
곤노 빈 지음, 이기웅 옮김 / 시작 / 201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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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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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수사' 시리즈 2편인 이 작품은 지난 1편의 단점까지 보완하고 있어 가히 역대급 완성도를 자랑한다. 우리나라에 출간될 때 '수사의 재구성'이라는 다소 재미없는 부제가 붙었는데 원래 부제는 '과단'이다. 그렇게 잘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 바꾼 듯한데, 과감한 결단을 내린 류자키가 위기에 내몰리는 이야기의 흐름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바뀐 부제가 약간 아쉽다.
허나 '수사의 재구성'이 재미없긴 해도 잘못된 부제는 아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지만 인질을 잡은 범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로 또다시 좌천될 위기에 처한 류자키는 수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이러한 과정의 몰입도가 1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 작품에서 류자키는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서장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트릭은 디테일이 돋보인 데다가 막판의 반전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으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이 반전의 양상이 뻔하다고 생각할 독자도 있겠으나 류자키가 어처구니 없는 책임을 지게 되지 않게 된 것에 안도한 독자가 훨씬 많을 것이므로 이 정도는 옥의 티라 여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몰입도나 서장으로서의 류자키의 일과나 전문성, 합리성도 아닌 류자키의 변화다. 일에 전념하느라 간과하곤 했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물론 그의 신념 일부가 변하는 걸 다룬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하나는 그의 아들이 추천한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서 마음을 다잡은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의 과감한 명령으로 인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이 독이 아닌 오히려 득이 되어 진범을 체포할 수 있던 것이겠다.
전자는 류자키가 홀대하다시피 했던 애니메이션 영화를 관람함으로써 아들을 이해함과 동시에 모종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장면이다. 지금이야 일본이 절대불변의 애니메이션 강국이긴 하지만, 그 일본에서도 애니메이션이 예술의 일각으로 인정받은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류자키가 딱 애니메이션을 애들이나 보는 것으로 인식하는 세대에 속하고 더군다나 그는 학창시절 공부만 해서 예술에 대해선 더욱 협소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입만 열면 합리성만 따지는 양반이 지극히 비합리적인 일 - 영화 관람을 통해 시야가 트이는 전개가 어찌나 통쾌하던지...
후자는 이 작품이 본질적으로 1편보다 뛰어난 이유라고 보는데, 일찍이 이 작품의 3장에서 류자키는 서장으로서 참석한 초등학생 학부모와 교사들과의 자리에게 일장연설을 한 부분과 연관하여 곱씹어보면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3장에서 류자키가 한 말을 내가 이해한 대로 함축해서 말해보자면, 이 세상이 너무도 풍요로워진 대가로 우리는 사생활이라든가, 아이들의 눈치나 범죄자의 인권처럼 과거엔 별 신경도 쓰지 않던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 살게 됐고, 그렇다 보니 놓치게 되는 것도 많아져 도리어 과거보다 세상은 퇴보했거나 살기 위험해졌다... 는 것인데, 역시 앞뒤 맥락을 자르고 옮겨적으니 너무 극단적인 발언인 것처럼 들리는군. 나와 달리 류자키는 매우 조리 있게 잘 설명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풍요를 포기하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대신 경찰 등을 비롯한 타자에게 무조건 날선 반응을 보이는 대신 간단한 협조나 가족과의 대화만으로도 범죄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예방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 장면 직후에 인질 사건이 터짐으로써 류자키는 물러터진 세상의 잣대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처한다. 사살당한 범인의 총에 총알이 다 떨어져 없었다는 이유로 인권 단체 같은 데서 일대 비난이 쏟아지고 경찰 상층부는 사건의 책임자인 류자키에게 어떻게든 패널티를 주고자 수석 감찰관까지 나서게 만든다. 도저히 류자키가 학부모 앞에서처럼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참으로 답답하면서 한심한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답답하고 한심한 양상으로 전개된 덕분에 류자키는 진범을 잡는 식으로 사고를 전환하게 됐다. 그것이 류자키 혼자만의 공로는 아니지만 수사 책임자로서 포기하지 않은 덕에 그렇게나 일사천리로 진범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만약 여론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류자키는 자신이 인질을 무사히 구출했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인질들이 사건을 조작하고 생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뻔뻔히 살아남은 걸 떠올리면 위와 같은 가정은 정말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3장에서의 류자키가 펼친 주장은 반은 맞으면서 반은 틀린 말이지 않은가 싶다. 세상이 물러터져서 놓치게 된 것은 많지만, 반대로 물러터졌기에 놓치지 않게 된 것도 있음을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났잖은가. 합리성만이 옳다 여긴 그가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마음을 다잡은 것도 통쾌했지만, 풍요를 얻은 대신 물러터진 사회를 통찰한 류자키에게 도리어 물러터진 사회 덕분에 진범을 잡을 수 있었다고 반론을 제시하는 듯한 전개여서 의미심장했고 곱씹는 재미가 충분했다.
이러한 재미는 1편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을 완벽히 보완하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지난 1편 포스팅 때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인데, 전편에선 소년 범죄의 가볍기 짝이 없는 양형의 부당함이라든가, 아니면 법이 유독 세간의 정의 구현의 심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꼬라지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류자키의 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춰 흐지부지된 것이 내심 아쉬웠다. 반면 2편은 그렇지 않았다. 박진감 넘치는 수사 과정, 경찰 조직의 다양한 갈등이나 시종 압박감에 시달리는 류자키의 심리를 묘사하면서도 주제의식 또한 예리하게 다루고 있어 전방위적인 만족스러움을 안겨줬다.
게다가 전편의 장점이 바래진 것도 아니다. 경찰의 다양한 부서의 알력이라든가 경직된 걸 넘어 부조리한 조직의 분위기를 신랄하게 묘사함으로써 이상적인 엘리트주의의 화신인 류자키의 캐릭터성이 시종 돋보였다. 흔히 류자키처럼 지위가 높고 가부장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은 자신이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쓸데없는 자신감을 갖는다거나 아랫사람이 자기 일을 한답시고 자신을 대우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 화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류자키에겐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다. 지위가 한참 낮은 부하 형사들, 인질 사건 중에 마주친 특수부대 팀 SIT나 SAT에게도 쓸데없는 참견 없이 그대들이 전문가니 사건을 주도하라며 전폭적으로 의견을 구하거나 자신이 캐리어다 보니 총기나 사건 수사의 노하우 등 현장에 미숙하단 사실을 인정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의 태도에 부하들이 머뭇거리면, 뭔가 잘못됐을 시 책임은 상관인 자신이 진다면서 부하들을 독려하는 등 이번 작품에서도 류자키의 엘리트주의는 빛을 발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잘할 뿐이고 그렇기에 익숙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선 서로 협력해야만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류자키의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인 지시 덕분에 사건 해결 및 진범 체포라는 공통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경찰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의 리더십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감탄은 입원한 아내의 부재로 인해 남은 가족끼리 가사를 해나가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로 터져나왔다. 자신이 서장이랍시고 집에서도 으스대지 않고 가사에 대해 전무한 것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아내나 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에서 나는 인간에게 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건 태도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솔직하고 치우치지 않은 태도는 도의적으로나 합리적으로나 옳고 유리한 전략일 수밖에 없는데, 혹시 이 점을 간과하지 않았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위와 같은 깨달음을 덕분에 이 작품이 아마도 올해 읽은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추리소설로나 조직소설로나 캐릭터소설로나 풍자소설로나 가족소설로나 뭐로나 깔 구석이 전무하고, 특히 아내의 입원으로 인한 긴장감이 인질 사건 못지않은 등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전개가 일품이라 정말이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3편이 국내에 출간될 일은 없을 듯한데, 드라마가 나왔다고 하니 그 드라마를 찾아보는 게 좋을 듯하다. 아니면 일본어를 공부해서 원서를 찾아 읽든가. 간혹 이렇게 꾸준히 소개되지 않고 중간에 끊긴 시리즈를 접할 경우 원서를 읽어볼까 하고 충동적으로 읊조리게 되는데 이 경우엔 그 읊조림이 더 진지하게 새어나왔다. 진짜 일본어 공부를 해서 읽어버려? 어느 세월에 읽겠나 싶지만 이런 충동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 정말로 실행될 수도 있겠다.
P.S 옥의 티 하니까 생각난 것이 있는데, 아들이 전편에선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이번 편에선 뜬금없이 애니메이션으로 진로를 바꾸고 싶다는 게 약간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언론과 애니메이션은 남극과 북극만큼의 간극보다 더 크지 않나 싶어서... 이건 류자키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게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P.S 2 그러고 보니 최근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재개봉했던데, 보러 가볼까. 오랜만에 보고 싶어졌다.
나는 흉악한 범죄와 맞서는 첫 번째 무기가 합리성이라고 믿고 있네. - 197p
반드시 대의를 위해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작은, 아주 작은 하나. 너무나 작더라도 자신이 믿는 바가 있다면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위해 싸우면 된다. -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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