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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반사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3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9.9
몇 년 전 이 작품을 처음 접할 땐 개똥을 치우지 않는 노인에 이입했다면, 이번엔 주차가 미숙한 여자에 이입하며 읽었다. 최근에 운전 연수를 받고 도로로 자주 차를 몰고 나가 버릇하다보니 당연한 일이다. 도로 운전은 어찌저찌 해도 주차에서 막막해지는 경우가 있고 뒤에서 빵빵거리면 보일 것도 안 보이게 되는 조바심을 종종 겪었다 보니 남의 일처럼 읽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차를 버리고 도망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만.
뭐든 끝마무리가 가장 힘들고, 그래서 중요하다. 운전과 마찬가지로 소설도 끝마무리가 무척 중요하다. 작가는 주제의식에 접근할 때 깜빡이를 켜듯 조심히 접근하고 엑셀을 밟을 때는 밟다가도 커브를 돌 때는 브레이크에 발을 걸고서 가야 하기도 하며, 신호에 따라선 멈출 줄도 알아야 하고 그때 급브레이크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전후좌우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주차한 뒤에도 한 번 더 확인해야 한다.
만에 하나, 아니 억에 한 번이라도 잘못 되면 인생 하직해야 하므로 과감할 땐 과감하되 조심해야 할 땐 필요 이상으로 조심해야 하는 것이 운전이지 않은가 하고 요새 핸들을 잡을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그에 비해 소설 집필은 운전만큼 필사적일 수 없으나 이 작품이 사회 구성원 전반에 걸쳐 있는 크고 작은 도덕적 해이를 살살 건드리고, 그로 인한 도미노 현상을 그리고 있는 만큼 작가가 나름 운전에 준하는 책임감 내지는 사명감을 갖고서 집필에 임하지 않았을까 싶다.
쓰러진 나무에 머릴 다쳐 죽은 아이의 아버지인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작가도 글을 이어나가면서 어디까지가 지켜야 할 선인지 고심했다는 게 독자 입장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어떤 지점은 과한 책임 추궁 같고, 또 어떤 지점은 소소한 규칙 위반을 일삼던 인물들의 심정이 이해도 되고 어떤 경우에는 동정심도 일어서 주인공의 추적이 자칫 생사람 잡아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정을 아는 독자니까 해볼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모두가 자기 생각만 하면 난장판이 되는 도로 상황처럼 일생 생활의 에티켓도 싫든 좋든 지킬 땐 지켜야 한다. 옆에서 두는 훈수가 고까워도 이치에 맞다면 수긍해야 마땅한데 자존심 싸움의 문제로 넘어가면 답이 없어진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땐 결말이 다분히 감상적이라 여겨졌는데 이번엔 매우 이성적으로 읽혔다. 양보할 건 양보하고 선을 지키며 주차도 안정적으로 해냈다. 작가의 뒤를 이어서 운전하려는 독자 입장에선 이 작품은 관리가 잘 된 차라 봐도 무방하다. 결국 책임 추궁이 아닌 단지 사과만을 바랐던 주인공의 심정은 참으로 합리적이면서 애처로워 자식이 없음에도 마음이 미어졌다. 도의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사소한 행동으로 인해 아이가 죽을 줄 알았더라면 안 그랬을 거라고, 인정해주고 사과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손가락질이 아니었나 싶다.
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고 거의 대부분이 짜증나기 그지없었지만 장면 전환도 빠르고 스케일이 작은 만큼 이입도 쉬운 이야기였던 터라 탄력적으로 읽을 수 있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누쿠이 도쿠로의, 아니 사회파 추리소설계의 역작이라고 생각하며 다양한 심리와 갈등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만큼 생각거리가 많아진 덕에 이틀 만에 읽어나간 것치고 여운은 아주 짙게 남아있다.
올해 <종이올빼미>부터 작가의 작품을 여럿 접했는데 역시 이 작품이 가장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기에도 가장 괜찮을 듯하다. 국내에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이 예전만 못한데, 조만간 <난반사>에 준하는 걸작을 집필해주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