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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체조 ㅣ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평점 :
9.7
정말 오랜만에 읽은 '이라부' 시리즈는 이전과는 다른 인상으로 다가왔다. 십여 년 전 고등학생 시절의 내게 이라부의 기행은 그저 천박하고 비호감일 뿐이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그도 나이를 먹었는지 어딘지 상식적이고 촌철살인의 언행을 보여 내가 알던 그가 맞는지 살짝 의심스러웠다. 여전히 속물적이고 환자의 아픔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만, 내가 변했는지 작가가 변했는지 아니면 작중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가 변한 것인지 확실히 뭔가 달랐다. 그런데 그게 기분 나쁜 다름은 아니었다.
시리즈의 이전 작품들을 십여 년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환자들의 태도다. 이전 작품들에서 환자들은 타의에 의해 이라부 앞에 앉혀지다시피 했고 자신의 병세를 부정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허나 이번 <라디오 체조>에선 환자들이 먼저 자신의 병세의 심각함을 깨닫고 자진해서 이라부를 찾아가곤 했는데, 흘러온 세월 동안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 그 덕에 시리즈의 인상도 이전과는 달리 다가온 것일 수도 있겠군.
이 책에서 딱 하나 의문인 점은 책 표지에 '오쿠다 히데오 장편소설'이라 적혀 있는 점뿐이다. 누가 봐도 단편소설집인데... 여하튼, 코로나로 인한 사람들의 일상과 심상의 변화에 대한 통찰이 담긴 두 편의 수록작을 비롯 분노 조절 장애, 광장 공포 등 좀 더 일반 대중들도 몰입이 가능한 병세와 환자들의 사연, 그리고 이라부의 무심한 듯 천부적인 카운슬링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읽으면서 저절로 힐링이 되는 책이었다.
수록작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피아노 레슨'이었다. 아마 이 작품은 올해의 단편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듯하다. 작중 환자에게 적절한 거리감을 주는 이라부의 태도는 과몰입과 무관심의 중간 지대에 걸쳐져 있어 상당히 본받을 만했다. 병원에 남아도는 헬기를 직접 몰아가면서 광장 공포를 충격 요법으로 해결해주려고 하면서도, 과도한 책임감에 짓눌린 환자에게 '그냥 나 몰라라 배째!', '일단 지각부터 해봐봐~' 등 남이기에 막 던질 수 있는 무책임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처럼 속시원한 전개와 더불어 주인공의 성찰과 피아니스트라는 특수 직업이 갖는 고충과 극복 과정이 담겨 있어 읽는 내내 적잖이 흥미로웠다. 거기다, 강렬한 캐릭터성에 비해 비중이 애매했던 마유미의 활약 및 그녀와 같은 밴드 멤버들의 등장, 끝말잇기 고수인 피아니스트의 매니저 등 저마다 개성과 역할이 확실한 캐릭터들도 많이 등장하는 등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다채로워서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피아니스트 매니저의 고향인 아마미오시마에서 맞이한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시차의 다름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간 감각과 생활 리듬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걸 받아들이며 한껏 여유를 찾는 주인공의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녀 말고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 속 환자들도 저마다 멍에에 짓눌려 있는데 각자의 멍에를 집어던질 활로를 찾거나 때론 이라부조차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극복하는데 그들이 맞이한 결말이 마치 내 일처럼 통쾌했다.
연초에 각오를 다잡는 와중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었다. 덕분에 나도 작중에 환자들처럼 어떤 멍에에 짓눌려 있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됐고 그 멍에를 집어던질 단서를 얻은 것 같아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공중그네>도 다시 읽으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으려나. 그땐 그 작품이 나오키상을 수상한 것이며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 약간 이해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꼭 올해 안에 다시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