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9.4


 스페인에 여행을 떠나기 전 피카소나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출신 화가들과 관련된 책도 많이 읽어봤는데, 마침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 중에 이렇게 달리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기에 찾아 읽어봤다. 제목만 봐선 무슨 내용일는지 가늠이 안 됐는데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다. 일본의 어떤 독자는 '추리소설로도, 연애소설로도 손색이 없다'고 했던데, 추리소설로는 사람마다 평이 갈릴 수 있지만 손색이 없는 연애소설이란 말엔 퍽 공감했다. 그나저나 역시 추리소설엔 치정이 어울리는 소재인 건가. 소재가 특이해도 하나도 이질적으로 읽히지 않은 데엔 치정이 살인의 강력한 동기가 되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피해자가 달리 애호가인 것도, 피해자가 죽은 장소가 밀실의 고치인 것도 아니다. 열렬한 달리 애호가인 나머지 콧수염도 달리처럼 기르던 피해자가 어째선지 시체로 발견됐을 땐 수염도 말끔히 밀린 상태였다. 도대체 얼마나 원한이 깊길래 살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소중히 기르던 콧수염까지 자른단 말인가. 예전에 신경 써서 수염을 길러본 사람으로서 말하는 건데, 콧수염은 수염 중에서도 그럴싸하게 기르기 까다로운 털이다. 그런데 달리만큼 길렀다는 건 그만큼 애정과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일인데 그걸 잘라간다는 건, 그것도 살해를 저지르고 빨리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굳이 다른 사람의 수염을 면도하는 번거로운 짓을 한다는 게 여간 기괴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의문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아 소설의 초반이 굉장히 지루함에도 결말은 반드시 읽겠노라고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히 중반부부터 피해자의 딱한 사정, 운명의 사랑을 만났음에도 짝사랑에 그치고 만 사연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몰입도가 올라갔다. 이윽고 과거 회상 장면에선 피해자가 실연 직전인 탓인지 어딘가 광기에 차있으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초라한 면모를 드러내는데, 화자인 아리스의 과거도 마찬가지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은 정말 인륜지대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에 좌절당하지 않고 쟁취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을 쟁취한다는 표현엔 어폐가 있겠다. 내 경우엔 늘 사랑이 일방통행이어서 비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 말하자면 사랑은 상대와 쌓아나간다는 말이 훨씬 적절하겠다.

 왜 수염이 밀렸고, 어떻게 고치 안에 시체가 방치될 수 있었는지 등의 수수께끼는 이야기가 진행되며 차츰 밝혀진다. 사건의 진상에 비해 지나치게 폼을 들였고 분량도 많이 소모한 감이 있지만 설명과 개연성이 명쾌하며 해당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와 완전히 인상이 달라지기도 해 새삼 반전에 살고 반전에 죽는 추리소설의 매력이란 이런 거지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초반이 특히 지루하고 소재 자체도 달리라는 키워드를 빼면 완전히 통속적이라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내겐 이런 화려하지 않으며 잡다한 요소마저 좋았다. 예전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풍과 세계관이 뭔가 애매하다고 여겼는데 이젠 분량이 더 길어도 좋으니 히무라와 아리스의 잡담이나 그들이 진범을 잡기 위한 시행착오를 더 빈번히 겪었음 좋겠단 생각마저 든다. 일상적이라서 더 빠져들게 되고 특히 진범을 찾고자 헤맨 시간이 길수록 히무라가 진범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이라든가 진범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서술의 임팩트가 올라가 다 읽고 난 다음의 여운에 크게 이바지한다고 본다. 특히 여운에 있어서 아리스가와 아리스만한 추리소설가가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달리 관련 이야기가 다뤄진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한 여자에 일편단심이었던 달리에 대한 해석, 사랑을 받은 여자보다 그만큼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던 달리가 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해석도 인상적이었고 - 여담이지만 작중에서 마성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사기오 유코가 방금 말한 해석을 내놨는데 이 해석을 보고서야 왜 그토록 많은 남성이 반했는지 납득이 갔다. 캐릭터는 설명보다 한 마디의 대사로 드러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 짝사랑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잘 알던 피해자의 내면,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의 애정을 얻으려는 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라는 대사도 마찬가지로 인상적이었다. 위의 두 말에 적잖이 공감하기도 했고, 자신만의 갈라(달리가 사랑한 여인)를 찾지 못해 '고치'라고 불릴 만한 특수 기계에서 위안을 찾는 모습이 특히 애처롭게 느껴져 사건의 진상과 무관하게 피해자를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착잡한 마음이 앞서게 되는 것 같다.

 내일 떠나는 3주간의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에서 바르셀로나 근교인 피게레스라는 소도시도 방문할 예정이다. 그곳에 있는 달리 미술관을 가기 위함인데, 그 미술관엔 비록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은 없지만 - 그 작품은 뉴욕의 모마MOMA에 있고 여담이지만 그 작품은 이미 봤다.ㅋ - 달리의 평생동안 보여준 예술 세계의 진수, 갈라를 향한 애정의 증표 등 달리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다고 해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달리가 뛰어난 예술가지만 작품 중엔 가끔 과하거나 일반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결과물도 있어 과연 100% 만족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래도 이렇게 <달리의 고치>로나마 달리 이야기를 접한 만큼 꼭 방문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달리와 갈라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며 미술관을 둘러보게 될 듯하다. 과연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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