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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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이 소설은 어떤 사람에겐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린 이색 추리소설로 읽힐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겐 죽음에 대한 철학이 진지하게 녹아든 무게감 있는 소설로도 읽힐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매력적인 도입부 제시와 분량 조절에 실패한 벽돌 소설로 다가올 것이고 완독에 성공하는 경우도 제법 드물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분량이 제법 되는 소설은 어지간히 흡입력이 있지 않은 이상 읽는 이의 컨디션에 작품 만족도가 크게 좌우되는 것 같다. 이 소설처럼 분량 못지않게 내용의 무게감이 강조된 작품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설령 완독하더라도 이 소설에 만족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0주년 결산에서 이 작품이 1위했으며 수많은 추리소설 팬들의 극찬의 이유를 확인하자는 게 아니라면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은 완독을 하고 싶은 동기부여가 매력적으로 이뤄지는 작품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결말에 도달할 지점인 300페이지 중반 즈음에서야 본격적으로 사건다운 사건이 터지고 이후의 전개는 그간의 느릿한 전개와 달리 재빠르게 흘러가지만 오히려 그러한 속도감의 변화 때문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도 있을 듯하다.


 그전까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지탱하다시피 했던 죽음에 대한 철학도 작품 이해나 '갑자기 살아나는 시체들'이란 설정을 해석할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진 않아 작품 후반부의 활극이나 끝없이 엎어지고 난무하는 추리들이 갈수록 어찌 돼도 상관없는 내용으로 느껴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인물들의 사망 여부, 언제 사망했는지 여부가 굉장히 중요하단 점, 그리고 범인의 동기가 독특하고 설득력 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도나 고양감을 느낄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과거엔 시대를 앞서간 독특함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작품이고 나 역시 10년 전에 읽었을 땐 재밌게 읽었지만, 그 이후에 깊이나 분량면에서 이 작품보다 압도적인 작품을 적잖이 접한 지라 요번에 다시 읽으니 과거에 좋았던 인상마저 빛이 바랬다.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마저 지금은 아무래도 좋을 형이상학적인 토론으로만 읽혀서... 작품의 6할이 사유라 볼 수 있는데 일주일이 지난 다음엔 특별히 기억나는 내용이 없다.


 내가 컨디션이 별로여서 유독 이렇게 삐딱한 감상을 내놓는 것인지 모르지만, 한편으론 독자의 컨디션에 좌우되는 작품성이라는 것도 요즘 들어선 영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취향에 맞았거나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한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밖에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제는 조금 고리타분한 작품이 돼버렸지 않나 싶다.

 작가가 본인이 쓰고 싶은 모든 걸 다 쏟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경외심이 들지만 딱 그 정도다. 내가 이 소설에 대해 10년 전엔 '죽음이다' 라고 감탄한 어조의 포스팅을 올렸지만 지금에 와선 다른 의미로 '죽음이다' 라고 외쳐야 할 것 같다. 정신줄을 붙잡고, 마치 좀비처럼 퀭한 표정으로 완독해낸 나 자신이 뿌듯하다기보단 독하다고 느끼는 건 어째서일까? 좀비처럼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지겨움 때문이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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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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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독방이란 갇힌 젊은이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바람조차 허락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8월 중순에 예정된 대만 여행을 기다리면서 대만과 관련된 책을 찾아 읽다가 이 작품도 접하게 됐다. 위 문장은 주인공이 영창을 묘사한 문장 중 하나인데, 아주 효율적이면서 간결하게 상황의 참담함을 전달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식의 폭발적이며 생생한 문장이 <류>에선 처음부터 질주하듯 구사된다. 그런 문장이 전개되는 모든 상황과 주인공의 심정을 어루만져 정말 오래간만에 소설 읽는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대만계 일본인 작가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나오키상 수상작인 <류>는 작가의 유년 시절의 대만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낸 작품이다. 대만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깝고 익숙한 나라지만 실상 그 나라의 역사까지 아는 사람은 무척 적은 편이다. 나 역시 그랬고 그렇기에 대만은 어떤 나라고 중국과 어떤 관계인지 알고자 여러 책을 읽고 있는데, 역시 역사 서적이나 인문 서적도 좋지만 소설만큼 전달력이 강한 매체도 또 없는 것 같다.

 대륙에서 공산당에 맞서 싸웠던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지난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념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고 밥을 주거나 의형제들이 있는 곳에서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싸웠을 뿐이다. 그는 스스로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어렴풋이 예상했었을까? 결말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 질문에 비슷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원래부터 대만에 살았던 '본성인'과 공산당에 패해 대만이란 낯선 섬으로 쫓겨나 살아가는'외성인'이 - 주인공의 가족들이 외성인에 해당 - 아직 제대로 섞이지 못했던 과도기를 배경으로 두고 있다. 마오쩌둥이나 박정일 같은 위상을 가진 장제스가 죽은 다음날 할아버지가 죽고, 하필 할아버지의 시체를 주인공이 발견해버리면서 일종의 트라우마, 그리고 미스터리를 안고 일생 동안 방황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주인공이 입시에 실패하거나 폭주족과 패싸움을 벌이고 입대해서 개같이 고생하는 등의 모든 이야기가 촘촘하고 치밀하게 얽혀있지 않지만 문장의 위력과 70년대의 대만이란 시공간이 주는 절대적으로 독특한 분위기가 한몫해 대체로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그리고 후반부에선 드디어 주인공이 할아버지를 죽였다고 추측되는 범인을 찾아 본격적으로 떠나는 여정이 시작되는데, 이 부분의 연출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더 이상 이 소설의 장르를 규정하거나 몇몇 이야기가 가독성이 떨어졌거나 하는 건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고 진범과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이게 됐다.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고 이 여운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던 결말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다음달에 대만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한참 나중에 읽게 됐을 텐데, 지금 이 순간에 내게 필요한 이야길 읽은 기분이라 절묘하기까지 했다. 어떤 글을 써야 하고 내 글에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지만 지금 이 작품처럼 날 뒤흔든 작품은 흔치 않은 것 같다. 나는 치밀한 전개를 우선했고 문장은 소홀히 하는 감이 있었는데 그런 내 가치관에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작품을 읽었더니 사고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훗날 내가 어떤 글을 쓰고 그 글이 어떤 결실을 맺을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작품 <류>를 읽은 순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듯하다. 아마 올해 읽은 최고의 책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운이 좋다면 더 멋진 작품을 접할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류>의 여운에 젖어있고 싶다.


단순한 불량과 시적인 불량에 차이가 있다면, 단순한 불량은 눈앞에 있는 적만 보지만, 시적인 불량은 자기 내면에도 적이 있다는 점이다. - 71p


우리는 서로에게 눈길을 피하지 않고 공격과 타협 그리고 도망칠 길을 암시하는 모든 조짐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놀랍게도 싸움을 걸어온 레이웨이조차 도망칠 길을 찾고 있는 듯했다. 사람을 죽일 때만 성욕이 치솟는 짐승이 아니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자기는 아닌 척한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를 길들였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 76p


우리 마음은 늘 과거 어딘가에 붙잡혀 있지. 억지로 그걸 떼어내려 해봤자 좋을 게 없단다. -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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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잔 진구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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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전작 <모래바람>이 너무나 별로여서 다음 작품인 <세 개의 잔>도 크게 기대되지 않았다. 작가에 대한 애정만 아니었다면 이 작품을 펼칠 일은 없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오글거리는 의뢰(?)를 수락하는 진구의 모습이 그려져 요번에도 뇌절인가 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진구가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누명을 쓰고 일사천리로 유죄인 상황으로 몰리게 되자 나는 삽시간에 작품 속에 빠져들게 됐다. 주인공이 누명을 쓰는 이야기는 참담하게 읽히지만 이후에 어떻게 누명을 벗을 것인지, 또 어떻게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상대에게 복수할지 그 귀추가 주목돼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이야기의 동력은 초반부에 강력하게 설정해놓는 데엔 성공했으니, 이제 중요한 건 디테일일 것이다. 전직 판사인 작가에게 법의 틈새, 구치소의 특수한 환경 같은 디테일을 작품 속에 녹이기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만큼 수월한 일이다. 실제로 판결을 내렸던 사건에서 영감이라도 얻었는지 - 하지만 예전에 읽은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글은 100% 창작이라고 한다! - 진구에게 누명을 씌운 범죄 조직 목적이나 그들의 계획성은 아주 참신하진 않아도 치밀하기 그지없어 읽어내려갈수록 결말이 어떻게 지어질까 궁금해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조직의 규모를 언급하며 진구를 협박하던 조직은 후반부에서 진구의 반격에 순식간에, 그리고 허무하게 무너진다. 엄청난 장기전을 예상한 것과 달리 승패의 여부는 조직이 먼저 선을 넘으면서 진구를 건드린 시점부터 이미 진구 쪽으로 기운 것이나 다름없어서 다소 싱거운 감이 없잖았다. 조직의 브레인인 연부의 예측불허한 면모가 오히려 결말의 긴장감을 약간 떨어뜨린 편인데, 그래도 전작에 비해선 특유의 마성을 제대로 선보여 도진기 작가의 천재 캐릭터들 진구, 고진, 이탁오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과시한 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에선 진구와 연부말고 이탁오, 그리고 짧게나마 고진도 등장하는데 훗날 출간할 작품엔 이 넷이 모두 주연급 인물로 등장해 본격적으로 맞붙게 될까? 이 네 명은 이들 중 두세 명만 있어도 뒷세계에서 암약하는 조직을 묵사발을 내버릴 수 있는 두뇌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인 지라 후속작이 몹시 궁금하다. <세 개의 잔>에서 정작 트릭보다 서사가 더욱 흥미로웠던 만큼 그 네 명의 캐미와 서로 속고 속이는 서사도 역시 기대된다. 마블 이후로 팀업 작품이 기다려지긴 정말 오랜만이다. 작가가 눈건강이 나빠졌다며 후기에 다음 작품 출간이 많이 늦어질 수 있다며 미리 양해를 구하던데,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으니 제발 출간해주길 바란다. 좋은 후속작을 위해 기다림이 뭐 대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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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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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어디까지 실화고 어디부터 픽션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본인의 경험을 유려하고 문학적으로 풀어넣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일이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는 작가지망생의 답답한 심정이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문학으로 승화됐다는 것인데,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긴 하나 글의 진솔함과 주인공의 직업 덕분에 조금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한국어 수업' 시리즈 1편에선 미국으로 이민을 간 주인공이 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2편에선 한국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소설을 가르친다.

 그러고 보니 장르 문학이 아닌 보통의 한국 문학에서 이렇게 시리즈물이 나온 경우가 참 드물지 않나 싶다. 동일한 주인공이 두 편에 걸쳐 성장하는 이야기가 제법 신선했는데 각각의 작품이 꼭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것이 아닌 만큼 개별적인 완성도가 출중한 것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지점이었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를 볼 때도 느끼지만 요새 나오는 시리즈물은 너무 후속작을 위한 예고편으로만 기능해 그 점이 늘 불만이어서 하는 말이다.


 동일한 주인공이 나오고 주인공이 처한 환경도 나라만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으나 1편과 2편은 꽤 다른 양상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1편은 이방인으로서 자신에게 익숙했던 모국어인 한국어부터 자신의 과거의 삶의 족적마저 어색해지고 현실감이 떨어져가는 묘한 이야기를 전달했다면 2편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하며 조금은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며 여운을 안겨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2편은 한국이 배경인 만큼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익숙하게 다가와 친국하게 읽혀 신선함은 덜했던 반면 1편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의 고충'처럼 내가 쉽사리 경험하기 힘든 독특한 직업 세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어 훨씬 흥미로웠다.

 이 두 권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 역시 한 편의 소설을 완결을 짓고자 고군분투했는데 그렇다 보니 주인공의 고뇌나 희로애락에 적잖이 공감이 갔다. 좀 더 눈에 명확히 그려지면서 건실적인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꿈을 쫓기엔 이젠 시기적으로 너무 뒤늦은 것 아닌가 하는 주인공의 고민은 대다수의 작가 지망생, 예술가 지망생에겐 공감을 유발하는 대목일 것이다. 이처럼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은 고민을 하니 작가는 자신의 고민을 자신만의 어법으로 독특하게 풀어내는 것이 관건이었을 텐데 작가는 이 부분을 정면돌파로 수월하게 해결한다.


 때론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픽션답게 약간의 기승전결의 틀만 갖춘다면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문학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평범한 인생이란 없는 것 같고 어떤 시선으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느냐에 따라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덕분에 나도 소설을 쓸 때 적잖이 힌트를 얻었다. 문학을 너무 만만하게 여겨서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여겨서 그리 전전긍긍했었나 싶기도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는데, 나도 내 삶을 너무 경시하며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을 쫓지 않았는지 반성도 해봤고... <초급 한국어>에서 주인공이 한국어를 깊게 들여보자 낯설음과 어려움을 느낀 것처럼 그 책을 다 읽은 뒤 나도 내 지나온 삶이 점점 그렇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가가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내 읽는 내내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오랜만에 공감 가는 이야기를 읽어서 반가웠다. 학교 다닐 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학교 과제로도 비슷한 이야길 많이 접했는데 시간이 지나 오랜만에 이런 창작물을 접하니 감회가 새롭다. 후속작으로 '고급 한국어'...가 아니라 '실전 한국어'가 나올 수도 있다는데(ㅋ) 꼭 나왔으면 좋겠다. 그 작품에선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지, 그리고 그 작품을 읽을 때 내 삶은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지 몹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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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 / 알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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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8월에 대만에 가는 김에 대만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고 싶어졌는데 문득 이 소설이 떠올라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은 홍콩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와 대만 추리소설가 미스터 펫이 공동집필한 SF 소설집으로 처음 접하신 분들은 제목의 의미며 작가들의 국적이나 장르까지도 도대체 무슨 내용일는지 짐작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중화권 작가들이 쓴 글임에도 작중 배경은 미국과 일본이라 더욱 정체불명의 작품이라 여겨질 수 있겠다.

 <S.T.E.P.>엔 SF적 상상력을 두 추리소설가가 추리소설다운 집요함으로 풀어낸 소설들이 수록됐다. 총 4편의 중장편이 수록됐으며 두 작가가 두 편씩 담당했는데 두 작가 다 전공이 컴퓨터 쪽이라 원래부터 SF 소설을 집필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소재 다루는 데 능숙하고 심지어 고증이 탄탄하단 느낌마저 든다. 생각이 이상으로 각잡고 집필해 중반부에 컴퓨터 인공지능의 원리를 기술하는 대목은 나 같은 문과생에겐 약간 버겁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인공지능 시스템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벌어질 윤리적 딜레마와 미스터리한 사건들, 그리고 치명적 오류까지 그려내는 등 심도 있고 입체적인 이야기가 펼쳐져 끝까지 몰입도와 만족감이 증폭됐다.


 대다수의 독자들이나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사람들도 그렇고 나 역시도 미스터 펫보다 찬호께이의 작품에 더 눈길이 갔다. 찬호께이가 묘사하는 미국이 배경으로써 그럴싸하게 다가왔고 실제로 이 작가가 다루는 작중 사건이 이 세계관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에 비해 미스터 펫이 묘사한 일본은 작가의 필명처럼 좋게 말해 이색적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작위적으로 읽혔고 다루는 사건도 이야기의 본론에서 벗어난 별난 형식의 서사인 경우가 많아 어느 순간부터 정이 가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미래를 예측하는 사보타주 시스템을 다룬 본작에서 미스터 펫 작가가 선보인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재치 넘치는 편이었지만 솔직히 주인공 두 캐릭터의 매력이나 캐미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박한 평가를 내렸을 듯하다.

 반대로 찬호께이는 SF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초반엔 SF인 것을 강조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몰입을 시키다가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의 맹점과 기계에 의존한 인간이 범하는 오류로 인해 터무니 없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등 SF다운 주제의식을 강렬하게 어필하는 것에 성공한다. 시뮬레이션, 인공지능, 평행세계, 다중우주 같은 설정은 요즘 세상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소재지만 추리소설의 대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서사적 디테일을 자신이 대학생 때 전공한 컴퓨터 공학에 접목시키니 금상첨화, 여호첨익이 따로 없었다. 이보다 설득력 있고 진중한 SF 스릴러는 흔치 않은데 6년 전에 읽었을 때나 지금 다시 읽었을 때나 똑같이 감탄했다.


 책의 제목은 각 수록작의 알파벳 앞글자를 엮은 것이기도 하지만 작중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미래에선 인간과 기계가 이인삼각으로 걸음을 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오는데 이 문장에서 작품의 제목이 비롯됐다고 생각된다. 이 주제의식도 사실 뻔하지만 표현이 너무 절묘하고 속된 말로 아다리가 맞아 이야기 전체가 강렬하게 가슴에 박힌다. 늘 느끼지만 난 이렇게 재치 넘치는 제목에 약하다. 뭐가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STEP이란 단어를 성사시키려고 각 작품의 제목 첫 글자에 해당 알파벳을 넣으려고 머릴 굴리는 작가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참 많이 읽었는데 호러나 청춘소설보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컴퓨터 기술을 극한으로 다룬 SF 장르에 훨씬 재능이 많은 것 같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 중에 읽지 않은 건 동화추리소설 <마술피리> 뿐인데 그 작품은 어떨는지 기대되면서도 살짝 걱정이다. 실망하면 어쩌지?

 미스터 펫은 아직 이 책에서밖에 접하지 못했는데 국내에서 두 권이 더 출간됐다. 두 작품 다 왠지 내 취향일 것 같지 않지만 한 권 골라 도전해볼 생각이다. 찬호께이만큼은 아니지만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듯해 공동집필이 아닌 단독집필에서 그 아이디어가 어떻게 빛을 발할 것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단독집필한 작품이 훨씬 좋을 수도 있지.


각 수록작별 한줄 감상 (스포일러 포함)


'사보타주' - 나는 추리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항상 '이게 현실이 아니라 다행이다' 란 말을 하는데 이 말을 추리소설 등장인물을 통해 들어보긴 처음인 것 같다.

'T&E' - 모든 것이 다 좋은 작품이었는데, 이게 결국 정사가 아니란 게 아쉽다. 열린 결말을 감당하지 못해 그런 노선으로 변경한 건가?

'E PLURIBUS UNUM' - 반성과 복기 없는 추리는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 아니, 가장 위험한 짓이다.

'PRPCESS SYNCHRONIZATION' - 읽을 땐 재밌었는데 일주일 지나니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을 인위적으로 심을 수 있다면 반대로 빼는 것도 가능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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