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 우리에게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스페인 이야기
서희석 지음, 이은해 감수 / 을유문화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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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5월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가게 돼서 요새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찾아 보는 중이다. 이전에도 관심이 많은 나라들이라 정기적으로 관련 책을 찾아 읽었지만 이렇게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진짜로 가게 된다는 기대를 안고 있는 와중에 읽으니 내용들이 전에 없이 술술 들어온다. 여담이지만 스페인어 교제도 샀다. 현지에서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해야 하니까...

 나는 원래 '한 권으로 읽는~' 이란 제목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는다. 한 권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욱여넣으면 내용이 풍성해지긴커녕 빈약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의 경우 스페인 근현대사만을 다루는 듯해 솔깃했다. 실제로 목차를 보니 펠리페 2세부터 살펴봐 정확히는 근현대사보다 좀 더 전의 역사부터 포함된다 할 수 있는데 아무튼 결과적으로 제법 디테일하고 고증이 탄탄한 책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적어도 진짜 근현대사 파트 전까지는.


 애석하게도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프랑코 독재까진 거의 단순 사실 나열이라 다소 지루하게 읽혔다. 반면에 펠리페 2세를 비롯한 스페인 왕가의 이야기는 의외로 굉장히 재밌었다. 수도원을 지을 때의 노동자들과 임금 문제로 갈등을 겪는 것이나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를 제압하고자 스페인이 혈세를 낭비하며 용병들을 고용했는데 정작 그 용병들이 또 상황을 악화시키는 에피소드, 게다가 중간중간 왕가의 스캔들까지 다루니 역사보다 대서사시를 읽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렇게 사진도 거의 없고 그나마도 흑백인데 그럼에도 빠져들며 읽는 역사 이야기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건 내용도 내용이지만 작가의 필력 덕분이라 해야겠다.

 그나저나 스페인 역사를 대서사시라고 한다면 굉장히 비극적인 대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너무 많은 식민지를 관리하고 반란을 제압하는 것에 너무 많은 수고가 들어 결국 자국 사정도 망쳐버리는 본말전도의 모습이 처음엔 쌤통이다가도 나중엔 정말 처절하게 비쳐졌다. 이 시기를 다룬 부분이 유독 흥미로웠던 이유는 바로 스페인 자국에서 자기네들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면밀히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다양한 사유를 낳았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스페인 현지에서 유학하고 현재도 살고 있다는 저자는 그 다양한 사유들 중에 흥미롭고 의미 있는 해석을 잘 모아 이 책에서 소개해 상대적으로 팩트 위주인 근현대사보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성찰과 교훈이 담긴 중세가 더 흡입력 있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스페인 역사가 우리에게 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라 강조한다. 식민지를 엄청나게 거느린 나라와 중국과 일본에게 짓밟힌 우리나라의 역사와 닮은 구석이 있을까 싶었지만 저자가 공언한 대로 제법 닮은 구석이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의 왕가나 구체제가 결정타를 맞은 부분이 그러했다. 무능한 지도자와 비선실세가 나라 말아먹은 꼴이나 - 그런데 재밌는 건 스페인에서 무능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두 왕이 있었는데 이때 궁정화가가 무려 벨라스케스와 고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원. - 다른 유럽 나라가 종교부터 시작해 근대적인 가치관을 확립해나가고 있을 때 스페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 부랴부랴 쫓아가다 경험 부족으로 결국 내전이 터지고 30몇 년 독재자의 압제를 겪기도 하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독자는 적을 것이다.

 아까 스페인이 본말전도의 길을 걷는 걸 보고 쌤통이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스페인이 남미나 네덜란드, 까딸루냐와 바스크 지방에 한 짓은 정말 악랄했지만 그렇다고 스페인 모든 국민이 겪는 고통을 인과응보로 여기는 건 내키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스페인에서 양심 있고 생각 있는 지식인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의 의지가 좌절됐는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은 잘못 내뱉으면 정말 폭력적으로 들리는데 이 경우가 딱 그렇다.


 그렇다 보니 한 나라를 단순히 나쁜 나라, 멍청한 나라, 게으른 나라라고 선입견을 가진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선입견을 조장하는 분위기가 우리 주변에서 만연한 걸 넘어 당연시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경각심을 가지면서 살아야 할 듯하다. 좀 거창한 말이긴 했지만,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처럼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을 읽다 보면 단순히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깨달음을 늘 얻곤 한다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역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겠지. 이걸 인식한 것만으로도 정말 좋은 공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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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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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책을 읽고 이안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시간이 지나 다시 읽으니 안타깝게도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일러스트가 수록된 특별판을 읽으니 더더욱 영화의 비주얼과 비교돼 소설의 표현력이 초라하게 다가오는 역효과를 낳았다. 책의 일러스트는 대체로 예뻤지만 경이로운 수준은 아니었고 대체로 있으나 마나 한 내용이었던 터라 작품의 몰입도를 크게 높여주진 못했다.

 비주얼이 아닌 연출이나 몰입도 측면에서도 영화가 소설보다 뛰어났다. 파이의 독창적이고 강인한 정신세계를 어필하는 소설의 전반부는 적잖은 독자들이 공인하듯 지루하고 리차드 파커가 호랑이의 이름이라는 반전은 유머러스하긴 해도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너무 뜸을 들여 김새기도 한다. 그에 비해 영화는 초반부의 지루한 부분을 많이 쳐냈고 책의 아쉽거나 두루뭉술한 부분을 많이 개선했다. 가령 파이가 일시적으로 실명했을 때 자신처럼 조난된 처지의 사람을 만나는 장면은 정말 사족이었는데 그런 사족이나 설명충스런 부분을 영화에선 압도적인 비주얼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에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에겐 더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작품의 결말도 영화가 더욱 잘 묘사했다고 본다. 번역의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책에선 파이가 두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냐고 묻는 반면 영화에선 더 마음에 드는 이야기냐고 묻는다. 사소한 뉘앙스 차이일 수 있으나 단순히 이야기의 만듦새를 겨루는 것이 아닌 인간이 기적과 믿음을 가지는 매커니즘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의 주제의식과 깊이를 생각하면 나는 영화에서의 배우들의 호연이나 연출이 더 마음이 간다.

 영화 쪽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했다면 소설은 파이가 화자로서 이야기하고 결말도 파이가 끝맺는 형식이다. 영화에선 파이에게 이야기를 들은 작가가 자기만의 답을 내리고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얻음과 동시에 자신처럼 파이의 두 이야기를 들은 일본인 조사관들이 적은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 미소 짓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 장면이 일품이었다. 인간은 끔찍한 이야기를 인정하느니 황당하더라도 환상적이고 희망이 있는 이야기를 믿으려 한다. 이 믿음은 때론 비극도 기적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공감을 구하는 장면이었는데 나도 마음속으로 동의하며 고갤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이렇게 지루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간혹 영화화가 너무 잘 이뤄지면 원작도 반사이익을 보기 마련인데 <파이 이야기>는 정반대다. 영화 덕분에 책도 부커상 수상작 중에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하고 이렇게 일러스트 버전처럼 여러 버전의 책이 지속적으로 출간되는 등 스테디 샐러로 자리매김됐지만...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다고 생각해보긴 정말 처음인 것 같다.

 여담이지만 제목은 원제보다 우리나라 버전의 제목이 더 좋다. <라이프 오브 파이>보다 <파이 이야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파이 전체의 삶이 아닌 파이의 두 가지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니까. 영화도 원제말고 이 제목으로 상영하지. <나를 찾아줘>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작품도 소설보다 영화가 더 좋았는데. 원작 소설보다 더 괜찮은 영화가 은근히 많다. 소설은 무조건 영화보다 낫다는 것도 참 이상한 편견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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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송경은 옮김, 김태권 부록만화 / 마시멜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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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8


 밑도 끝도 없이 히틀러가 죽지 않고 현대의 독일에서 깨어난다는 황당하고 섬뜩한 설정의 작품이 있다기에 찾아 읽어봤다. 진짜 히틀러가 말이다. 난 혹시나 너무 미쳐버려서 자신이 히틀러라 단단히 착각해버렸다는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반전은 없었고 이 작품 속 히틀러는 진짜 히틀러였다. 어쩌다 현대로 넘어왔는지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리라. 전범이란 자각도 없이 여전히 망상에 빠진 그가 무슨 짓을 할 것인가 그 여부가 중요할 것이다.

 의외로 이 작품 속에서의 히틀러는 자신이 이끌던 나치와 독일이 패전하고 지금의 독일이 꿈꿔온 것에 비해 전혀 다른 역사를 밟은 현대의 독일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니, 적응한다기보다는 눈치를 본다는 표현이 옳은데 오히려 이런 주변머리를 갖추고 서서히 자신이 암약할 기회를 노리는 점이 참 현실적이고 섬뜩하게 다가왔다. 당연히 사람들은 히틀러를 보고 그냥 히틀러 흉내를 완벽히 내서 모종의 풍자를 노리는 코미디언이라 알아서 착각하지 진짜 히틀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점점 현혹되는 사람이 늘어가는데, 그때마다 현대의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의 언변에 넘어갈 만큼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그 나라 사람들이 한 명의 미친 독재자한테 시달린 흑역사를 잊을 리 없으니 다시 돌아온 히틀러라 해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믿으면서.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독일이 과거에 그런 과오를 저지른 건 히틀러 단 한 명의 책임이 아닌 히틀러의 이름을 연호하고 지지를 아끼지 않은 우중愚衆의 책임도 크고, 히틀러는 그저 운이 좋거나 시대가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를 잘 파악한 미치광이라는 말이 아주 과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고 입가에 쓴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타인의 의견을 자신과 다르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묵살할 순 없지만 무슨 일이 터진 다음엔 민주주의가 형체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런 말랑말랑한 분위기 속에선 독일은 언제든, 아니 평화로운 분위기가 만연한 어떤 나라든 나치에 찬양한 과거 독일의 전철을 밟을 공산이 크다.  작중에서 히틀러가 다른 창작물에서와 달리 미묘하게 인간적으로 묘사된 터라 우리 주변에 악마를 가려내는 건 무지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

 억지 주장은 언변으로, 장황한 말투에 사람들이 당황하면 카리스마로 어떻게든 무마하고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고급 코미디로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착각하고 포장해주다 보니 히틀러는 어느새 유튜브 스타가 되고 만다. 이 과정은 다소 과장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작가가 의도한 바는 전해졌다. 어딘지 허술한 정치인들과 네오나치마저 차례차례 논파해나가는 히틀러의 기상천외한 여정은 그가 과거에 했던 짓을 그대로 재현할 초석을 닦았다는 불길한 암시를 남기며 끝맺어지는데 이 후반부의 전개에 몇이나 웃을 수 있을까. 어려운 서사와 인물을 그럴싸하게 써내려간 패기와 묘한 유머는 인정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블랙유머로 부르기엔 지나치게 섬뜩하지 않은가 싶었다. 나는 <그가 돌아왔다>를 코미디 소설이라 정의하는 것은 작중에서 사람들이 히틀러를 코미디언으로 착각하는 것만큼 웃긴 일이리라 여겨졌다.


 이 작품이 영화로도 나왔다는데 그 결과물이 궁금하다. 평가가 원작 못지않게 좋던데 어떻게 결말이 났을지 궁금하고 대체 어떤 배우가 히틀러를 연기했을지 궁금하다. 이래저래 리얼리티가 중요한 스토리인 만큼 과장 없는 히틀러 연기가 과연 어떻게 디렉팅됐을지 몹시 궁금하다. 듣자하니 연기나 결말이나 소설보다 더 불길하게 연출됐다는데... 나치에 치를 떠는 독일에서 이런 파격적인 작품이 나온 것도 신기한데 영화로도 나왔다고 하니 그 만듦새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담이지만 책엔 일종의 부록 같은 개념으로 만화가 김태권의 단편 만화가 실려있다. 그는 <히틀러의 성공시대>라고 히틀러와 나치가 어떻게 독일을 집어삼키는지 그 과정을 그린 작품을 그렸는데, 지나치다 싶은 희화화와 아재 개그 때문에 히틀러와 그 시대의 섬뜩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 단점이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요번에 실린 단편 만화는 그런 부분은 조금 덜어지고 대신 현실성을 높여 섬뜩함을 더하는 데 중점을 뒀던데... 아예 이 소설을 원작으로 둔 만화를 그려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이번 만화는 너무 패러디라 조금 유치하게 느껴지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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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 1 - 차일드 44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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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최근 러시아와 관련된 책을 읽었다보니 자연스레 이 작품이 떠올랐다. 소련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아동 연쇄살인을 바탕으로 집필된 <차일드44>는 의외로 소련의 실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톰 롭 스미스라는 영국인 작가의 작품이며 데뷔작이지만 맨부커상 최종후보에 들고 이름 있는 추리소설상을 수상하고 톰 하디가 출연한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영화는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관객과 평단, 심지어 원작 팬들한테도 외면당했고 몇 년 전에 나도 영화의 실태를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원작을 다시 읽으니 그 수준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경직되고 허황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한 사회주의의 이념도 문제지만 그걸 실현하고 믿음을 공고히 하고자 자국민 학살도 주저 않는 50년대 소련의 분위기가 더 문제일 텐데 이와 같은 총체적 난국을 <차일드44>처럼 잘 구현한 작품을 난 아직까지 읽은 적이 없다. 전체주의를 겨냥하고 실감나게 묘사하며 비판하는 작품이야 한둘이 아니지만 이 작품은 엄연히 실존했던 나라를 배경으로 두고 실재했던 사건을 다룬 만큼 충격도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배경과 사건의 모티브가 된 연쇄살인은 전혀 다른 배경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연쇄살인은 80년대에 내막이 드러났는데 이 즈음은 소련의 밑천이 드러나 국가가 사형 선고를 받기 직전인 터라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누그러진 편이라고 한다. 적어도 아직 스탈린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50년대와 비교한다면 말이다.


 스탈린이 언급돼서 하는 말이지만, 스탈린의 사인死因은 사실상 본인이 자초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고 들었다.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몰빵하고 독재자로서 군림해야 하니 국가의 모든 일을 자신이 결정했고 그 탓에 늘 과로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스탈린은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다는데, 문제는 그의 수행원이나 부하들은 스탈린이 업무를 보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해진 규율을 어기고 괜히 나댔다가 스탈린에게 찍혀서 숙청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아무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 스탈린은 추정컨대 사망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엄청난 고통 속에서 말도 못하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아니 전체주의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두 가지 짚어낼 수 있다. 소수의 권력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긴급 사태를 대처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피해는 권력을 만들어낸 본인들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자로 군림하기 위해 온갖 그럴싸한 말로 자기자신과 신념을 신격화해봐도 그래봤자 일개 인간의 몸을 지녔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피로와 고통에 직면하면 고꾸라지기 마련이거늘... 삶이란 이처럼 덧없는데 뭐라도 되는 것처럼 발버둥친 꼴처럼 보여 스탈린이고 사회주의고 다 안쓰럽다.


 작중에서 삽질을 해대는 사회주의 추종자들이나 레오와 라이사, 네스테로브의 수사를 방해하기까지 하는 무리들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일그러졌더라도 어쨌든 신념에 가득차서 주인공 일행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개중엔 바실리처럼 개인적인 복수심에 미쳐 선을 넘는 자도 있어 머리가 지끈거린다. 당시 시스템 자체가 반문을 제기하는 것이 곧 자살 행위나 다름없던 지라 중상모략과 음모론을 꽃피우기 쉬웠을 뿐 설령 정상적인 시스템이었더라도 바실리에 의해 레오와 라이사 부부는 결국 위기에 직면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래도 이 부부가 어떻게 몰락하는지 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국가의 개였던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신념이 흔들리고 정신이 붕괴되고 일종의 도피처로 국가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을 파헤치는 일련의 전개가 몰입도와 개연성이 높아 다시 읽음에도, 또 힘겨운 내용임에도 술술 읽혔다. 레오와 라이사의 심리, 처음엔 반목했다가 후에 아군 편에 서는 네스테로브의 심리와 뒤로 갈수록 묘한 공감대를 자아낸 바실리의 심리, 아이들을 죽인 범인의 심리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고 저마다 실감나기 그지없는 속사정이 있어 간만에 읽는 맛이 났다. 개인적으로 처음 읽었을 땐 별로라 생각했던 범인의 정체나 심리도 다시 읽으니 복선이라든가 작가가 실제 사건을 어느 정도로 참고하고 모티브 삼았는지 느껴져 이번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소름을 느끼며 읽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같은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결국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범죄가 잉태되기도 한다는 작가의 해석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사회주의 덕에 만인이 평등해진 사회, 즉 낙원에선 살인 같은 범죄는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에 함몰된 나머지 그 믿음을 부술 근거가 눈앞에 들이대져도 자본주의측 스파이가 정교하게 조작한 증거물이라며 거들떠도 보지 않고 실제 아이들의 시체를 발견하면 마치 이때가 기회라는 듯 범인으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을 지목하고 숙청해버리는 썩은 일처리... 이 과정이 사실적이고 꾹꾹 눌러 쓴 듯한 문체로 묘사돼 이런 요지경이 실제로 벌어졌을 것이며 지금도 강도가 약해졌을 뿐 분명 벌어지고 있으리란 씁쓸한 의심도 들었다. 이쯤 되면 전체주의는 공권력의 부패를 경계할 장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부패를 권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비관적인 세계 속에서 목숨을 걸고 움직인 레오나 그 레오의 행동에 크나큰 동기를 심어준 라이사의 입체적인 캐릭터성도 작품의 몰입도에 큰 기여를 했다. 아까 서두에서 영화 <차일드44>가 원작의 팬들한테도 외면당했다고 하는데 아마 라이사가 평면적으로 묘사된 탓이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력과 판단력이 있음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소련 전역에 걸쳐 아이들을 죽이고 다니는 웬 미친놈을 잡고자 한때는 증오하기까지 한 레오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은 레오의 변심 못지않게 개연성 있었고 작가도 공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졌다. 레오 같은 특수요원이 아닌 일반 사람이 보여주는 용기와 생존력은 오히려 나를 비롯한 모든 일반 독자의 공감대를 자극하므로 작품의 일등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차일드44' 3부작 중 남은 두 개의 작품에서 레오와 라이사 부부가 겪을 파란만장한 일들이 참 걱정되면서도 기대된다. 이미 읽은 작품임에도 1편이 너무 훌륭하다보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다. 내 기억에 2편은 그닥이었고 3편은 2편의 부진을 만회한다는 인상이었는데 지금 읽으면 다르게 느낄는지 모른다. 당장 이번 작품만 해도 우크라이나 대기근 같은 사건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렇게 두 나라 사이를 어떻게 악화일로를 걷게 했는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었기에 작품의 이야기가 더 깊이감 있게 다가온 것처럼 2편도 3편도 새로운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한없이 우울한 내용의 소설이었지만 반대로 독자 입장에선 읽는 내내 너무나 행복했던 작품이다. 읽는 맛이 탄탄하고 이렇게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말도 흔치 않기에 자꾸 얘기하지만 다시 읽음에도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 이 맛에 읽은 책을 시간내서 또 읽는 거지. 다시 읽어서 후회하는 일이 빈번해진 요즘에 이런 걸작을 읽으니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없이 우울한 한편으로 인생과 희망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라 뒷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 본 영화 <타이타닉>도 그랬지만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에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 다음에 읽을 땐 지금보다 더 약해지려나. 음,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인상깊은 구절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그 사람의 운명과 한데 묶는 것이다. - 133p


 우리나라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요. 전 세계인들이 우리의 혁명을 증오하고 있어요. 우리는 반드시 조국을 지켜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적이 우리 자신이더라도 말입니다. - 145p


 그들의 도덕적인 나침반은 너무나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북쪽이 남쪽이 됐고 동쪽이 서쪽이 됐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면 답이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이런 불안한 시기에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행동 방침은 가능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 188p


 예방책

 이 말은 어떤 죽음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독일군 병사가 빵 한 덩어릴르 발견하게 하느니 자국민을 죽이는 것이 낫다. 여기에는 한 점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사과도 하지 않았고,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살상에 반대하면 반역행위로 간주되었다. 부모님이 그녀에게 가르친 애정에 대한 교훈들, 사이좋은 부모 밑에서 아이가 보고 들으며 배웠던 교훈들은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런 행동은 다른 시대에나 어울리는 것이다. 집이 있다는 것, 보금자리가 있다는 느낌, 그런 허망한 감정은 아이들이나 집착하는 것이었다. - 250~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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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적인 러시아 - 일리야의 눈으로 ‘요즘 러시아’ 읽기
벨랴코프 일리야 지음 / 틈새책방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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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짧지만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줬던 일리야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찾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책의 출간 시기가 러시아에 대한 전세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던 즈음이라 나도 조금 눈치가 보여 결국 반년이 흐른 이제서야 읽게 됐다. 지금이라고 러시아의 인식이 좋아지긴커녕 악화일로를 걷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러시아에 좋은 감정이 많다. 당장 일리야의 고향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할 적에 생각보다 친절했던 러시아 사람들이나 노르웨이 여행 때 새벽녘 베르겐 기차역에서 나처럼 혼자 여행온 러시아 아저씨와 코인로커를 어떻게 사용하지 같이 머릴 맞대며 이리저리 헤매다 우리 둘 다 깔끔히 사용을 포기하고 서로 좋은 여행을 기원하며 헤어진 추억 등이 있어 뉴스 속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만으론 좀처럼 러시아에 대한 악감정이 싹트지 않았다.


 일리야는 서두에서 시기가 시기인 지라 눈치가 보이긴 하나 오히려 지금처럼 러시아에 대한 온갖 안 좋은 편견이 난무할 때가 이 책을 출간할 적기란 생각이 든다고도 말한다. 언젠가는 러시아도 국제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우니 언제까지고 벽을 쌓기보단 교류하게 되는 순간이 올 텐데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문화나 정치 등 조금이라도 무지한 점을 줄이고 서로 사람 사는 곳이란 인식을 자신이 쓴 책이 심어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고 겸손하면서도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어 신뢰감이 갔다.

 아울러 러시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은 나라이고 그렇기에 일리야 본인이 아는 러시아는 간혹 본인이 겪은 범위 안에 국한됐거나 최대한 한국인 눈높이 맞추려다보니 러시아만의 세계관이 자칫 왜곡될 수 있을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시사하는 태도도 도리어 신뢰감을 더해줬다. 첫장에선 러시아의 다양한 지리와 기후 같은 가벼운 주제로 시작해 소비에트와 러시아가 전혀 다른 나라이며 어쩌다 푸틴 같은 독재자에 열광하고 왜 정치에 무관심하게 됐는지 역사적 배경 같은 것을 꽤 그럴싸하게 설명한다.


 물론 지면의 한계와 자료 조사 및 독자를 배려한 탓인지 설명이 불충분하게 느껴진 부분이 없던 것은 아니다. 간혹 그토록 무능하고 쓰레기 같은 정치인에 당했다는 이유로 같은 쓰레기지만 유능하다는 이유로 그 정치인의 허물과 비리까지 용인하거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음에도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후진적인 여성 인권 등은 책을 읽은 지금도 이론적으로나 알겠지 진심으로 와 닿진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컬쳐쇼크의 순간은 일리야도 처음 한국에 와서 살 때 많이 겪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선 서로 인종이 달라도 언어와 국적이 같다면 같은 러시아인으로 여기는 반면 단일민족 국가인 탓에 좁은 땅덩어리에서 어디 지역 출신이냐 갖고 차별하는 등 조금만 다르면 배척해버리는 우리나라의 정서 등 처음엔 이론적으로나 알겠지 진심으로 와 닿진 않은 순간이 많았고 어떤 점은 지금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익숙해졌다고 얘기한다.


 중요한 점은 그 나라가 그런 문화와 인식을 갖게 된 데엔 다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으나 서로 완전히 이해하거나 존중하긴 힘든 일이란 걸 인정하는 것 아닐까. 진정한 의미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자기기만일는지 모른다. 대신 최소한 사전 지식을 갖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나 러시아나 지금보다 더욱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을까 하고 우리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게 일리야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개선의 여지가 없는 와중에 일리야가 쓴 비판적이면서 묘하게 팔이 안으로 굽는 듯한 내용의 책을 읽으니 러시아를 향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기어코 왕따의 길을 걷고자 하는 러시아의 꼬라지를 생각하면 고개를 젓게 되지만 그 나라의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 찬란한 유산이나 고난의 역사를 버텨낸 사람들의 저력,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그 나라의 따뜻한 첫인상을 떠올리면 국가감정과 개인과 개인의 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별개의 일로 치부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다소 낙관적이고 무책임한 생각까지 든다.


 저자 일리야는 우리나라로 귀화한 한국인이라 보다 러시아에 비판적일 수 있지만 러시아에서 나고 자라 러시아식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그가 완전한 의미에서 한국인이라 하기엔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여겼는지 대신 자신은 러시아계 한국인이란 표현으로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을 정의내린다. 우리에겐 아직 생소하게 들리는 단어일 수 있지만 러시아와 한국 두 나라에 깊은 인연의 뿌리를 내린 일리야의 족적을 살펴보면 완전히 러시아인이 아니라기에도 한국이라 보기에도 미묘할 만큼 두 나라 문화에 빠삭한 그에게 이보다 적합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처음 <비정상회담>에 출연할 때보다 진보한 한국어 구사력과 폭넓어진 세계관으로 중무장했기에 이 책이 단지 방송에서 못다한 이야길 길게 풀어내거나 러시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어내는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한 나라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는 것과 별개로 그 나라의 문화나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해하려는 길은 어렵고 까다로우며 그 길을 걷게 되면 필시 이질감 못지않게 동질감도 느끼게 돼 애증이 생겨버린다는 걸 이 책을 읽는 내내 깨닫게 됐다. 참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러시아, 일본만큼이나 참 곤란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졸지에 러시아에 좋은 인상을 가진 모든 외국인들을 한꺼번에 갈 곳 잃고 할 말도 잃게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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