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 반복되는 일상에 떠밀리다 마침내 새로운 세계에 닿다
오건호 지음 / 텍스트칼로리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9.4



 포르투갈은 유라시아 반도 최서단에 있는 나라로 리스본 근교에 있는 호카곶은 '세상의 끝'이라는 이명이 있다. 먼 옛날 사람에겐 드넓은 수평선의 대서양밖에 보이지 않는 호카곶이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으리라. 하지만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느니 세상의 끝이라느니 하는 표현은 다소 과하거나 혹은 편협한 구석이 있다. 그렇게 따지면 한반도 땅끝마을도 세상의 끝이지. 한반도도 결국엔 유라시아 반도의 어느 한 방향에서 끝자락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저런 이명이 붙은 데엔 포르투갈이 대서양을 통해 유럽 변두리 나라에서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돋움했다는 자부심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지금 세상에 머물기보단 저편으로 새로운 가능성 내지는 희망을 찾아 기어코 엄청난 결과를 이룩해낸 자부심과 그러한 과거에 대한 향수가 녹아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내일부터 3주간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떠나는데 호카곶도 반드시 방문할 예정이다. 그때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일주일간 포르투갈 여행을 바탕으로 한 이 에세이의 제목이 난 처음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배경이 어떻든 간에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란 수식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 첫째, 그리고 에세이의 제목으론 너무 식상한 감이 있다는 것이 둘째였다. 명색이 자기 표현의 정수로 통하는 에세이의 제목이거늘 이미 널리 알려진 표현으로 제목을 장식한다는 게 처음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작가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역량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흑백이면서 사실적인 화풍은 사진을 연상케 했는데,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만화 같으면서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인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는 점이 놀라웠다. 하루이틀 그려본 솜씨가 아닌 듯했는데 놀랍게도 저자는 그림을 따로 전공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이과 출신에다 직장도 그림과 연이 없는 곳이었는데 작금과 같은 삶에 피로감을 느끼던 와중 포르투갈의 도시 포르투가 예술가들의 도시란 말에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참 충동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는데 아무튼 처음엔 일러스트에 끌려 이 책을 펼친 것이지만 프롤로그에서부터 느껴지는 저자의 행동력과 필력에 이끌려 이후부턴 글에 집중하며 읽어내려갔다.


 책의 분량 자체는 200페이지도 넘지 않으며 개중엔 1~2페이지를 차지는 일러스트의 분량도 상당한 지라 체감상 100페이지 정도의 짤막한 책을 읽은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글의 밀도가 낮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행 중에 겪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그대로 집필한 글이라 글의 분량이 각각의 글이 단편적이고 촘촘하게 이어지지 않고 약간 따로 노는 부분이 없잖았는데, 작가의 사유나 순간순간 빛나는 감성이 깊이가 있는 만큼 책의 구성에도 고민을 해봤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가령 처음엔 리스본 공항에서 호의를 거절했다가 마지막에 자신도 리스본에 처음 온 관광객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저자가 느꼈던 감정처럼 독자로 하여금 시선을 확 잡아끄는 서사가 몇 개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포르투갈 여행 정보나 역사, 문화를 알고자 이 책을 읽는 건 아주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다. 저자 본인도 충동적으로 포르투갈로 떠난 탓인지 여행 중에 실시간으로 알아가는 느낌이 강해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되진 못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꼭 포르투갈이 아니어도 이 책의 내용은 어느 정도 성립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허나 호카 곶을 앞두고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란 이명을 저자 나름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부분은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어서 이 책을 읽은 게 후회되지 않는다.


 에세이 작가들에게, 특히 몇몇 여행 에세이 작가들에게 특히 미안한 얘기지만 사진이나 일러스트를 제외하면 텍스트의 내용만으론 차별점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필력과 사유가 별로라 다 읽고 시간 아까운 경우가 적잖았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의 경우 포르투갈을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이 여행을 통해 깨달은 여러 사유를 담담하게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둬서 적어도 시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의 끝'이라고 한들 그래봤자 바다가 보이는 곶에 불과한 장소에서 저 나름대로 희망을 발견하는 서술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작가의 여정에 빠져들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때론 담담하게 얘기하면 더욱 몰입하게 된다.

 위에서 '이 책의 내용은 꼭 포르투갈이 아니어도 성립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이 작가는 다른 나라, 포르투갈과 관련이라곤 없는 폴란드나 동남아 어디를 가도 이만한 수준의 사유의 결과물을 냈을 테니까. 중요한 건 포르투갈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의 여정이 참 부럽기도 했다. 나에게 여행이란 철저한 계획의 산물이다. 계획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것이고 완벽한 여행을 위해 많이 공부하고 여러 입장권과 투어를 예약할 때도 있다. 물론 그 과정을 꽤나 즐기는 편이지만, 정말 오래전부터 그 여행지에 방문하는 걸 너무나 고대한 나머지 그저 발길 닿는대로 느끼고 사유하는 여행과는 연이 없었던 것도 같다.


 여행엔 나처럼 계획하는 여행과 반대로 충동적으로 떠나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여행처럼 다양한 갈래가 있다. 여행은 반드시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고, 계획적인 여행이라고 사유가 없을 리 만무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라도 마냥 무계획적인 여행일 수도 없다. 문제는 내가 지금껏 여행은 이래야만 한다고 나도 모르게 규정을 지으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무척 손해 보며 살았을 것 같단 생각도 드는군.

 이번 3주간의 여행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완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여행이 될 듯해 불안하면서 설렌다. 내일 출국인데도 실감이 안 나는데 이래도 되나 싶구만. 분명히 날 당황시킬 일이 많이 일어날 텐데... 대비는 해두더라도 생각이나 판단은 그때 내려야겠다. 과도하고 생각이 개입되면 자칫 여행을 떠난 보람이 반감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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