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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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기욤 뮈소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작품에 한해선 가장 인상적이고 여운이 짙은 작품이다. 결말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결이 달라 통속적인 소재와 언제 읽어도 구린 표현력, 불필요한 장면 등 거슬리는 점이 많았음에도 계속 곱씹어보게 된다. 작가가 데뷔작에 이어서 쓴 두 번째 작품으로 교통사고를 당하고 사경을 헤맨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에 대한 통찰이 깃든 덕분에 이런 남다른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작가의 단점은 고스란히 있어서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긴 애매하다. 가령 네이선이 자신을 협박하는 남자를 떨쳐내는 장면이라든가 캔디스를 구하기 위해 접근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작가의 필력은 유치하기 그지없어 과연 이 사람에게 소설가라는 직함으로 불러도 되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망설여질 정도다. 이 작가의 문체가 '영상 같은 묘사 방식'으로 주로 수식되곤 하는데 내가 봤을 때 이런 수식어는 문장력이 떨어지는 소설가한테 붙여지는 일종의 조롱이라 생각한다. 소설엔 소설다운 영상엔 영상다운 표현 방식이 있고 각 분야가 다른 분야의 형식을 지나치게 쫓으면 졸작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 나도 내 말이 좀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듣자하니 기욤 뮈소는 여전히 1년에 한 권씩 꾸준히 신간을 집필하고 있다는데, 이 작가는 그럼에도 독자들 사이에서 '처음 읽은 작품이 가장 좋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것도 다작을 하는 소설가에게 그리 좋은 얘기는 아닌 듯하다. 쉽진 않겠지만 신작이 제일 좋아야지, 처음 읽은 작품이 좋았다는 건 결국 자가복제라는 얘기 아닌가?

 그렇다면 내 경우는 어떨까? 나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로 기욤 뮈소를 처음 접했지만 이 작품 <그 후에>가 더 좋다. 의사이자 메신저인 가렛 굿리치의 캐릭터성이 마음에 들어서, 죽음에 대해 책임감 있게 얘기하는 작가의 태도가 생각 이상으로 진지해서, 그리고 그 주제의식이 녹아있는 반전이 굉장히 훌륭하기 때문이다.


 일단 쓴소리 먼저 하겠다. 난 이 작품이 출판사의 광고처럼 <식스 센스> 수준의 반전을 선보였다는 말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복선이 부족해 뜬금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과 출판사의 호들갑만 빼면 참 좋은 반전이라 생각한다. 반전이란 주인공의 믿음이 송두리째 부정당해야 좋은 반전이란 말이 있는데 이 작품의 반전이 그 말에 제대로 해당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자기 삶의 실수와 매듭을 풀어낸 네이선에게 닥친 예상치 못한 장애물과 그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지 열린 결말로 처리한 작가의 선택은 숱한 단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고갤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슬프고 비정한 결말이지만 그래서 로맨스라는 본작품의 성격을 극대화시키지 않았는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로맨스는 해피엔딩보단 새드엔딩인 편이 더 명작으로 남는 것 같다.

 불필요하고 반복적인 장면과 과거 회상은 덜어내 분량을 줄이고, 특히 초반부의 지루한 진입장벽만 낮춘다면 훨씬 좋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물론 이대로도 괜찮은 작품이다. 나는 많이 투덜거리긴 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조차 사랑할 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나 역시 사경을 헤매본 경험이 있었더라면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고. 작품이란 건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면 독자마다 감상이 통일되지 않고 갑론을박을 낳기 마련이다. 난 <그 후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란 반열에 든, 그야말로 기욤 뮈소의 대표작이라 본다. 작가도 실제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란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까? 신작으로. 갑자기 이 작가의 신작들이 궁금해지는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의사로서 절망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저 환자들을 낫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절망을 느끼는지를 묻고 있는 거요?
아니, 도리어 그 반대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더 의욕이 생기지. 병을 낫게 할 수 없다고 치료를 못하는 건 아니오.(중략) 우리는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에 동행이 되어 주는 일을 하고 있소. 사람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것보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길에 동반자가 되어주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 103~1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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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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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최근 헨닝 망켈의 작품을 읽고 북유럽 추리소설에 다시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몇 권 더 읽어볼까 찾아보던 중 북유럽 추리소설계의 전설적인 작품이라는 <로재나>가 눈에 띄었다. 아... 예전에 읽다 중도 이탈했던 작품이었다. 사실적인 걸 넘어 지지부진한 형사들의 지난한 범인 추적의 과정이 너무나 매력 없게 읽힌 탓에 숱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덮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 7년 전 일이다.

 작년에 마르틴 베크 시리즈 10권이 국내에 완간됐다는 소식은 들었다. 10권을 완간하기까지 6~7년 걸린 걸 보면 후속작에 대한 독자들의 성원이 마냥 열광적이었던 것 같진 않다. 물론 다른 문제 때문이었을 순 있지. 어쨌든 그래도 전권이 완간된 걸 보면 이 클래식한 추리소설이 우리나라 독자들한테도 자신의 매력을 어느 정도 어필하는 데에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비록 중도 이탈하긴 했어도 7년 전 일이고 북유럽 추리소설에 다시 관심이 가고 있던 차에 큰맘 먹고 다시 펼쳐봤다. 과연 나는 10권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일단 1권인 <로재나>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역시나 지루하고 요즘 추리소설에 비하면 극적인 맛이 덜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 전에 집필된 작품인 만큼 이해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이 작품 이전엔 북유럽 추리소설 또한 영국이나 일본처럼 수수께끼 풀이에 중점을 뒀지만 <로재나>를 기점으로 현실적인 경찰 조직 묘사, 사회 문제 비판의 색채를 띈 작품이 많이 나오게 됐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을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의의가 대단한 작품인 건 알겠는데 역사는 역사일 뿐 완성도는 어땠는지 살펴보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추천사에서 헨닝 망켈은 이 작품의 특징으로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이야기라 언급했다. 하나의 살인사건이 해결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시간과 형사들의 고생, 헛발질이 필요하단 걸 강조한 말이다.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봐 참 잘 포장했는데 이 말을 온전히 공감하는 독자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어떤 독자들은 치명적인 단점으로, 어떤 사람들은 결말에서 범인을 잡을 때 쾌감을 더해주는 서사적 장치라 여길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헨닝 망켈이 자신이 처음 읽던 시기에 느낀 강렬함에 아직 사로잡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클래식은 클래식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의의가 있고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나로선 이러한 서두에서의 언급은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결국 호들갑이지 않았나 하고 중얼거렸다. 현실적인 수사 묘사, 사회 비판, 그래서 뭐? <로재나>가 선구적인 작품일 순 있어도 오늘날에도 과거에 처음 출간됐을 때와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해도 부분적으로 흥미로운 요소가 산재한 작품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다. 피해자의 정체가 밝혀지던 대목, 피해자가 생전에 다소 문란했던 사생활이 밝혀짐에도 형사들끼리 저급하게 뒷담화를 까지 않았던 것, 주인공 마르틴 베크가 현실에 있을 법한 형사라 괜히 더 이입이 가능했던 것, 그가 용의자를 심문하거나 최후반부에 드러나는 범인의 똘끼, 그 범인을 취조할 때 전혀 말려들지 않고 프로패셔널하게 일처리를 하는 마르틴 베크 등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많았다. 지금 기준에선 화려함이라곤 없지만 정석적인 구조에 탄탄한 마무리가 여운을 준 작품이었다.


 요약하자면 출판사와 띠지, 서두와 해설의 호들갑을 제외하고 본다면 편안하게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었다. 60년대 스웨덴의 모습이나 첨단 과학 없이 노가다적인 방식으로 범인을 잡아낸 형사들의 고군분투는 마치 일일 드라마를 보듯 묘하게 빠져들게 만드는 지점이 있어 마지막 장까지 읽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과연 나는 10권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일단은 2권인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와 시리즈 최고작이라는 <웃는 경관>은 읽어볼 생각이다. <웃는 경관>은 명성도 명성인데 제목이 궁금해서라도 읽을 것 같다. 또 모르지. 그 작품까지 읽고서 완전히 이 시리즈의 팬이 돼버려서 10권까지 빠르게 독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재나>를 재평가할 일은 적어도 지금으로선 요원해 보인다. 물론 이것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P.S 이 책의 저자 두 명의 원래 직업은 기자였다고 한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도 기자였는데, 그러고 보니 스웨덴, 아니 전세계의 추리소설가들 중에 기자였다가 추리소설가로 전직하는 경우가 은근히 흔한 편인 것 같다. 요코야마 히데오도 떠오르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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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스페인어라고? - 모르고 쓰는 우리말 속 스페인어, 2023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홍은 지음 / 이응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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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외래어 중 우리가 모르고 쓰는 스페인어를 소개함과 동시에 작가가 자신의 스페인 생활기를 담아낸 책으로 가볍게 읽기 좋다. 책도 얇고 수록된 글도 각각 짧은데 중간중간 느껴지는 통찰과 사유는 휘발성이 강하지 않고 제법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서 곱씹으며 읽기에 좋았다. 일전에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라고 내가 아주 혹평을 남긴 책이 있는데, 그 책과 비슷한 결의 가볍디 가벼운 책이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어쩌다 보니 스페인어를 고른 탓인지 스페인어 공부도 글의 마무리도 흐지부지, 유야무야의 꼴을 면치 못했지만 <이게 스페인어라고?>의 저자는 여행 때 계기로 스페인어를 배우게 됐고 지금은 스페인어 책까지 낼 만큼 통달하게 됐으니 서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였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혼자만 언어 능력이 떨어져 소외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언어에 관심을 갖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은 극소수다. 누구나 그런 계기를 만나길 기대하고, 또 어쩌면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여행지에서의 감상과 깨달음은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옅어지고 다시 끔찍이 여기던 일상으로 자연스레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스페인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좋은 기회를 잡아 5년 동안 스페인에서 살게 됐다는 작가의 삶의 족적은 그래서 무척 부럽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정말 사소한 계기였는데 저렇게까지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이 책이 다수 독자들에게 스페인어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높여주는 책이 될 진 잘 모르겠다. 우리에게 친숙한 스페인어로 된 단어나 브랜드만 알려줬지 스페인 알파벳만의 발음 체계나 독특한 문법에 대해선 그리 깊이 있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벼움이 이 책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아무튼 워낙에 분량이 짧다 보니 스페인어의 매력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생각했을 때 스페인어는 친절함과 터프함이 공존하는 언어이며, 한국어처럼 읽긴 참 쉬운데 문법이 어려워 파면 팔수록 어려운 언어인데 그 점이 덜 묘사된 같아서... 스페인을 좋아하고 스페인어를 수박 겉 핥기 수준으로라도 배워봤다고 괜히 어깃장을 놓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다른 건 몰라도 작가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 행동력이 정말 바람직하고 존경스러웠다. 작가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그와 동시에 나의 삶도 돌아보게 됐다. 작가의 직업은 도예가이며 관악구에서 도예공방을 운영 중이라는데, 관악구가 집에서 멀긴 하지만 궁금한 마음에 조만간 방문해볼 생각이다. 내 삶에 있어 도예란 정말 조금도 관련이 없는 분야였지만, 작가가 여행을 계기로 스페인어라는 세계를 접했듯 나도 이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새로운 분야를 접하면 좋지 않겠는가. 최근 그 어떤 충동도 즐거움도 없이 하루하루 생존하기 바쁘고 지쳐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 무언가 자극이 필요한 참이다. 꼭 극적인 뭔가를 얻거나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그간 눈길을 두지 않은 것들도 둘러봐야지.

조금씩 쌓아 그란데를 만드는 삶과 한 번에 그란데를 취해 조금씩 음미하는 삶 중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아마도 각자 만족감을 느끼는 지점에 따라 기쁨의 정도도 저마다 다를 테다. 진정한 만족은 ‘자신에게 얼마나 적당하고 얼맞은가‘ 에 달렸으니까. - 26p

빈말을 빈말로 그냥 두었다면 그 관계도 허허롭게 끝났을 테다. 하지만 그 말을 참말로 바꾸는 데 공들이며 속을 채운 노력은 특별한 관계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결국 빈말은 채우는 말이 아닐까. 이미 무언가로 꽉 차서 더 넣을 수도, 쉬이 바꿀 수도 없는 말보다 상대방이 빈 채로 내어준 데를 자신의 의지로 채우면 알곡이 되는 말. - 1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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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일본 철도 여행 - 스케치북과 카메라로 기록한 드로잉 여행 1
김혜원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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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8



 글 말고 다른 형식으로 여행을 기록할까 싶던 차에 읽은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예전에 읽을 땐 작가의 아기자기하고 유머러스한 그림체와 일본 기차 여행이란 로망에만 감탄했지만 새삼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이 정말 축복받은 능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령 사진 촬영이 불가한 미술관에서의 경험일지라도 이 작가처럼 그림 실력이 뛰어난 경우엔 문제 없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니 정말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제아무리 말로 이렇더라 저렇더라 조리 있게 설명을 해도 시각적인 자료를 동반하면 전달력에 있어서 얘기가 달라지지 않는가.

 형식은 만화지만 작가의 남다른 인문학적 취향 덕에 일부 파트는 대단히 유익하게 읽혔다. 가령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를 읽고 가보고 싶던 우동집을 직접 방문해보는 에피소드나 다자이 오사무의 발자취를 쫓는 문학기행, 쉽게 접하기 힘든 일본 미술관 방문기 등 통상적인 일본 여행기와는 확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정을 기차 여행 중에 했다는 게 정말 대단했고 부러웠다. 아마 책에서 소개된 야간열차 중 몇 대는 운행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로망을 늦지 않게 이룬 작가의 행동력과 그 로망을 자신의 장기인 그림으로 남겨둔 성실함과 꼼꼼함엔 정말 고갤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준비 단계에 있어 정확히 말은 못하겠지만, 나도 글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여행기를 남겨보고픈 열망이 크다. 생각을 묵혀둔 다음에 글로 풀어내는 여행기의 묘미를 좋아하지만 이젠 그것말고 다른 형식, 가령 영상으로 담은 여행기처럼 보다 현장감 있는 여행기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느낀 감동은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엔 어느 정도 열기가 식어버려서 실감나게 표현하려고 해도 가식적이거나 상투적인 것 같다는 한계에 직면해서다. 여행을 좋아하고 앞으로도 계속 다닐 것이기에 더 잘, 그리고 후회없이 기록하는 것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것 같다. 여행을 가는 것만큼이나 여행을 기록하고 추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니까.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드로잉 일본 철도 여행>은 출간되고 시간이 지나서인지 절판이 됐던데, 못 읽어본 분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거나, 만약 중고서점에서 발견한다면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해본다. 소장 가치도 있거니와 볼륨도 상당해 일본 여행에 관심이 많다면 후회 없을 책일 것이다. 여행 동선을 구상함에 있어 많은 참고가 됐는데 - 물론 작중 여행 시기가 최소 10년 전이니 JR 패스라든가 관광지 입장료 등에 대한 정보는 지금과 현저히 다를 수 있다. - 해당 도시로 여행을 갈 일이 있으면 이 책을 다시 펼쳐볼 예정이다. 일단 이 책에 나온 일본 도시 중 끌리는 곳이 있다면 사구가 있는 돗토리와 우동이 유명한 타카마츠, 그리고 예술의 섬 나오시마로 갈 것 같다. 비행기표를 한 번 알아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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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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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북유럽 추리소설은 오랜만에 읽어본다. 헨닝 망켈은 북유럽 추리소설계에서 꽤나 명성이 자자한 작가인데 작품을 접해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 엘릭시르에서 3개월에 걸쳐 연재된 중편소설 '피라미드'를 읽긴 했지만 이렇게 단행본을 읽어본 적은 없다.

 요번에 읽은 <피라미드>는 동명의 표제작과 여러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발렌데르 형사가 등장하는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이 책을 다 읽고서 시리즈 첫 작품인 <얼굴 없는 살인자>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어서? 아니, 이렇게 10편의 장기 시리즈로 나올 만큼 첫 작품이 괜찮았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말인즉슨 <피라미드>의 수록작들 중엔 작가의 명성과 달리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작품이 없었다. 전형적인 북유럽 추리소설답게 복지사회를 이룩한 선진국이라는 찬란한 간판 아래 그늘처럼 드리워진 병폐를 범죄/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흥미로웠지만 너무 분위기만 잡고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의 내면만 잘 묘사됐지 정작 추리소설다운 만듦새는 다소 심심한 축에 들었다. 범인들의 최후도 일관적이라 식상했으며 범인의 광기 어린 행적들도 사회 시스템의 빈틈이라면서 애꿎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시선도 그닥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그 탓에 다 읽고 여운에 빠지긴커녕 쌩뚱 맞고 허탈함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수록작들 대부분 결말이 2%, 아니, 20% 모자랐다. 형사라는 직업의 고충, 아버지와 아내 등 가족과의 불화를 겪는 와중에 형사의 재능을 발휘하는 발란데르의 모습 등 흥미를 자아내는 구간은 많았지만 역시 그놈의 결말, 그리고 범인들의 평면적인 동기와 사건의 전말에 비약이 있던 것이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단편보단 장편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은데, 찾아보니까 국내에 출간된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은 다 장편이더군. 장편에선 내가 단편에서 느꼈던 단점이 안 느껴지려나? 그래야만 이 작가의 명성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번에 다시 읽은 중편 '피라미드' 얘길 조금만 더 하겠다.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기엔 좋은 분위기와 결말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특히 발란데르의 아버지가 자기 버킷 리스트를 이루겠답시고 벌이는 기행은 묘하게 공감대를 자아내 처음 읽을 때나 요번에 다시 읽을 때나 재밌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소설다운 짜릿한 맛은 2% 부족했다. 다만 추리소설 말고 다른 장르, 순수 문학이나 사회 병폐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에겐 만족스러운 작품일 듯하다. 위에서도 말했듯 헨닝 망켈의 작품은 정말 전형적인 북유럽 추리소설이니까.


 내가 노르웨이를 여행했을 때 도서관과 서점을 모두 포함해 못해도 열 곳 이상을 방문했는데 방문하는 곳마다 추리소설만 있는 책장이 광범위하게 있어 놀랐었다. 어디선가 북유럽에선 추리소설이 주류 장르라고 들었는데 그냥 있는 말은 아니구나 싶었다. 주류인 비결로 사회 문제를 파고드는 북유럽 추리소설의 성격이 북유럽 독자들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라고 하는데 이게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과도 느낌이 살짝 달라서 굳이 북유럽 사람이 아니더라도 취향에 맞을 사람은 엄청 반길 듯하다.

 나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등 나름대로 북유럽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봤고 또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헨닝 망켈의 작품을 읽으니 꼭 그런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담백한 문체와 깊이 있는 분위기가 범죄자를 쫓는 형사의 이야기와 약간 따로 논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어쩌면 나만의 생각에 불과한지 모른다.... 하지만 모르지, 이래놓고 <얼굴 없는 살인자>를 보고 완전히 이 작가의 스타일에 반해버리게 될지.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 내가 취향이 변해서 이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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