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쿠르트 발란데르 경감
헨닝 만켈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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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북유럽 추리소설은 오랜만에 읽어본다. 헨닝 망켈은 북유럽 추리소설계에서 꽤나 명성이 자자한 작가인데 작품을 접해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에 엘릭시르에서 3개월에 걸쳐 연재된 중편소설 '피라미드'를 읽긴 했지만 이렇게 단행본을 읽어본 적은 없다.

 요번에 읽은 <피라미드>는 동명의 표제작과 여러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발렌데르 형사가 등장하는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이 책을 다 읽고서 시리즈 첫 작품인 <얼굴 없는 살인자>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어서? 아니, 이렇게 10편의 장기 시리즈로 나올 만큼 첫 작품이 괜찮았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말인즉슨 <피라미드>의 수록작들 중엔 작가의 명성과 달리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작품이 없었다. 전형적인 북유럽 추리소설답게 복지사회를 이룩한 선진국이라는 찬란한 간판 아래 그늘처럼 드리워진 병폐를 범죄/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흥미로웠지만 너무 분위기만 잡고 주인공 쿠르트 발란데르의 내면만 잘 묘사됐지 정작 추리소설다운 만듦새는 다소 심심한 축에 들었다. 범인들의 최후도 일관적이라 식상했으며 범인의 광기 어린 행적들도 사회 시스템의 빈틈이라면서 애꿎게 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시선도 그닥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그 탓에 다 읽고 여운에 빠지긴커녕 쌩뚱 맞고 허탈함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수록작들 대부분 결말이 2%, 아니, 20% 모자랐다. 형사라는 직업의 고충, 아버지와 아내 등 가족과의 불화를 겪는 와중에 형사의 재능을 발휘하는 발란데르의 모습 등 흥미를 자아내는 구간은 많았지만 역시 그놈의 결말, 그리고 범인들의 평면적인 동기와 사건의 전말에 비약이 있던 것이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단편보단 장편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은데, 찾아보니까 국내에 출간된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은 다 장편이더군. 장편에선 내가 단편에서 느꼈던 단점이 안 느껴지려나? 그래야만 이 작가의 명성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번에 다시 읽은 중편 '피라미드' 얘길 조금만 더 하겠다.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기엔 좋은 분위기와 결말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특히 발란데르의 아버지가 자기 버킷 리스트를 이루겠답시고 벌이는 기행은 묘하게 공감대를 자아내 처음 읽을 때나 요번에 다시 읽을 때나 재밌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소설다운 짜릿한 맛은 2% 부족했다. 다만 추리소설 말고 다른 장르, 순수 문학이나 사회 병폐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에겐 만족스러운 작품일 듯하다. 위에서도 말했듯 헨닝 망켈의 작품은 정말 전형적인 북유럽 추리소설이니까.


 내가 노르웨이를 여행했을 때 도서관과 서점을 모두 포함해 못해도 열 곳 이상을 방문했는데 방문하는 곳마다 추리소설만 있는 책장이 광범위하게 있어 놀랐었다. 어디선가 북유럽에선 추리소설이 주류 장르라고 들었는데 그냥 있는 말은 아니구나 싶었다. 주류인 비결로 사회 문제를 파고드는 북유럽 추리소설의 성격이 북유럽 독자들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라고 하는데 이게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과도 느낌이 살짝 달라서 굳이 북유럽 사람이 아니더라도 취향에 맞을 사람은 엄청 반길 듯하다.

 나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등 나름대로 북유럽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봤고 또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헨닝 망켈의 작품을 읽으니 꼭 그런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담백한 문체와 깊이 있는 분위기가 범죄자를 쫓는 형사의 이야기와 약간 따로 논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어쩌면 나만의 생각에 불과한지 모른다.... 하지만 모르지, 이래놓고 <얼굴 없는 살인자>를 보고 완전히 이 작가의 스타일에 반해버리게 될지.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 내가 취향이 변해서 이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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