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의 도쿄
나이토 아키라 지음, 호즈미 가즈오 그림, 이용화 옮김 / 논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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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江戶]의 등장

 

일본의 수도는 794년에 당시 세계 제일의 대도시였던 중국 당(唐)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을 본 떠 4분의 1 정도의 크기로 조성된, 계획도시 헤이안쿄[平安京, 오늘날의 교토]가 먼저다. 그러다가 고대 율령제 국가가 무너지면서, 교토 사람들이 ‘동이(東夷)’라고 부르며 업신여기던 간토[關東] 사람들이 주역으로 활동하는 중세가 시작됐다. 소위 ‘반도[坂東] 무사’ 혹은 ‘간토[關東]의 무사’들에 의한 막부(幕府) 시대, 구체적으로는 가마쿠라[鎌倉] 막부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에도[江戶, 오늘날의 도쿄]’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렇다면 ‘에도’라는 도시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본격적인 에도성[江戶城]의 시작은 간토 간레이[關東 管領] 우에스기 사다마키[上杉 定正, 1443~1494]의 가신인 오타 도칸[太田 道灌, 1432~1486, 이하 ‘도칸’]이 1457년에 쌓은 요새라고 한다. 이 후 에도성이 ‘간토 제일의 명성(名城)’으로 불리면서, 많은 학자와 승려들이 황폐해진 교토를 떠나 도칸을 따르기 위해 모였다. 이렇게 그의 위망(威望)이 높아지자, 1486년 그의 주군, 우에스키 사다마키가 그를 암살한다. 도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에도성은 더 이상 번영하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런 에도성이 변화를 겪게 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이하 ‘이에야스’]가 간토를 새로 영지로 받으면서부터였다. 석축(石築) 하나 없이 잡초로 덮인, 흙을 다져 쌓은 토담[土墻]만 남아있는 에도성에 자리잡은 이에야스는 헤이안교를 모델로 삼아 1592년 에도성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세계 제일의 문명을 자랑하는 중국에서는 오랜 경험에서 ‘음양학(陰陽學)’이라는 학문이 번성했습니다. 현대의 천문학과 지리학을 합친 학문으로 인간이 행복한 생활을 보내려면 어떠한 지형에서 살면 좋은가를 점치고 예측하는 일종의 과학입니다.

음양학에서는 도시 만들기의 원리로써 ‘사신상응(四神相應)의 지형’을 선택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동서남북 4개의 신을 모시는 다음과 같은 지형을 찾아 도시계획을 하라는 것입니다.

동쪽에 ‘청룡’의 신이 머무는 강

남쪽에 ‘주작’의 신이 머무는 연못이나 바다

서쪽에 ‘백호’의 신이 머무는 길

북쪽에 ‘현무’의 신이 머무는 산

 

요컨대, 산을 등지고 남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태양 빛을 가득 받은 동쪽에서 맑은 물을 끌어들여와 평상시의 음용수로 이용하면서 서쪽에서 들여온 식료로 풍족한 생활을 한다 - 이것을 인간의 이상향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pp. 39~40]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6~1598]이 후시미성[伏見城]의 건설을 명하면서 에도성의 건설은 중단됐다. 그러다가 이에야스가 에도[江戶] 막부를 개설하면서 다시 공사가 재개됐다. 이후 에도 막부의 2대 쇼군[將軍]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81~1632]의 지시로 축성술의 대가인 도도 다카토라[藤堂 高虎, 1556~1630]가 에도성을 중심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수로가 시계방향으로 끝없이 이어지도록 도시계획의 기본설계를 변경했다.

 

달팽이 모양의 확장계획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58~59

 

새롭게 고안해낸 것이 ‘달팽이[の]’ 모양의 거대한 확장계획이었습니다. 에도성을 중심으로 마치 ‘달팽이’를 그리듯이 오른쪽으로 소용돌이치는 모양의 수로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까지 만든 동네를 보존했다는 것입니다. 외각에 있는 구릉이나 계곡과 산 등의 자연지형을 효율적으로 살리며 ‘달팽이’ 모양으로 수로를 뻗어가게 했습니다. 토목기술만 잘 활용하면 에도라는 도시는 그야말로 발전가능성이 무한했습니다.

그리고 이 ‘달팽이’ 모양의 수로에 방사상(放射狀)으로 다섯 갈래의 큰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에도가 제아무리 커져도 무사의 소비생활을, 쵸닌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도시계획은 아주 특이했으며, 처음부터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계획에 의해 막부는 여러 다이묘들의 부인과 자녀를 에도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1년마다 참근교대(參勤交代)를 안정적으로 실시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전국에서 아무리 많은 무사가 몰려와도 충분히 거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확장계획이 없었다면 에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작 해야 나고야[名古屋] 정도의 죠카마치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pp. 57~60]

 

토목공사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42~43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단단한 암반 위에 돌을 쌓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에도성의 해자는 히비야만을 매립한 갯벌 위에 쌓는 것이기 때문에 무거운 석축은 푹푹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진흙 속에 소나무를 나란히 깔고 뗏목을 짜넣고 긴 말뚝을 박아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킨 후에 돌을 얹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이것을 ‘뗏목지형’이라고 합니다만, 가라앉는 일이 잦아 모처럼 쌓은 석축이 공사 중반에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중략 ~

(이에 가토 기요마사는) 무사시노에 우거져 있는 억새풀을 베어내어 진흙 늪 속에 깔고, 10살에서 15살까지의 어린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 위에서 놀게 하면서 시간을 두고 굳어지게 한 후에 석축을 쌓았다고 합니다. 아사노 가문의 사고로 인해 공사는 늦어졌지만 이렇게 쌓은 석축은 지진이 발생해도 꿈쩍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pp. 79~80]

 

이렇게 석축 쌓는 토목공사가 끝나자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목수 출신인 나카이 마사키요[中井 正淸]는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혼마루[本丸] 중앙에 솟아 있는 대천수(大天守)의 동-북-서쪽에 소천수(小天守)를 에워싸듯 짓는 마치 고리처럼 연결하는  ‘환립식(環立式)’ 천수를 세웠다.

 

환립식 천수(天守)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 83

 

1640년 4월,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때에 이르러 비로소 에도성이 완공됐다. 거의 50년 만이었다.

 

에도성[江戶城] 혼마루[本丸]

사진출처: <에도의 도쿄>, pp. 104~105

 

1644년의 에도 시역은 44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일본 제일의 거대도시였습니다. 두 번째 도시인 교토는 21평방 킬로미터 정도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에도는 고대 이후 문화의 중심이었던 교토를 뛰어넘어 그 두 배 이상 되는 거대도시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달팽이’ 모양의 도시계획은 드디어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도 시민은 모두가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가 영원히 이대로 지속될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p. 173]

 

이러한 안이함은 메이레키[明曆] 3년(1657)에 발생한 대화재로 사라졌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에서 일어난 대형화재로 인해 50년에 걸쳐 세워진 에도성이 불과 이틀 만에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막부는 서양식 삼각측량 기술에 의한 ‘에도 실측도’를 완성하고, 성곽 내에 ‘방화용 공터[火除け地]’라는 빈 터를 마련했다. 그리고 다양한 건축규제를 적용했다. 예를 들면, 들보 3간(약 5.9m) 이상의 대형 건축을 지을 수 없게 되었고, 도로의 폭이 넓어졌으며, 도로변에는 소화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 1간(약 1.8m)의 차양을 새로 설치해야 했다.

 

이후 에도에는 거대도시에 얽힌 다양한 재해가 일어났지만 그 때마다 시민은 ‘화재와의 싸움은 에도의 꽃[火災と喧?は江戶の華花]’이라고 여기며 억척스럽고 힘차게 부흥하는, 더 큰 발전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동시에 가부키와 우키요에[浮世繪] 등,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를 창조해 냈습니다. [p. 108]

 

어쨌든 ‘메이레키 대화재’는 결과적으로 ‘에도’가 ‘거대도시 에도’로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화재예방을 위해 1쵸[町]마다 30명으로 구성된 시민소방조직[町火消し]을 모아 ‘이로하 48조’라는 소방대를, 화재감시대[火の見]를 설치하고, 불에 강한 내화건축을 위해 기와지붕 건축을 허가하는 등 변화가 시작됐다.

 

이에야스 이후 발전해 온 소비도시 에도는 ‘흑선내항(黑船來航)’ 이후 개항, 참근교대제의 완화 등을 거쳐 물가상승으로 약탈소동이 발생하는 등 쇠퇴의 기미를 드러냈다. 여기에 도막(倒幕)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신정부군[倒幕軍]에게 에도성이 넘어가고, 1868년 에도[江戶]가 도쿄[東京]로 명칭이 바뀌면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 책, <에도의 도쿄>는 ‘에도[江戶]’라는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에도 막부 시대에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그린 책이다. 일본 건축사를 전공한 나이토 아키라[內藤 昌, 1932~2012]의 글과 건축학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穗積 和夫, 1930~ ]의 일러스트가 맛깔지게 결합하여 비전공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여졌다. 중세 도시의 형성과정이나 ‘에도’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옥의 티                                                                                                                                   

p. 12 [거대도시 에도에 관한 연표] 중에서

에도성 완성 시기가 1940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1640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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