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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흔적 - 돌과 바람의 조형, 이타미 준
이타미 준 지음, 유이화 엮음 / 미세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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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미 준 혹은 유동룡

 

이타미 준[伊丹潤, 1937~2011]’으로 알려진 건축가가 있었다. 2019년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이타미 준의 바다>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이타미 준을 본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오사카의  이타미[伊丹]’ 공항과 작곡가 최치정(崔致禎, 1927~1995)의 예명 길옥 윤/요시야 준(吉屋 潤)’에서 따온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을 가진 유동룡(庾東龍)이라는 재일교포 건축가였다.

재일교포라는 것은 영원한 이방인을 의미한다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쪽발이로 불리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이니까어쨌든 그는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을 그리워하며 살아갔다그래서일까대학시절 혼자서 한국 여행을 하면서 조선의 민화건축달항아리[白磁大壺]에 빠져들었고수집과 연구를 시작했다.

훗날 그가 <이조 민화(李朝 民畵)>(1975), 오사무 무라이[村井修, 1928~2016]와의 공저인 <이조의 건축[李朝の建築]>(1981), <조선의 건축과 문화[朝鮮の建築と文化]>(1983), <한국의 공간>(1985) 등의 책으로 펴낸 것도 이때부터 쌓은 내공 덕분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말년에는 제주에 비오토피아의 [핀크스 퍼블릭 골프 클럽 하우스](1998), [핀크스 맴버스 골프 클럽 하우스](1998), [포도호텔](2001), [()/()/(미술관](2006), [두손 미술관](2007), 그리고 [방주교회](2009) 등의 작품을 남겼다.

 

핀크스 퍼블릭 골프클럽하우스


출처: <손의 흔적>, pp. 118~119

 

 핀크스 맴버스 골프클럽하우스


출처: <손의 흔적>, pp. 126~127

 

포도호텔


출처: <손의 흔적>, pp. 142~143

 

()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62~163 / 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66~167  / 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미술관


출처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두손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72~173, pp. 176~177 / 핀토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방주교회


출처: <손의 흔적>, pp. 190~191

 

2003년 세계적인 동양박물관인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에서 이타미 준일본의 한국 건축가라는 제목으로 아시아인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이때 그는 국립 기메 박물관장으로부터 이타미 준은 예술가로서동시에 건축가로서 전통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시공을 초월한 독창성과 현대성을 지닌 예술작품을 창조해왔다” [p. 9]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2005년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하면서 그 이유를 이타미 준은 현대 미술과 건축을 아우른국적을 떠나 세계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그의 작품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아시아 문화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 [p. 9]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다. 2006년 한국의 김수근 건축상을,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작품_SK건설 기흥 아펠바움], 2010년 일본 최고의 건축상이라는 무라노 도고[村野 藤吾][작품_두손 미술관//석 미술관]을 수상했다.

 

 

도공의 무심한 마음으로 빚는 건축.

 

유동룡의 고국에 대한 목마름은 달항아리 등에 대한 애정으로 표현되었고그는 이를 다시 건축에 담으려고 했다그래서 그를 풍토경치지역의 문맥에서 뽑아낸 본질을 건축에 녹아낸 건축가라고 말한다.

나는 풍토경치지역의 문맥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뽑아내 건축에 스며들게 할지를 생각한다.

조형은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 하고,

공간과 사람자신과 타인을 잇는

소통과 관계의 촉매제여야 한다. ” [p. 7]

 

이를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온양민속박물관]을 들 수 있다.

 

온양민속박물관


출처: <손의 흔적>, pp. 44~45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의 무덤은 모두 흙의 조형물이다지역성과 풍토성이 짙은 시골집땅에서 솟아오른 원초적인 반원 형태의 무덤에서 흙과 불꽃그리고 흙으로 빚은 조형의 원점을 발견한 느낌이다.

이번에 맡은 <온양민속박물관>은 시골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근대의 벽돌을 만드는 방식처럼 황토를 틀에 넣어 누를 후 햇별에 말려 초벌구이 상태의 흙벽돌을 만들었다흙을 주제로 혹독한 자연 환경과 풍토성 속에 자립한 이 건축믈을 그 풍경에 맞설 수 있는 외관을 갖춘 셈이다.

그 지역의 돌과 흙으로 지역의 특성과 풍토에서 싹튼 전통 방식으로 건축물을 짓는 것은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개척하려는 노력이다.” [pp.51~52]

 

 

마지막 남은 손의 건축가.

 

유동룡은 오늘날 컴퓨터의 지배를 받아 현대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건축에는 온기가 사라지고 디자인의 독특성에만 쏠려 감동을 잃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정신문화까지 황폐해질 것을 염려했다그래서 그는 손으로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을 고집했다아날로그적인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과 글쓰기를 통해사람의 온기를 밑바탕에 두고 그 땅의 울림과 바람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했다.

나의 건축 작업에서 글과 드로잉은솜씨는 서툴어도 사람 냄새가 나고 따듯한 피가 흐르는 건축을 되돌아보기 위한 훈련의 선이라고 하겠다그것은 모두 살아가기 위한 것이고 심장이 뛰는 것과 같은 것이다사각형 안에 원을 그리고 그 혀상이 공기와 같이 청명하고 생명을 머금은 것으로 드러나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그것도 어떤 경지에서 보면 말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내게는 새로운 건축을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p. 16]

 

<이타미 준의 바다>에서 [먹의 공간부분에서 유동룡의 딸 유이화는 “아버지 대나무가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바뀌거나 썩지 않아요?”라고 질문하자유동룡은 “그걸 의도한 거야그게 시간의 맛이지라고 말한다사람과 함께 나이 먹는 집이것이 그가 의도했던 자연스러운 건축이 아니었을까?

 

먹의 공간


출처: <손의 흔적>, pp.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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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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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독한 삶뭉크 작품의 원천

 

절규로 유명한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삶을 보면 마치 죽음이라는 향기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다섯 살 때[1868] 어머니[Laura Bjolstad]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열세 살 때는 (가족 중 가장 각별했던) 누이 소피에(Sophie)마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뭉크의 아버지[Christian Munch]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매달렸다그리고 뭉크에게 엄격한 종교적 생활 방식을 강요했다병약하기까지 했던 뭉크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 학습을 받았기 때문에 교우 관계도 유지할 수 없었다그는 더욱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게 된다.” [p. 21]

그러한 사실만 보면 그의 앞에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와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다행히 그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과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뭉크의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공황 장애우울증불면증정신 분열불안 장애환각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p. 14]

 

 

청춘사랑과 방황

 

21살이었던 1885뭉크는 보레(Borre)에서 가족들과 여름 휴가를 보내다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그녀의 이름은 밀리 타우로브(Milly Thaulow), 이미 한 남자의 아내였다하지만사랑을 갈구하는 두 자유로운 영혼들의 앞에서는 그런 제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뭉크의 첫사랑이었다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녀가 자신이 고른 이와 두 번째 결혼을 했을 때그녀의 옆에 선 사람은 뭉크가 아니었다그렇게 뭉크의 첫사랑은 성냥개비의 불꽃처럼 확 피었다가 화상만 남기고 사그라졌다.

 

<이별>


출처: <뭉크>, p. 43

 

뿐만 아니었다. “1889 11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뇌졸증으로 마비가 와 곧 세상을 뜨고 만다화가가 되기로 한 뒤부터 아버지와 마찰이 잦았던 뭉크는 아버지에게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게다가 아버지의 죽음 후 뭉크 가족의 불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아버지의 수입에 의존하던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고곧이어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이 발병하여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된다카렌 이모가 부업을 하고 막냇동생 잉게르가 피아노 레슨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지만 집안의 맏이로서 뭉크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화단에서 인정받고 화가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뭉크를 짓눌렀다.” [pp. 44~45]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이러한 20대의 방황은 혁신적인 예술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대표작 <절규(The Scream)>를 비롯하여 <마돈나(Madonna)>, <불안(Anxiety)>, <아픈 아이(The Sick Child)>, <이별(Separation)>, <키스(Kiss)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서 가져왔다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p. 14]

 

 

뭉크의 혁신적인 예술

 

뭉크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시도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첫째뭉크는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번 그리는 것을 즐겼다.

<절규또한 4개의 버전과 판화본이 존재한다동일한 제목에 같은 모티프를 가졌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4개의 버전이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p. 68]

 

<절규>(1893)


출처: <뭉크>, p. 12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알려진 버전이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서 보관하는 1893년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절규>의 얼굴은 대부분 이 버전에서 기인한다판지에 템페라와 크레용으로 그린 이 그림은 잘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화면 오른쪽에 덧붙여 확장시킨 부분이 그것이다.” [p. 68]

 

또 다른 <절규가운데 2개를 뭉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뭉크 박물관은 판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1893년 작과판지에 템페라와 유채로 그린 1910년 작의 두 가지 버전을 소장하고 있다1893년 작은 크레용의 터치가 거칠고 건물과 배가 없다디테일이 약해 아마도 연습 버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반면 1910년 작은 템페라와 유채로 그려져 색이 선명하고 형태가 비교적 견고하다특징은 중심인물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pp. 68~70]

 

<절규>(1895)


출처: <뭉크>, p. 70

 

마지막으로 독일의 미술 수집가 유진 폰 프란케트의 주문으로 1895년 제작된 판지에 파스텔로 그린 버전이 있다이 버전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다른 버전에서는 배경의 길이 자유롭게 채색되어 있는데 반해이 그림에서는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배경의 두 남자를 주목해볼 만하다다른 버전에는 두 인물이 모두 서 있다그러나 이 파스텔 버전에서는 두 인물이 좀 더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다한 명은 서서 고개를 돌려 피오르를 바라보고 있고조금 뒤쪽의 다른 한 명은 난간에 기대어 있다.” [pp. 70~72]

덧붙이자면, <절규>에 앞서서 그 토대가 된 <절망(Sick Mood at Sunset: Despair)>(1892) <절망(Despair)>(1894)라는 작품도 있다.

<절망(Sick Mood at Sunset: Despair)>


출처: <뭉크>, p. 60

 

영원한 습작이 된, <아픈 아이>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이처럼 같은 작품을 조금씩 다르게 반복적으로 그림으로써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형상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소설가 최인훈(崔仁勳, 1936~2018)이 그의 대표작인 <광장(廣場)>(1960) 10여 차례 개정과 개작(改作했던 것과 비슷한,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마음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뭉크가 남긴 많은 글 가운데 그의 예술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문구이다뭉크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풍경이나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다시 말해대상을 관찰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 본 것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다.

기억이란 감정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이 화가의 뜻대로 해석되고, ‘편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3]

 

 

둘째작품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을 가졌다.

뭉크 예술과 인생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생의 프리즈>는 인간 삶의 여러 모습을 주제별로 엮어 보여주는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작 아이디어로 작품의 배치 및 전시에 관한 뭉크의 관심이 빚은 결실이었다.

 

그가 <태양>과 같이 따뜻한 희망이 넘치는 그림도 그렸다는 점을 알게 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절규> 하나만 알고 있던 화가 뭉크가 불행한 삶을 살면서 겪은 고독과 죽음을 그림을 통해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는 것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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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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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國에 들어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를 대표하는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境の長いトンネルをけると雪であった]”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그래서 저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찾아가는 여행을 소설 <설국>의 배경이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에치고유자와[越後湯]’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설국을 보기 위해 일기예보까지 확인한 저자는 열차를 타고 시미즈[淸水터널을 지나환상 속의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몇 초 후 터널이 끝났다말 그대로 설국이었다밤 시간은 아니었지만 터널 반대편에 비해 습하고 흐렸으며 눈은 역 구내에까지 높이 쌓여 있었다온통 흰색으로 된 세상설국이었다온도와 습도색깔이 터널 저쪽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었다말 그대로 딴 나라였다.

기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동안 차창 밖으로 플랫폼에까지 날아와 쌓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청소나 정리를 잘하는 일본인들의 기질로 미루어봤을 때 역 구내에 이만큼 눈이 쌓인 건 몇 시간 만의 일일 것이 분명했다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의 방문에 맞춰 폭설을 내려준 조물주에게 감사했고이제 기차에서 내려 걸어가게 될저 멀리 보이는 시골길의 풍경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p. 43]

아마 이때 저자의 기분은 해리포터가 9 3/4 플래폼을 지나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도착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줄거리의 소설이 아닌 이미지의 소설

 

피천득의 <인연>은 피천득과 아사코[朝子] 3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도 어떻게 보면부모의 유산으로 살아가면서 서양무용 평론가를 자처하는 기혼자 시마무라[島村]와 병든 약혼자의 약값과 병원비를 대기 위해 게이샤[藝者]가 된 코마코[駒子] 3차례 만남그리고 코마코의 친구인 요오코(葉子)와의 만남을 주된 이야기로 하고 있다.

줄거리만 보면 불륜을 다루는 로맨스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국>은 노벨 문학상을 받고일본문학 사상 최고의 서정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다행히 저자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설국>을 읽고 실망했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재미가 없다는 반응에서부터 너무 밋밋하다” “이해하기 어렵다”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내 생각에 이런 반응은 <설국>에 대한 잘못된 접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설국>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여타 소설과는 조금 다른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우리가 소설에 접근하는 익숙한 방식인 줄거리 위주 독법이나 기승전결을 염두에 둔 흔한 독법으로 읽다 보면 <설국>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암시적 장치를 놓치고 만다.

결론부터 말하면 <설국>은 일종의 '암시 소설'이다. <설국>에는 사건과 그 사건들이 결합해 결말로 향해 가는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게다가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감정 표현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설국> 줄거리의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설이다. <설국>에서 나오는 모든 배경은 일종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다시마무라[島村]가 살고 있는 도쿄라는 현실 세계가 아닌 터널 밖의 세계즉 에치고유자와[越後湯]라는 이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p. 62]

 

결국 <설국>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읽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국>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한 행 한 행시를 읽듯 이미지를 읽어나가는 것이다읽으면서 소설 전체의 인과관계를 찾거나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그냥 나열된 이미지 하나하나를 감상하듯 읽어야 한다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독자 스스로 어떤 종합에 이르게 된다.” [pp. 82~84]

 

 

허무와 체념의 미학

 

그렇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왜 이런 이미지의 소설을 썼을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오사카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하지만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버지어머니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채 자라난다두 살 때 아버지가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부모가 사망한 후 이바라키에 있는 조부모 집에서 살았지만 일곱 살에 할머니가열 살 때는 누나가 세상을 떠난다그리고 결국 마지막 보호자였던 할아버지마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시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장례의 명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의 초반 생은 죽음과 이별로 점철되었다.” [pp. 134~135]

뿐만 아니라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 재학 시절 사귀게 된 첫사랑의 소녀 이토 하쓰요[伊藤 初代]에게 일방적으로 파혼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마도 이렇게 삶의 환희보다 죽음의 허무그리고 체념을 먼저 배운 그의 삶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진 듯한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닐까?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관해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살았고 글을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동시에 그는 “작품을 통해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며자신은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고도 덧붙였다어떤 주장도 힘주어 말하지 않는 습관이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치고는 꽤나 단정적인 발언이었다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철학과 문학적 지향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고백이다그에게 현실은 죽음이었고죽음은 자연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허무하고 아름다운 궁극 같은 것이었다이런 세계만을 바라본 그에게 현세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나 승패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p. 243]

 

어쩌면 그는 벚꽃이 지듯 스러져 가는 일본식 죽음의 미학을 삶과 글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래서 저자도 나는 그를 떠올리면 늘 벚꽃이 생각났다죽기 직전의 모습이 이다지도 화려한 꽃이 벚꽃 말고 또 있을까벚꽃은 절정의 시기를 잠시 보여주고 꽃비가 내리듯 소멸을 향해 간다어느새 돌아보면 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잎만 남는다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알려주듯이바라키의 벚꽃도 그렇게 영혼처럼 떨어져갔으리라” [p. 147]고 말한 것이 아닐까?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을 허무만으로 얘기하지 않는다아예 직설적으로 체념의 문학이라고 말한다흔히 체념이라고 하면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한다는 것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여기서는 반대로 이치나 도리를 깨닫는 마음을 의미한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내내 나를 따라다닌 ‘화두’였다체념한다는 것그리고 그 체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이 있다깊은 체념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체념이 힘이 된다는 것을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가 원고의 첫 행을 쓰는 것은 절체절명의 체념을 하고 난 다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희망보다 체념을 먼저 배운 자는 잔치가 끝난 다음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안다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그 흔적들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공간에서 몸을 일으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미학이다모두 다 끝났다고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코피를 쏟는 일’그것은 체념의 도를 깨우친 자만이 찾아낼 수 있는 표현이다.” [p. 138]

절망과 허무를 극복한 긍정적인 그 무엇이 체념인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에 대해 잘 모르겠다그저 영상으로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뿐학창시절에 읽었던 <설국> <천우학(千羽鶴)>을 다시 읽으면 이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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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밤 산책자 - 나만 알고 싶은 이 비밀한 장소들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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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의 즐거움

 

흔히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주로 낮의 풍경을 즐기려 가는 것을 의미한다하지만 저자의 교토[京都여행은 조금 다르다. <교토의 밤 산책자>라는 제목처럼 저자에게 교토는 햇볕이 쨍한 낮보단 해질녘 늦은 오후의 교토이고여행은 붐비는 인파 속에 사람에 치여 더딘 걸음이 아닌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기는 밤 산책이다.

사실 약간의 조명만 있다면초저녁부터 시작된 벚꽃 흩날리는 봄밤의 산책은 낭만적일 수 밖에 없다하늘하늘 춤추며 눈처럼 바닥에 쌓이는 벚꽃의 왈츠를 누구의 방해도 없이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황홀하지 않을까?

 

산책 코스로는 지온인[知恩院]까지 갔다가 큰길을 따라 야사카진자[八坂神社앞으로 와서 시조 거리[?通]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이 하나아까 간 길을 시라카와[白川]를 따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 또 하나가 있다일행이 있을 때보다 혼자 이 길을 걷는 게 더 좋은 이유는 쓸쓸하고 운치 있는 밤 산책에 딱 어울려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그 소리를 잠재우기 좋은 산책로다너무 길지도 않고너무 외지지도 않으며언제든 꺾어 돌아갈 수 있는조명 자체가 적당히 낮은 조도를 유지한 밤의 기온 뒷골목을 걷다 보면정말 달밤에 단추를 줍는 기분이 든다단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나 자신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이런 밤의 시간에나 잠깐 허용될 뿐이다해가 뜨면 그런 감정은 소맷부리에 집어넣는다누군가는 버리는 것이지만 나는 버릴 수 없다나는 나를 버릴 수 없다. [pp. 117~120]

 

 

여행자의 게으름을 만끽하는 순간


이 책은 4부분으로 나눠 시간의 미감교토의 꽃과 계절’, ‘혼자여도섞여도 좋은 교토의 정원과 산책로’, ‘마음과 취향을 알아주는 가게와 볼거리’, ‘치장하지 않아 더욱 완벽한 교토의 음식을 소개했다단지 그뿐이다어떤 여행 코스를 소개하거나 추천하는 것도 아니고.

길을 가다 골목을 잘 못 들어가서 헤매는 작은 실수 정도는 가볍게 웃고 지나갈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덕분에 집 주위 혹은 회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커피숍에 가서 무언가를 마시거나 디저트 가게에서 간단한 디저트를 사는 것처럼 부담감없이 저자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었다.


출처: <교토의 밤 산책자>, pp. 82~83


각 장의 시작에는 위와 같은 지도가 있다그리고 한 장소를 소개하기 전에 꼭 시나 소설을 인용한다.

예컨대기타노텐만구[北野天滿宮]의 매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왕안석(王安石, 1021~1086) <매화>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처럼.


눈이 아닌 줄 멀리서 아는 것은[遙知不是雪]

그윽한 향기 덕분이리라 [爲有暗香來]” [p. 24]


중간에 저자의 생생한 경험담도 있고

나는 벚꽃 구경도 단풍 구경도 많이 다녔는데그러다 생긴 요령이라고 하면 ‘낮을 포기하는 것’이다꽃과 단풍이 난리인 교토의 성수기(3월과 9)는 특히 악명 높은데일단 숙박비가 평소의 두 배가 되고 그나마도 빈 방을 찾기 어렵다유명하다는 관광지는 사람에 치여 죽을 것 같고 뒷사람에 밀려 원치 않아도 앞으로 앞으로 이동하게 된다밥 한번 먹으려면 맛집은 고사하고 어느 식당이든 일단 줄을 서야 하는 일이 다반사고절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버스는 당연 만원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행인 점이라면 교토의 절은 관람 경로를 잘 만들어서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벚나무를 찍을 때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게 찍히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진에는 나무 홀로 요요히 서 있는 것처럼 나와도 실제 상황은 아수라장이라는 말이다. [p. 41]



시센도[詩仙堂]라고 불리는 오우토쓰카[凹凸?]를 소개하는 글에서는 가라오케에 함께 간 일행 중 하나가 부른 우에무라 카나[植村 花菜うえむら かな, 1983~ ]의 <トイレの神樣(화장실의 여신)>(https://youtu.be/Z2VoEN1iooE덕분에 떠올린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짧은 조언을 곁들인다.

소중한 것을 잃어간다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부였던 시절을믿고 사랑했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간다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그런데 가끔은거기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때가 있다그런 장소가 있다시센도에 걸려 있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사진처럼 더 이상 그렇지 않은슬픔으로 끝난 관계들이 가장 반짝거렸을 때를 상기시키는 장소가 있다.

그 사람과 같이 방문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하는 장소가 있다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장소 찾기의 중독자들이다나에게는 시센도가 그런 곳이다처음 방문했던 때는 혼자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분명 당신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그러니 아직 찾지 못했다면 찾기를 포기하지 마시길. [p. 147]

 

또한하나의 장소에 대한 소개를 마칠 때마다 해당 장소의 교통편요금입장정보를 제공한다때때로 숨은 그림 찾기처럼 나타나는다혜's PICK(또는 TIP)을 통해 저자만의 여행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교토를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여행 가이드의 성격도 띄고 있다.

 

무심코 읽다보면 몸은 서울에 있는데마음은 교토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얼마 전에 읽은 하야시야 다쓰사브로 [林屋辰三郞, 1914~1998]의 <교토>도 그렇고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니 언젠가는 꼭 교토에 가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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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 일본 역사학자의 진짜 교토 이야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하야시야 다쓰사부로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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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대한 역사지리적 가이드

 

이 책은 교토[京都]라는 특정 지역을 다루고 있다그렇다고 해당 지역에 대한 기본 정보하이라이트추천코스지역여행체크 리스트 등이 엮여 있는 일반적인 여행 가이드북이나 정여울의 <헤세로 가는 길> arte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처럼 한 예술가의 흔적을 따라 그의 생애와 작품을 함께 살펴 보는 여행기도 아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저자 유홍준 교수의 교토 답사 시 길라잡이를 해준 책!이라는 책 소개처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와 같은 답사기(踏査記)에 해당하는 글이다또한 이 책이 교토대 사학과 교수였고 교토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한 하야시야 다쓰사브로 [林屋辰三郞, 1914~1998]의 <京都>(1962)를 번역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유홍준의 답사기보다 이쪽이 선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책을 펼치면서 약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이 책이 출간된 지 거의 60답사 열풍을 가져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011)이 출간된 후로도 약 8년이 지난 2019년에 와서야 이 책을 번역한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우선 이 책이 어떤 내용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 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교토[京都]의 문화와 종교사회와 정치에 관한 내용을 15장으로 나눠 각 장마다 시대와 공간의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출처: <교토>, p. 7

 

 1장 교토의 고대인에서 교토의 역사가 최소한 약 7~8,000년 전에 시작되었음을 얘기한다.

쇼와[昭和36(1961) 8월 기타시라카와[北白川북쪽의 이치조지[一乘寺무카이하타 초[向畑町]에서 구획정리공사 중 조몬[繩文]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특히 제표층인 갈색 흙층에서 조몬기에는 드문 주전자가 출토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검은 흙층에서 약 7,000년 전에 해당하는 조몬 초기의 새로운 토기가 발견된 것이라고 했다.” [pp. 31~32]

 

 4장 교토의 신사와 미스리에서는 일반적인 원령(怨靈)의 저주(詛呪)를 물리치는 민간의 풍속이었던 어령회(御靈會)가 정치적 희생양이 된 인물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의식으로 바뀌고이를 포섭하여 신사로 발전시킨 과정을 애기한다.

조간[貞觀11(869) 역병이 유행하자 일본의 66개 지방을 상징하는 66개의 창을 앞세워 우두천왕(牛頭天王)을 모신 가마를 신센엔[神泉苑]으로 보낸 것이 기온 어령회의 시작이라고 한다기온 신사[祗園 神社현재의 야사카[八坂신사]는 이런 어령 신앙의 대세를 교묘히 포착해 성립한 것이다.” [pp. 92~93]

기타노 신사[北野 神社]는 (본래 농업 신인 뇌신(雷神)을 모시던 곳이었는데 헤이안쿄 근교가 도시적 발전을 함에 따라쓰쿠시 지방 다지우후[太宰府]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管原道眞, 845~903]의 원령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 [pp. 92~93]으로 바뀌었다뇌신이라는 자연신(自然神)에서 스기와라노 미치자네라는 인격신[人格神구체적으로는 학문의 신 혹은 문필의 신]으로 발전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교토를 15개 지역을 구분해서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지역을 배정하고그 발전사를 조근조근하게 설명하고 있다덕분에 단순히 관광지로만 여기는 이였다면천년 고도(古都)로서의 교토가 지니는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교토국립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한 역사학자라는 점도 있겠지만근본적으로 저자가 교토라는 도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이 책은 저자의 교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이 돋보이는 진정한 교토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만약 코로나19로 인한 문제들이 해결된 후 교토를 방문할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 볼 필요가 있다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이기에기왕 교토를 간다면 제대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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