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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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國에 들어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를 대표하는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境の長いトンネルをけると雪であった]”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그래서 저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찾아가는 여행을 소설 <설국>의 배경이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에치고유자와[越後湯]’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설국을 보기 위해 일기예보까지 확인한 저자는 열차를 타고 시미즈[淸水터널을 지나환상 속의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몇 초 후 터널이 끝났다말 그대로 설국이었다밤 시간은 아니었지만 터널 반대편에 비해 습하고 흐렸으며 눈은 역 구내에까지 높이 쌓여 있었다온통 흰색으로 된 세상설국이었다온도와 습도색깔이 터널 저쪽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었다말 그대로 딴 나라였다.

기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동안 차창 밖으로 플랫폼에까지 날아와 쌓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청소나 정리를 잘하는 일본인들의 기질로 미루어봤을 때 역 구내에 이만큼 눈이 쌓인 건 몇 시간 만의 일일 것이 분명했다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의 방문에 맞춰 폭설을 내려준 조물주에게 감사했고이제 기차에서 내려 걸어가게 될저 멀리 보이는 시골길의 풍경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p. 43]

아마 이때 저자의 기분은 해리포터가 9 3/4 플래폼을 지나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도착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줄거리의 소설이 아닌 이미지의 소설

 

피천득의 <인연>은 피천득과 아사코[朝子] 3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도 어떻게 보면부모의 유산으로 살아가면서 서양무용 평론가를 자처하는 기혼자 시마무라[島村]와 병든 약혼자의 약값과 병원비를 대기 위해 게이샤[藝者]가 된 코마코[駒子] 3차례 만남그리고 코마코의 친구인 요오코(葉子)와의 만남을 주된 이야기로 하고 있다.

줄거리만 보면 불륜을 다루는 로맨스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국>은 노벨 문학상을 받고일본문학 사상 최고의 서정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다행히 저자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설국>을 읽고 실망했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재미가 없다는 반응에서부터 너무 밋밋하다” “이해하기 어렵다”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내 생각에 이런 반응은 <설국>에 대한 잘못된 접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설국>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여타 소설과는 조금 다른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우리가 소설에 접근하는 익숙한 방식인 줄거리 위주 독법이나 기승전결을 염두에 둔 흔한 독법으로 읽다 보면 <설국>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암시적 장치를 놓치고 만다.

결론부터 말하면 <설국>은 일종의 '암시 소설'이다. <설국>에는 사건과 그 사건들이 결합해 결말로 향해 가는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게다가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감정 표현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설국> 줄거리의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설이다. <설국>에서 나오는 모든 배경은 일종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다시마무라[島村]가 살고 있는 도쿄라는 현실 세계가 아닌 터널 밖의 세계즉 에치고유자와[越後湯]라는 이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p. 62]

 

결국 <설국>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읽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국>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한 행 한 행시를 읽듯 이미지를 읽어나가는 것이다읽으면서 소설 전체의 인과관계를 찾거나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그냥 나열된 이미지 하나하나를 감상하듯 읽어야 한다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독자 스스로 어떤 종합에 이르게 된다.” [pp. 82~84]

 

 

허무와 체념의 미학

 

그렇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왜 이런 이미지의 소설을 썼을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오사카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하지만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버지어머니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채 자라난다두 살 때 아버지가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부모가 사망한 후 이바라키에 있는 조부모 집에서 살았지만 일곱 살에 할머니가열 살 때는 누나가 세상을 떠난다그리고 결국 마지막 보호자였던 할아버지마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시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장례의 명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의 초반 생은 죽음과 이별로 점철되었다.” [pp. 134~135]

뿐만 아니라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 재학 시절 사귀게 된 첫사랑의 소녀 이토 하쓰요[伊藤 初代]에게 일방적으로 파혼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마도 이렇게 삶의 환희보다 죽음의 허무그리고 체념을 먼저 배운 그의 삶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진 듯한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닐까?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관해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살았고 글을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동시에 그는 “작품을 통해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며자신은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고도 덧붙였다어떤 주장도 힘주어 말하지 않는 습관이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치고는 꽤나 단정적인 발언이었다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철학과 문학적 지향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고백이다그에게 현실은 죽음이었고죽음은 자연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허무하고 아름다운 궁극 같은 것이었다이런 세계만을 바라본 그에게 현세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나 승패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p. 243]

 

어쩌면 그는 벚꽃이 지듯 스러져 가는 일본식 죽음의 미학을 삶과 글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래서 저자도 나는 그를 떠올리면 늘 벚꽃이 생각났다죽기 직전의 모습이 이다지도 화려한 꽃이 벚꽃 말고 또 있을까벚꽃은 절정의 시기를 잠시 보여주고 꽃비가 내리듯 소멸을 향해 간다어느새 돌아보면 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잎만 남는다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알려주듯이바라키의 벚꽃도 그렇게 영혼처럼 떨어져갔으리라” [p. 147]고 말한 것이 아닐까?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을 허무만으로 얘기하지 않는다아예 직설적으로 체념의 문학이라고 말한다흔히 체념이라고 하면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한다는 것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여기서는 반대로 이치나 도리를 깨닫는 마음을 의미한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내내 나를 따라다닌 ‘화두’였다체념한다는 것그리고 그 체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이 있다깊은 체념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체념이 힘이 된다는 것을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가 원고의 첫 행을 쓰는 것은 절체절명의 체념을 하고 난 다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희망보다 체념을 먼저 배운 자는 잔치가 끝난 다음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안다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그 흔적들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공간에서 몸을 일으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미학이다모두 다 끝났다고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코피를 쏟는 일’그것은 체념의 도를 깨우친 자만이 찾아낼 수 있는 표현이다.” [p. 138]

절망과 허무를 극복한 긍정적인 그 무엇이 체념인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에 대해 잘 모르겠다그저 영상으로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뿐학창시절에 읽었던 <설국> <천우학(千羽鶴)>을 다시 읽으면 이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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