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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건축 - 패전과 고도성장, 버블과 재난에 일본 건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현정 지음 / 마티 / 2021년 3월
평점 :
왜
전후(戰後) 일본 건축일까?
저자는 1945년 이후 일본 건축을 서술하기 위한 틀로 ‘현대’ 대신 ‘전후’(戰後)를 선택했다. 이는 시대구분으로서의 ‘현대’보다 “전전(戰前)의 군국주의와
차별된 민주주의, 평화주의, 경제성장을 특징으로 한 일종의
가치 공간” [p. 10]을 말하는 ‘전후(戰後)’를 통해 건축을 살피겠다는 뜻이다. 즉, <전후 일본 건축>이라는 제목을 통해 시대의 흐름이나
양식, 건축가 개인의 특징이 아닌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건축을 파악하고 서술하겠다는 저자의 의지를 선포하는 셈이다.
1950년대 전후 재건기_일본의 국가 건축가, 단게 겐조
1945년 패전과 함께, 일본은 천황제(天皇制)와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로의
변화가 강제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건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저자는
‘일본 건축의 아버지’ 혹은 ‘일본의 국가 건축가’라고 불리면서 일본 현대 건축의 토대를 닦은 단게
겐조[丹下 健三, 1913~2005]의 변화를 통해 이를
얘기한다.
단게
겐조는 대학원 시절, 전시(戰時)의 대표적인 프로파간다에 일본 전통 건축의 모티브를 적극 도입한 ‘대동아건설총령신역계획’ 설계 공모(1942)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는 그가 전전(戰前)에 군국주의를 위해 봉사했다는,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상징한다. 이 꼬리표를 때기 위해 그는 사실상의 데뷔작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1949~1954)에 “르 코르뷔지에 풍의 국제주의 모더니즘 양식을 전략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전쟁 시기 건축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후 일본의 공식 건축가로 새 출발을 도모할 수 있었다.”
[p. 41]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전쟁 시기 건축과의 단절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천황제, 군국주의 등 일본 전통의 부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이를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먼저 1953년 ‘국제성, 풍토성, 국민성: 현대건축의
조형에 관하여’라는 심포지엄에서 “모더니즘 건축을 일체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거부하는 ‘국제주의 건축’이자, 지배계급의 이해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기능하는 ‘휴머니즘 건축’으로 규정” [p. 42]한 저명한 건축 평론가 하마구치 류이치(浜口 隆 一, 1916~1995)와 달리 일본 건축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심지어
모더니즘, 즉 “국제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정신성을 결여한 백색의 “위생도기”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p. 43]
또한,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의 뿌리, 원시성으로서
조몬[繩文, B.C. 10세기~B.C. 3세기]적인 세계를 추구한 오카모토 다로[岡本 太郞, 1911~1996]의 주장을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즉 단게 겐조는 일본 건축의 성취가 민중적인 조몬과 귀족적인 야요이[弥生, B.C. 3세기~ 3세기]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예로 전통 건축의 대표작인 가쓰라 이궁[桂離宮]과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제시했다. 물론 단게 겐조의 주장만으로
이들에게 일본 전통건축의 정통성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 고건축에서 모더니즘적 요소를
찾으려는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같은 영향력 있는 서구 모더니스트들의 ‘발견’과 ‘관심’이 강력하게 작용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일본 전통[특수성]과 모더니즘[보편성], 전통과 현대의 조화 내지는 화해를 모색했다.
1960년대 고도 성장기_메타볼리즘
1960년대 아사다 다카시(淺田 孝, 1921~1990)의 강력한 리더십이 이끈 메타볼리즘(Metabolism) 그룹은
건축의 유연성과 가변성, 성장가능성을 전면에 내세운 여러 프로젝트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성립은
첫째, 1950년 후반 근대건축국제회의(CIAM, 1928~1959)의
헤게모니 붕괴
둘째, 1950년대 일본 건축계의 일본전통논쟁
셋째, 패전과 폐허를 딛고 막 고도성장기에 들어선 전후 일본 사회의 특수한 맥락 덕분에 가능했다.
이들의
디자인 방법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첫째, 메가스트럭처적 접근
“도시의 여러 기능을 포괄한 초대형 구조물”[p. 110]인
메가스트럭처를 지향했다. 기쿠타케 기요노리[菊竹 淸訓, 1928~2011]의 ‘해양도시’(1958)이나
구로카와 기쇼[黑川 紀章, 1934~2007]의 ‘공중도시’(1960)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들은 “위로부터의
전면적인 개발을 강조” [p. 113] 했다.
기쿠타케 기요노리의 해양도시, 구로카와
기쇼의 공중도시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111
둘째, 그룹 형태(group form)적 접근
“주민의 필요와 도시의 맥락에 맞게 유연하고 점진적인 적응과 변화를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접근을 지향”[p. 113]
한다. 따라서 “건축가의 권능보다 거주민의 요구와 지역적인 맥락에 방점을 둔 도시계획”[p. 115]을 선호한다. 마키 후미히고[槇 文彦, 1928~ ]의 ‘힐사이드
테라스’(1960~1992)는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마키 후미히고의 힐사이드 테라스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p. 116~117
“메타볼리즘은 인공대지로 대표되는 도시적 규모의 디자인에서부터 캡슐로 불리는
개별 주거 단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선보였다. 1960년 초반 거대한 인공대지가 메타볼리즘
건축을 대표했다면, 1960년대 중반부터는 캡슐이 메타볼리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pp. 120~122]
이들의 시도는 비(非)서구권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며, 일본 건축이 동시대 국제 건축계의 보편적인 이슈를 공유하고, 때로는 선점하기까지 하는 ‘국제적 동시대성’을 획득하게 했다. 그러나 “바다와 하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는 메타볼리즘의 대담한 구상은 기술과 진보에 대한 자신감만큼이나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태풍 등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있는) 섬나라 일본이 갖는 근원적인 불안에 의해 추종되었다” [p.
136]는 저자의 말처럼 일본사회의 ‘생존에의 강박’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70년대 오일 쇼크_ 포스트모더니즘, 이소자키 아라타
1970년대는 급진적인 전공투(全共鬪)의 몰락,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1925~1970]의 할복자살, 오일쇼크 등은 국가
재건과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된 한 시대의 종언을 알렸다. 건축분야에서는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그 역할을 했다. 건축사학자 야쓰카 하지메[八束 はじめ, 1948~ ]가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건축을 “모더니즘
건축의 장송곡”이자 포스트모던 건축의 서막을 알리는 일본 건축사의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규정” [p. 150]했던 것처럼, “1970년대 들어 과학기술 낙관론에 근거한 유토피아주의를 골자로 하는 모더니즘 건축은 냉소주의와 상업주의, 절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건축의 등장에 의해 도전”
[p. 152]받은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건축을 대표하는 것이 이소자키 아라타[磯崎 新, 1931~
]를 리더로 해서 ‘포스트 메타볼리즘’을 표방한
일련의 젊은 건축가들이다. 이들의 등장에는 무엇보다도 1970년대
일본 사회라는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 즉, “(일본의) 1970년대는 전후 재건이나 정치 민주화, 경제성장 같은 강력한 사회적 합의가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 시기이다. 따라서 건축도 사회를 표현하는 공적 역할을 떠맡는 대신, 시적 감흥과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서 사적
성격이 강해졌다.” [p. 207] 이소자키 아라타의 ‘쓰쿠바 센터 빌딩’ (1983)은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이소자키 아라타의 쓰쿠바 센터 빌딩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217
전후 1세대에 속하는 3세대 건축가들은 “단게처럼 대동아 공영권의 그늘에서 발버둥칠 필요도, 메타볼리즘이나
이소자키처럼 히로시마의 유령과 싸우거나 종말의 순간을 상상할 이유도 없었다. (이들은) 자신의 건축의 목표가 국가의 부흥과 동일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롯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pp. 227~228]
3세대 건축가를 대표하는 이토 도요[伊東 豊雄, 1941~ ]는 “메타볼리즘의
영웅주의적 자의식과 위압적이고 값비싼 거대 스케일의 디자인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거주민의 삶과 밀착한 주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p. 237] 그의 라이벌인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 ]는 “도시를
‘악’으로 규정하고, 주택을
도시로부터의 피난처이자 개인을 지켜주는 저항의 요새로 접근했다. 이를 위해 공간의 개방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둥과 보로 하중을 받치는 근대건축 전략을 폐기하고, 대신 견고한 벽을 쌓아 내밀한
사적 영역을 만드는 “영벽(領壁)”의 부활을 주장했다.” [p. 243]
이처럼 1970년대에 데뷔한, 이들 신세대 건축가들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외부와 단절된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닫힌 주택’에
관심을 가졌다. 이토 도요의 ‘U HOUSE’(1976)나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파사드의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1976)는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토 도요의 U HOUSE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p. 240~241
안도 다다오의 스미요시 나가야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242
1990년대 이후 장기
불황_탈(脫) 전후 건축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냉전 체제가 해체되고, 경제의 버블이 꺼지면서
일본은 장기 불황에 빠진다. 이로 인해 “냉전 질서 아래에서 평화와 안정, 풍요를 누렸던 일본의 ‘전후’ 패러다임이 붕괴”
[p. 271]했다. 건축분야에서도 “호황기에 유행했던 과시적이고 거대한 포스트모던 건축이 비판되고, 대신
기능성, 경제성, 친환경성,
로테크(lowtech), 공동체성 등의 가치가 새롭게 모색(된)” [p. 272] 주택 설계만 활기를 유지했다. “국내에는 <와타나베의 건축 탐방>(1989~ )으로 알려진 주택 탐방 TV프로그램이나 <카사 브루투스>(1998~ )처럼 주택과 인테리어를 소개하는
잡지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p. 272]
언뜻
예술 소주택 붐이 일었던 1970년대와 비슷해 보이지만, “1990년대 이후 주택을 둘러싼 논의는
고령화와 인구감소, 소자녀화 등 당시 일본에 불어 닥친 급격한 사회적,
인구학적 변동” [p. 286]때문이었다.
2011년 3.11 도후쿠 지방의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사고는 또 한 차례의 변곡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재난
이후 건축이 재난복구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시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택을 통해 위기에 처한 일본을 개조한다는 구상마저 나왔다.
그러나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인 ‘신국립경기장’과 관련된 논란은 그러한 변곡점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국제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의 설계안을
진행 중에 백지화시키고, ‘약한 건축’, ‘작은 건축’을 지향하는 구마 겐고[隈硏吾, 1954~ ]의 설계안을 새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사회를 통해 건축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 사회, 한국 건축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아가 일본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 한국 건축의 가까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