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고세훈 지음 / 한길사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조지 오웰>은

 

이 책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이하 ‘오웰’)로 알려진 사람의 전기가 아니다. 이는 이 책이 한 개인의 삶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늘어놓는 연대기 혹은 편년체(編年體)라는 일반적인 전기 형식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서사와 사상을 연대기적으로 묶어서 서술하다가 읽는 즐거움과 주인공의 일관되고 체계적인 사유방식을 모두 놓칠까 염려” [p. 39]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크게 오웰의 삶을 그린 ‘1부 생애’와 그의 사상과 작가로서의 글쓰기 태도를 다룬 ‘2부 사상과 글쓰기’로 엮여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을 한 사람의 일생에 평론을 곁들인 평전(評傳)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조지 오웰’이라는 모범 답안을 두고, 은연중 그와 비교하면서, 그의 시각으로 바라본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한 것으로도 보인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글을 엮어나가다 보니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튀어나와 아쉬웠다.

 

 

오웰의 사상과 글쓰기 태도

 

장 폴 샤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이하 ‘샤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이란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 [p. 14]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비슷하게 오웰은 “권력 언저리에서 킁킁대며 안일과 위선과 표변을 일삼는 지식인에 대한 거대한 보고서” [p. 33]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을 통해 지식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웰이 보는 지식인은 어떤 존재일까?

첫째, 지식인은 무지몽매한 민중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흔히 지식인이라고 하면, 무지몽매한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984>와 <동물 농장>으로 알려진 오웰은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전제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즉, “그는 궁핍과 질병이 주는 삶의 신산(辛酸)함에도 불구하고 승자 진영에 편입되고자 안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을 피해자 편에 서서 그들의 눈과 입을 빌려 관찰하고 발언하기를 지속했다. “오웰은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설교하지 않았으며,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 그는 결코 시끄럽지 않았으며, 불안한 자의 독단을 보이지 않았다 (…) 그는 관광여행의 안내자의 태도를 취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p. 34]

 

둘째, 지식인은 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지녔음직한 정치적 편견 혹은 종교적 가치에 대해 스스로 민감할수록 미적, 지적, 정직성의 희생 없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진다. 인간에겐 너무도 명백하여 변경 불가능한 사실들, 그리하여 조만간 직면해야 할 사실들을 무시하는 능력, 곧 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믿으려는 성향이 있다. 마침내 틀렸음이 밝혀졌을 때에도 옳음을 보이기 위해 사실들을 비트는 것이 인간이다.” [p. 503]

샤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회에서 가장 소외 받는 계층, 즉 일반적으로 피지배계층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확장된 이익을 대변하는 ‘보편적 계급’이기 때문에 지식인은 이들의 입장에 서거나 이들을 대변할 경우에만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는 지배계층의 일부일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이 자신의 시각으로 피지배계층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시각을 가지려 해야 한다는 얘기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이 피지배계층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오웰은 이러한 샤르트르의 주장을 가장 잘 구현한 지식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웰에게는) 이데올로기든 신앙이든 혹은 권력에 의해서든 그것이 작가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율성을 제한한다면, 작가의 생명인 정직성 또한 제약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해 보였다.

오웰로서는 진실, 사실과의 정직한 대면, 그리고 그러한 대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인간이 주관적인 감정을 온전히 배제하지는 못할지라도,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가능하면 사고로부터 그것을 걷어내는 일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읽을 만한 것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pp. 502~503]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정치적 글쓰기라는 예술

 

우리가 학창시절에 KAPF나 프로문학을 배우면서, 문학에 정치적 의도가 들어가면 작품이 아니라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정치적 글쓰기라고 하면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웰에게 문학과 정치적 가치는 상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년에 그는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늘 가장 원했던 것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p. 503]

오웰이 보기에는 “소설을 쓰는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보통사람과 계급적으로 유리된 중간계급에 속해 있다. 보통사람, 특히 노동계급(의 삶)과의 접촉이 쉽지 않을 때 작가들은 주제나 소재의 부재에 시달리며, 단어와 표현의 미학적 유희에 쉽게 빠져든다. (그 결과로 산출된 작품들은) 모든 것이 허용된 듯이 보이지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재미는 있을지라도 감동은 찾기 힘들다.” [pp. 526~527]

오웰이 이런 말을 한 것에는 어떤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혹은 독자들을 선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글쓰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오웰은 ‘보통사람들의 품위(common decency)’가 사회 곳곳에 스며드는 세상을 꿈꿨다. 언어가 간결하고 명료하면 보통사람들이 정치적 논의로부터 배제되거나, 지도자들에 의해 쉽사리 속임을 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정치작가로서의 다짐을 이렇게 토로했다.

책을 쓰는 일이란, 어떤 고통스런 질병을 한 차례 길게 앓는 것 같은 끔찍하고 탈진시키는 투쟁이다. (...) 자신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쓸 수 없다. (...) 내 작업을 돌아볼 때, 내가 생기 없는 책을 쓰고, 미사여구, 의미 없는 문장, 화려한 수사, 곧 눈속임에 취해 있을 때는 예외 없이 정치적 목적을 결여했을 때였다는 것을 본다.” [p. 36]

 

즉, 오웰에게 중요한 것은 “일관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관된 도덕적 힘이었다. 무릇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지만,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推動) 한다. 오웰의 도덕적 힘은 (<카탈로니아에 경의를[Homage to Catalonia]> (1938) 등에서 드러나는) 피해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버마 나날들[Burmese Days]>(1934)에서 보듯이) 가해자로서의 수치와 죄의식에 터를 잡고 있다.” [p. 35]

따라서 그가 사회주의자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결과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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