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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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역설적으로 들리는 두 개의 단어가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듯한 제목이다. 마치 차가운 불꽃처럼.

그래서일까? 이 소설은 이지연의 현재와 1930년대 이정선의 과거가 교차하듯이 얽히면서 전개된다. 현재는 서른 두 살의 이지연이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회령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는 백정의 딸로 태어난 그녀의 증조할머니 이정선이 나고 자란 황해도 삼천을 떠나 회령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1930년대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가 누군가의 입을 빌어 얘기되는 것이 아니라 화자에 해당하는 이지연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료들이 역사가에 의해 재구성되어 역사로 남겨지는 것처럼.

 

지연의 증조모 이정선은 정신대에 끌려갈 뻔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처라고 거짓말을 한 남자 박희수와 결혼하여 개성으로 떠난다. 병든 어머니를 두고 자기 혼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는 원죄(原罪)에, 백정의 자식이라는 핸디캡까지 있었지만, 남편이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저 만민이 평등하다는 기독교 교리를 실천했다는 허영심으로 그녀와 결혼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의 범주에는 백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박희수의 부모가 그 결혼을 반대할 수 밖에. 이로 인해 박희수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백정의 딸과 결혼했다는 죄책감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결혼이 힘겨울 수 밖에. 단지 ‘삼천’이라고도 불린 지연의 증조모가 모든 것을 참고 견딞으로써 그들의 결혼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지연의 할머니 박영옥의 삶도 힘겨웠다. 증조부가 1.4 후퇴 때 단신으로 회령으로 내려온 길남선을 마음에 들어 했기에 그와 결혼했다. 길남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남들 보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그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북에 부인과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할머니를 속였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 하나 없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변명할 뿐이었다.

사실 할머니나 증조모도 그녀의 결혼이 파국을 맞이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단지 그 예감이 생각보다 빨리 현실화되었을 뿐.

 

남선인 너이 아바이랑 비슷한 사람이야. 나두 영옥이 너이 어마이가 아니었으면 남선이레 공손하구 괜찮은 사내라구 생각했을지도 모르갔어. 기런데…… 아니야. 너를 귀하게 대할 사람이 아니다

기걸 어마이가 어떻게 알아

같이 밥 먹을 때 보라. 생선이든 고기든 가장 큰 살코기를 제일 먼저 집어가는 기를. 영옥이 너가 귀하면 기렇게 하갔어? 말은 재미나게 하디. 기건 나두 알갔어. 기런데 영옥이 네 말 들어주는 모습을 내레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다 기렇디 않아.

영옥아, 내는 다른 거는 몰라두 너레 너를 속이디 않았으면 한다. [pp. 216~217]

 

지연의 어머니 길미선도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로망으로 자신의 엄마가 꺼려하는 결혼을 선택한다. 지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저 참고 견디기만 했다. 그나마 지연의 조모가 중혼(重婚)을 한 남편에게 매달리지 않고, 지연이 바람을 피운 남편과 이혼을 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묘하게도 그녀들에게는 모두 힘든 순간 버팀목이 되어 준 벗이 있었다. 지연의 증조모 이정선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지연의 조모 박영옥은 새비 아주머니의 딸 김희자가, 지연의 어머니인 길미선은 멕시코에 사는 명희 언니가, 지연에게는 지우가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고 속에 담아둔 말을 들어줄 수가 있는 상대방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이 존재하는 것, 혹은 버틸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기억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굳이 다른 이를 기억하기 위해 마음과 시간을 쓴다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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