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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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으면서 한 가지 독서의 목표가 생겼다.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영미문학 100선의 책들을 한 번 섭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시작부터 과연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일단 지난주에 <1984>도 성공적으로 읽었고, 내친 김에 1928년 퓰리처상에 빛나는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도 구해서 읽었다. 사실 20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이라 그런지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다만 후반부로 가면서 가독성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손턴 와일더의 이름은 사실 처음 들어 봤다. 이번에 모던 라이브러리 소설 100선을 접하면서 내가 참 모르는 작가 이름이 많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손턴 와일더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영어 원서로 읽는 것이 아니라 번역서로 걸작 소설을 읽는 것이라 그런지 영어의 글맛은 잘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손턴 와일더가 쓰고 있듯이, 문학이란 마음의 기록이라고 하는데 내가 접한 그의 마음의 기록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 숱하게 책을 읽어대면서도 내가 정의하는 문학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만들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소설의 주 공간적 배경이 되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쿠스코로 가는 길에 있는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라고 손턴 와일더는 쓰고 있다. 1714년 7월 20일, 그 다리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다리를 건너던 다섯 명의 사람들이 추락사했다. 어떻게 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은 사건에 주목한 사람은 프란체스코 회 소속으로 남아메리카 인디언 개종에 여념이 없던 바로 현장을 십여분 전에 건넌 주니퍼 수사였다. 그는 이 사건이야말로 신의 인간에 대한 계시라고 생각하고, 6년여 동안 공들여 죽은 다섯 명의 사람들에 대한 방대한 조사를 진행시켜 마침내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냈지만, 종교 재판 결과 자신이 저술한 책과 함께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살라졌다. 문득 손턴 와일더는 왜 소설의 배경을 다른 곳도 아닌 페루라는 공간으로 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세기 근대의 여명기에 구대륙 유럽보다, 근대사상의 세례가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하고 주술과 부적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던 신대륙이야말로 베일에 쌓인 인간들의 욕망을 저술해 내기에 적합한 공간이라고 저자가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소설 속의 ‘가짜책’에 첫머리에 등장하는 주자는 바로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마리아 부인이다. 리마의 부유한 포목상집의 딸로 태어나 후작 부인이 된 마리아 부인은 결혼해서 자신이 낳은 아름다운 딸 클라라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바친다. 어머니의 맹목적 사랑을 이기지 못한 딸은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백작 부인이 되어, 어머니가 제공하는 신대륙의 부와 재화를 마음껏 탕진한다. 통신과 교통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 어머니가 딸과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였다. 마리아 부인은 딸에게 보낸 숱한 서간문을 통해 남은 기록은 현재 당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을 정도였다고 저자는 증언한다. 돌아오지 메아리처럼 리마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모성의 발현이었지만, 백작 부인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딸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답을 얻지 못하자, 마리아 부인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마저 부인하고, 치차 술에 점점 의존하게 된다. 마침내 딸이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딸의 순산을 바라는 미신적 주술을 행하고 리마로 돌아가던 길에 우리가 아는 예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마드레 마리아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후계자로 점찍은 마리아 부인의 하녀이자 비서로 활동하던 페피타 역시 그녀와 같은 운명이었다.

 

두 번째 주인공은 고아로 버려진 쌍둥이 형제 마누엘과 에스테반이다. 역시 마드레 마리아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보살핌으로 자란 그들은 총명함으로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또 태생적 일체감 때문에 한편으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자신들을 대하는 세상은 낯설고, 이상하며 적대적이어서 그들만의 비밀언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평생을 함께 할 것 같았던 이 둘의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은 바로 전 마리아 부인의 에피소드에도 등장하는 리마를 주름잡던 명배우 카밀라 페리콜에 대한 사랑이었다. 문맹이었던 페리콜은 마누엘을 자신의 필경사로 삼아, 편지심부름을 맡기기에 이른다. 자신의 반쪽이 사모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스테반의 핵심적인 욕망은 그야말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차라리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에스테반의 고민과 갈등은 진폭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누엘이 쇠붙이 무릎을 다치고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에스테반에게 삶은 무상하고 더 이상 가치 없는 그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던 에스테반은 델 필라르 수녀원장과 그들이 잘 따르던 알바라도 선장의 곡진한 설득으로 여행길에 나서게 되지만, 에스테반 역시 산 루이스 레이 다리 사건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카밀라 페리콜이 연극배우로 대성하게 할 수 있게 온갖 사랑과 노력을 다한 피오 아저씨다. 18세기 문제적 인간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피오 아저씨는 스페인 카스티야 출신으로 산전수전 그리고 요즘으로 치면 공중전까지 모두 체험해서 사업이면 사업, 모험이면 모험 그리고 종교 재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다양한 재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어린 소녀 페리콜은 요즘 말로 하면, 연예기획사 사장에 눈에 띈 빼어난 재능 넘치는 아이돌 후보생이었다. 그녀의 재능과 장래성을 알아본 피오 아저씨는 냉혹한 조련과 교육을 통해, 카밀라 페리콜이 리마에서 아니 스페인 문화권에서 최고 배우로 성장하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 둘의 기묘한 사랑은 훗날 배우로 성공한 페리콜이 연극판을 떠나 페루 총독 돈 안드레스의 애인이 되어 상류 계급으로 도약한 뒤에도 끈질기게 이어진다. 페리콜의 아들인 돈 하이메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주겠다는 제안과 협박전략을 구사해 마침내 허락을 받고 그 역시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던 중에 비극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이 모든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낸 주니퍼 수사의 운명 또한 산 루이스 레이 다리의 비극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이단으로 몰렸던 것일까? 종교 재판관의 주문에 따라, 주니퍼 수사와 그가 저술한 책은 불길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 개입한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사랑론으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끝을 맺는다.

 

걸작으로 지칭되는 소설의 무게는 역시 남다르게 다가왔다. 산 루이스 레이 다리에서 추락한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보편적 숙명을 맞이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에 충실하다. 딸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삶에 매진하는 마리아 부인, 일체감으로 하나가 되었던 혈육의 죽음으로 삶의 목적을 잃었지만 새출발에 나서려는 에스테반, 그리고 대배우를 키워 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피오 아저씨의 욕망이 차례로 주니퍼 수사의 기록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에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사건의 알고리듬의 상층부에 자리 잡은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존재는 상징적이다. 그리고 사건을 기록한 주니퍼 수사는 처음부터 비극에 신의 섭리가 개입했다는 가정을 가지고 과학적 접근을 시도해 보지만, 사실 무의미한 시도였다는 것으로 판명이 된다. 그런데 왜 페루 당국은 주니퍼 수사의 기록을 이단으로 판단하고 말살하려고 했던 걸까? 일반에게 공개되지 말아야 할 그런 비밀이라도 있었던 걸까? 독자가 읽은 이야기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주니퍼 수사가 도전한 미스터리는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는 모양이다.

 

소설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떠올랐다. <침묵>처럼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은 아니지만, 신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델 필라르 수녀원장을 통해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공통의 무언가가 느껴진 탓일까. 일독으로는 도저히 손턴 와일더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고전답게 재독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낀 그런 독서였다.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다시 읽으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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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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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날이 차가워지면서, 어느 순간에 여름날의 무더위가 훌쩍 날아가 버렸다. 선선한 날씨가 독서하는데 있어서 집중력을 높여 주는 효과를 준 모양이다. 여름날 제자리걸음하던 독서에 비해, 책을 술술 넘어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때마침 만난 나카마치 신의 <모방살의>는 이 계절에 딱 맞는 그런 책이었다.

 

일본에서는 장르문학,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기 없는 추리소설이 꾸준히 소비되는 것 같다. 우리가 순문학에 치중하면서, 태생적으로 상업적일 수밖에 없는 추리소설이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아서일까. 다양한 형태의 토종 추리소설을 기대하기란 역시 난망하다는 느낌이다. 제법 많은 일본 추리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새로운 작가 이름을 듣고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비채 블랙 앤드 화이트 시리즈로 처음 소개된 나카마치 신의 <모방살의>서술트릭으로 독자를 매혹시킨다.

 

77일 오후 7, 사카이 마사오란 이름의 젊은 추리소설가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사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역시 고전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타살의 흔적이 없고 죽은 장소는 밀실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작가는 마사오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가정 아래, 소설을 진행시킨다. 볼 것도 없이 표면상에 보이는 것처럼 자살이라면, 이야기 구성이 되겠는가. 자 그럼, 누가 그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힌 것인가? 교차해서 등장하는 두 명의 화자를 나카마치 신은 절묘하게 배치한다. 그리고 사카이 마사오가 죽은 이후의 날짜들을 며칠 단위로 배열한다. 서술이라는 기본구조로 독자를 속이는 트릭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두 명의 화자는 각각 다음과 같다. 한 명은 나카다 아키코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쓰쿠미 신스케 군이다. 전자는 저명한 소설가이자 소설의 신으로 불리는 세가와 고타로의 딸로, 현재 의학전문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겠지만, 죽은 사카이 마사오와는 사랑하는 사이로 결혼을 약속하기도 했다. 자신의 피앙세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죽었으니 남은 사람이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또 다른 편에서 마사오의 죽음을 추적하는 사람은 한 때, 고인과 문학 동인이기도 했던 역시 추리소설가로 지금은 주간지에 살인 리포트 따위의 글을 연재하는 쓰쿠미 신스케다. 원작이 사십년도 전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쿄와 도야마 간(사실 거리가 얼마인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의 대중교통 수단이나 거리감 등은 현재와 매우 다를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정보들도 주인공들이 하나 같이 직접 방문해서 탐문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추리소설가로 등단은 했지만, 발표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해 고민하던 작가가 신병을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카이 마사오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가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리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 가운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카이 마사오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한 꺼풀씩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우선 도쿄에서 온 여탐정으로 알려진 나카다는 마사오가 죽기 전에 도가노 리쓰코라는 묘령의 여성으로부터 거액의 수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나카마치 신이 신인 시절에 발표한 글이어서 그런진 몰라도, 나카다의 추리에는 빈틈이 많고 논리적 비약이 상당히 눈에 띈다. 리쓰코가 마사오를 죽였을 거라고 단정한 나카다는 그녀가 제시한 사진 알리바이를 깨는 데 전력을 다한다. 한편, 쓰쿠미는 마사오의 작품 발표에 걸림돌이었던 <추리세계>의 편집차장 야나기사와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의 알리바이에 도전한다. 야나기사와의 여동생이 사카이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은 쓰쿠미의 추측을 확신으로 만든다.

 

추리소설 속에 죽은 추리소설가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소설은 더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그의 죽음을 추적하는 나카다와 쓰쿠미가 탐정 뺨치는 실력을 발휘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직업이 추리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 쓰쿠미야 그렇다 치고, 일개 편집자인 나카다 쪽은 거장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요즘 같은 디지털 카메라 시대라면 불가능할 필름 카메라 사진을 이용한 카메라 트릭이라던가, 일본 특유의 한자 이름 읽기(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트릭 등은 정말 클래식 그 자체였다. 하지만, 무명작가의 미발표 원고를 거장이 표절했다는 설정과 독자가 예상하고 있던 반전을 한 번 더 비트는 나카마치 신의 기교는 작가의 한판승으로 봐도 좋을 듯 싶다. 작가는 누가 범인이냐고 추궁하는 줄거리의 전개에 독자가 집중하도록 하는 함정을 파놓고 허를 찌르는 결말의 반전을 준비한다. 도대체 누가 범인인가,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또 추리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사건발생, 추궁, 전개 그리고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착착 붙은 구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야기를 실제적으로 이끌어 가는 나카다와 쓰쿠미에게 사건에 관련된 캐릭터들이 차례로 등장해서 정보를 공유해 주는 장면이 다소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소설의 진행상 불가피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없었더라면 화자들이 어떻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결말의 쎈 한 방을 기대하는 독자에게 <모방살의>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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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코너스톤 세계문학 컬렉션 2
조지 오웰 지음, 박유진 옮김, 박경서 / 코너스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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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카카오 감청과 국정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때마침 읽고 있던 조지 오웰의 마지막 소설 <1984>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반세기도 전인 1949년에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써낸 작가의 천재성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빅 브라더와 당이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 감시하고, 이중사고(doublethink)로 무장된 사람들의 천국인 오세아니아는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디스토피아다. 근대 이래 계속된 기술문명의 진보가 미래에 인민에게 낙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을 <1984>에서 조지 오웰은 통렬하게 박살내 버린다. 오히려 순수 권력을 추구하는 권력집단에게 사생활을 통제당하고, 모든 사람들이 무지가 힘이고 전쟁이 평화라는 반복되는 프로파간다에 세뇌된, 그야말로 살아 있는 좀비 같은 존재로 개조되는 미래사회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39세의 남자로 진리부 기록국에서 역사왜곡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소설은 사유하고 회의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윈스턴이 일기를 쓰면서부터 시작된다. 어쩌면 7년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부당원 오브라이언에게 들은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사는 오세아니아는 항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중에 그가 입수한 반혁명당의 영수 골드스타인이 저술한 반정부 성향의 금서는 전쟁이야말로 권력의 영속화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다. 자본주의는 타파되고, 영사(영국 사회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과잉생산을 항상적인 전쟁으로 소비하고 맹목적 애국심으로 무장한 인민이야말로 오세아니아 지배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골드스타인은 선언한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계속되는 전쟁은 가상의 적에 대한 항시적인 불안을 조성하면서, 순수권력의 영구적인 지배를 위한 정치적 기반을 제공한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현실을 빼닮았는지 모르겠다. 세계를 휘두르는 경찰국가 미국에게 전쟁이야말로 군산복합체를 위한 꼭 필요가 아닌가. 2차 세계대전으로 대공황을 극복했고, 이어지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 없는 미국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모든 것을 감시하는 사상경찰과 움직임, 목소리 어쩌면 감정까지 잡아내는 텔레스크린의 존재는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비비(빅 브라더)의 강력한 무기다. 오세아니아에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101호실의 가혹한 폭력에 굴복한 정범들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주저 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도 결국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교육을 통한 주민의 통제라는 전통적 시스템을 내부당 인사들이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빅 브라더와 당이 사람의 머릿속까지 지배할 수 있을 것인가? 윈스턴 스미스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항변하지만, 적인지 동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다가 결국 체제의 수호자로 변신한 오브라이언은 그를 비웃으며 변형된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빅 브라더를 증오하는 감정을 지우고, 오히려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자신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이십대 검은 머리 여자로 불리던 줄리아와 은밀한 로맨스를 즐기면서, 윈스턴은 위험한 일탈을 시도한다. 사상은 물론이고, 섹스마저도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에서 십오개월의 실패한 짧은 결혼생활을 경험한 주인공에게 비로소 스릴 넘치는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비밀리에 오브라이언과 접촉하게 된 윈스턴은 형제단의 일원이라는 오브라이언의 술수에 넘어가 당과 빅 브라더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선서까지 하기에 이른다. 겉으로 당에 충성하는 사회구성원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제로 구질서를 타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줄리아와 달리, 오세아니아 지배계급의 실체를 알게 된 윈스턴은 골드스타인의 저서를 읽으면서 한층 각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오브라이언이 실제로는 내부당의 핵심인사로 훗날 101호실에서 자신에게 온갖 폭력을 행사할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윈스턴은 해보지 않았던 걸까. 이 문제적 인간에게 봄날의 행복과 즐거움의 순간은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찾아올 고통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죽음이라는 숙명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직면할 때까지 미루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윈스턴은 자신과의 치열한 기억투쟁에서 실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증발되고,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사실에 대한 트라우마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면서도 현재를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모습은 기록국에서 과거를 지우고 왜곡하는 일을 하는 자신의 노동과 교묘하게 중첩된다.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윈스턴 역시 오세아니아의 과거를 지우고 왜곡하는 일에 동원된 부역자가 아닌가. 조작과 왜곡을 통해, 현재는 물론이고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까지도 철저하게 지우고 새롭게 창조해내는 일을 해온 그가 어느 순간, 당과 빅 브라더를 타도하겠다고 나서게 된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철저한 자기 부정과 반성이 따르지 않은 회개자가 과연 프롤(레타리아)이야말로 희망이라고 떠들어 대는 모습이 자못 우습기까지 하다.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 조지 오웰이 지적한 또 다른 면은 바로 미래의 자원과 노동력 확보 경쟁이다. 1940년대와는 달리,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는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한 자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른바 희토류라는 자원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원이 아니기 때문에 확보가 지극히 어렵다. 소설에서는 전쟁이라는 폭력적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중동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판에 몸소 뛰어든 국가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또 다른 희극으로는 자원외교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국부를 유출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도 있다. 한편 컴퓨터화된 기계문명의 눈부신 발전으로 기존 인간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대중의 점진적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소설에서는 언급되는 순수권력의 궁극적 지향점이 아닐까. 철저하게 통제되고 세뇌된 대중을 교육’(끊임없이 대중을 무지하게 만들기 위해 신어를 생산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을 통해 재생산해내는 영사 시스템의 설계자들은 혈연에 의한 권력 세습의 지속가능성보다 임명식 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 특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비밀도 알고 있다. 어쩌면 두 번째 장에 소개된 형제단의 두목 이매뉴얼 골드스타인의 책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야말로 20세기 사회주의 실험과 공산주의 혁명을 모두 목격한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권력의 속성에 대한 해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 오웰의 마지막 소설 <1984>에는 너무나 많은 담론들이 들어 있어,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고전이라면 다시 읽는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된 모양이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참 많았지만, 다 증발해 버리고 지극히 일부분만 쓴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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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초상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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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오사 게렌발의 <7층>과 <가족의 초상>을 연달아 읽었다. 사실 그렇데 많은 분량이 아니라(<에식스 카운티>와 비교해 보라), 금세 다 읽을 수가 있었다. <7층>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족의 초상> 역시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빨리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듯 그렇게 휘리릭 읽고 나서도 여전히 머릿속에 잔영이 남아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족의 초상>은 마리 요한슨 가족 구성원 4명과 외부인, 이른바 ‘가족의 친구’ 라그나르 아저씨가 말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의 이야기로 세상을 살아 나간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사건을 경험했지만 해석하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라는 점은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 주자로 등장하는 라그나르 아저씨는 요한슨 가족의 친구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 그 집 큰 딸인 18살난 마리를 좋아한다. 반했다, 홀렸다라는 말을 두서없이 반복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대책 없는 돼지라고 마리는 거침없이 폭언을 일삼는다. 그리고 마리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벌어진 틈을 파고 들어, 마리의 엄마와 재혼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전히 마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 중이라나. 스웨덴판 막장 드라마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은 마리 엄마의 변론이다. 마리 엄마는 자신의 재혼에 가장 결사적으로 반대한 마리와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마리의 결사적인 반대와 노골적인 거부로 대화가 단절된 채 10년을 지내왔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 결혼한 라그나르 씨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장 위로가 필요했을 때,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접근한 사람과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독자는 알지만 그녀 자신은 모르고 있다. 엄마로서의 삶보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한 마리의 엄마.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거시적인 점에서 본다면 그녀야말로 가장 힘든 결정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주인공 마리가 등장할 차례다. 어려서부터 독립적인 성향으로 무엇이든 혼자 해온 그녀 역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사회적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건 인류 역사가 증명해 오지 않았던가. 오, 물론 로빈슨 크루소 아저씨처럼 고립된 무인도에서 맨 정신으로 잘 살아왔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화의 맨 끝에 등장하는 여동생 스티나와는 달리 모든 면네서 비관적인 마리는 라그나르 씨와의 사건 후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엄마의 재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라그나르냐 아니면 자신이냐고 엄마에게 선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불평불만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비뇨기 감염으로 신체적 고통까지 감당해내야 하는 그녀의 정신발작은 시시때때로 도진다.

 

산부인과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큰딸 마리를 픽업하러 간 아빠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그저 평화주의자인 아빠는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하는 대신 회피하는 전략으로 가정의 붕괴에 일조한다. 마리는 새로 가족을 꾸린 아빠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이 나이에 무슨 사랑이냐며 능구렁이처럼 또 문제를 회피하려는 아빠 앞에서 다시 발작증세를 보인다. 답이 없구나 도대체 이 요한슨 가족. 어쩌면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진 선진국병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의 생존이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요한슨 가족이 겪는 고통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지 않을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문구가 연상된다. 화장실로 도망간 마리를 7분 정도 기다리다 떠나 버리는 아빠의 문제피하기 전법은 정말 답이 없어 보였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언니 마리에 비해, 어려서부터 작은 천사였다는 스티나의 현재는 마리의 그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일체유심론을 설파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현실세계에 개입하게 되는 게 아닐까. 누구나 다 스티나 같은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응 개인적 성향 때문에 마리 같은 경우에 처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제 막 결혼을 앞두고, 막장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법한 자신의 가족을 되돌아보며 한숨짓는 스티나의 모습에서 문득 나의 행복지수를 점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는 ‘행복하자’는 즐거워 보이는 구호로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긴 행복을 거부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냐만서도.

 

말미에 오사 게렌발은 <가족의 초상>이 자신의 최악의 작품이라며 이 책을 읽지 말란다. 십년 전에 자신이 쓰고 그린 그림에 대한 부정인가. 만화에서 마리가 당한 부당함에 대해서도 다른 작품을 통해 그녀에게 보상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예전 행동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 땐 그랬지 하고, 미소 짓게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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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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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 논객의 데이트 폭력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의 목소리에 대해 자세히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춰 내는 것이 반가울 리가 없어서가 아닐까. 스웨덴 출신의 오사 게렌발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7층>에서 데이트 폭력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이야기는 주인공 ‘블랙’ 오사가 아트 스쿨에 진학해서, 운명의 남자(과연?) 닐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약간 맛이 간듯 하지만 좋은 친구들과 자신을 타인화시키지 않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무섭게 흑기사처럼 등장한 닐의 존재는 오사에게 큰 힘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닐은 사사건건 오사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 거듭나라는 강요를 일삼는다. 그리고 주변과 남성과 잦은 데이트를 하는 여성을 창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사의 삶에서 흑기사처럼 등장했던 닐은 흑마술로 그녀의 과거를 지우기 시작한다.

 

건전한 남녀관계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오사와 닐의 관계에서, 닐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 대신 일방적으로 자신을 따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부장적 모습으로 오사를 대한다. 그녀의 화장, 옷가지, 예전에 받은 엽서들, 포스터, 음악CD와 그녀가 어울리는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닐의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정도까지 문제가 진전되었다면, 해결책은 딱 하나인데 오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것은 닐이 언제나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데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닐에게 길들여져 버린 것일까. 어린왕자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길들여진 그녀의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만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닐의 오사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어서기 일쑤다. 그녀가 말하기 전에, 아니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정신병원에 가서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국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닐과 오사의 위험한 관계는 폭력을 동반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오사의 과거를 의심한 닐은 오사에게 극도의 순결을 요구하고, 오사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다 밤을 하얗게 세울 지경이다. 게다가 다리미를 내던지지 않나, 오사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도중에 그녀의 손을 물어뜯은 닐의 행동은 정말 도를 넘어섰다. 결국 오사는 닐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이른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데이트 폭력의 일반적인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사는 자신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한 전 남자친구인 닐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법정에서 전 남자친구를 만나는 장면은 정말 낯설었다. 하지만, 이별 즈음에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가 결정적으로 닐의 데이트 폭력을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되면서 닐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사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무너지고 다시 세우기의 반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난 닐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대신해서 새로운 희생양이 된 그녀의 모습에서 오사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에 갈등과 반목 그리고 해소가 빈번하다고 하지만, 해결방법으로 폭력이 동원되는 건 절대 반대한다. 말미에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배우자의 의한 살인사건이 사흘에 한 번 꼴로 발생한다고 하는데, 애증이 개입된 관계의 치명적 결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었는데, 이 만화가 사회과학 분야로 분류된 것도 주목할 점이다. 데이트 폭력이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일까. 자신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생생한 리포트를 전해준, 오사 게렌발의 용기에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녀의 만화는 유럽 스타일답게, 정교하기보다 투박한 그림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리딩데이트] 2015년 10월 8일 오후 12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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