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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으면서 한 가지 독서의 목표가 생겼다.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영미문학 100선의 책들을 한 번 섭렵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시작부터 과연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일단 지난주에 <1984>도 성공적으로 읽었고, 내친 김에 1928년 퓰리처상에 빛나는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도 구해서 읽었다. 사실 20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이라 그런지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다만 후반부로 가면서 가독성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손턴 와일더의 이름은 사실 처음 들어 봤다. 이번에 모던 라이브러리 소설 100선을 접하면서 내가 참 모르는 작가 이름이 많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손턴 와일더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영어 원서로 읽는 것이 아니라 번역서로 걸작 소설을 읽는 것이라 그런지 영어의 글맛은 잘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손턴 와일더가 쓰고 있듯이, 문학이란 마음의 기록이라고 하는데 내가 접한 그의 마음의 기록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 숱하게 책을 읽어대면서도 내가 정의하는 문학에 대한 고유한 생각을 만들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소설의 주 공간적 배경이 되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쿠스코로 가는 길에 있는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라고 손턴 와일더는 쓰고 있다. 1714년 7월 20일, 그 다리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다리를 건너던 다섯 명의 사람들이 추락사했다. 어떻게 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은 사건에 주목한 사람은 프란체스코 회 소속으로 남아메리카 인디언 개종에 여념이 없던 바로 현장을 십여분 전에 건넌 주니퍼 수사였다. 그는 이 사건이야말로 신의 인간에 대한 계시라고 생각하고, 6년여 동안 공들여 죽은 다섯 명의 사람들에 대한 방대한 조사를 진행시켜 마침내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냈지만, 종교 재판 결과 자신이 저술한 책과 함께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살라졌다. 문득 손턴 와일더는 왜 소설의 배경을 다른 곳도 아닌 페루라는 공간으로 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8세기 근대의 여명기에 구대륙 유럽보다, 근대사상의 세례가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하고 주술과 부적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던 신대륙이야말로 베일에 쌓인 인간들의 욕망을 저술해 내기에 적합한 공간이라고 저자가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소설 속의 ‘가짜책’에 첫머리에 등장하는 주자는 바로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마리아 부인이다. 리마의 부유한 포목상집의 딸로 태어나 후작 부인이 된 마리아 부인은 결혼해서 자신이 낳은 아름다운 딸 클라라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바친다. 어머니의 맹목적 사랑을 이기지 못한 딸은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백작 부인이 되어, 어머니가 제공하는 신대륙의 부와 재화를 마음껏 탕진한다. 통신과 교통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 어머니가 딸과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였다. 마리아 부인은 딸에게 보낸 숱한 서간문을 통해 남은 기록은 현재 당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을 정도였다고 저자는 증언한다. 돌아오지 메아리처럼 리마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모성의 발현이었지만, 백작 부인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딸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답을 얻지 못하자, 마리아 부인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마저 부인하고, 치차 술에 점점 의존하게 된다. 마침내 딸이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딸의 순산을 바라는 미신적 주술을 행하고 리마로 돌아가던 길에 우리가 아는 예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마드레 마리아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후계자로 점찍은 마리아 부인의 하녀이자 비서로 활동하던 페피타 역시 그녀와 같은 운명이었다.
두 번째 주인공은 고아로 버려진 쌍둥이 형제 마누엘과 에스테반이다. 역시 마드레 마리아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보살핌으로 자란 그들은 총명함으로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또 태생적 일체감 때문에 한편으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자신들을 대하는 세상은 낯설고, 이상하며 적대적이어서 그들만의 비밀언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평생을 함께 할 것 같았던 이 둘의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은 바로 전 마리아 부인의 에피소드에도 등장하는 리마를 주름잡던 명배우 카밀라 페리콜에 대한 사랑이었다. 문맹이었던 페리콜은 마누엘을 자신의 필경사로 삼아, 편지심부름을 맡기기에 이른다. 자신의 반쪽이 사모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스테반의 핵심적인 욕망은 그야말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차라리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에스테반의 고민과 갈등은 진폭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누엘이 쇠붙이 무릎을 다치고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에스테반에게 삶은 무상하고 더 이상 가치 없는 그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던 에스테반은 델 필라르 수녀원장과 그들이 잘 따르던 알바라도 선장의 곡진한 설득으로 여행길에 나서게 되지만, 에스테반 역시 산 루이스 레이 다리 사건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카밀라 페리콜이 연극배우로 대성하게 할 수 있게 온갖 사랑과 노력을 다한 피오 아저씨다. 18세기 문제적 인간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피오 아저씨는 스페인 카스티야 출신으로 산전수전 그리고 요즘으로 치면 공중전까지 모두 체험해서 사업이면 사업, 모험이면 모험 그리고 종교 재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다양한 재능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어린 소녀 페리콜은 요즘 말로 하면, 연예기획사 사장에 눈에 띈 빼어난 재능 넘치는 아이돌 후보생이었다. 그녀의 재능과 장래성을 알아본 피오 아저씨는 냉혹한 조련과 교육을 통해, 카밀라 페리콜이 리마에서 아니 스페인 문화권에서 최고 배우로 성장하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 둘의 기묘한 사랑은 훗날 배우로 성공한 페리콜이 연극판을 떠나 페루 총독 돈 안드레스의 애인이 되어 상류 계급으로 도약한 뒤에도 끈질기게 이어진다. 페리콜의 아들인 돈 하이메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주겠다는 제안과 협박전략을 구사해 마침내 허락을 받고 그 역시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던 중에 비극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이 모든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낸 주니퍼 수사의 운명 또한 산 루이스 레이 다리의 비극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이단으로 몰렸던 것일까? 종교 재판관의 주문에 따라, 주니퍼 수사와 그가 저술한 책은 불길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 개입한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사랑론으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끝을 맺는다.
걸작으로 지칭되는 소설의 무게는 역시 남다르게 다가왔다. 산 루이스 레이 다리에서 추락한 다섯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보편적 숙명을 맞이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에 충실하다. 딸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삶에 매진하는 마리아 부인, 일체감으로 하나가 되었던 혈육의 죽음으로 삶의 목적을 잃었지만 새출발에 나서려는 에스테반, 그리고 대배우를 키워 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피오 아저씨의 욕망이 차례로 주니퍼 수사의 기록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에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사건의 알고리듬의 상층부에 자리 잡은 델 필라르 수녀원장의 존재는 상징적이다. 그리고 사건을 기록한 주니퍼 수사는 처음부터 비극에 신의 섭리가 개입했다는 가정을 가지고 과학적 접근을 시도해 보지만, 사실 무의미한 시도였다는 것으로 판명이 된다. 그런데 왜 페루 당국은 주니퍼 수사의 기록을 이단으로 판단하고 말살하려고 했던 걸까? 일반에게 공개되지 말아야 할 그런 비밀이라도 있었던 걸까? 독자가 읽은 이야기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주니퍼 수사가 도전한 미스터리는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는 모양이다.
소설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떠올랐다. <침묵>처럼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은 아니지만, 신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델 필라르 수녀원장을 통해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공통의 무언가가 느껴진 탓일까. 일독으로는 도저히 손턴 와일더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고전답게 재독의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낀 그런 독서였다.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다시 읽으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