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4 ㅣ 코너스톤 세계문학 컬렉션 2
조지 오웰 지음, 박유진 옮김, 박경서 / 코너스톤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최근 카카오 감청과 국정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때마침 읽고 있던 조지 오웰의 마지막 소설 <1984>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반세기도 전인 1949년에 이렇게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써낸 작가의 천재성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빅 브라더와 당이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 감시하고, 이중사고(doublethink)로 무장된 사람들의 천국인 오세아니아는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디스토피아다. 근대 이래 계속된 기술문명의 진보가 미래에 인민에게 낙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을 <1984>에서 조지 오웰은 통렬하게 박살내 버린다. 오히려 순수 권력을 추구하는 권력집단에게 사생활을 통제당하고, 모든 사람들이 무지가 힘이고 전쟁이 평화라는 반복되는 프로파간다에 세뇌된, 그야말로 살아 있는 좀비 같은 존재로 개조되는 미래사회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39세의 남자로 진리부 기록국에서 역사왜곡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소설은 사유하고 회의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윈스턴이 일기를 쓰면서부터 시작된다. 어쩌면 7년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부당원 오브라이언에게 들은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사는 오세아니아는 항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중에 그가 입수한 반혁명당의 영수 골드스타인이 저술한 반정부 성향의 금서는 전쟁이야말로 권력의 영속화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다. 자본주의는 타파되고, 영사(영국 사회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과잉생산을 항상적인 전쟁으로 소비하고 맹목적 애국심으로 무장한 인민이야말로 오세아니아 지배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골드스타인은 선언한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계속되는 전쟁은 가상의 적에 대한 항시적인 불안을 조성하면서, 순수권력의 영구적인 지배를 위한 정치적 기반을 제공한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현실을 빼닮았는지 모르겠다. 세계를 휘두르는 경찰국가 미국에게 전쟁이야말로 군산복합체를 위한 꼭 필요가 아닌가. 2차 세계대전으로 대공황을 극복했고, 이어지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 없는 미국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모든 것을 감시하는 사상경찰과 움직임, 목소리 어쩌면 감정까지 잡아내는 텔레스크린의 존재는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비비(빅 브라더)의 강력한 무기다. 오세아니아에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101호실의 가혹한 폭력에 굴복한 정범들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주저 없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도 결국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교육을 통한 주민의 통제라는 전통적 시스템을 내부당 인사들이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빅 브라더와 당이 사람의 머릿속까지 지배할 수 있을 것인가? 윈스턴 스미스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항변하지만, 적인지 동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다가 결국 체제의 수호자로 변신한 오브라이언은 그를 비웃으며 변형된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빅 브라더를 증오하는 감정을 지우고, 오히려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자신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이십대 검은 머리 여자로 불리던 줄리아와 은밀한 로맨스를 즐기면서, 윈스턴은 위험한 일탈을 시도한다. 사상은 물론이고, 섹스마저도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에서 십오개월의 실패한 짧은 결혼생활을 경험한 주인공에게 비로소 스릴 넘치는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비밀리에 오브라이언과 접촉하게 된 윈스턴은 형제단의 일원이라는 오브라이언의 술수에 넘어가 당과 빅 브라더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선서까지 하기에 이른다. 겉으로 당에 충성하는 사회구성원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제로 구질서를 타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줄리아와 달리, 오세아니아 지배계급의 실체를 알게 된 윈스턴은 골드스타인의 저서를 읽으면서 한층 각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오브라이언이 실제로는 내부당의 핵심인사로 훗날 101호실에서 자신에게 온갖 폭력을 행사할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윈스턴은 해보지 않았던 걸까. 이 문제적 인간에게 봄날의 행복과 즐거움의 순간은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찾아올 고통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죽음이라는 숙명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직면할 때까지 미루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윈스턴은 자신과의 치열한 기억투쟁에서 실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증발되고,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사실에 대한 트라우마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면서도 현재를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모습은 기록국에서 과거를 지우고 왜곡하는 일을 하는 자신의 노동과 교묘하게 중첩된다.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윈스턴 역시 오세아니아의 과거를 지우고 왜곡하는 일에 동원된 부역자가 아닌가. 조작과 왜곡을 통해, 현재는 물론이고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까지도 철저하게 지우고 새롭게 창조해내는 일을 해온 그가 어느 순간, 당과 빅 브라더를 타도하겠다고 나서게 된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철저한 자기 부정과 반성이 따르지 않은 회개자가 과연 프롤(레타리아)이야말로 희망이라고 떠들어 대는 모습이 자못 우습기까지 하다.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 조지 오웰이 지적한 또 다른 면은 바로 미래의 자원과 노동력 확보 경쟁이다. 1940년대와는 달리,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는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한 자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른바 희토류라는 자원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원이 아니기 때문에 확보가 지극히 어렵다. 소설에서는 전쟁이라는 폭력적 방법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중동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판에 몸소 뛰어든 국가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또 다른 희극으로는 자원외교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국부를 유출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도 있다. 한편 컴퓨터화된 기계문명의 눈부신 발전으로 기존 인간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대중의 점진적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소설에서는 언급되는 순수권력의 궁극적 지향점이 아닐까. 철저하게 통제되고 세뇌된 대중을 ‘교육’(끊임없이 대중을 무지하게 만들기 위해 신어를 생산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을 통해 재생산해내는 영사 시스템의 설계자들은 혈연에 의한 권력 세습의 지속가능성보다 임명식 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 특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비밀도 알고 있다. 어쩌면 두 번째 장에 소개된 형제단의 두목 이매뉴얼 골드스타인의 책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야말로 20세기 사회주의 실험과 공산주의 혁명을 모두 목격한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권력의 속성에 대한 해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 오웰의 마지막 소설 <1984>에는 너무나 많은 담론들이 들어 있어,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고전이라면 다시 읽는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를 이제야 깨닫게 된 모양이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참 많았지만, 다 증발해 버리고 지극히 일부분만 쓴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