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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4년 11월
평점 :
얼마 전, 인터넷 논객의 데이트 폭력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의 목소리에 대해 자세히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춰 내는 것이 반가울 리가 없어서가 아닐까. 스웨덴 출신의 오사 게렌발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7층>에서 데이트 폭력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이야기는 주인공 ‘블랙’ 오사가 아트 스쿨에 진학해서, 운명의 남자(과연?) 닐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약간 맛이 간듯 하지만 좋은 친구들과 자신을 타인화시키지 않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무섭게 흑기사처럼 등장한 닐의 존재는 오사에게 큰 힘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닐은 사사건건 오사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 거듭나라는 강요를 일삼는다. 그리고 주변과 남성과 잦은 데이트를 하는 여성을 창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사의 삶에서 흑기사처럼 등장했던 닐은 흑마술로 그녀의 과거를 지우기 시작한다.
건전한 남녀관계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오사와 닐의 관계에서, 닐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 대신 일방적으로 자신을 따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부장적 모습으로 오사를 대한다. 그녀의 화장, 옷가지, 예전에 받은 엽서들, 포스터, 음악CD와 그녀가 어울리는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닐의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정도까지 문제가 진전되었다면, 해결책은 딱 하나인데 오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것은 닐이 언제나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데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닐에게 길들여져 버린 것일까. 어린왕자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길들여진 그녀의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만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닐의 오사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어서기 일쑤다. 그녀가 말하기 전에, 아니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정신병원에 가서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국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닐과 오사의 위험한 관계는 폭력을 동반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오사의 과거를 의심한 닐은 오사에게 극도의 순결을 요구하고, 오사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다 밤을 하얗게 세울 지경이다. 게다가 다리미를 내던지지 않나, 오사가 자동차를 운전하는 도중에 그녀의 손을 물어뜯은 닐의 행동은 정말 도를 넘어섰다. 결국 오사는 닐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이른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데이트 폭력의 일반적인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사는 자신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한 전 남자친구인 닐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법정에서 전 남자친구를 만나는 장면은 정말 낯설었다. 하지만, 이별 즈음에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가 결정적으로 닐의 데이트 폭력을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되면서 닐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사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무너지고 다시 세우기의 반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난 닐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대신해서 새로운 희생양이 된 그녀의 모습에서 오사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에 갈등과 반목 그리고 해소가 빈번하다고 하지만, 해결방법으로 폭력이 동원되는 건 절대 반대한다. 말미에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배우자의 의한 살인사건이 사흘에 한 번 꼴로 발생한다고 하는데, 애증이 개입된 관계의 치명적 결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었는데, 이 만화가 사회과학 분야로 분류된 것도 주목할 점이다. 데이트 폭력이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일까. 자신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생생한 리포트를 전해준, 오사 게렌발의 용기에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녀의 만화는 유럽 스타일답게, 정교하기보다 투박한 그림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리딩데이트] 2015년 10월 8일 오후 12시 3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