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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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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러 해설이나 리뷰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굳이 애를 써서 보려고 하지 않아도, 약간의 종교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즉 자발라위, 아드함과 이드리스, 까드리와 후맘, 자발, 리파아, 까심 등이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자발라위는 하느님을, 아드함과 이드리스는 아담과 사탄을, 까드리와 후맘은 카인과 아벨을, 자발은 모세를, 리파아는 예수를, 까심은 무함마드를 의미하며, 이 소설은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행적을 묘사함으로써,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각 기본바탕에 내재해 있는 것들을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각각의 이야기로서 들려준다. 그러므로 사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각 종교에 내재해 있는 어떤 물음들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우리 동네 이야기> 속 이야기대로라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다. 자발라위는 왜 얼자 아드함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장자 이드리스를 내쳤는가(하느님은 왜 악을 탄생시켰는가). 자발라위는 왜 형 까드리가 아니라 동생 후맘에게 나타났고, 후맘이 까드리에게 죽도록 내버려두었는가(우리는 왜 살인자 카인의 후예가 되었는가). 자발라위는 왜 리파아를 구원해주지 않았는가(왜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도록 구해주지 않았는가)...등등의 물음들. 물론 이 중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책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반복되는 질문이자, 종교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왜 자발라위는 대저택에 은거하고만 있는가, 왜 그는 직접 나서서 재산이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도록 하지 않는가, 왜 그는 모든 사람이 핍박받고 고통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 다시 말해서 신이 있다면, 왜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직접 나서서 구원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든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물음. 

 

물론 이 물음은 세상의 누구라도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 알레고리를 그려내는 작가 마흐푸즈도 마찬가지다. 대신 마흐푸즈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 알레고리에 덧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라파의 이야기이다. 책의 마지막에 붙은 아라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어떤 종교적인 알레고리를 벗어나는 부분으로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었을 것이다(그래서 사실 그전 까심의 이야기까지는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 부분부터는 이야기가 약간 활력을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동네에 나타난 마법사 아라파가 자발라위의 비밀을 밝히려다 자발라위를 죽게 만들고(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인을 실수로 죽여 그 충격으로 자발라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설정이다. 즉 자발라위는 처음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이야기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만, 그 이후에는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자발이나 리파아가 자발라위를 만나는 장면도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발이나 리파아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로서 전해질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설정을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결과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런 물음을 여기에서 덧씌울 수는 있다. 자발라위가 죽은 것인가, 자발라위가 죽었다고 믿는 것인가), 폭력을 휘두르던 수장들을 제거하지만, 그가 결국 폭력과 억압의 중심에 있던 관재인과 한패가 되고, 그런 자신에 환멸을 느끼고 도망치려다 죽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물론 해설에서 이야기하는 바대로, 마법사 아라파를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이라는 것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라파가 마법사라는 상징은 물론이거니와(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클라크), 예를 들어 그가 '본의 아니게' 자발라위를 죽게 만든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즉 오랫동안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이 자발이나 리파아나 까심의 이야기, 즉 종교라면, 그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것이 마법사 아라파, 즉 과학이며, 과학은 '본의 아니게' 종교가 가졌던 신비를 상당부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었다. 또 그와 동시에 마법사 아라파가 마법의 병을 통해 수장들을 제거한 것처럼, 과학은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날 어떤 가능성을 또한 제공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물론 흥미로운 것은 마흐푸즈가 이런 마법사 아라파를 결코 긍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위에 얘기한 대로 마법사 아라파는 모든 이를 억압하는 관재인 까드리의 시녀가 되었으며, 과학은 또한 동시에 거대한 억압과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세계를 휩쓴 두 차례의 전쟁이 그렇게 거대해진 것이 결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을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이 약하게 만들었던 종교와 연관지어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아라파도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어 있어요. 불로 죽든 물로 죽든 마귀에 의해 죽든 몽둥이에 맞아 죽든 말이죠."- 2권 p.214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은 이들의 자식입니다." -2권 p.332). 그리고 관재인은 자발라위가 죽고 동네가 그의 것이 되었는데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즉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재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발라위가 죽고난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종교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이는 종교의 역할을 마흐푸즈가 결코 완전히 부정하지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아라파가 죽음의 과정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아라파의 파멸은 결국 그의 오만, 즉 자발라위가 그를 죽게 만든 아라파를 흡족해하면서 죽었다는 착각, 혹은 죽은 자발라위를 다시 살려낼 수도 있다는 맹신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라파는 결국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결말이 마흐푸즈가 찾은 어떤 적절한 균형점처럼 보인다. 과학과 종교의 어떤 균형점 말이다. 반복되는 리벡 연주에 맞춘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이야기가 핍박받고 억압받는 동네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아라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예를 들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자발라위는 죽었다고 믿어졌지만, 사실은 완전히 죽일 수도, 혹은 죽을 수도 없으며(아라파는 그를 죽일 의도가 없었으며, 그를 끝끝내 어떤 형태로든 되살리려 애썼다), 아라파는 산채로 매장당했다(아라파의 죽음은 모호하게 처리되는데, 이 묘사는 그를 결국 죽일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서 종교든 과학이든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를 완전하게 구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나를 흥미롭게 만들었던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자발라위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과 같은 종교적 선지지가 아닌 평범한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이다. 작품 내내 이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긍정적이지 않다. 일부 현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탐욕적이고, 서로를 시기하고, 남자들은 싸움을 즐겨하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약한 자를 짓밟으며, 강한 자에게 금새 아첨한다.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도 모른채, 매일 해시시 담배를 물은 채로 반복되는 리벡 연주를 들으며, 선지자의 이야기, 그러나 현재는 그저 한낱 종교적인 신화가 되버린 그 이야기만을 들을 뿐이며, 미망에 빠져 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반복되는 폭력을 불러온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한 가지 다행스러운 구원의 가능성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사람들은 이야기꾼의 거짓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경멸스러운 내색을 보였다" -2권, p.357). 그리고 아라파의 마법의 노트를 가진 하나슈는 해방의 날에 대비해 청년들에게 마법을 전수한다.

 

이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 그것은 종교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은 마법을 부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제어할 능력도 배우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는 것이며, 아라파를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의 위치에 올려놓지 않는 것이다. 마흐푸즈는 가능성과 불안을 동시에 열어놓는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불안인가, 희망인가. 구원의 가능성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발라위의 살해범이라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설사 그가 자발라위를 죽였어도 동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를 추앙했고 드디어 각 구역마다 그를 자신들의 구역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동네는 다시 폭력 행위가 난무하고 증오와 공포가 팽배한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내하고 끈질기게 학대와 억압을 견디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 2권,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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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4-2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로도 어렵군요. 그렇게 느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D

오랜만에 궁금.
점심 메뉴를 말해줘요 :)

맥거핀 2015-04-25 15:33   좋아요 0 | URL
이야기가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닌데, 그렇게 느껴졌다면 제가 리뷰를 못 써서 그렇죠 뭐.^^

오늘은 낮에 비빔국수를 먹었습니다. 사먹은 게 아니고 제가 만들어서 먹었어요.^^

아이리시스 2015-04-25 15:35   좋아요 0 | URL
오..간단한데 의외로 귀찮은 국수.. 종교가 등장하면 난해해서 그렇죠. 리뷰탓은아닌게아니지아닙니다ㅎㅎ 맛있겠다 비빔;;

맥거핀 2015-04-25 15:40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간단하게...면 삶은 다음에 대충 있는 거 잘라서 넣고 오뚜기 비빔양념장을 넣습니다.-_-

아이리시스 2015-04-25 15:47   좋아요 0 | URL
오뚜기비빔양념장 아... 요즘 엄마 안계시니, 생전 부엌일 잘 안해봤는데 예전엔 안사던 온갖걸 다 사서 먹어봅니다.. 맥시멈 1주면 이제 엄마밥 먹을수있어요~!

맥거핀 2015-04-25 15:51   좋아요 0 | URL
밥 중에는 엄마밥이 제일이죠. 그래도 곧 퇴원하신다니 다행입니다. 퇴원하면 얻어먹지만 말고 아이리시스님이 맛있는 것도 해드려요,^^(물론 잘 하시겠지만.)

희선 2015-04-2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는 대로 된다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와 같을까요 이건 종교는 아니고 사람은 어떻게 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기도 하잖아요 그랬을 때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건 이루어지지 않죠

세 가지 종교가 나오고, 과학도 나오는군요 세 가지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고 그냥 종교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죠 종교와 과학으로... 두 가지 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은 주지만, 그것만 믿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얼마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봤는데... 거기에서는 하늘이 정말 있느냐, 있는데 왜 힘든 사람을 도와주지 않느냐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신이 사람을 도우면 잘못할 수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사람은 잘못을 하죠 신이 사람을 도우면 더는 신이 아닐지도 모르죠 결국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건 사람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거겠죠

저는 이 소설 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것 같네요


희선

맥거핀 2015-04-25 15:46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모든 것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모든 것이 종교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의 한계를 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어떤 구조나 시스템의 한계로 돌리는 것도 위험하지만,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위험하겠지요.

저는 작가가 마지막에 나름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봤어요. 물론 그런 태도가 한편으로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에게는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신을 믿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저도 잘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군요.)

2015-04-23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5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5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