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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 이야기의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마신다. 혹은 마시려고 애쓴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홍차를,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맛있는 물을, '캠핑카'의 토미히로 타로는 커피를,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는 보이차를,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는 햇차를 마신다. 왜 이들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일까.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자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은 뭔가 좋아하는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결혼상담소' p.58

     

"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패닉이랄까, 너무 슬프거나 괴로워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심호흡을 하라고 하면서 물을 마시게 하잖아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차를 즐길 여유가 없지요. 저는 그래서 차라든지 음료는 단순히 수분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천천히 차를 마시면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 '펫로스' p.247~248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다. 왜 어렵고 힘든가. 예를 들어 그것을 일본 경제와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인 소설 속 인물들이 한창 활동하던 예전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시대였다. 호황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버블은 꺼졌고, 이제 그 시절은 끝났다.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의 말을 빌리자면, "버블 붕괴 이후밖에 모르는 세대는 이처럼 혹독한 노동 환경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고도성장과 버블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목에도 있는) 55세라는 나이는 그런 시기인지도 모른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이제 물러나야하지만, 자식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수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만 많이 남은 시기.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배우자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이며, 자식들과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두렵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애매한 시기, 무엇인가를 이뤄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 무대 뒤편으로 물러날 것을 요청받는 시기. 그러나 무대 뒤 불꺼진 대기실에서의 삶은 아직도 너무나도 길게 남아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박과 세대 일반으로서의 중압감은 이들에게 두 가지 이상(異常) 증세로 나타난다. 먼저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상에 대한 묘사.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에서 나타나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 '캠핑카'의 토미히로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불안증과 우울증, 혹은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의 급격한 현실감 상실. 이 이상 증세들은 현실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며, 해결책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이상 증세는 일종의 분노이다. 주인공들은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남편의 말투는 물론 숨소리까지 불쾌하게 여기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자신도 모르게 길을 막고 있던 노숙자에게 호통을 치며, '캠핑카'의 토미히로는 인재 파견 회사의 콧수염을 기른 젊은 직원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분노는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감정을 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과 연결지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것을 요청하는 사회 일반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삶을 꾸려가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분노를 포함한 모든 감정을 다루는 법을 인물들이 점점 잊어버리게 된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분노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마른 분노에 가깝다. 말라버린 감정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알 수 없는 적의.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마르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의 하나로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마른 것은 불타기 쉬우며, 불은 상대방을 태우기도 하지만, 그전에 결국 본인을 태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안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삶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불타 소멸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기에는 배어있지 않을까.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결국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삶을 연장시키겠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펫로스'에서 다카마키 요시코가 기르는 늙은 개 보비가 심장 이상 증세로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이를 먹고, 물에 적신 스폰지에서 물을 빨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은 삶의 의지라는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다카마키 요시코와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위안을 받는다.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그 존재로서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말이다. 혹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가 죽어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아주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후쿠다를 보고 결국 얻게되는 정신적인 도움 말이다. 55세는 그대로 소멸하기에는 너무도 이른 나이니 말이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긴 삶이 남아있다. 그것이 고통으로 남을지, 혹은 감사함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떤 가능성으로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었다. 내 기억에는 2000년에 처음 출간된 <공생충> 이후로 처음 읽는 것 같다. 다시 그의 책을 잡게 된 것은 오랜만이지만, 1990년대 말 책 좀 읽는다,하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류의 소설들은 나름 꽤 읽었다. 글쎄. 무엇이 그의 소설을 읽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유려한 문장을 쓴다거나, 혹은 어떤 삶의 진실이나 통찰을 전달해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누구나의 이야기이다. 책의 후기를 보면 아마도 그것이 류의 의도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보통 이웃들, 혹은 현재와 미래의 나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들은 통속적이다. 사실 '통속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흔히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는데, 예를 들어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통속적이라고 말해질 때의 어떤 이질감말이다. 왜냐하면 그 막장드라마의 세계들은 사실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우리가 가까이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계는 통속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이 류의 이야기들은 현실에 아주 가깝게 발을 붙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주 통속적이다. 이것은 류의 어떤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전의 그의 이야기들은 특정의 세계, 특정의 문화, 특정의 인물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정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마음을 예상치 못하게 건드릴 때가 많다. 그러니까, 통속적인 이야기를 볼 때의 민망함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한다. 아이씨,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아니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때에도 사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었으니까. 책 날개의 지은이 약력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라카미 류. 1952년 일본 나가사키 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렇게 나이들었었단 말인가.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나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1952년생 작가가 쓴 55살 나이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나이의 어떤 것을 지금의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 리뷰의 끝은 이렇게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르겠다. 정말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55세가 되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다시 쓸게요. 물론 당신이 다시 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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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2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사람이 예전보다 오래 살아서 쉰다섯이라고 하면 많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적지 않군요 그때가 되어도 마음은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지만... 어쩐지 지금보다 더 우울할 것 같기도 합니다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다니...

맥거핀 님이 쉰다섯이 되면 이 책 다시 보실 건가요 쓰기도 하겠다니 그때는 어떻게 쓸지... 여기 나온 사람들과 같은 나이가 되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할까요(그 나이가 아니어도 언젠가 찾아오겠다 하겠군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읽은 책에 나온 사람도 쉰다섯에서 쉰여섯이 됐습니다 그 사람은,

“쉰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나이를 확 먹은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지만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오십 줄에도 완전히 익숙해졌고, 환갑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아직 그렇게 늙은 건 아니다, 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제가 본 책에 나온 사람과 여기 나온 사람은 나이만 같고 처지는 다르군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서글프지 않으면 좋을 텐데, 벌써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은 자라지 않고 나이만 먹는 것 같아서 말이죠 앞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이런 생각 자주 하지 않고 아주 가끔 합니다 사람은 본래 안 좋은 것보다 좀더 나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것도 살려는 뜻일지도 모르죠

기분 안 좋을 때 차를 한번 마셔봐야겠군요 마음이 가라앉는지 보게... 그런 걸 느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예전에 ‘아침에 아버지가 내려준 커피를 마셨다면 그날 안 좋은 일이 없었을 거다’ 하는 말을 들은 적 있군요 무슨 일이 있는 사람한테도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했네요 그건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라는 뜻이기도 하겠죠


희선

맥거핀 2015-04-29 15:11   좋아요 0 | URL
사람이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내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지금 쉰다섯의 감정을 미리 느끼거나, 혹은 쉰다섯이 되었을 때, 이십대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지금 제가 나의 쉰다섯일 때는 이럴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것은 있겠지만, 막상 그 때가 되면 그렇게 상상하는 것과는 아마 많은 부분에서 다른 사람이겠지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쉰다섯살 때, 내 나이 이십대때에 느꼈던 어떤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지금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쉰다섯살 때라니요. 아무튼 그래서 분명히 쉰다섯 살 때 혹여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느낌이 지금과는 아주 다르겠지요. 그런 경우들 많이 있잖아요. 예전에 분명히 보았거나, 읽은 이야기인데, 지금와서 다시 보았더니 매우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죠. 지금보다 더 풍부하게 느낄지, 더 빈곤하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르겠지요.

나이를 먹는게 서글프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소리겠지만, 서글픔도 어쩌면 나름 중요한 감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그 서글픔마저도 망각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 그런 멜랑꼴리함이 나중에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확신할 수가 없군요.

네..저도 책을 읽고나서 기분이 안좋을 때 무엇인가를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음이 그럴 때 좀 안정이 되려나요. 이왕이면 차가운 것보다는 천천히 마실 수 있는 뜨거운 것이 좋겠죠.

아이리시스 2015-04-2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아님.

아놔 맥거핀님, 평가단도서 말고 다른 리뷰도 좀 써달란말입니다 부대에 읽을거리가 없단말입니다 심심해요;;

맥거핀 2015-04-29 15:13   좋아요 0 | URL
평가단도서 리뷰도 겨우 쓰고 있어요. 허허허. 아이리시스아님님, 아이리시스님한테 읽을 거리 많은 거 알고 있으니 열심히 읽으시라고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