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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2009-10-18

  

  

 

 

 

 

 

 

 

<의심에 대한 옹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렇다. '의심'보다 필요한 건 '괴롭힘'이라고. "나를 괴롭혀주세요"라는 부탁의 대상은 밀리언셀러클럽의 스릴러 소설이나 끝나기 5분 전 관객의 뒷골을 땡기는 영화만 속하는 건 아니다. '학문'도 충분히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출판계를 점령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제스츄어는 무엇인가. "자, 여기 불 따끈따끈하게 피워 놨어. 저기 안락 의자 보이지? 간식도 몇 개 챙겨놓았어. 자. 이 정도면 내 이야기 들을 준비 충분하지?" 권장할만한 자세다. 하지만 그 자세가 정체된 자신의 지식을 보호하는 데 이용되어선 안 된다. 굳이 긴 이야기로 꾸미지 않아도, 자신이 세운 이념형의 논리적 조각을 잘 맞추었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과로 이 세상에 대한 '열정'을 도모하려는 건 속된 말로 '날로 먹는 것이다'. 

<의심에 대한 옹호>엔 '의심'의 물질성이 없다. 저자들은 민주주의의 열정을 복원하기 위한 실천 윤리로 '의심'을 제안하지만, 여기서 '의심'은 논리적으로 잘 맞춰진 퍼즐 혹은 쌓여진 탑일 뿐이다. 즉, 그 '형식미'에서는 박수를 쳐 줄 만하다. 그러나, 그 '형식미'가 일상 속에 있는 행위자, 사람들에게 더 '친밀한 무엇'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점은 다른 층위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버거와 지터벨트는 내가 이 정도로 치열하게 논리적으로 잘 정리를 해 보았으니, 제안한 이 개념, 충분히 쓸모 있지 않아?라고 전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의심을 둘러싼 담론의 역학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의심'의 대당인 믿음, 그 믿음과 확실성에 가려진 '관성화'된 사고를 고쳐보도록 하자는 '건전송'만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래전 버거는 루크만과 함께 <지식형성의 사회학>에서 사회학자로서의 사명을 밝힌 바 있다. (이 구절은 <일상생활의 사회학>에서 가져 왔다)

우리의 목적이 일상생활의 현실 - 더욱 자세히 말해서 일상생활에서 행동을 유도하는 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있으며,또한 여러가지 이론적 안목에 있어서 이러한 현실이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다양한 이론적 조망으로 비추어지는가에 대하여 오로지 관심이 있으므로, 먼저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들의 상식에 이용될 수 있는 현실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사회학자로서 그가 가진 소신의 일관성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나타난 그의 서술 태도를 보면, '상식의 재구성'수준에도 못 나가고 있는 듯하다.(사실 가만히 있던 '의심'이란 개념을 통한 '상식의 재구성' 이것이 저자가 노린 의도였을텐데 말이다)  

a란 사고 잘못 되었지? b란 사고 허점이 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니? a의 장점만 취하고, b의 단점을 피해서 c란 대안을 일상 속에서 생각해보자구. 그게 바로 내가 '의심'을 통해 추구하고 싶은 '중용의 정치'라는 거야.  

하지만, 여기엔 오직 '상식의 되풀이'만 남았다. 내가 요즘 가장 우려하는 지식 시장의 종교적 현상, 바로 '반복을 도모하는 예배의 언어'들, 그것의 넘쳐남 말이다. 

제대로 된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타락을 반복하는 것이다.-133쪽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기독교의 핵심에는 '반복'이 있다고 했다. 고로 기독교에 필요한 건 신자의 순결함이 아니라, 신자의 타락이다. 타락이 없다면 기독교가 갖는 '반복'의 힘. 예배당에 와서 반복적 회개를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 정당화를 획득할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시장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세게 말해 미안하지만) 피터 버거와 안톤 지터벨트가 책에서 보여주는 사고와 태도는 '나'의 지적 타락을 도모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사회학적 개념과 원칙들을 꼼꼼하게 정리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개념 '의심'에 대한 과감한 계보학적 탐색을 펼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계보학적'탐색이 보이지 않는다.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같은 성과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이들이 주창하는 것은 '의심'이라는 개념의 또 다른 '이념형'을 만들어내는 정도다. 고로 이 책은 한창 사회학에 빠져든 한 대학원생의 페이퍼가 갖고 있는 정돈된 열정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정작 그 '열정'에는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다.  

무엇보다 불만스러운 건, 상대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과정 자체다. 상대주의에서 발견되는 니힐리즘을 깨고, 근본주의가 갖고 있는 '절대성'이라는 광신을 깨기 위한 무엇의 발견. 두 저자는 "우리는 광장의 언어에 무심하지 않아"같은 제스츄어를 드는 사례 및 직접적인 몇몇 구절로 넌지시 표시해두지만, 정작 이들이 무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장'의 복잡다단함이었다. 그들은 학문의 언어가 갖고 있는 개념의 건실함을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설명'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정작 '일상생활'의 심층적인 부분들에는 '테두리식 접근'에만 머무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이 주창하려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려는 태도 자체가 자신이 독자들의 세계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의심에 대한 옹호>는 이 질문에 대한 선명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원칙의 검토와 확인'만이 있을 뿐, 오히려 자신이 사고하고 밀어붙이는 '원칙'에 대한 믿음이 도리어 강화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의심을 '예찬'하면서, 자신들이 주창하는 그 의심 자체에 대한 '믿음'을 강화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게 바로 그들이 추구하자고 제안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건실함을 지탱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건, 앞에서 말했다시피, '의심'자체에 대한 물질성, 그것이 사회 세계에서 언어의 물질성을확보하고, 사회를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교류되고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심'자체의 진공상태가 확정된 상황에서, 그것을 위해 깔아놓은 논리적 무기들은,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에 더 가깝지, 그것이 그들이 갈구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윤리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피터 버거와 안톤 지터벨트가 의심을 제대로 옹호하기 위해선,자신들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뒷골을 오싹하게 할 공포스러운 '이단적 언어의 창조와 재구성'. 그것이 주는 '괴롭히는 사회학적 태도'의 강화여야 했다. 

그들은 '맛난 밥상'의 선결 조건은,  바로 '맛있음'에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음식은 어디서 시켜먹든, 밥이야 햇반으로 하든, 일단 친절하게 밥상만 잘 차려보자라는 식의 태도가 불편하다. 정작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먹어보니, 준비한 태도에서 나오는 저자들의 '인간적인 매력과 도덕적 건강함'만이 조금 느껴질 뿐이다. 상식의 재론에 큰 일 했다고 자화자찬하는 학자들과 상식에 너무 과장된 찬사를 보내는 시민들의 신앙 가운데, 점점 크는 건 시민들의 망각을 노리는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 민주주의의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오늘날 보편화된 라이프스타일 양식인 '명강의의 언어'에 들뜨고, 잊어버리면 또 그 명강의의 언어에 은혜를 받고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했던 죄를 씻으면 된다.  



 
 
yamoo 2010-08-12 11:08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글을 보니 읽을 마음이 샥~ 살아지는데요~ㅎㅎ 아, 그나저나 쓰신 글 중에서 의문사항이 있어서요..'의심에 대한 과감한 계보학적 탐색'을 펼치는 것과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 민주주의의 언어'의 차이가 그렇게도 큰 것인지요? 의심에 대한 과감학 계보학적 탐색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과 같은 논의방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흄이 했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책이 '정치하지 않다'로 받아들이는데..맞는지요? 그리고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민주주의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요? 보편화된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EBS 명강의의 언어..그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요..쓰신 글의 맥락상 이런 언어는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을 획득할 수 없어 보이는데...그렇다면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 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ㅠㅠ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22   URL
아고, 부족한 글(사실 책에 대한 기대와 어긋난, 제 분노에 치우친 글)에 덧글 고맙습니다. 덧글이라 시각상으로 잘 나타나질 진 모르겠지만, 당시 제가 이 글을 썼던 마음의 상태와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yamoo님의 지적 중, '계보학'에 대한 이야긴, 푸코 쪽이었습니다. 사실 '제목'도 그랬고, (물론 출판사의 부가적인 타이틀 부각도 있었지만) '계보학적 탐색'이 갖고 있을 때, 주는 그 언어의 변동 양상이라고 할까요. '의심'이 사회와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역사 속 그 단절의 순간, 그러면서 애초에 우리가 몰랐던 '의심'이라는 개념 자체의 새로운 시각을 함께 고민해보기. 사실 이런 걸 기대했었습니다. '의심'을 둘러싼 언어-지식-권력, 이것에 대한 세세한 역사적 탐색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된 효과들, 뭐 이런 것에 대한 저자들의 귀기울임을 기대했었거든요. 그런데, 책의 구조가, 이미 '의심'은 신의 의자에서 놀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30   댓글달기 | URL
"'의심'은 우리가 최상의 목표로, 우리 시대의 실천 윤리로, 행동 강령으로 정해놓은 상태란 말이지" 원제가 비록 '의심 예찬'이긴 하나, 이런 예찬은 기대했던 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두번째, 교양민주주의 언어 측면에서, 요즘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지식과 지식 수용에 있어 발생하는 목회자- 양들 간의 관계라고 할까요. 사실 상식의 재론 수준에 머무는 책 자체가 갖는 '너무나 당연한 말들을 위한 목가'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이런 것에 대한 제 비판적 시각을 적어본 것인데, 고민의 세밀함이 아직 더 해, 제 진심의 강도는 아직 약한 것 같습니다.^^;;(노력해야겠습니다.) '상식화된'민주주의, '정보제공자'로 추락한 지식인들..또 그런 책들의 출간 러쉬..같은 것.(전 개인적으로 유명 지식인들 몇몇 출판사에서 짬뽕으로 이리저리 넣어, '다시,민주주의를 말한다'같은 책을 내는 것에 대해 별로 동의하지 않거든요. 그런 지식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제 의견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35   댓글달기 | URL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이라는 표현은, 담론에 대한 제 생각을 넣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심 자체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술'(테크놀로지)에 의해 맺어진 하나의 양식인가, 그 양식은 시대를 거쳐가며 변해왔는가,시대의 권력자들, 지식을 소유한 이들은 '의심'을 어떻게 전유했는가, 변용시켜왔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의심'을 구성해왔는가 등등의 생각들이요. 그런데 <의심에 대한 옹호>에는 그런 시각이 없더라구요.(개인적으로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같은 책이나, 자크 르 고프의 <돈과 구원>같은 책을 기대했었던지라, 제 아쉬움이 더 큰 것 같습니다.)

2010-08-12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18   댓글달기 | URL
평이함 자체의 가치 절하를 말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것과는 다른 결의 주장인데, 아직 제 생각이 채 여물지 못한 듯 합니다. 꼼꼼한 지적 고맙습니다!

2010-08-12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23:41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진지하게 잘 들었습니다. 언어에 대한 신중함은 사실 참 중요한 것인데, 저도 이 참에 다시 제 포스트 하나, 둘 돌아봤네요. 성의있는 주고 받음을 위한 다리 놓기라는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