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부식 선생을 둘러싼 아픈 사건들이 몇몇 있다. 이 아픔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이 아픔의 속사정을 재론한다는 것에 대해 난 여전히 신중하고픈 입장이다.(그것이 그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달변가이며, 문장가이다. 그리고 여전히 뛰어난 출판인으로서의 감각을 지닌 채, 대중들과 조용히 소통하고 있다. 이 정도까지만 소개하겠다. 역사와 기억에 대한 그의 진심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민주주의, 역사, 기억에 대한 그의 명문 중 하나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환멸 역에서>의 몇 구절을 옮겨 본다. 생각의나무 시절, 당대비평이 휴간하기 전, 2005년 2월호의 흔적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가 있던가. 불안과 동요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할 때 모든 것은 숨가쁘게 거래의 양식으로 변한다. 관심과 사랑과 화해의 방식까지도. 그것은 이미 불안의 시대에 유일하게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관계의 방식이자 삶의 단일한 원리가 되어 있음으로 삶을 지배하는 배후의 폭력은 쉽게 대상화되지도 않는다. 지난한 단계를 거쳐 한결 참신해지고 한층 장황해진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도 우리의 삶을 덮친 불길한 기운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하지 못한다. 아니 우리가 마주친 이 시대의 거대한 역설은,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을 자양 삼아 탄생된 그 민주주의가 광휘를 발하는 동안 사람들의 무력감이 더욱 심각해져 마침내는 실어증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 223쪽 

 

비인기 과목임을 자조하던 '역사업자'들을 오늘처럼 바쁘게 만들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고구려사에서부터 해방전후사까지 시대별 전문가들을 모두 불러내어 고루 활력을 불어넣었던 사례도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역사는 국책사업이 되었고,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의 심화로 고단한 대한민국에서 최대의 사회적 논쟁은 다름 아닌 '광화문 현판 교체'문제이다. 역사가 돈 되는 사업이 된 마당에 앞서 이재를 터득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마침내 전방위적 과거사 규명의 시대다. 영화 <그때 그 사람>은 개봉되기도 전에 사회적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쿨한 냉소'든 역사의 희화화든 '역사라는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의 가치와 참신성,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성이다. 역사의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지닌 상처와 고통의 기억도 상거래의 법칙을 강요받는다.  

사람들은 과거사라고 해서, 상처나 고통이라고 해서 다 동등한 것은 아니며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받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된다. 진상규명, 명예회복, 보상이라는 수순으로 된 창구들을 지나쳐가는 속도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참혹한 상황은 사람들의 상처나 기억들 사이에 경쟁이 생겨나거나, 정치적 수요가 만들어낸 특정의 표준적 기준에 맞추어 기억들이 변형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타난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이미 '현재'로부터 다 터득하고 있는지 모른다. 과거라는 시장에서 어떤 것이 고가로 거래되고 어떤 것이 외면당하는지. 225-226쪽 

 

덧붙이자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리 없이 통합되어 있는 가식된 현재와 현재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즉 '위험하지 않은 과거'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다. 인간의 고통과 기억은 - 그것이 설사 모순과 수치심으로 채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시장에 나앉아 좌판에 나열된 채 사람들의 시선을 구걸토록 방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인간의 불행한 운명과 고통의 기억을 전유하여 자기 정당화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현세적 권력의 기도에 저항하기 위해 '기억하기의 고통'을 수행하지 않은 기록을 기억의 정본으로 삼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철학테제>에서 벤야민이 말했던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들이 <돌 속에 갇힌 밤>에는 틈새 속에 박혀 있다. 기억의 혁신은 거의 언제나 틈새 속에서 일어난다. -228쪽 

어느 때부턴가 시대적 유행어가 된 '민주화 이후'라는 말을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단지 양극화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수사적 균형 아래 위태롭게 매달려 있음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이 허위의 균형이 숨긴 거짓은 이제 폭로되어야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수사적 정의는 오늘의 민주주의가 처한 상태를 숙고하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음으로 동어반복의 틀 속에서 민주주의를 물신화시킬 위험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참여 민주주의'가 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냐고 질책하는 고언은 진지하지만 위험하다.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는 불행은 그 민주주의가 할 수 없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아무 것이나 행해도 된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더 심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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