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당비의 생각(http://dangbi.tistory.com/) 에 실렸습니다. 

 

'없음'을 위한 민주주의

- 욕망의 교차 공간, 신도림역에 서서


김신식(당비의 생각 간사)

 

 나는 운동화를 비교적 빨리 바꾸는 편이다. 운동화 뒷쪽이 빨리 벌어져 너덜너덜해지기 때문이다. 내 운동화와 신도림역은 상극인 듯하다. 학교 위치상, 꼭 신도림역을 거쳐야 하는데, 지하철 안에서 신도림역 이름만 나오면, 미리 인상이 찌푸려진다. 오늘도 조심조심 걸어야지. 사람들이 날 밀더라도 짜증내지 말아야지. 걸을 때 되도록 내 뒷사람 구두 굽에 안 닫게 해야지. 하지만, 세상은 결심과 반대의 장면을 나에게 선사한다. 작년이었나. 킬 힐을 신은 여학생에게 역 계단에서 한 번 밟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산지 얼마 안 된 신발의 뒷 굽이 확 벌어져 신경질이 난 적이 있었다. 싸게 산 덕분이라 자신에게 위안을 보냈지만, 그런 경험이 갈수록 쌓이다보니, 신도림역은 나에게 '신경질역'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나는 이 역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신촌 방향과 강남 방향으로 갈리는 두 플랫폼. 이곳에 오면 어떤 욕망이 보인다. 내가 살면서 추구해야만 하는 그 욕망. 그것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통로가 여기 있다. 서울에 진입해야만 하는 사람들. 갈수록 이 진입로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정치인들은 "지읍시다, 세웁시다, 만듭시다!"라고 주절대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은 없어져야 할 것이 많다. 기술이 늘어나고, 매체가 늘어나고, 사람들의 감각이 늘어난다. 내가 '발산형 사회'라고 부르는 현상. 모든 에너지들이 발산되는 구조. 이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그 피로도가 더해진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의 피로도를  '있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안이 시민들의 행복을 위한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음'을 위한 민주주의다.

‘질서적’ 민주주의를 벗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혼란이라고 생각하며, 민주주의는 이 혼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이 시대의 권력을 잡은 자들이 질서라는 개념을 민주주의의 가장 큰 효과라고 강조하면서, 그들은 이 질서가 주는 가지런한 자유를 자신들의 노력이라고 자화자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적한 것은, 사람들의 불안이다. 사람들은 늘 '있음'에 친숙해져야 하며, 이 '있음'에 기반을 둔 사회적 구조에 천착한다. 그러하여, 자신들의 일상에 '있음'을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고로 '없음'은 늘 민주주의의 적으로 여겨진다. 

 정전이 일어난 당신, 그리고 이웃의 집을 상상하기. 사람들은 정전이 일어났을 때 발생하는 그 고요함의 에너지를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있음'이 천착하는 존재론적 안전의 구조. 그러므로, 사람들은 '있음'에 대한 사고만으로 이 세상이 움직인다고/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상상력이라는 말, 이 말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각자의 사연은, 늘 '있음'안에서만 작동해야 하는 규범이 발생한다. '없음'에 대한 삶을 늘 혼란으로 규정하며, 심지어 그 '없음'의 삶이 주는 행복을 비현실적이라며 몸부림친다. '발산형 사회'안에서, 사람들이 저절로 표출하게 되는 언어 그리고 감정들. 이 언어와 감정을 배출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불안한 판단과 자기 검열. 

 

 결국 '극단적 없음'을 경험하지 못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삶 안에서, 그 삶을 유지하는 에너지 흐름이 중단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발산형 사회'의 비극에 동참한다. 이 비극 안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언어들이 나의 몸 안과 밖에 넘쳐난다. 현대인의 고독과 무관심을 반영하는 메일 함 속 스팸 메일의 홍수, 나와 타인의 모호한 감시 경계 속에서 불안과 의심의 언어를 조장하는 '뒷담화'라는 현대 사회의 고도화된 안식처. 지나치게 큰 웃음과 울음. 방 안에 무엇 하나라도 틀어놓지 않으면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 걱정하게 되는 미디어 환경과 장소의 합일. 이것을 추동하는 도시들. 

 '있음'에 기반을 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상상력.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상력이란 개념은 늘 현재의 '있음'을 둘러싼 포장의 언어가 되었다. 그 포장을 풀었을 때 사람들이 확인하는 것은 냉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있음'이 주는 위험을 발견할 때라도, 그 '있음'을 경고하고, 성찰하는 이들의 시선은 '극단적 없음'을 늘 불온하게 쳐다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단순한 절약/ 검약 정신을 챙기기?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정비식'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직은 사람들이 '비방할' 가능성이 큰 '파괴적' 민주주의. 나는 이 민주주의의 현실적 실천의 언어를 여기서 제시할 순 없다. 다만, 꿈꾼다. 작은 프라이드 차 안에 몇 명이 들어가는지 기네스북 기록을 세워보려는 자들이 채운 풍경 같은 이 곳, 신도림역. 나는 차라리 이 사람들을 안전하게 수용하기 위해 구획을 짓는 민주주의가 아닌, 이 공간을 파괴하여 새로운 풍경을 제시하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이다. 

 

‘있음’의 굴레를 탈출하자

 강수돌 선생이 말하는 '팔꿈치 사회'를 살아가는 타인이, 상대방을 이리저리 치면서 길을 갈 때, 그 길로 인해 생기는 짜증을 안 생기게 해달라는'나'의 요구는, 기존의 '있음'을 확장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공간의 '없음'으로 인하여, 욕망의 흐름 자체가 완전히 절단될 때. 그 절단이 주는 충격과 파격은 진보진영 특유의 '묵시록 효과'가 주는 과장된 경고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 안에 스며든 생각보다 무덤덤한 현실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상상과 실천을 관계 맺는 것을, '혁명'과 '급진'이라고 쉽게 부르는 진보들도 문제고, 그것을 '불안'과 '혼란'이라 지적하는 보수도 문제인 지금. 실천의 언어는 갈수록 타인의 눈치를 보고, 사유의 언어는 계속 '있음'이란 상품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윤리적 선만 긋는다.  '있음'을 위한 민주주의에서 내가 늘 느꼈던 불안함이란 건, 내 운동화가 타인의 움직임 때문에 너덜너덜해졌다는 게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느껴지는 창피함도 아닐 것이다. 내가 맨발로 이 땅을 걸어갈 수 있다는 행복. 그것을 행복이 아니라, 현실적 불안이라 보는 사회적 시선의 감옥에 스스로가 나오길 싫어한다는 것이 아닐까. 고로 이 행복 자체를 상상하는 게 점점 더 희미해진 현실.  '있음'을 위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라고 설득하는 이 감옥 안에 산 지 꽤 된 것 같은데, 나는 오늘도 자발적으로 이 감옥의 창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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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9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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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30 0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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