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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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씩 소설을 읽을 때, 그 내용보다 작가의 문장에 빠질 때가 있다. 주인공의 생각과 말에 얹힌 그 문장들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상황을 똑바로 보게 한다. 니클의 소년들은 작가의 좋은 문장으로 인해, 인종 차별을 받는 흑인들의 불행함을 넘어,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직시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당연히 이 책의 내용도 좋다. 복선과 반전도 절묘해 소설을 읽는 재미도 있다. 오래간만에 스토리와 문장, 작가의 개입이 잘 짜여진 훌륭한 소설을 만났다.

 

짐 크로법이 이미 효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인종 차별이 심하게 존재하는 남부의 탤러해시에 누구 못지않게 착하고 반듯한 흑인 소년, ‘엘우드 커티스가 산다. 그는 마틴 루터 킹목사의 연설을 들으며 흑인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불의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품위를 갉아먹는 것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나서며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년이다.

 

엘우드는 하나의 원칙에 마음이 기울었다. 킹 목사가 그 원칙에 형태와 소리와 의미를 주었다. 짐 크로처럼 검둥이들을 계속 누르려고 하는 거대한 힘이 있고, 엘우드 너를 계속 누르려고 하는 작은 힘이 있다. 이를테면 주위의 다른 사람들. 이런 크고 작은 힘 앞에서 너는 꼿꼿이 일어서 너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p39

 

그런, 누구 못지않게 착한 엘우드는 생각지도 않게 누명을 쓰고 악명 높은 니클 소년 아카데미라는 감화원으로 가게 된다. 니클 안에서 자행되는 만행은 뻔하다. 원칙 없음. 가차없는 폭행과 살인. 강제적 데이트라 불리어지는 어른에 의한 강간. 노동. 주정부에서 지급되는 물품들을 뒤로 빼돌려 이익을 챙기는 윗대가리들. 바깥의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착한 척 하지만 니클에서만은 가식을 떨지 않는 어른들. 언제나 오트밀을 먹는 망가진 소년들.......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니클에서도 엘우드는 고민한다. 삶의 방향을 어디로 정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조용히 모든 것에 눈 감고 침묵해서 그곳에서 벗어날 것인지, 아니면 죽을 지도 모르지만 장애물을 정면으로 통과해 니클의 실상을 알릴지에 대해 엘우드는 갈등한다. 그리고 엘우드는 선택한다.

 

이렇게 정의의 메커니즘이 움직이게 된 것은 버스에서 앉으면 안 되는 자리에 앉은 여자, 금지된 식당에 들어가 호밀빵에 햄을 얹은 샌드위치를 주문한 남자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증거를 담은 편지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p226

 

지금 현재 겪는 불행이 무서운 건, 그것이 현재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과 차별에 의해 남들과 똑같은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한다. ‘그들은 평범한 삶이라는 소박한 즐거움조차 누릴 기회가 없고, 경주가 되기도 전에 이미 불구가 되어 절룩거리며, 정상이 되는 방법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니클이 폐쇄되고 인종 차별이 없어져도 니클의 소년들은 여전히 니클에서 산다. 애써 막아놓고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두운 곳에서 언제나 니클은 그들을 지배한다. 불행은 여전히 불행을 가져온다.

 

착하고 굳건한 소년, 엘우드가 혼자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과 관심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해주기를 마냥 기다리면 빠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그는 마틴 루터 킹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사랑해야만 한다는 목사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니클의 소년들은 스토리의 전개와 거기에 스며든 문장들이 잘 짜여진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폭력에 놓여진 소년들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 시대에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사람에게 가해지는 여러 종류의 폭력은 여전하다. 그 폭력을 보는 것이 힘들어 많은 것에 눈 감는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그것에 대항해 싸워줄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하며 슬그머니 빠지는 나 자신을 본다. 니클에서 혼자 저항하지 않고 같이 싸웠더라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무력감도 있다. 모든 것이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이라서 내가 개입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상대라는 두려움도 있다. 나를 지키고자 선택한 침묵이 분명 이 세상의 수많은 엘우드를 외롭고 힘들게 할 것이 분명하다. 부끄럽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어렸을 때 그는 리치먼드 호텔의 식당을 지켜보았다. 그의 종족에게는 금지된 장소였지만 언젠가 그 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두운 감방에서 그는 자신의 기다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는 어두운 피부색을 초월해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그를 동지로 불러줄 사람, 똑같은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아는 사람, 비록 속도는 느릴지라도 뒷골목과 신선한 나날로 점철된 그 미래 앞에서 손으로 쓴 항의의 팻말과 연설에 장단을 맞추는 사람. 커다란 레버에 체중을 실어 세상을 움직일 준비가 된 사람.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 식당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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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1 00: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회에서는 죽어서도 골치덩어리라고 ㅜ.ㅜ
‘자신의 영혼을 믿고 자부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루터킹 목사의 말도 전혀 믿지 못하는 사회 ㅜ.ㅜ


페넬로페 2021-02-21 00:41   좋아요 5 | URL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 궁극적으로는 맞는 말일까요?
이 책은 참 많은걸 생각하게 해주네요^^

scott 2021-03-05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이달의 당선 추카~* 추카~
행운의 福🐸개굴
놓고 가여 ^0^

페넬로페 2021-03-05 16:28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scott님도 축하드려요**
 
책 좀 빌려줄래? -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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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빌려줄래?》는 낮에는 치과 의사, 밤에는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랜트 스나이더'의 카툰 에세이이다.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책 좀 빌려줄래?'를 읽는 동안, 나에게서 계속 이런 말이 나왔다.

 

푸하하, 그래, 맞어, 어쩌면 이렇게 나랑 똑같을까.

이 세상 어디에서나 책에 파묻혀 사는 인간들이 많구나.

책에 대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내가 항상 사용하는 단어인 '언젠가는'이라는 말을 이 작가도 하고 있네.

'파리대왕'이 두 번이나 나왔는데 좋다는 거야, 아님 좀 아니라는 거야? (나는 좋게 읽었는데)

이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구나!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 브래드버리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정리를 잘 했네.

시에 대한 생각들은 좀 심오하니 다시 천천히 읽으며 생각해보자.

라틴어에 대한 것까지? 치과 의사가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고 대체 세상이 왜이리 불공평한건지, 휴, 난 도대체 뭐람?

 

이 책에는 책덕후의 일상과 생각뿐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고충도 그려져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의 모습들과 글을 쓰고자하는 노력들이 재미있으면서도 따뜻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느끼는 생각과 어려움을 경쾌하면서도 가볍지만은 않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사람이 책 읽을 시간이 어디있어. 집에 갖다 놓은 책 대부분은 결국 펴보지도 않겠지. 혹시 이런 사람이 되면 모를까...부랑자, 할 일 없는 재벌 2세, 골프 안 치는 은퇴자, 신동, 수감자, 소도사, 문학 평론가, 소설가...-p7

 

요즘 세상에 책 말고 다른 재미있는 것도 많은데 나를 비롯해 책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욕망과 자본이 최고인 이 사회에서 책덕후인 우리들은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절대 책을 포기하지 못한다. 책에 파묻혀 사는게 행복하기에....한번씩 내가 아웃사이더같은 느낌이 들 때, 뒤쳐지는듯한 불안감에 잠을 자지 못할 때 이런 책은 친구가 되어 나를 위로해준다. 오래간만에 많이 웃으며 책을 읽었다. 

 

책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 책의 뒷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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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08 22: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부랑자도 아니고 할 일 없는 재벌 2세도 아니고(할일은 많고 3-4세 부자 친구들만 ㅋㅋㅋ/근데 이런애들 책 진짜 많이 읽는데?/)) , 골프 안치고, 신동도 아니고 , 수감자도 아니고, 소도사는 몰라서 패스 ㅋㅋ, 문학 평론가, 소설가도 아닌데 왜?? 책더미에 깔릴정도도 모자라서 킨들에 몇만권을 ㅋㅋ이정도면 집 자동차랑 바꿔야 하죠? 페넬로페님 ( *˘╰╯˘*)

페넬로페 2021-02-08 23:48   좋아요 3 | URL
에이 그런 사람 아니어도 scott님 자체가 책덕후이자 만능재주꾼이예요^^

미미 2021-02-08 23: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빨리 읽고싶어요! 저 도서관 신청했는데 2순위에서 1순위로 올라옴! 덕분에 더 두근두근😳

페넬로페 2021-02-08 23:49   좋아요 3 | URL
네, 읽으면 재미있어요~~

라로 2021-02-09 08: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들 이름을 레이먼드 라고 지으면 글 잘 쓰는 작가가 될 확률이 좀 높은 걸까용?? ㅎㅎㅎ
아참! 저 작가 인스타그램 보셨어요? 저는 인스타 보고 책 안 사는;;;;(치과 의산데 제가 안 사줘도 돈 잘 벌겠죠, 뭐~~~~😅)

페넬로페 2021-02-09 08:59   좋아요 2 | URL
책에서는 세 줄기 빛 ㅡThe Three Ray 라고 표현했더라구요~~
제가 인스타그램을 안해서 이 작가에 대해 잘 모르지만 확실히 돈을 많이 벌것 같죠 ㅎㅎ

붕붕툐툐 2021-02-10 1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거슨 같은 책, 다른 리뷰네요~ 페넬로페님은 진정 명품 리뷰어~👍

페넬로페 2021-02-10 13:23   좋아요 1 | URL
붕붕님 덕분에 기분좋고 경쾌하게 이 책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1-02-10 1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리뷰 읽으니 이 책 더 읽고 싶어졌어요!!!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1-02-10 13:25   좋아요 1 | URL
이 책도 버스데이 걸처럼 길지 않으면서도 의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1-02-11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많이 있어도 읽을 것들은 늘 좋아요.
페넬로페님 설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새해복많이받으세요.^^

페넬로페 2021-02-11 08:39   좋아요 1 | URL
네 언제나 책을 읽는것은 좋죠~~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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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람의 살아온 모습을 상상하고, 그가 나타낸 말과 행동의 배경과 사연들이 궁금하다. 잔잔하고 단아한 김금희 작가의 문장은 사람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이 김금희 문장의 큰 힘이다.

 

배경의 묘사가 좋은 소설 복자에게는 사람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는 수없이 반복되는 일상보다 어느 순간에 맞닥뜨리는 특별한 이유로 관계 맺기를 더 많이 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깨질 확률이 더 크다.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키기가 힘들지만 나는 나이기에, 나의 관계를 결정한다.

 

제주의 한 의료원에서 일어난 산재사건과 그 소송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의 주된 배경은 제주이다. 제주의 방언과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모티프로 사용한 소송의 과정은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다. 난 그것이 더 좋았다. 힘없는 피해자들이 거대한 공룡과 싸우는 어렵고 끝없는 과정은 말 안해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작가는 그 과정 중에 도움을 주고 싶지만 오히려 빠져주어야만 그것에 도움이 되는 자의 상실과 억울함을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질투와 어리석음은 많은 후회를 낳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 돌고 돌아 먼발치에서 바라본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며, 많은 것이 이해될 수 있지만 그땐 어쩔 수 없는 내가, 순수하지만 덜 익은 아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어른이 된 우리들은 얼마나 또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영초롱이 돌아본 자신과 복자에게는, 이미 상처받은 유년의 아이들이 서로 기댈 곳을 찾는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을 잃기 싫어하는 관계의 맺음과 끊어짐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만난 그들이 그 아무것도 아닌것을 넘기려고 하지만 또다른 난관에 부딪혀 두사람은 튕겨진다. 그런 두사람의 얼룩짐은 회복될 수 없는 듯 하지만, 복자에게 부치지 않는 편지를 쓰는 영초롱에게서 조금은 다가가려는 여지가 보인다. 나의 주체성으로 선택한 어떤 단호한 결정이라도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먹먹하고 감동적이다.

 

두 번 이나 연달아 읽었는데도 이 소설에 대한 글쓰기가 어려운 건 복자에게가 쉽게 읽히면서도 그만큼 깊이가 있다는 뜻이 될 수 있겠다. 평범한 듯한 소재로, 사람과 사건들을 잘 묶어놓았다. 영초롱과 복자의 이야기도 좋았지만, 순수하면서도 심지가 있는 청년 고오세가 난 좋았다. 주인공 영초롱의 직업이 판사라서, 판사의 일에 대한 것도 많이 서술되어있다. 잠시 그곳에 다녀와 그 세계도 들여다봤다. 영초롱의 상사인 이영춘 부장판사가 그녀에게 읽으라고 했던 볼테르의 관용론의 어느 한 부분도 이 소설을 형성하는데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말' 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고 한다. 사표를 낸 영초롱과 더이상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를 하지 않는 영초롱의 동생 영웅은 이러한 것을 실패가 아니라 '인생을 더 깊이 용인한다는 자세 아닐까?' 라고 한다. 이 구절이 내가 선택한 이 소설의 한 문장이다. 앞으로 실패라는 감정을 느낄 때 이 문장을 생각한다면 힘이 날 것 같다. 

어쩌면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에 나는 슬픔에 대해 온전히 알게 되지 않았을까.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묵직한 추가 달린 듯 몸이 어딘가로 기우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으로? 여태껏 가늠하지 못한, 그럴 필요가 없었던 세상 편으로. - P15

내가 아빠를 미워했어. 아빠가 실패해서 아빠를 미워했어. 그런데 그러면 나는 아빠가 아니라 실패를 미워한 셈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아빠를 안 미워했어.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P61

그리고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 하루가 활기차다고도 했다. - P81

생선을 토막 내고 오징어를 손질하는 주인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파리떼가 그의 유일한 아우라 같았다고 고모는 적었다. 오직 그것만이 토막 난 생선처럼 종결되지도 않고 차양 아래 오징어처럼 다 물러지지도 않은 채 생이 계속된다고 증언하는 듯했다. 그 비린것에 달라붙는 파리떼처럼 칼과 도마와 고무장갑에 내려앉았다가도 공기 중으로 와락 떠오르며 우리도 산다고. 우리가 이렇게 구차하고 끈질기게 기꺼이 산다고. - P143

내게 놀라웠던 건 볼테르의 마지막 물음이었다. "이렇듯 가장 거룩한 신앙심도 지나치면 범죄를 낳는다, 해서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란 사실상 기만이라고 냉소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신앙의 자유 자체가 과연 그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있었던가?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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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8 1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페넬로페님이 밑줄 쫘악 하신 문장들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말 속에 작가에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네요.
이분에 작품은 ‘편혜영이 수상한 김유정 작품집에서 처음 읽었었는데 그때 느낌이 수상작보다 잘썼다고 생각했는데,,,

종교라는게 늘 그랬듯이 버텨내는 자들에게 기꺼이 삶에 복을 약속하지만 사람에 앞날이라는게 약속한데로 흘러가는게 아니라는것을...
복자에게 읽고나면 스쳐지난간 몇몇 사람들 모습이 떠오를것 같네요

페넬로페 2021-01-28 20:23   좋아요 3 | URL
네, 이 책엔 깊이 들여다봐야 할 좋은 문장들이 많아요~~
scott 님의 말씀대로 지나간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어요^^

붕붕툐툐 2021-01-29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마트 도서관에 「복자에게」가 5권 있기에 요즘 유행하는 책인가 난 전혀 정보가 없는데... 하던 차에 페넬로페님의 리뷰를 읽게 되니 너무 좋으네요~ 완전 나이스 타이밍
!!^^😄

페넬로페 2021-01-29 13:57   좋아요 2 | URL
쉽게 읽히면서도 깊이가 있는 책이예요~~
제주에 대한 묘사도 많아 가고 싶더라구요^^
 
도연명 전집 대산세계문학총서 38
도연명 지음, 이치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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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불편하게 구성된 책은 저자와 독자와의 사이를 가로막는다. 이 책은 한자 원어를 읽을 수 있는 독자에게만 친절하다. 한자어에 대한 풀이와 주석만 있다. 한글로 번역된 글을 이해하지 못했을 땐, 그 부분에 대한 한자어를 찾아 거기에 따른 해설을 읽어야 한다. 시에 온전히 빠져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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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3 2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번역?역주를 달으신 분이 이치수 교수님이라고 경북대 중문과 교수(전에는 영남대 계셨음) 원래 루쉰. 마오둔 중국 근현대문 전공이세요 도연명은 중국동진-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던 시인인데,,한글로 번역된것도 이해하기 힘들정도라면 담당 편집자들은 이해 하고 출판 했을까요?

페넬로페 2021-01-23 21:07   좋아요 3 | URL
한글로 된 글이라도 완전 이해하려면 힘들잖아요~~
더군다나 한자어는 고사성어와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한글로 바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한글로 번역된 글은 일단 한글에 대한 주석이 바로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쉬웠어요~~

그레이스 2021-01-23 21: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주해는 중국 학자들이 해놓은 것을 인용하는것이죠
뒷부분398~408p의 자료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래서 시마다 있는 각주도 다른 책과 거의 같습니다.
일단 번역된 시어들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저도 어느정도 동의!
번역과 한시가 나란히 있어서 보기 좋았구요.
어떤 의미라는 것을 안 후에는 번역된 문장에 구애받지 않고 의미를 새길 수 있었습니다
다른 책과 비교했을 때 또 하나 장점은 사언시 오언시 사 부를 구분해 놓았다는 것!
번역은 최근에 나온 책도 마찬가지!
어차피 한시로 읽지 않으면 그 맛은 살리기 힘들듯요

페넬로페 2021-01-23 21:14   좋아요 2 | URL
의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1-23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전공때문이 아니라 번역자의 시어가 문제인듯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의역이냐 직역이냐의 고민인듯 합니다

붕붕툐툐 2021-01-25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이 잘못했네~ 페넬로페님 몰입을 방해하다닛!!😠

페넬로페 2021-01-25 10:01   좋아요 1 | URL
ㅎㅎ~~
네 저한테는 읽기 불편한 구성이었어요^^
 
도연명을 그리다 - 문학과 회화의 경계
위안싱페이 지음, 김수연 옮김 / 태학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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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을 그리다》는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를 소재로 한 시와 그림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도연명' 그 자체보다 그의 글이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세하고 전문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도서관의 '클래식' 동아리에서 선정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생각보다 많이 학술적이라 당황했다. 대충 책장을 넘겨보며 내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회의도 들었다. 그러나 동아리에서 선정된 책이고 랜선 모임을 앞두고 있었기에 책을 펼쳐들고 공부하듯 다시 읽어 나갔다. 각 페이지에 나오는 시를 읽고 그에 따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점점 책이 편안해지고, 도연명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었다. 여기서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음주' 20수 중 5수가 자주 나오는데, 도연명 전집을 따로 준비해 음주 20수를 비롯해 다른 시들과 산문들도 같이 읽었다. 여러가지 한자어와 고사성어를 찾아서 기록해가며 자세히 이 책을 읽어 나갔다. '도연명을 그리다' 는 이렇게 음미하듯 천천히 읽어야 빛이 나는 책이다. 

그냥 책장만 넘겨가며 이 책을 읽는다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도연명은 동진 말에서 송나라 초 시대의 사람이다.

 

도연명은 이처럼 사회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으며,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에 살았다. 이러한 가운데 현실과 이상의 괴리속에서 출사(出仕)와 퇴은(退隱)의 문제를 고민하는 도연명의 문학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도연명은 8월에 팽택령이 되었다가 11월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때 관리 생활에서의 괴로운 심경과 전원 생활의 즐거움을 적은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 이다.-도연명 전집, 이치수, 문학과 지성사, p382~p383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는 그를 대표하는 시이다. 그는 80일 정도의 벼슬을 하였으나 독우(지방의 감찰관)의 방문을 앞두고 그들에게 구차하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만두고 그 유명한 귀거래사를 짓고는 표표히 고향으로 떠난다. 

 

'도화원기(桃花源記)' 는 도연명이 지은 유기(遊記)이다. 무릉지방의 복사꽃이 만발한 도화원에 세상을 등지고 모여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보통 유토피아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하는 '무릉도원'이 바로 이 '도화원기' 에서 나온 것이다.

 

 도화원기는 도연명의 이상을 표현했고 그 이상이 인간의 보편적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p147

 

'화도시(和陶詩)' 는 도연명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지은 '추화시(追和詩)'-옛사람을 추모하여, 그 사람이 지은 시의 운자를 따서 지은 시-이다.

 

 후대 시인들은 적막하게 지낸 도연명의 삶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다투어 화도시를 지었다. 화도시는 내용도 다채롭고 그 양도 방대하다. .....중국의 수많은 시인 가운데 도연명처럼 국경을 초월하여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도연명은 중국 문화를 읽는 키워드이며, 특정한 이상적 삶을 상징한다.-p212

 

위안 싱페이의 '도연명을 그리다' 는 도연명 자체를 다루었다기보다 그가 남긴 시와 산문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고 콘텐츠화 되었는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는 수많은 후대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채국(국화를 따다)', '녹주(술을 거르다)', '호계삼소(호계에서 세 사람이 웃다)'등 도연명과 관련된 일화도 주요 제재가 된다. 그의 시의 운자를 따서 짓는 화도시도 유행처럼 번져갔다. 도연명처럼 속세를 떠난 은사, 망한 왕조의 유민, 높은 관직의 관료와 제왕(건륭제)까지도 화도시를 짓는다. 심지어 도연명의 삶과는 전혀 다르게 권력에 아첨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도 이 시류에 합류한다.

 

송대 이전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소개된 그림과 화도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인간이란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보편적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그림들을 보며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거기에 표현된 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맞지 않는 삶을 거부하며 갈건을 쓰고 옷자락 휘날리며 표표히 걸어가는 도연명의 모습에서 결연함을 본다. 마음 맞는 벗을 만나 고개를 크게 뒤로 젖히며 한바탕 웃는다. 자신이 쓰고 있던 갈건을 벗어 펼치어 술을 거른다.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놀고 있는 자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술 취한 사람과 취하지 않는 사람은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국화를 따다가 먼곳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이와같은 소재들을 바탕으로 화가들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채롭고 멋있는 그림들을 그려낸다.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는 각 시대의 화가에게로 가서 그들 각자의 사연과 생각으로 개별화된 모습으로 완성된다. 도연명의 삶을  평가할 필요도 없고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의 삶의 모습들을 역사의 흐름에 실어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귀거래사에 화운하다. 음주 스무수에 화운하다. 빈사에 화운하다. 귀원전거에 화운하다등 그 무수한 것들의 연결로 도연명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 책은 그림 도록처럼 글과 그림이 짜임새있게 잘 구성되어 있다. 원문을 같이 실은 시의 해석도 좋다. 오언시와 사(辭)의 원문을 그 느낌에 맞게 잘 번역한 것 같다. 다만 본문의 내용에 대한 주석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

 

지금 이 시대에 사는 내가 도연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그의 태도나 행동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표현인지 아니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숨은 안일함으로 치부해야하는지 갈등했다. 그러다 그 모든 것을 떠나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억지로 뭔가를 하지 못하는 인간 도연명을 만났다. 남들이 답답해하고 왜 저렇게 사느냐고 손가락질을 해도 할 수 없으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고 나에게도 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이제 돌아가야지

전원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가지 않으랴

이미 마음이 몸에 부려졌다고

어찌 구슬프게 홀로 서러워하리오.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이 없고

다가올 일 뒤좇아야 하리.

실로 길을 헤맸어도 멀리 가지 않았거니와

지난날이 그르고 지금이 옳음을 깨달았네.

-도연명, '귀거래사' 중에서,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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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21 00:4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귀거래사, 안빈낙도에 삶을꿈꾸며 노래 했던 도연명[전원이 황폐해지는데 어찌 가지 않으랴 이미 마음이 몸에 부려졌다고 어찌 구슬프게 홀로 서러워하리오.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이 없고 다가올 일 뒤좇아야 하리. 실로 길을 헤맸어도 멀리 가지 않았거니와 지난날이 그르고 지금이 옳음을 깨달았네]이시 코로나로 신음하고 있는 지구를 향해 말하는것 같네요 아파트 숲 벗어나 무릉도원에서 복숭아꽃나무 키우며 살고 싶은 1人

페넬로페 2021-01-21 01:00   좋아요 4 | URL
역시~~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scott님이 말씀하신 것과 똑같아요**

그레이스 2021-01-21 0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그분?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

페넬로페 2021-01-21 10:14   좋아요 1 | URL
앗! 네, 반갑습니다**

미미 2021-01-21 08: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이 이 책에 빠져들었다는 과정이 인상적이네요.👍

페넬로페 2021-01-21 09:07   좋아요 4 | URL
리뷰쓰기전에 그 과정이 꼭 필요할것 같아 적었어요 ㅎㅎ

붕붕툐툐 2021-01-21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학술적 책과 학구적 독자가 만났군요~ 페이퍼에 생각할 거리가 그득해서 넘 좋네욤~😍

페넬로페 2021-01-21 10:15   좋아요 2 | URL
붕붕툐툐님의 말씀이 화도시같아요^^
너무 좋은 해석을 해주셔서 감사해요**

scott 2021-02-10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페넬로페님 이달의 당선 2관왕 !!
👏👏

페넬로페 2021-02-10 17: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송구스럽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