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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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씩 소설을 읽을 때, 그 내용보다 작가의 문장에 빠질 때가 있다. 주인공의 생각과 말에 얹힌 그 문장들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상황을 똑바로 보게 한다. 니클의 소년들은 작가의 좋은 문장으로 인해, 인종 차별을 받는 흑인들의 불행함을 넘어,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직시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당연히 이 책의 내용도 좋다. 복선과 반전도 절묘해 소설을 읽는 재미도 있다. 오래간만에 스토리와 문장, 작가의 개입이 잘 짜여진 훌륭한 소설을 만났다.

 

짐 크로법이 이미 효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인종 차별이 심하게 존재하는 남부의 탤러해시에 누구 못지않게 착하고 반듯한 흑인 소년, ‘엘우드 커티스가 산다. 그는 마틴 루터 킹목사의 연설을 들으며 흑인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불의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품위를 갉아먹는 것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나서며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년이다.

 

엘우드는 하나의 원칙에 마음이 기울었다. 킹 목사가 그 원칙에 형태와 소리와 의미를 주었다. 짐 크로처럼 검둥이들을 계속 누르려고 하는 거대한 힘이 있고, 엘우드 너를 계속 누르려고 하는 작은 힘이 있다. 이를테면 주위의 다른 사람들. 이런 크고 작은 힘 앞에서 너는 꼿꼿이 일어서 너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p39

 

그런, 누구 못지않게 착한 엘우드는 생각지도 않게 누명을 쓰고 악명 높은 니클 소년 아카데미라는 감화원으로 가게 된다. 니클 안에서 자행되는 만행은 뻔하다. 원칙 없음. 가차없는 폭행과 살인. 강제적 데이트라 불리어지는 어른에 의한 강간. 노동. 주정부에서 지급되는 물품들을 뒤로 빼돌려 이익을 챙기는 윗대가리들. 바깥의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착한 척 하지만 니클에서만은 가식을 떨지 않는 어른들. 언제나 오트밀을 먹는 망가진 소년들.......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니클에서도 엘우드는 고민한다. 삶의 방향을 어디로 정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조용히 모든 것에 눈 감고 침묵해서 그곳에서 벗어날 것인지, 아니면 죽을 지도 모르지만 장애물을 정면으로 통과해 니클의 실상을 알릴지에 대해 엘우드는 갈등한다. 그리고 엘우드는 선택한다.

 

이렇게 정의의 메커니즘이 움직이게 된 것은 버스에서 앉으면 안 되는 자리에 앉은 여자, 금지된 식당에 들어가 호밀빵에 햄을 얹은 샌드위치를 주문한 남자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증거를 담은 편지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p226

 

지금 현재 겪는 불행이 무서운 건, 그것이 현재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과 차별에 의해 남들과 똑같은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지 못한다. ‘그들은 평범한 삶이라는 소박한 즐거움조차 누릴 기회가 없고, 경주가 되기도 전에 이미 불구가 되어 절룩거리며, 정상이 되는 방법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니클이 폐쇄되고 인종 차별이 없어져도 니클의 소년들은 여전히 니클에서 산다. 애써 막아놓고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두운 곳에서 언제나 니클은 그들을 지배한다. 불행은 여전히 불행을 가져온다.

 

착하고 굳건한 소년, 엘우드가 혼자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과 관심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해주기를 마냥 기다리면 빠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그는 마틴 루터 킹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사랑해야만 한다는 목사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니클의 소년들은 스토리의 전개와 거기에 스며든 문장들이 잘 짜여진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폭력에 놓여진 소년들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 시대에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사람에게 가해지는 여러 종류의 폭력은 여전하다. 그 폭력을 보는 것이 힘들어 많은 것에 눈 감는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그것에 대항해 싸워줄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하며 슬그머니 빠지는 나 자신을 본다. 니클에서 혼자 저항하지 않고 같이 싸웠더라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무력감도 있다. 모든 것이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이라서 내가 개입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상대라는 두려움도 있다. 나를 지키고자 선택한 침묵이 분명 이 세상의 수많은 엘우드를 외롭고 힘들게 할 것이 분명하다. 부끄럽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어렸을 때 그는 리치먼드 호텔의 식당을 지켜보았다. 그의 종족에게는 금지된 장소였지만 언젠가 그 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두운 감방에서 그는 자신의 기다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는 어두운 피부색을 초월해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그를 동지로 불러줄 사람, 똑같은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아는 사람, 비록 속도는 느릴지라도 뒷골목과 신선한 나날로 점철된 그 미래 앞에서 손으로 쓴 항의의 팻말과 연설에 장단을 맞추는 사람. 커다란 레버에 체중을 실어 세상을 움직일 준비가 된 사람.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 식당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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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1 00: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회에서는 죽어서도 골치덩어리라고 ㅜ.ㅜ
‘자신의 영혼을 믿고 자부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루터킹 목사의 말도 전혀 믿지 못하는 사회 ㅜ.ㅜ


페넬로페 2021-02-21 00:41   좋아요 5 | URL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 궁극적으로는 맞는 말일까요?
이 책은 참 많은걸 생각하게 해주네요^^

scott 2021-03-05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이달의 당선 추카~* 추카~
행운의 福🐸개굴
놓고 가여 ^0^

페넬로페 2021-03-05 16:28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scott님도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