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논, 김현준의 재즈+로그
김현준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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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재즈 현장을 비추는 거울, 캐논

- 캐논, 김현준의 재즈 + 로그

 

김현준 지음, [한울] (2022)




책을 통해 재즈비평가 김현준을 처음 알게 된 건 25년 전의 일이다. 우울증인지도 모르고 내 안의 세계에 갇혀 있던 시절, 나는 어떤 음악도 듣지 않는 아이였다. 우연한 만남. 재즈는 나를 세상으로 향하도록 처음 문을 열어주었다. 새끼 새가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때 어미 새는 밖에서 알을 쪼아 도와주기도 한다던가.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문을 잡아준 것에는 김현준의 재즈 파일(1997)과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있었다. 군 시절 라디오로 그가 진행하던 재즈 프로그램을 듣던 기억이 난다. 점호가 끝난 한 밤중, 고참들이 잠든 시간.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눌러 그가 진행하던 방송을 테이프에 녹음하곤 했다. 내무반에서 방송을 녹음 한 테이프를 늘어져라 듣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기억도 새롭다.


 

캐논, 김현준의 재즈 + 로그(이하 캐논)18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책이라고 한다. 책에 담긴 이야기가 무르익는 동안 그는 어떻게 지냈을까 궁금했다. 간간이 그가 번역했던 쳇 베이커마일즈 데이비스 평전을 서점에서 만나면 반가웠지만, 나는 나대로 생활에 매몰되어 오랫동안 음악을 잘 듣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는 여전히 재즈비평가로, 또 공연기획자와 프로듀서로, 그리고 교육자로 치열하게 자신의 역을 맡아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캐논은 그가 지난 세월 함께 했던 국내 재즈 현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기에 저자가 가상의 피아니스트 한세영과 대화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을 도입했다. 비평가만이 아니라 음악과 연주자에 대한 애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가슴에 꾹 눌러 담았던 이야기였다. 그가 써야할 책이었다고 말할 때, 재즈 클럽의 문을 여는 순간 떠들썩한 공기의 떨림과 실내의 열기가 살갗을 때리는 듯 느껴졌다. 여기에는 지난 20여 년 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을 것이다.


 

책 전반에서 저자가 비평가로 지내는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 되물었을 법한 화두를, 재즈곡의 중요한 프레이즈(phrase)처럼 만나게 된다. 바로 비평가란 누구인가?’, ‘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비평가의 역할이란 물밑에 감춰진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눅눅하게 처져버린 우리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일”(7)이다. 그에게 비평이란 짝사랑하기다. 그렇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포기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을 주어본 이만이 상대방을 미워할 수도 있는 법이라고 이해한다. 조금 과장해본다면 배교자라도 한때는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의 비평은 연주자의 상처를 덧나게 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재즈 연주자들에게 여러 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대안과 자성의 소중함’(125)을 지향한다. 이런 내막으로 그동안 그의 눈길은 줄곧 무대 위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을 향하고 그의 숨소리 하나까지 듣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왜 비평을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나의 비평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게 해준데 대한 감성의 화답이다.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미학적 신념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이성의 손길이다.”(125)


비평가는 무엇보다 먼저 연주자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대상 없는 비평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124)이다. 지난 25년간 재즈계 현장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연주자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당부가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이 말들이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의 당부가 재즈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재즈나 재즈인이라는 표현을 다른 분야의 예술로 대체해보라. 여전히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미술가는? 사진가는 또 어떤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느 예술 분야를 떠올려보아도 대상 없이존재하는 분야는 없다.


 

또한 저자는 연주자의 궁극적인 목표가 스타일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과 주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는 세상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으로 대상의 상태를, 특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입은 상처와 슬픔을 제일 먼저 감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상처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짐으로써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27)을 갖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각자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172)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다. 비평가로서 그가 재즈계에 전하는 당부를 나는 모든 예술인들에게 전하는 정언명령으로 읽는다. 이 길이 고귀한 길인 반면,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코로나 시국으로, 또는 기득권이 들어앉은 높은 성벽에 가로막혀 재즈인의 길을 걷지 못한 연주자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손에서 놓아 버린 가슴 아픈 사연들이 찬바람 이듯 지나가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재즈라는 서브컬처는 굽은 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음악이 경력을 쌓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이유’(264)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 말을 읽고 어느 작가가 언급한 표현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의 글쓰기 수업 중 언급한 표현을 대강 옮기면 이렇다. ‘글쓰기는 결코 직업이 아니다. 글쓰기는 여러분이 좋아하기 때문에, 나아가 쓰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라고. 물론 음악인의 경력을 쌓는 문제는 중요하다. 다만 여기에 선행되어야 하는 건, 음악가가 자신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다. 달리 말해, 저자는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지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음악가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연주가가 아니기에 이런 말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비평가가 후배 연주자들에게 하는 말은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보다 먼저 재즈 현장에 뛰어든 사람으로서 그는 새로운 세대에 대해 무한한 관심과 지지를 보내면서, 음악을 가까이하는 대중에게는 국내에서 왜곡되어버린 재즈의 위상을 바로 알리고자 한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나름의 위치에서 분투해온 시간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10년 전 즈음의 기억이다. 이탈리아 재즈계의 거장 트럼페터 엔리코 라바의 공연에 간 적이 있다. 2012년 즈음이므로 당시에 라바는 이미 73세 정도였다. 젊은 시절만큼의 에너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분한 연주였지만, 특히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연주 중에 빈번히 젊은 연주자들에게 연주할 기회를 더 주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좋은 작품을 인정하는 기준으로 표현력(연주력), 독창성, 진정성을 들었다. 엔리코 라바의 연주 기량이나 독창성은 비평가의 입장에서 인상적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까마득한 후배 연주자의 소리를 정성껏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배려하는 모습은 선배 연주자가 보여주는 진정성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재즈를 여전히 잘 모르는 나에게도 그 날의 연주가 뭉클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이유다. 저자가 책에서 들려주는 진정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이 날의 연주를 떠올리며 읽었다. 언제 그의 연주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기약할 수 없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저자가 한국 재즈계와 후배 연주자들에게 하고자했던 말은, 문학을 하고 싶었던 중학생시절의 저자에게 친척이 해준 말에 아마도 모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의 고향을 잃지 마라.”(109) 앞서 이야기한 선배 연주자 엔리코 라바의 사례처럼 이미 정상에 오른 이들이 후배들에게 더 많이 배려할 때, 후배들은 새로운 마음의 고향을 얻게 될 것이다. 선배 연주자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후배 연주자들에게 길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재즈 1세대는 그야말로 어려운 여건에서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만든 세대다. 아울러 후배들을 많이 챙기고 배려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이제 그 몫은 다음 세대에게 주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후배 재즈인들이 해야할 일은 마음의 고향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이들에겐 힘겨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대로 대한민국에서의 재즈는 앞으로도 서브컬처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한 소수 음악이 사회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로부터 그 존재를 인정받을 때 젊은 연주자들은 최소한 마음의 고향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책을 읽는 동안 재즈비평가가 오랫동안 묵혀놓았던 이야기들을 밤새 옆에서 들은 느낌이다. 자연 생태계가 건강한지의 여부는, 생태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서로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종의 다양성 확보에 달려 있다. 한국 재즈계도 그렇다. 젊은 재즈연주자들이 마음의 고향을 잃고 존재 이유인 음악을 손에서 놓아버린다면, 한국 재즈 생태계의 다양성이 감소하고, 나아가 언젠간 대한민국 재즈의 미래 역시 소멸 위기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 오래도록 음악과 멀어져 있던 나 역시 한국 재즈계에 침묵의 봄이 오지 않길 바란다. 음악은 음악인 혼자 수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속한 생태계는 건강해야만 한다. 예술은 국내 어느 한 기업가가 말했던 것처럼, 한두 명의 천재가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분야가 결코 아니다. 효율성과 성과를 기준으로 예술인들을 평가하고 지원하는 것은 다양성이 확보된 생태계를 만드는 데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생명력을 잃고 하나의 화석처럼 되어 버린 퓨전 국악의 사례를 떠올리면 된다.


 

책을 덮고서 책에 등장하는 가상의 피아니스트 한세영을 다시 떠올려본다. 한세영이란 인물은 대한민국에서 소수 음악을 어께에 짊어지고 고군 분투해온 이 땅의 모든 재즈 음악인들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책에 제시된 한세영의 경력이 피아니스트인 점을 제외하면 저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닮았다는 점에서, 한세영은 저자를 비추고 있는 하나의 거울상으로도 읽힌다. 따라서 한세영이 하는 말은 비평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할 테다. 나아가 저자가 또 하나의 자신한세영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이 거울이야말로 하나의 캐논’(예술가들이 삶과 창작 과정에서 지켜야할 규범, 176)이었다는 생각도 해본다. 저자가 지향했던 삶과 마찬가지로, 그가 바라보던 연주자는 오늘도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 길을 헤매기도 할 것이며,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고 있을 것이다. 또 어디선가는 마음의 고향을 지키며 자신의 작품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마음의 고향을 지키며 자신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모든 예술인들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전영애 역, 도서출판 길, 91)









[책 속으로]

[1] "나는 재즈가, 수많은 이들의 갈채 속에 시대를 풍미하는 상업 음악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재즈를 그렇게 만들려는 시도가 되레 그 가치를 왜곡하기 쉽다는 점도 현장에서 몸으로 배웠다."(9)

[2] "삶과 동떨어진 음악은 현실 속에서 생명력을 얻지 못하며 울림의 폭도 좁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음악은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면, 음악은 없다."(70)

[3]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의 고향을 잃지 마라."(109)
- 문학을 하고 싶었던 저자의 중학생 시절, 친척 한 분이 저자에게 했던 말.

[4] "비평은 짝사랑이다. 비평가로 세상을 산다는 건 설렘의 포로가 된 채 ‘마냥 기다림‘의 끈기를 요구받는 일이다."(124)

[5] "비평가는 그대가 꿈에 그렸던, 그대의 작품을 누구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마주했던 열렬한 짝사랑의 주체였다."(125)

[6] "건강한 서브컬처로서의 소수 음악이 사회에 의해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건 견디기 힘든 폭력이다."(126)

[7] "연주자로서 눈여겨봐야 할 재즈의 교훈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 태도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있어요."(172)

[8] "세상 그 누구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모든 이들에게서 사랑받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생을 바쳐라."(231)
- 재즈 연주자 앤드루 시릴이 2014년 사천 국제 재즈워크숍에서 저자에게 건넨 말.

[9] "우리는 그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351)

[10] "(연주자는) 조건 없이, 자기 작품을 아낌없이 무조건 사랑하라."(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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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 시대의 아이콘 평전시리즈 2
앤 C. 헬러 지음, 정찬형 옮김 / 역사비평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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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에 이방인이 된다는 것

-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



C. 헬러 지음, 정찬형 옮김, [역사비평사] (2021)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삶은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대한 짧고 강렬한 평전이다. 잡지 편집자이면서 인물에 관한 논픽션작가인 앤 C. 헬러의 군더더기 없는 글이 돋보인다. 간결한 평전인 만큼 아렌트의 대표적인 정체성을 규정하는 세 가지 사항에 크게 초점을 맞추었다. 저자는 먼저 아렌트를 세계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게 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철학자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던 젊은 시절을 조명한다. 특히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공적·사적 관계, 그리고 유럽 대륙이 나치의 광풍에 휘말린 1930년대에 아렌트가 자신의 운명과 마주해야했던 경험 및 그가 지나야 했던 삶과 죽음의 경계로 독자를 이끈다. 마지막으로 아렌트가 미국으로 망명 한 후 그를 다시 깨어나게 한 사건, 곧 유대인 여성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를 언급하고, 이어서 그를 지식인 사회에서 인정받게 했던 역작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단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32) 이 말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 중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아렌트는 <뉴요커>지의 기자 자격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고 생각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그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한 것”(44)이라고 말이다. 아이히만 자신은 상부에서 시키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렌트의 기준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복종은 나치를 지지한 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어렸을 때 흔히 볼 수 있었던 학교 폭력 현장을 생각해보자. 눈앞에서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을 경우,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방관자로 있었다면, 이 방관자는 결국 폭력에 대한 지지나 다름없다는 경고가 된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왔을 때는 또 어떤가. 집단 자체가 하나의 모순 덩어리인 상황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종종 거대한 생산 장치를 이루는 하나의 작은 부품처럼 되어야 한다. 부당한 것, 불합리한 것들이 있을 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 방관자로서 살아갈 때 결국 우리는 우리 삶을 규정하는 거대한 부조리를 지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아렌트는 현대 사회와 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유형을 진지하게 고찰하여 우리에게 경고를 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우리를 어떤 선택의 경계로 내몬다. 더 이상 방관자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각 구성원의 판단과 행동 그 자체가 곧 정치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우리 삶의 문제점을 보다 더 진지하게 마주할수록 우리는 방관자일 수 없다.


 

저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요약해놓았다.

 


아렌트의 숨은 의도는 아이히만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대중사회의 인간’, 즉 사회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외롭게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로,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의 표적이 되기 쉬운 특성을 지닌 후기 산업주의 사회 특유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7)


 

이 문장만을 본다면 아렌트는 시대를 너무 빨리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아렌트는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고 비추어 놓은 것만 같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의식은 그가 미국으로 망명을 한 이후 쏟아낸 글들을 거치며 보다 총체적인 시각을 형성해 갔고, 결국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발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편 아렌트에게 재능을 갖춘 유대인 여성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는 또 다른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 아렌트가 유대인의 문제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야말로 비로소 그에게 고유한 문제, 그와 불가분의 관계인 정치적문제가 되었던 셈이다. 유럽 역사에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증오는 꽤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어느 사회든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개신교를 비롯한 현지의 종교 및 문화에 대한 동화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유대인에게 동화의 문제는 꽤나 다층적이고 복잡한 문제였다. 단순히 종교를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경멸의 시선을 바라보곤 했는데, 이들에게 동화의 문제는 곧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내면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106). 이는 곧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이 상황이야말로 창과 방패의 관계, 곧 모순이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동화의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태어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야만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단순히 고향을 떠나고, 고향을 상실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는 것, 곧 언어도 잃어버릴 위기를 에 놓이는 걸 의미했다. “가장 간명한 표현 수단인 ... 언어도 잃어버렸다.”(162) 이 말은 아렌트의 어머니 마르타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립된 생활을 하며 남긴 하소연이었다. 표류하는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렇게 다층적인 삶의 조건이 아렌트에게는 자신과 전혀 무관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들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사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렌트가 미국으로 망명 한 후 9년 째 되던 1949년에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이 바로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인 셈이다. 저는 이 책을 고독, 뿌리, 소속의 상실에 관한 명상록’(164)이라는 문구로 요약하면서, 책의 목적이 사람을 잉여란 존재로 만드는 사악한 의도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고독과 소속감의 상실이라는 경험에 터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165)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고독’, ‘소속감의 상실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는 징후가 아닐까 해서다. 계층과 세대 간 갈등과 소외, 역사 및 전통과의 단절과 괴리가 이토록 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런 증상은 이미 뚜렷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후기 산업사회의 모습, 이를테면 고도의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의 소외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 여건이 70여 년 전 아렌트가 했던 경고를 떠올리게 하지 않은가. 우리 삶을 점점 더 좌지우지하고 정치력을 거머쥔 대기업은 현대적인 맥락에서 전체주의 세력과 다를 바 없다는 자각을 준다. 아렌트가 말한 상황과 현재 우리 사회의 조건이 잘 부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얼마나 취약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아렌트의 사상에 비추어 더욱 실감하게 된다.


 

저자 헬러는 아렌트가 가장 어둡고 위험했던 시대에도 언제나 이방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아렌트의 행보는 어린 시절부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라 이해된다. 그럼 어두운 시대에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밝힌 바를 이용하여 정리해보면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 안의 작은 아이히만과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다. 아렌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우슈비츠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순간, 그리고 라헬 바른하겐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이런 문제들은 그에게 고유한 문제,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그가 단순히 방관자로만 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어두운 시대의 삶은 아렌트의 사상과 저작들에 이미 익숙한 독자들보다는 입문자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아렌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표 저작 몇 가지를 중심으로 여기에 영향을 준 아렌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 앤 C. 헬러는 태생적 조건(20세기 전반 유럽의 유대인)으로 경계인이 된 아렌트가 단순히 방관자로만 있지 않고, 이방인이 되고자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익숙함과 구태와 거리를 두고 새롭고 공정한 시각으로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했던 한 정치철학자의 삶을 소개해주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래픽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도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될 수 있겠다. 이 책은 탈출이라는 키워드로 미국으로의 망명 이전의 한아 아렌트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책이다. 이 그래픽노블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좀 더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책 속으로]


[1] "나는 단지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았다."(32)
- 재판을 받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말

[2] "아렌트의 숨은 의도는 아이히만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대중사회의 인간‘, 즉 사회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외롭게 표류하며 경제적으로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로, 허무주의와 전체주의의 표적이 되기 쉬운 특성을 지닌 후기 산업주의 사회 특유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7)


[3] "사람들이 모두 내면에 작은 아이히만을 갖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바로 그것이었다."(42)

[4]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 동일한 것이다."(44)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마지막에 쓴 문장


[5] "최소한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장점들을 강화시키고,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변호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111)


[6] "단순히 방관자로만 살 수는 없었다."(117)
"유대인이라는 것이 나의 고유한 문제가 되었고,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그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121)


[7] "내 삶을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계기는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알게 된 날이었어요."(156)


[8] "(대규모) 만장일치는 합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광신과 히스테리의 표현과 다름이 아니다."(159)


[9] "전체주의는 인간의 고독과 소속감의 상실이라는 경험에 터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165)


[10] "가장 어둡고 위험했던 시대에도 그녀는 언제나 이방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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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03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로는 좀 아쉬었는데
최근에 나온 새로운 평전이 인기
라 해서 일단 수급은 해두었답니
다.

<아이히만>도 다시 읽고 리뷰
를 써야지 했는데 결국 다시 읽
지도 리뷰도 남기지 못했네요.
 
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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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

- 고독한 얼굴를 읽고

 



제임스 설터(James Salter) 지음 |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

 



책을 덮으니 그 산은 마치 거대한 오벨리스크 같다라는 문장이 주는 이미지가 또렷이 떠오른다.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작가 제임스 설터가 54세 때 발표한 장편 소설 고독한 얼굴은 이처럼 산의 선명한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이 작품은 눈과 얼음으로 덮인 채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암벽과 이를 오르는 사람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야자나무가 있는 로스엔젤레스의 해안가에서 건물 지붕을 수리하며 살아가는 버넌 랜드라는 인물이다. 20대 중반으로 등장하는 랜드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멕시코계 여인의 집 창고 하나에 세 들어 살고 있다. 언뜻 보기에 구차하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랜드가 암벽을 타다가 이전에 함께 등반했던 동료 캐벗을 만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샤모니에 가보라는 캐벗의 말에 랜드는 자신이 속해 있던 곳을 떠나게 된다.

 


프랑스의 알프스 산지에 있는 샤모니에 도착한 랜드는 확고한 기쁨, 충만한 행복감을 다시 느낀다. 산악인에게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충만한 행복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책을 읽는 동안 줄곧 궁금했다.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바위처럼 내게는 그저 낯선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혹한 바위는 자연 조건과 사투를 벌이며 정상을 정복한 이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으로 보상한다. 랜드 역시 거대한 오벨리스크같다고 표현한 짙은 빛깔의 화강암 암벽 드뤼를 정복하고 만다. 함께 오른 캐벗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등 위험한 고비를 극복하고 말이다.


 

하늘로 치솟은 얼음 암벽에 오른 이들의 내부에는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이 채워진다.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산이란 열정을 불어넣어주고 생명력을 전하는 존재다. 다만 암벽은 이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산악인들은 자신의 손과 발을 지탱해주는 홀드를 붙든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자포자기의 심정 및 자기 번민과 반드시 싸워야 한다. 산악인들에게 자포자기의 심정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의지가 고갈된다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딛고 있는 홀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이제 랜드는 거대한 첨탑같은 드뤼를 정복하고, 이곳에서 조난당한 이탈리아 산악인을 구조하는 등의 활약으로 산악계에서 유명해지고 영웅이 된다. 그는 이곳에서 알게 된 카트린이란 여성과 파리로 와서 자신의 유명세를 즐기기 시작한다. 파리의 아늑함과 행복 속에서 이따금 샤모니를 생각하던 랜드는 이곳 생활과 기만적인 자신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낀다. 한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유명세에서 생명력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결국 다시 샤모니로 돌아와 이전에 등정했던 드뤼보다 두 배 높고 험한 워커에 오르고자 했다. 하지만 파리 생활로 무뎌진 열정을 안고 워커에 오르게 된 랜드에게 암벽이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줄 리 없었다. 한 인간의 내부에는 이미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는 마음이 교차하고 충돌하고 있었다.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찾아서

 


두려움과 의지의 고갈은 산악인에게 치명적이다. ‘넌 할 수 있어라고 마음을 다지면서도 결국 랜드의 내면은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만다. 그는 암벽에서 물러난다. 상상하기조차 아찔한 이 뾰족한 암벽을 도대체 왜 오르는 것일까? 그리고 이 존재가 어떻게 인간에게 그토록 확고한 기쁨과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것일까, 궁금했다. 상상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길은 없지만 산악인들이 느낀 충만한 행복감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 몇 가지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항상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 앞장서는 것이 운명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삶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사람은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초의 인간이다.”(188)


 

소설의 제목이 고독한 얼굴(Solo Faces)이기도 하지만, 산악인이 마주한 암벽 역시 'face'로 표현된다는 점은 소설이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될 여지를 준다. 샤모니에 우뚝 솟아 있는 험난한 암벽들은 각자 문명 이전의 고유한 남성성의 원형을 간직한 존재이자 장소로 읽을 수 있겠다. 샤모니의 암벽 드뤼를 가리킬 때 희고 거대한 존재’, ‘거대한 오벨리스크로 표현한 점은 떠올려보면 그렇다. 제임스 설터는 이 최초의 인간이 지녔을 법한 얼굴이 바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 그리고 이런 존재 자체가 바로 생명력을 지닌 인간의 모습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세상사에는 숨겨진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길이 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은 짐승의 지혜를 익히는 것이다.”(270) 여기에서 짐승의 지혜를 갖는 것은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집중하고 존재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암벽과 마주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홀드 하나에 걸고,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악인들에게 산을 오르는 일은 바로 문명 이전의 인간 원형에 가 닿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이 일에는 파리에서 만난 여인 콜레트가 말했듯 누구나 대가를 치러야했다. 산악인들이 대가를 치루는 곳은 암벽이었다. 눈과 얼음에 덮여 가려진 준엄한 바위 암벽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다. 이를 마주하고 오르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한다. 곧 암벽은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최초의 인간들이 문명을 일으키자, 문명은 이 인간의 본성을 광기로 규정하고, 이를 도덕과 규범으로 억압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여기에 길들여졌다. 문명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된 인간들은 열정을 잃고 생명력을 강탈당했다최고의 등반에 용기 이상의 것, 영감과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언급과 달리, 문명은 인간에게서 상상력마저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산악인들이 산을 찾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지만, 각자의 마음 속 보다 깊은 곳에는 최초의 인간이 지닌 생명력 넘치는 얼굴을 되찾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산의 암벽은 산악인들로 대표되는 인간이 문명으로 잃어버린 남성성 혹은 인간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넘어서야 하는 경계이자 전장(戰場)으로 읽힌다.


 

산과 달리 파리로 대변되는 문명은 인간을 도덕과 규범으로 길들인 곳이다. 대신 길들여진 인간에게 아늑함을 제공하고 쾌락과 명성 같은 피상적인 행복을 건넨다. 그 결과 많은 인간들이 순수한 열정을 잃어버렸다. 본질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된 이들에게 생겨난 공허함은 단지 랜드가 파리에서 만끽했던 물질적 보상 같은 다른 기호로 끊임없이 대체될 뿐이었다. 니콜을 비롯하여 파리에서 만난 이들에게서,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운전하던 차의 백미러를 통해 갑자기 늙어버린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문명 속에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소모된 삶이라는 질병에 걸린 셈이다. 이 늙어버린 얼굴이야말로 문명에 길들여진 최후의 인간이 지닌 모습일 것이다.

 


랜드는 산에서 추락하여 하반신 마비가 된 캐벗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가 권총으로 자신과 캐벗을 상대로 러시안 룰렛을 감행한 까닭 역시 캐벗이 생명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최초의 인간이 지녔던 얼굴을 되찾을 수 있길 요구하는 메시지였을 테다. 동료의 얼굴에 생명력과 충만한 행복감이 다시 넘칠 수 있도록 말이다. 현대 문명이 거세해버린 남성성은 소설 앞부분에서 설터가 스치듯 설정해 두었던 D.H. 로런스의 사진과도 연결된다. 이 사진은 랜드와 동거하던 여인 루이즈가 잡지에서 오려 붙인 것이었다. 로런스의 소설에서 엿보이는 주제 의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산업 문명으로 손상을 입은 남성성의 문제, 그리고 회복에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강요하고 억누른 인간들은 매일 같이 패배하고 바수어진 채, 뿌리 없이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랜드가 찌그러지고 못쓰게 된 차들을 취급하는 폐차장을 운영한다는 설정도 이 주제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폐차장으로 들어온 차들은 모두 거세된 남성성혹은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잃은 문명인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바로 문명에 의해 내상을 입고, 생명력을 상실한 인간들 말이다.


 

높은 곳에 올랐다가 낮은 곳으로 추락한 랜드는 날개를 잃은 새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랜드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다시금 고독과 태양을 즐기고 있다. 여기에 설터는 랜드가 뭔가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 병으로부터,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278)라고 씀으로써 그가 언젠가는 다시 최초의 인간이 지닌 얼굴을 되찾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현재 그의 삶이 미식축구 선수가 실수로 떨어뜨린 펌블 같은 상태일 지라도, 그 공을 다시 집어들 수 있는 시간은 남아 있다. 랜드가 새 연인 폴라에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 두려워 하지 말고.”(281)라고 한 말은, 꼰대스러운 남자가 여자에게 충고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독백이었다. 이 말은 그가 기자들에게 나는 (산이 아닌) 삶을 사랑합니다라고 했던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린다. 희망은 여전히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1] "바위는 따뜻하고 낯설었으며, 아직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다."
"바위는 바다의 표면과 같아서, 일정하긴 하나 결코 똑같지는 않다. 동일한 루트를 오르는 두 명의 등반가가 있다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등반할 것이다. 그들의 능력은 같지 않고, 자신감도 욕망도 같지 않다."(32)

[2] "침대에 누운 그는 육체적인 차분함보다는 훨씬 더 깊은 어떤 것, 삶 자체의 고동 같은 것을 느꼈다. 확고한 기쁨이, 따뜻함과 충만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47)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보다 더 가치 있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았다."(57)


[3] "산들은 희고 거대했다."(85)

"그 산은 마치 거대한 오벨리스크 같다."(87)
: 거대하고 험난한 봉우리 드뤼에 대한 표현


[4] "등반하는 사람을 벽에 매달릴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믿음이다."(108)

[5] "산을 오를 때면 그의 내부에서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그의 야망은 예전에는 평범했으나 드뤼 이후 달라졌다.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이 그를 가득 채웠다. 자신의 삶을 찾은 것이었다."(120)

[6] "항상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 앞장서는 것이 운명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삶에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사람은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초의 인간이다.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든 남보다 앞서 배운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힘을 주고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188)

[7] "파리, 그곳은 랜드가 이미 떠나고 있는 거대한 터미널 같았다. (...) 그는 잠시 그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에 불과했다. (...) 파리는 그를 버렸다."(216)

[8] "인간의 얼굴은 항상 변하지만 완전히 완벽해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 모습을 갖춘 것이다. 그것은 불변의 얼굴이다."(227)

[9] "그는 뭔가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 병으로부터,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중이었다."(278)

[10]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견디는 거예요. (...) 두려워 하지 말고."(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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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2-09-26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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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들을 위한 성스러운 책 

-에세 Les Essais를 만나 읽기 시작했다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심민화·최권행 옮김, [민음사] (2022)



 

말복이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확연히 달라진 기온을 느낀다. 덥고 비도 많았던 올 여름도 지나고 있다. 에너지가 바닥나도록 한 주를 보내고 주말에 거실에 누워 창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듣다 눈물이 핑 돌았다. 힘 빠진 매미 소리. 여름 끝의 마지막 생의 떨림 같이 느껴져서다. 문득 내가 사는 모습, 내 주변 가족의 모습이 떠올라 순간 울컥했더랬다. 명절 때마다 보는 조카들은 무럭무럭 자라는 반면, 어른들은 점점 더 허리가 굽고, 통증을 더 호소한다. 나이가 들어가서 그런가. 이런 나의 멜랑콜리가 웬일인가 싶다가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에 가까워 지다보니 생각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알라딘에서 두 달 정도 마일리지와 적립금을 모아 미셸 몽테뉴의 에세를 구입했다. 토막 시간을 내어 조금씩 읽는다. 반세기도 전에 수상록이란 제목으로 정성스레 번역되긴 했으나, 다시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번역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언젠간 다시 번역되지 않을까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던 셈이었다. 이제 새로운 번역으로 몽테뉴의 글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1권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을 번역하는 데 15여 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 밖에 옮긴이의 해설과 감회의 말도 좋았는데, 무엇보다 번역이라는 이 거대한 작업과 관련하여 그간 옮긴이의 고충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축약본 형태의 수상록을 몇 권 읽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이 책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면 오랫동안 곁에 두고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격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내게 에세무신론자들을 위한 성스러운 책, 혹은 성경인 셈이다(내가 이런 표현을 만들어낼 리는 없고, 어디선가 이 표현을 본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히 난 이런 표현을 만들어 낼 깜냥이 안 된다). 최근에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다가 파스칼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 놀라게 되었는데, 파스칼이 특히 몽테뉴의 에세를 많이 인용한 정황을 통해 그가 몽테뉴로부터 여러 모로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이해에 몽테뉴가 준 영향은 무시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에세는 영향력이 있는 책이다. 후대의 독자 및 작가들에 큰 영향을 남긴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파스칼뿐만 아니라 앙드레 지드, 랄프 왈도 에머슨와 같은 작가와 사상가들이 몽테뉴가 하는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파스칼의 팡세를 읽으면서 정리했던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파스칼의 글은 나와 인간에 대한 통찰을 통해 신으로 향하는 길을 터놓았다. 반면 몽테뉴의 글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다고 말했다. 곧 그의 글쓰기는 나를 탐구하는방편에 보다 가깝다.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인격적인) 신의 존재에 대해 줄곧 회의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고대의 신탁이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기적, 미신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과 달리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도록 몽테뉴의 글을 곁에 두고 읽고 싶어졌던 이유도 몽테뉴는 종교가 강요할 수 있는 특정 교리나 독단으로부터 자유롭고 열린 태도로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몽테뉴가 근대를 열어젖힌 한 사람이라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한편 몽테뉴가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에게도 영향을 준 정황이 보이는데, 우선 모비 딕의 앞부분에 실린 발췌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발췌록에서 멜빌은 에세에 수록된 레이몽 스봉의 변호라는 글 가운데 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인용부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요나서에 나오는 고래, 혹은 거대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 같다. 내용면에서도 작중인물인 이슈메일이 식인종 퀴퀘그를 편견 없이 바라보는 장면, 그리고 술에 취한 기독교인들보다 술에 취하지 않은 식인종과 함께 지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몽테뉴적인 태도 혹은 세계관이 엿보인다. 멜빌의 소설에는 그가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식인종들과 한동안 살았던 경험을 더하긴 했지만, 그보다 앞서 몽테뉴는 《에에서 식인종족 몇 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자신의 글에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멜빌은 에세의 이 장면에서 크게 공감하고 이 부분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런 정황을 보면 몽테뉴가 멜빌에게 준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보기에 충분하다.


 

이번에 완역되어 출간된 에세를 읽기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주목하게 되는 주제는 인간의 유한성’, 죽음에 대한 것이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죽음이야말로 몽테뉴의 평생에 걸친 주제였다. 사실 보다 넓게 보면 모든 문화 예술의 태생적 모티브는 다름아닌 죽음이라고도 볼 수 있는 면이 있다. 몽테뉴의 말을 들어보자.


 

이처럼 잦은 예들이 이처럼 예사로 우리 눈앞을 지나가는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떨쳐 버릴 수 있으며, 어떻게 매 순간 죽음이 우리의 멱살을 쥐고 있는 듯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자의 말에서 재인용)


 

몽테뉴는 30대 말에 은퇴했다. 이후 조상이 마련해 준 몽테뉴성의 원형 공간을 자신의 서재로 꾸미고, 이 방에 들어가 매일매일 읽기와 쓰기를 해나갔다. 매일 같이 죽음을 성찰했던 그에게 끊임없이 생각과 글을 생산해내는 둥그런 자궁 같은 서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사상가들을 인용하는 대목에서 이 죽음과 거리를 두어 대상화하고 이를 탐구하듯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원자론자들 혹은 에피쿠로스학파 계열로 보이는 사상가들의 말을 많이 언급했다. 몽테뉴의 말을 통해 그가 죽음이란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자 했을지 짐작해본다. 물론 그는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면서도 맹목적인 회의주의나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것 역시 스스로 경계했던 것 같다.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의 글쓰기는 결국 자신의 을 향했다.


 

나는 사람들이 여기서 꾸밈없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보통 때의 내 모습을 봐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그려 보이는 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35)


 

이어서 그는 이 글, 이 책의 재료가 바로 나 자신임을 재확인하며, 미래의 독자에게 자신의 소박한 희망을 전한다. 어쩌면 몽테뉴의 끊임없는 자기 확인과 글쓰기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한계를 인정하되, 이를 넘어서고자 했던 소망이 담긴 행위로 볼 수도 있겠다. 글로서 오래도록 가까운독자에게 기억되고 문화적인 유전자 을 남기는 행위로서 말이다. 후대의 수많은 독자와 작가들에게 그에 대한 기억과 영향을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셈이다.

 


그러면 몽테뉴가 글쓰기를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그가 스스로 재확인하고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지금/여기(hic et nunc)의 시간을 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에세에는 키케로나 세네카와 같은 고대 로마의 웅변가, 사상가의 말이 많이 언급된다. “미래를 근심하는 영혼은 불행으로 짓눌린다.”(52)와 같은 세네카의 말을 보면 현대인의 미래를 염려하는 습관이 근대산업사회에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생각보다 더 오래전, 그러니까 어쩌면 신탁에 의지했던 고대 문명에서도 인간이 미래를 근심하고 있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지금/여기의 삶을 사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야생 동물들과 같은 본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그것(잡다한 상념거리)이 어찌나 많은 악몽과 환상적인 괴물들을 낳아 두서도 목적도 없이 이것저것 쌓아 올리던지, 나는 정신의 어리석음과 기이함을 내 마음대로 관찰하려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정신 스스로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말이다.”(82)


 

몽테뉴의 이런 속마음을 알고 나면, 그가 정말 400여 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사람인지, 최근에 세상을 뜬 인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사상가들이 몽테뉴의 글에서 각자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게 에세무신론자들을 위한 성경처럼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앙심 깊은 이들이 매일 성경/불경 등 경전을 읽듯, 나 역시 에세를 매일 조금씩 읽어보기로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탐구하여 글을 써나갔던 몽테뉴의 모습을 상상하고 따라가다 보면, ‘지금/여기의 삶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걱정삼아 나에게 한 번 더 묻는다. 에세를 읽는 나, 잘 살고 있는 걸까?




 



추가로 함께 읽고 싶은 책들

: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책읽는수요일, 2012)

몽테뉴 여행기(필로소픽, 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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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09-08 15: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책이 서재에 여러 번 올라왔어도 한 번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초란공 님의 이 글은 몽테뉴의 <에세>를 드디어 제대로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게 하네요.

초란공 2022-09-08 15:35   좋아요 3 | URL
잠자냥님이 남겨주신 말씀이 더 감동이에요!! 읽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평안한 연휴 보내세요!

scott 2022-09-08 16: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 출판 해준 민음이 역자분들의 노고에 감탄하지만
첫장 부터 오타가 뙁!


초란공님 추석 밥상
에세 완독!
기원 합니다 ^^

초란공 2022-09-08 16:15   좋아요 4 | URL
눈 밝으신 scott님! 첫장 어디에요 어디? ㅋ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구요!

stella.K 2022-09-08 1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을 준비가 다 되어있군요.
<어떻게 살 것인가>꺼정. 현재 절판으로 나오는데...
<에세>가 안 나왔으면 <수상록>쯤 살짝 제꼈을 것 같은데 고민이네요.
저는 팡세도 안 읽었는데...ㅎ
근데 왜 울고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호르몬이...ㅋ
저도 올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를 살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 내가 덤으로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추석 잘 보내십시오.^^

초란공 2022-09-08 19:33   좋아요 2 | URL
추석 연휴 평안히 보내세요. 모든건 다 호르몬 탓입니다!! ㅎㅎㅎ

얄라알라 2022-09-11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친 transient님께서 마침 오늘 <몽테뉴 여행기> 리뷰를 올려주셨던데 초란공님의 페이퍼에서 또 만나니, 기억에 콕 담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22-09-13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페이퍼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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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극 허풍담 5를 읽고


요른 릴 지음, 지연리 옮김, [열림원] (2022)

 



이른바 문명 세계에서 성장한 한 인간이 북극의 오지를 방문하고 매료되어 16년을 눌러 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보기 드문 이 경험의 주인공은 덴마크의 작가 요른 릴이다. 그가 19세가 되었을 때 한 탐험가와 함께 방문한 그린란드에 매료되어 그대로 16년을 눌러 살았다고 한다. 북극 허풍담은 작가의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쓰인 소설이다. 북극 허풍담 5를 읽으면서 줄곧 작가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가 지구의 외딴 곳에서 발견한 매력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먼저 나온 북극 허풍담네 권을 아직 읽지 못했지만, 번역가가 직접 그린 재미있는 삽화를 보면서 각 인물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읽었다.


 

보급 물자를 실은 배가 그린란드 북동부의 항구 톰슨 곶에 들어오면, 이곳 사내들 사이에는 기대와 흥분이 감돈다. 배가 이 오지에 닿는 일은 일 년에 한 두 번이다. 누구는 거대한 사향소 사육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망을 기다리고, 다른 이는 새 파이프 담배 하나가 도착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또 어떤 시인은 반년 전 혹은 일 년 전에 자신의 원고를 문명 세계의 출판사로 보내 그 결과를 기다리기도 한다. 각자 하는 일이 어떻든지 간에 이 곳에 사는 사내들은 모두 사냥꾼들이기도 하다. 또 이들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수도원에서 침묵이란 기도를 배우는 수도승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문명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일과 불가사의한 일이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아마 앞부분에 자세한 내막이 나와 있을 테지만, 북극 허풍담 5에서는 어떤 실수(?)로 닐스 노인을 먹어버린 할보르 로네센이 다른 사내들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린란드 북동부의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타고 돌아온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한 남자가 얼떨결에 식인을 해버렸다는 소설의 설정부터 충격적이지만, 이 곳의 도덕은 오히려 실수로 벌어진 일인데 어쩌랴에 가깝다. 문명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이 이곳에서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소설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이곳 사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곳에서의 삶을 지배하는 규율은 문명이 만든 형이상학이 아니라, 철저히 경험주의적인 야생의 법칙이었다. 북극의 혹독한 기후와 절대 고독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선 문명이 만들어 낸 외곬수적이고 편집증적인, 그리고 신경증적인 규율이나 법과 도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문명 세계였다면 이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을 것이다. 문명 세계에선 사람을 잡아먹은 전적이 있는 사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신부님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도 할보르는 식인 살인마라는 오명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사형을 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선 현지의 야생과 집단의 규율이 곧 법이었다.


 

이 소설이 북극 허풍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아주 중요한 삶의 진실 하나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그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태도 혹은 철학이다. 기나 긴 겨울이 지배하는 북극 세계에서 봄은 아직 멀었고, 여름과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그러니 이곳에는 대부분 어둠의 시기만이 남는다.

 


이 시기가 오면 말 그대로 순간을 살았다. 하루가 가면 또 하루를 살고, 과거도 미래도 없이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이동했다.”(115)


 

이 부분에서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게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삶의 철학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순간을 산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이런 삶의 방식이야말로 대부분의 현대인이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지 모른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가 철학자와 늑대에서 저자는 인간의 삶과 늑대의 삶을 비교하고 있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늑대가 순간을 살아가는방식이었다. 이는 늑대의 본성(nature)이라고 해도 좋겠다. 고통이 닥치면 피하지 않고 그저 견디는 것이다. 이는 하루하루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반면 인간은 온전히 순간에 머물지 못하고 미래를 걱정하는데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순간을 사는삶의 방식은 무모해보이거나 미개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캐내어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를 줄곧 채찍질하곤 한다. 문명 세계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 더 안락한 삶을 살기위해 미래에 시선을 맞추게 한다. ‘지금을 희생하도록 무언의 요구를 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을 길들인 문명의 규율이다. 인간의 문명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양분삼아 유지된다고 볼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돈으로, 물질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따라서 문명 세계로 떠나 신부가 된 할보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대상은 대부분의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작가 요른 릴이 청년기의 대부분을 북극의 오지에서 보내면서 인간이 잃어버린 본성의 모습을 다시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할보르는 눈폭풍 속에서 며칠 동안 나아가다 죽음의 문턱에 서기도 했다. 동상으로 엄지발가락을 잃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는 이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미래를 갈망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평화가 내면에 자리 잡았다.”(177) 이 경험을 한 직후 그 앞에 구릿빛 피부의 여인 마 킨이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졌다. 할보르는 마 킨과 섬을 타고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할보르가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은 마 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허풍 같이 보이는 북극 사내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명 세계 사람들이 잃어버린 본성일 것이다. 문명은 사람들을 북극 오지의 사람들보다 더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고립시켜버렸다. 문명인들은 곧 순간을 사는 법을 잃어버린 셈이다. 요른 릴이 줄곧 이야기하고자 하던 것이 바로 이런 삶의 양식이 아니었을까. ‘문명인들의 행복감은 물질에 의존적이고 조건적이며 피상적이다. 반면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북극 사내들이 느낀 행복감은 삶에 보다 밀착되어 있고 본질적이었다. 행복감의 결이 분명 달랐던 것이다.


 

할보르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릿빛 여인 마 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그린란드를 떠났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두 사람이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다시 북극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또 다시 문명 세계의 규율에 영향을 받고, 여기에 익숙해져가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린란드에는 다시 봄이 오고 북동부 항구 톰슨 곶에는 물자와 소식을 가득 실은 베슬 마리호가 들어왔다. 스스로를 좌초된 인생들이라고 부르는 북극 사내들의 세계에 여전히 커다란 행복과 평화가 깃들 수 있을까? 아직 읽지 않은 앞부분이 궁금하고, 동시에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책 속으로]



[1] "봄은 아직 멀었다. 따라서 즐거운 일도 없었다. 여름은 자잘한 기쁨을 몰고 왔지만 황당하게도 왔는가 싶으면 그새 지나갔다. 가을도 마찬가지였다. (...) 그러니 남는 건 어둠의 시기뿐이었다. 이 시기가 오면 말 그대로 순간을 살았다. 하루가 가면 또 하루를 살고, 과거도 미래도 없이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이동했다."(115)

[2] "할보르, 미친 건 우리가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지. 놀랍긴 하지만 불가사의한 일은 삶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어. 그런 걸 부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해."(176)


[3] "그는 이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미래를 갈망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평화가 내면에 자리 잡았다."(177)

[4] "안톤에게 그해 봄은 특별한 계절이었다. 젖먹이 송아지가 똥을 싸듯 시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215)

[5]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신부님이기도 했지만, 사람을 잡아먹은 전적이 있었다."(249)

[6] "그렇게 그들은 로이비크가 썰매 가득 고철과 강철 케이블, 용접용 램프를 싣고 도착할 때까지 사랑의 시간을 살았다."(250)

[7] "할보르는 행복했다. 행복한 빛에 휘감기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과거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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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0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상 추카!

초란공님은 허풍 1도 없으실 것 같습니다 ^ㅅ^

이하라 2022-10-0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2-10-0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새파랑 2022-10-0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2-10-07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저는 왜 못 본거지요 ㅎㅎ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

그레이스 2022-10-07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책
축하드려요~
초란공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