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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 Generation>

하비 피카/ 풀 볼 (글)

에드 피스커 (그림)

김경주 옮김

 

[책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들 모음]

 

미국의 현대 역사에 있어서 60년대는 그 언제보다도 역동적이고 사건 사고가 많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사회, 문화 및 예술 등의 사회 모든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분출하고 충돌하던 시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히피문화, 여권운동(성차별 반대), 인종차별반대 운동, 케네디 대통령 암살, 루터 킹 목사 암살, 미국의 베트남 전 참전 및 반전 운동 확산, 68혁명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60년대를 특징짓는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의 한 부분에서 큰 역할을 한 문화적 요소로서 '비트 세대'를 반드시 고려해야할 것 같다. '비트 세대'는 대체로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를 관통하는 큰 문화적 흐름의 하나였다.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저항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며, 미국의 작가 들에게 좀더 색다르고 도전적인 시와 산문을 쓰도록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의 문학작품 및 생활에 큰 영향을 주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 비트 세대들은 동성애에 대해 말하고, 징집 반대, 반전주의, 마약복용 허용 등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생활방식으로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비트 제너레이션>은 미국 현대사를 이루는 중요한 19세기 중반의 비트 세대에 한정해서 조명하고 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통해 보다 생생하게 이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트 세대'들의 대표 인물인 잭 케루악(Jack Kerouac),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urg),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를 중심으로 이들을 둘러싼 미국 문화의 한 단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비트 세대'에 대한 정보를 문학이나 역사를 통해 접하게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진'이라는 분야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57년 스위스 태생의 사진작가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는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찍은 사진들로 만든  <The Americans>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 사진집은 사진사적으로 기존의 근대 사진을 뛰어 넘어 현대 사진으로 넘어가는데 큰 영향을 준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대단한 테크닉이나 위대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의 모호한 연작이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 최강의 부유한 시절을 보내던 미국에서 어떤 점에서 보면 기존의 다큐멘터리적인 사진들이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연작의 형태로 미국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호불호가 매우 강했을 것이다. 후에 잭 케루악이 이 사진집에 주목하고, 널리 이야기하면서 더욱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와 잭 케루악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했지만, 이 <비트 제너레이션>에는 그 친분을 알 수 있는 대목이 한 문장 나온다.

"케루악과 긴즈버그는 함께 썼던 시 <풀 마이 데이지>를 로버트 프랭크, 알프레드 레슬리와 함께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케루악의 나레이션은 최고였고, 독립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44면)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는 독립영화 제작도 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 바로 케루악과 긴즈버그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한 줄 밖에 단서를 찾을 수 없었지만, 매우 흥미로운 정보였다. 특히 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은 이들의 작업을 찾아보면 케루악과 긴즈버그의 시와 이들의 영화화 작업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57년 9월 미국 일간지 <New York Times>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On the Road>에 대한 서평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1957년에 잭 케루악과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The Americans>의 발간은 이미 비트 세대의 분출이 여러 분야에서 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비트 세대'의 중심 인물들의 생활을 보면(마약과 동성애, 심지어 강도와 우발적 살인) 일반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거부감을 야기할만하다. 마약을 한 상태에서 여자 친구의 머리에 유리잔을 올려놓고 윌리엄 텔 놀이를 하다가 여자 친구의 머리에 총을 쏘아 죽인 윌리엄 버로스의 일화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비트 세대들에 대한 보다 생생한 묘사를 통해 이들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면모에 더욱 주목하게 되고, 미국 역사의 한 단면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사소한 일화일지는 모르겠지만 윌리엄 버로스의 유명한 소설 <벌거벗은 점심 Naked Lunch>가 원래는 <벌거벗은 욕망 Naked Lust>였던 것을 앨런 긴즈버그가 잘못 읽었고 이 제목에 대해 잭 케루악이 비난한 사실로 인해 정해진 제목이라는 일화 등은 <비트 제너레이션>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래픽 노블을 읽어나가니 영화 <킬 유어 달링 Kill Your Darling>가 생각났다. 이 영화는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 앨런 긴즈버그 및 루시엔 카의 젊은 시절을 배경으로하는 영화였다. '비트 세대'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가지는 데에 이 영화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실제 있었던 사실과 다른 점들은 있을 수 있으니 당대의 배경을 이해하는 정도로만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한다.  

 

 

(불만스러운 점들)

책의 편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트 제너레이션>에 대해 독자로서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텍스트가 너무 작아 읽기에 눈이 아팠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모두 시력이 좋은 사람들만을 가정한 것인지... 나는 책을 읽으며 상당히 불편했다. 일반 만화보다 글이 많은 그래픽 노블의 특성과 독자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이렇게 책을 만들었을까. 나아가 책의 막바지에 이른 184페이지 부터는 잠깐이지만 글자 크기가 더욱 작아져있다. 이렇게 편집할 요량이면 왜 판형을 더욱 키워서 글자를 크게하고 가독성을 높이는데 좀더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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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이산하 시집 [창비]

'지옥의 묵시록'을 읽다가 남기는 잡문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 나온 시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시집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국어와 문학을 제일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어쩌다' 나이가 들어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나 역시 궁금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다만 책을 읽다보면 가끔 책에서 소개되는 시집이나 시인에 대해 알게되고, 궁금해지긴 했다. 아마도 아직 남아있는 '중년의 호기심',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모든 결과는 무언가의 우연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가. 그렇게 더듬더듬 시도를 해보게 된듯하다.


학창 시절에 무언가를 좋아하고 몰입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 그 무언가에 손을 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나이가 들 수록 이전에 형성된 관성으로 계속 살아가게 마련아닌가. 학창 시절에 음악을 좋아하고 그 세계를 탐험해보지 않은 이가 나이들어서 클래식이나 재즈를 듣기란 매우 어렵다.


내가 시에 그것도 뒤늦은 나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 수록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젊은 시절의 치기가 빠져서일까, 아니면 나의 '별볼일 없음'을 이제서야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무의식 속에 쌓아둔 나의 결핍감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호기심이란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댄 오랜 아쉬움인지도.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이산하 시인의 <악의 평범성>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단지 호기심에서. 아직 시를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나마 내게 아직 이런 호기심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따름이다. 그렇게 시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첫 번째 시 '지옥의 묵시록'부터 '턱' 걸려버렸다. 머뭇머뭇 문지방 밖에서 주저하면서 방안을 쳐다보는 소심한 강아지처럼 나는 시의 눈치를 살핀다.


시는 울음을 이야기한다. 벤야민과 니체의 울음을 말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어느 공원에서 아침 산책 중이던 니체는 어느 마부가 모질게 때리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는 이야기. 니체의 연보에는 그가 우는 동안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시의 마지막 문장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10)에서 머뭇거려진다. '표면이 심연인 듯'한 울음은 또 무엇일까. 금새 이해가 되진 않는다. 이 부분이 무척 궁금했다. 사람들은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할까. 이런 궁리를 하는동안 반나절이 지났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을 떠올렸다. '닭똥같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온 몸으로 우는 아이들의 울음을 말이다. 매일 같이 품에 안고 다니는 인형을 잃어버린 아이는, 세상이 무너진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을 때 보여주는 아이들의 울음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표면과 심연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우는 그런 울음이란.


나는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그러니 이 문장이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내가 '표면이 심연인 듯'한 울음을 울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오늘은 시 한 편 읽었다.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10)
- 시 ‘지옥의 묵시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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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10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년의 시읽기! 저말입니까 하고 들어왔어요. 표면이 심연인듯? 초란공님 설명들으니 가슴에 와닿네요. 세상이 무너지는. 무너진듯 느껴도 아닌척 무슨무슨척하는게 어른인거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님 ~

초란공 2022-01-10 11:23   좋아요 2 | URL
전 아직 어른이 아닌가 봅니다 ㅜㅜ ‘척‘을 못해요... ^^;;

2022-01-10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0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2-01-11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행복한책읽기님 덕분에 이산하 시인의 시를 조금 맛보게 되었는데 초란공님께서도 좋은 에세이 올려주셔서 감사드려요. ‘닭똥 같은 눈물‘과 ‘표면이 심연인 눈물‘ 아! 깊은 읽기와 느리게 생각하기 과정이 느껴집니다

초란공 2022-01-11 19:34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 알게된 시인인데 젊은 시절에 정말 고생많으셨더군요 ㅜㅜ

2022-01-11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1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죄와 벌을 읽으며 옆길로 새어 헤매기

 



이번 글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다가 옆길로 새고 헤맨 기록을 모아본다. 지나친 상상이라고 비난하실지 모르겠다.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는 읽다보면 어느 새 딴 생각을 하곤 한다. 아니면 집중력이 약하여 쉽게 옆길로 새기 때문에 독서를 빨리 못하는 것일까. 오늘 쓴 글을 보니 작품의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어느 한 부분에서 마주한 상황과 관련하여, 다른 작가의 작품을 떠올려보고 나름대로 상상력을 가미해본 작업이다. 죄와 벌을 읽으면서 함께 읽기의 제안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은 이후 추가 독서를 위한 독서지도 만들기 혹은 독서 계획이 될 수도 있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략 6가지 장면에서 출발하여 옆길로 새고 헤매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 결과다. 상상력을 가미하긴 했지만 각자 나름의 무모한근거도 곁들인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글은 작품의 이해에 하등 도움은 안 될 것이다. 다만 한 분이라도 재미있었다면 충분하다.

 




[1] 로쟈는 (lice, )'를 왜 그토록 혐오했을까?

 

어릴 때 어머니가 내 머리 속에 있던 하얀 벌레를 잡아 죽이셨던 기억이 난다. 손으로 누를 때마다 빨갛게 터지던 녀석들. 바로 머릿니다. 머리에 가루약을 넣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죄와 벌에서 로쟈는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댄다. “난 단지 이를 죽였을 뿐이야, 소냐. 무익하고 혐오스럽고 해악을 끼치는 이 말이야.”(문학동네, 2, 226) 아무리 전당포의 고리대금업자라고 해도 힘없는 노파를 라고 규정하고, 혐오발언을 일삼으면서 생명을 빼앗은 일은 경악스럽다. 게다가 로쟈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한다. 자본의 힘으로 법을 다루는 이들과 공모하여 죄를 면하거나, 초범에 반성문 열심히 쓰면 풀어주는, 망가져버린 우리나라 법정에서나 먹힐만한 이유 아닌가. 문장만을 따로 떼어 보자면 로쟈의 변명처럼 심각한 인간혐오표현이 따로 없다. 다시 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는 에 대해 혐오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던 것인지 모른다. 도대체 이 작은 녀석들이 어떻게 내 몸에 들어와 기생할 수 있었을까.


 

최근에 읽은 치명적 동반자, 미생물(도로시 크로퍼드 지음, 김영사, 2021, 이하 미생물)을 읽으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을 때 등장인물들이 살았을 법한 환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보인다. 미생물에 따르면 밀집되고 위생이 불량한 열악한 환경에서는 이질,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등 대변-구강 경로로 전파되는 병원체가 퍼지기 쉽다. 이 중에서 발진티푸스를 선택해본다. 이 질병은 리케차라는 미생물에 의해 발병한다. 이 녀석은 DNA염기분석 결과 오래전부터 쥐의 몸에 기생해온 발진열 리케차에서 진화된 것으로 추정’(238)된다. 무엇보다 인간이 수렵채집생활(이동생활)에서 농경생활(정착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집에 함께 머물던 쥐들을 통해 인간과 접촉이 증가했을 것이다. 그 결과 발진티푸스 리체차라는 병원체는 몸니(body lice)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발진티푸스에 얽힌 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로쟈가 되고 싶어 했던 나폴레옹, 그가 일으킨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미생물에서 저자는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을 위해 감행한 181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정복을 위해 50만 명이 넘는 병사를 거느리고 모스크바로 출정했다. 이 과정에서 질병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고 낙오했는데,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병력이 1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아가 최종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생환했던 병력은 불과 35천 명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제대로 된 전투를 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던 것은 무엇보다 발진티푸스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듬해인 1813년에 나폴레옹은 또다시 50만 명을 징집하여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데, 결국 발진티푸스 리케차라는 병원체가 유럽을 정복하고자 했던 나폴레옹의 열망을 꺼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만다.


 

미생물에 따르면, 1880년대 중반에 발진티푸스는 개인과 사회 위생의 향상으로 서유럽에서는 보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는 수천 명이 발진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도 발진티푸스가 대규모로 유행하여 약 300만 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죄와 벌이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했던 해는 1866년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쓰던 이 시기에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괴롭히던 질병이었다. 여기에서 바로 몸니가 이 병원체(리케차)를 매개하던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가난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모든 이들의 몸에 예외 없이 기생했을 는 그저 혐오와 박멸의 대상이었을 것이 분명해진다. 오죽하면 사상가, 정치가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회주의가 이를 박멸하지 못한다면 이가 사회주의를 박멸할 것이다.”(같은 책 재인용, 243)라고 와의 전쟁을 선포할까. ‘를 보기 힘들어진 요즈음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에서 를 그토록 혐오하며 썼던 이유를 역사 속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2] 로쟈의 꿈과 니체와의 관계


 

죄와 벌의 전반부에서 로쟈가 범행을 저지르기 하루 전에 거리를 방황하고 술을 마신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에 삼일 째 거의 먹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술을 퍼마신 로쟈는 돌아오던 길에 숲에서 다리가 풀리고 기절하듯 잠을 자버린다. 이 때 로쟈는 무서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린 로쟈는 아버지와 묘지로 가는 길에 술집 옆에서 벌어진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비쩍 마른 암말에 매어둔 짐마차에 여러 명이 탄 채, 말주인은 채찍과 몽둥이로 말을 죽도록 때린다. 결국 주인은 쇠 지렛대로 말의 등을 내려치면서 숨통을 끊어놓는데, 꿈속의 어린 로쟈는 비명을 지르며 피투성이가 된 말의 얼굴을 끌어나고 입을 맞추고, 눈과 주둥이에도 입을 맞추며 흐느껴 운다.


 

아마 많은 분들이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부분은 니체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에피소드를 연상케 한다. 니체의 연보를 보다가 발견한 사례인데, 니체가 45세이던 18891월에 있었던 사건과 관련이 있다. 니체가 머물던 이탈리아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그는 채찍에 맞는 말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싸 안다가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때 니체의 친구 오버베크가 바젤로 데려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니체는 죄와 벌에서 이 장면을 읽고 영향을 받은 바가 있을까?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니체에게 아주 큰 영향을 준 소설가임에는 분명하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다. 그를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행운 중 하나다.이 정도라면 니체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인간에 대한 치밀한 심리묘사를 보여준 도스토옙스키를 정밀하게 읽고 그 영향이 고스란히 몸에 각인되지는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 간질환자라는 공통점 혹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예민한 감수성 같은 것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의학적인 소견은 아니지만, 간질 발작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후 두드러지는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도 간질로 고생했다. 그는 28세였던 1849년에 한 비밀모임에서 급진적인 비평가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짜인 각본에 의한 가짜 처형식이었지만 총구 앞에 섰다가 감형된 이후, 그는 이듬해에 수감된 감옥에서 처음 간질 발작을 경험했다. 니체도 말이 무자비하게 채찍을 맞는 현장에서 말에 대한 연민과 고통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간질 발작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죄와 벌에서 로쟈의 꿈과 니체가 20대 초반에 이 소설을 읽고 영향을 받았던 것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심리학적 주제가 될 수 있겠다. 분명한 사실은 니체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3] 알베르 카뮈의 전락(轉落)죄와 벌의 연관성


 

알베르 카뮈는 생의 말년이던 1956(당시 43)전락(轉落)(이정림 옮김, 범우사)이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카뮈가 정치 활동에서 은퇴한 후 언론계로 복귀한 시기에 쓴 장편소설이다. 파리에서 유명한 변호사로도 활동했던 소설의 화자는 어느 날 밤 파리의 센 강에 있는 다리를 건널 때, 물속으로 투신한 여자의 소리를 듣고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친다. 양심의 가책이 내는 소리였을까. 그는 이후에 갑자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이후 네덜란드로 와서 사는 이 남자는 자신을 고해 판사라고 말하면서 소설 내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독백을 이어간다. 상황 자체가 그야말로 부조리한 경우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수많은 도시 사람들이 익명성 속에서 살면서 접할 법한 상황은 아닐까. 이 작품이 오로지 독백으로만 채워지기에 카뮈의 다른 책보다는 수월하게 나아가진 않지만, 꽤나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부조리한 연극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다.


 

나는 이 장면을 죄와 벌에서 다시 떠올렸다. 로쟈는 동생 두냐의 약혼자 루진과 충돌한 장면이 나온다. 이후 라주미힌이 로쟈의 돈으로 사다준 옷을 입고 술집에 들르는데, 이곳에서 로쟈는 경찰서 서기관 자메토프를 만나 내가 살인자라면 어쩔거냐고 협박하기도 한다. 범행 후 예민해져 있던 로쟈가 루진과 충돌하고, 술을 마신 다음 어느 다리를 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로쟈는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든 여자를 바로 앞에서 목격한다. 이 장면에서는 목격자가 많은데다 순경이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어 여자를 구한다. 나는 카뮈가 이 장면을 읽고 부조리한 상황을 설정해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전락(轉落)을 번역한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카뮈는 이 소설에서 부조리와 모순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만약 죄와 벌에서 나온 장면에서, 목격한 사람이 한 밤중에 나 혼자였다면, 나는(혹은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카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다소 무리한 상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찾아낸 무모한근거는 카뮈가 일종의 도스토옙스키 전문가(혹은 덕후?)’였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카뮈는 젊은 시절 알제 방송국 극단의 희곡 배우로 활동했고, 희곡 <아스튀리의 반란>을 비롯한 여러 희곡을 썼던 극작가이기도 했다. 아마추어 연극단체를 조직하기도 했고, 극단을 운영하며 배우 및 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1959(46) 2월에는 앙트완느 극장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각색하고 공연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이 연극으로 지방 순회공연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공연한 연극에서도 이반 역으로 무대에서 열연했다. 이 두 소설을 수도 없이 읽었을 카뮈가 죄와 벌을 읽지 않았을까? 그는 이미 생활이 극단 및 연극과 분리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런 그가 죄와 벌의 운하 위 다리 장면에서 부조리한 상황을 설정해보지 않았을까. 옆길로 새어 해본 상상이다.


 

여기에 카뮈가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꿰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근거가 한 가지 더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락(轉落)은 화자 혼자 등장하는 모노드라마 같은 소설이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장광설로만 채워진다. 이러한 형식은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다.”(도스토옙스키 고백록, 제윤 편역, 을유문화사, 이 책에 실린 소설)로 시작하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견주어볼 수 있다. 이 중편 소설에서 화자인 는 소설 내내 전락(轉落)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독백을 이어간다. 카뮈는전락(轉落)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사용한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국 카뮈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열심히 탐구하면서, 그로부터 발견하고 알아낸 것들 준거로 삼아(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아주 잘 훔치고 베껴서) 자신의 창작으로 활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카뮈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도스토옙스키 덕후였으니까.



 

[4] 프란츠 카프카 변신과의 관계


 

죄와 벌을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카프카를 떠올렸던 것은 이 소설에 계속 등장하는 때문이 아니었다. 죄와 벌에 거미가 한 번 언급된다는 걸 알고 계시는지? 로쟈가 소냐를 찾아가서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며 나누는 대화 중에 등장한다.


 

방금 당신에게 대학 다닐 돈이 없었다고 말했지. 하지만 알아? 난 다닐 수 있었는지도 몰라. 필요한 돈은 어머니가 보내주셨을 테고, 신발이나 옷, 빵을 살 돈은 내가 직접 벌 수도 있었어. 분명 그랬어! 과외 자리도 들어왔었어. 은화 반 루블씩을 제안했지. 라주미힌은 일을 하잖아! 근데 난 악에 받쳐서 하려 하지 않았어. 정말 악에 받쳤지! (좋은 단어야!) 그때 난 거미처럼 방구석에 몸을 숨겼어. 당신도 개집 같은 내 방에 와서 봤잖아... 소냐, 낮은 천장과 비좁은 방이 마음과 생각을 억압한다는 걸 알거야!”(2, 227)

 


카프카가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로쟈가 범행 후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천장이 낮고 좁은 자신의 방속에 거미처럼 몸을 숨겼던장면에서 카프카는 책을 멈추고 새로운 상상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이를 테면 자신의 방 속에 해충으로 변신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 카프카의 작품을 읽었기에 20년이 지나도 기억이 남아 있다. 나는 변신을 훈련소에서 처음 읽었다. 기초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에서 추가 직무 훈련을 받느라 몇 개월 더 머물던 때였다. 당시 저녁 시간 2시간 정도는 훈련생이 무언가를 읽을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책을 읽지 않던 시절이어서 내가 문고에서 고른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 작품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얇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공지영의 고등어같은 책을 진중문고에서 찾아볼 수 없었는데, 카프카의 이 소설은 어떻게 부대 내에 배치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소설 역시 부조리한 현실 혹은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무자비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말이다.


 

변신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전영애 옮김, 민음사)

 


지금 다시 이 부분을 보면 그레고르 잠자가 변한 해충은 죄와 벌에 등장하는 거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한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 실직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어느 사회든 위기가 찾아온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상황이 한 가족에게 닥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말이다. 카프카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식인이었지만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도 일했던 경험이 있다. 그가 내일을 담보로 수익을 얻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간파하지 못 할리 없다. 특히 폐결핵을 비롯한 질병으로 여러 번 병가를 내면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였다. 그러므로 카프카는 보험도 없이 위태롭게 살아가야 했을 수많은 가족들이 겪을 수 있는 현대인의 조건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설정해놓았던 것이다. 가족에게 돈을 벌어다주지 못하는 가장, 혹은 구성원은 가족에게 부담을 지우는 존재, 나아가 저거라는 사물로 지칭된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혐오를 고스란히 받게 될 상황을 떠올려보는 일은 그에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서로에게 지옥이 될 수밖에. 이 소설이 지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전염병으로 일상이 통제받는 상황에서 문을 닫는 많은 상점 주인들은 누구나가 우리 시대의 그레고르 잠자. 카뮈뿐만 아니라 카프카의 작품처럼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을 그려낸 작가는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카프카가 도스토옙스키를 탐독했다는 기록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로쟈가 전당포 노파를 무익하고 혐오스럽고 해악을 끼치는 이라고 대상화했던 장면에서 카프카는 작품의 모티프를 얻었을 법하지 않은가.



 

[5] 톨스토이 부활과의 유사성 및 함께 읽기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사람인 톨스토이(7살 연하임) 역시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톨스토이가 53세이던 1881년에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했을 때 톨스토이가 크게 슬퍼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탐독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죄와 벌에서 로쟈는 유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나는데 이때 소냐가 로쟈를 따라간다. 소냐는 그의 곁에서 인간이 새로워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마련해준다. 반면 부활에서는 카튜사 마슬로바라는 여인이 죄를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이동하는 과정에 귀족인 네흘류도프가 동행한다. 그는 귀족의 신분으로 젊은 시절 카튜사를 범했는데, 이 일로 그녀는 억울하게 쫓겨나 매춘부가 되었던 것이다. 죄와 벌에서 소냐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다만 이렇게 표면적인 유사성 말고도 두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부활은 톨스토이 사상의 진수가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에는 인간 특히 민중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닮아 있다. 다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한 인간의 부활 과정이 가능성으로만 암시가 되면서 소설이 끝나는 반면, 톨스토이의 작품은 바로 이 부분을 작가가 깊이 있게 탐구해나갔다.


 

나아가 집필에 10년이 걸린 부활에서 톨스토이가 참고한 실제 사건은 토스토옙스키가 작품에 활용했던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에 기반한다. 역자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이 작품의 전신인 코니의 이야기불쌍한 로잘리야 오니와 그녀의 유혹자 이야기라 불리는 사건에서 소재를 취했다. 대신 톨스토이는 젊은 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한 인간(네흘류도프)과 엄혹한 현실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던 취약한 여인(카튜사) 두 사람이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새로워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는 두 작품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 작품을 함께 읽기를 제안해보는 것이다. 비슷해 보이는 설정과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며 각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이 내게는 흥미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삶의 모습은 크게 달랐다. 한 사람은 도박과 간질로 힘든 삶을 살았다. 다른 한 사람은 부유했지만 작품의 저작권과 재산분배로 말년에 부인과 자녀 사이에 분쟁을 겪었다.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처럼 불행의 이유도 가지가지였던 셈이다. 그래도 두 작품을 비교해보니 두 작가가 사람에 대해 던지는 연민의 시선과 인간애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6]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과 도스토옙스키


 

글을 마치면서 죄와 벌에서 눈여겨본 대목 하나를 골라본다. 로쟈가 시베리아 감옥에서 앓아누워 있을 때 꾸었던 꿈에 대한 대목이다. 다소 길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라 빠르게 지나쳤을 수 있는 이 부분을 다시 읽어 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그는 사순절이 끝날 무렵부터 부활절 내내 병원에 누워 있었다. 이미 회복되고 한 후 그는 아직 고열로 헛소리를 하며 누워 있을 때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병중에 그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무서운 전염병이 아시아 깊숙한 곳에서 유럽으로 퍼져 전 세계가 희생될 운명에 처한 꿈을 꾸었다. 선택받은 아주 소수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새로운 선모충, 사람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미생물이 출현했다. 그런데 이 생물체는 지능과 의지가 부여된 영적인 존재였다. 그걸 몸에 받아들인 사람들은 바로 귀신이 들린 듯 미쳐버렸다. 하지만 전염된 사람들은 결코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대단히 똑똑하고 진리를 흔들림 없이 따르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판단, 학문적 결론, 도덕적 신념과 믿음을 그 누구보다 더 확고부동하게 여긴 것이다. 마을 전체, 도시 전체와 사람들이 전염되어 미쳐버렸다. 모두들 불안에 떨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들 진리가 오로지 자기에게만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했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울고 손을 쥐어뜯었다. 누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어떤 걸 악으로, 어떤 걸 선으로 여겨야 할지 합의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무분별한 적의 속에 서로 죽여 댔다. 서로를 향해 온전한 군대로 뭉쳤지만, 이미 출정한 군대가 갑자기 자기 편을 죽이기 시작했고, 대열이 무너지면서 군인들은 서로에게 덤벼들어 찌르고 베고 물어뜯고 잡아먹었다. 도시에서는 온종일 경보를 울려댔다. (...) 각자 자신의 생각, 자신의 처방만을 주장해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일상적인 생업마저 내팽개쳐졌다. 농사도 짓지 않았다. 어디선가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몰려들어 뭐든 함께하는 데 동의하고 헤어지지 않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금세 방금 결심한 것과 완전히 다른 짓을 벌여서 서로를 비방하기 시작하더니 주먹다짐과 칼부림이 일어났다. 전염병은 기세를 떨치며 멀리, 더 멀리 퍼져갔다. 전 세계에서 단지 몇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들은 순결하고 선택된 사람들로, 새로운 인류를 낳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땅을 새롭게 정화하도록 예정된 사람들이었지만, 누구도 어디서도 그런 사람들을 보지 못했고, 누구도 그들의 말과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2, 429)

 


우선 아시아 깊숙한 곳에서 무서운 전염병이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는 대목에 눈길이 멈추었다. 표면적으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깊숙한 곳에서 유럽으로 온 전염병에 흑사병이라고 불리는 페스트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이 질병은 유라시아 초원의 설취류에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로부터 날아와 덮치는 무소불위의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이 느껴진다. 인용한 부분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언급된다. 이 부분에서 프랑켄슈타인으로 유명한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을 떠올려본다. 이 소설 역시 전염병으로 인류가 모두 죽고 한 사람만 남는 이야기가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셸리가 남편과 한 명을 제외한 아이들을 모두 어려서 잃었던, 개인적인 아픔이 반영된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셸리가 29세였던 1826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때는 도스토옙스키가 5살일 때다. 의사인 아버지를 두었던 도스토옙스키가 전염병과 선모충에 대한 지식에 무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다만 이 부분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전염병이 추상적인 대상을 빗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렸을 때 셀리의 소설을 읽었을까. 알 수 없지만 상상해볼 뿐이다. 시기적으로 그가 이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신과 혐오만 남게 될 때,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도스토옙스키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성찰능력을 잃어버린 인류가 개별적인 존재로 분열되고 소외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우리에게 불신과 혐오만 남게 되면 인류는 이렇게 극한 상황으로, 나아가 멸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공상과학 소설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도스토옙스키는 마지막으로 로쟈와 소냐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와 사랑의 감정을 암시하게 된다. 이제 죄와 벌을 읽으면서 옆길로 새고 헤매는 읽기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다음에는 악령을 읽어보려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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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07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이건 뭐 재미로 읽을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전 오래 전 <죄와벌>을 나름 인상 깊게 읽은 정도지 이렇게 저렇게
상상하고 연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단순히 도 선생님이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건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줬는지 몰랐는데 이제 좀 그림이 그려지네요.
참말로 고맙슴다. 수고하셨습니데이~^^

근데 이를 달고 사셨다니 대충 70년대 유년시절을 보내셨을 것 같군요.ㅋ

초란공 2022-01-07 22:03   좋아요 1 | URL
당분간 <죄와벌>은 잊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
명탐정 코난같으세요. ㅋㅋ 연대측정을 ^^;;

mini74 2022-02-10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초란공님 도선생님으로 2관왕 !!!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2-02-10 21:11   좋아요 1 | URL
지난 달에 도선생님을 너무 들들볶아대었군요. ㅋㅋ 자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2-10 18: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2관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2-10 21:12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2-10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2-02-10 21:12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해요~^^
 


1111,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 1차 대전 종전일

 


[1]

어제 다른 날보다 늦게 퇴근하는 아내와 따듯한 국수 한 그릇 먹고 들어오려고 지하철에 마중을 나갔다. 개찰구 옆에서 기다리는 동안 몇몇 젊은 남자들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었는데, 다음날(1111)이 일명 *로 데이라서 그랬나 싶었다. 학창시절에 이 날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족히 25년은 더 되었을 테다. 정체불명(?)의 명절처럼 되어버린 할로윈을 포함해서 이제는 새로운 세대의 문화가 되었구나 싶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문화를 만들어가는 세대가 주인공이지 싶다.



 

[2]

오늘이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탄생 200주년 되는 날이라고 한다. 그는 18211111일에 태어나 188129일 사망했다. 여러 출판사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작가의 탄생 200주년 기념판으로 제작해서 내놓았다. 학창 시절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기에 중년의 나이가 되어 처음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죄와 벌이다. 아니면 내가 예전에 백치를 읽었던 작품인지 가물가물하다. 죄와 벌은 작년에 읽었는데, 한 번에 다 수긍이 가는 작품이 아니었다. 작가의 삶과 사상에 대해 좀 더 조사와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그의 삶 자체가 마치 소설과도 같이 극적인데다 다채로운 사건들이 많아, 그의 삶에서 있었던 전환점들을 다시 살펴보고 이해해야하지 싶다.









































최근에는 그의 작품 악령을 구입했는데, 아직 시작하진 못했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좀 더 어렵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악령을 읽은 다음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작가의 세계에 다가가면 좋지 않을까, 언제나 그렇듯이 일단 읽을 계획() 세운다.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경우, 작년에 코너스톤 출판사에서 나온 두 권짜리 기념판이 제일 아름답게 보인다. 











   

 


[3]

‘1111하면 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오늘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 선언된 지 103년 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1차 세계대전은 1914728일 시작하여 19181111일에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현재 우리에게는 연인들을 위한 기념일처럼 되어 기대와 흥분을 가져다주는 날이기도 하지만, 유럽의 누군가에게는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을 떠올리고 그리워했던 날이리라. 그들은 전쟁 속에서 가족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던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버지 혹은 딸, 아내, 어머니였을 것이다.


 

이 날을 배경삼아 나온 소설이 생각난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 이 소설은 2013년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소개글에 따르면 문학성과 예술성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문학상에 대중 문학 작가가 선정된 것은 이례적인 일인 모양이다. 자세한 내용을 피하고자 간단한 정보만 언급하자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지만 부상을 입고 귀환한 이들을 국가는 나몰라라 했다. 오히려 이들은 국가에 짐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참전 용사인 주인공은 종전 기념일인 1111일을 기념하는 기념탑 건립사업에 참여하여 국가를 상대로 거대한 사기극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4]

프랑스 작가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니 프랑스와 관련한 사건이 하나 떠오른다. 요새 매일 조금씩, 성경을 읽듯이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의 대표작 뿌리(Roots)를 읽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책장에 이 책이 꽂혀 있던 게 생각난다. 그저 일하시느라 바빠서 책 읽으시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이 된 내가 어느 날 중고 서점에서 Roots를 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난주에 부모님 집에 들러 책을 넣어둔 박스를 뒤져 20년 넘게 읽지도 않은 상태로 먼지 쌓인 이 책을 다시 찾아 보았다. 감회가 새롭다. 이 책은 꽤나 긴 소설인데다, 가지고 있는 번역본은 행간이 너무 작아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는 셈치고(?) 천천히 읽게 되었다.














잘 알려져있는 것처럼 소설의 주인공은 쿤타 킨테라는 흑인이다. 쿤타 킨테는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7대 조상으로 알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의 서부 끝에 있는, 현재 세네갈 지역의 숲에 있던 푸아레 부족 출신이었다. 17세가 된 어느 날 자신의 북을 만들려고 나무를 구하러 숲에 들어간 사이, 백인 노예 사냥꾼들에게 납치되어 미국 남부로 끌려왔다. 네 번의 탈출을 시도했지만, 백인들에게 결국 붙잡혔다. 그들은 쿤타의 한쪽 다리를 도끼로 잘랐다. 이렇게 이어지는 작가 집안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와 노예제의 면모를 고발하며 보편성을 얻는 역사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랑스와 관련한 사항은 아이티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시 아이티는 3만 명 미만의 프랑스인이 지배하던 식민지였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리카 흑인 50만 명 이상을 아이티로 데려와 사탕수수, 옥수수 등의 농장에서 가혹하게 일을 시키고 착취했다. 인간적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혹독한 노동환경과 현실에 불만을 품은 투생이라는 흑인이 아이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쿤타는 백인들이 하는 말을 듣거나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통해, 흑인 반란군 지도자 투생을 마음속으로 지지하고 응원했다. 이 반란은 결국 비극으로 끝이 난다. 나폴레옹이 협상을 구실로 투생을 끌어내어 붙잡은 다음 프랑스의 어느 토굴 감옥에 가두어버렸던 것이다. 투생은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올해 언제인가 큰 지진이 났다는 아이티 생각이 났다아이티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끌려온 흑인들의 후예들로 유지되던 프랑스 식민지였기에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된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다.


 

눈 상태도 좋지 않고 책의 행간이 너무 좁아 뿌리(Roots)를 다 읽으려면 11월 한 달 내내 조금씩 읽어야할 것 같다. 작가 알렉스 헤일리 연보를 보니, 1921811일 생이다. 올해는 헤일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셈이다. 그는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끈 맬컴 X에 관한 전기 The Autobiography of Malcolm X: A Life of Passion and Struggle를 쓰기도 했다. 맬컴 X의 자서전이긴 하지만 그와의 대담 및 인터뷰를 통해 구술한 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보인다. 맬컴 X에 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뿌리(Roots)의 주인공 쿤타 킨테처럼 무슬림이면서, 무장투쟁을 지지했던 입장으로 기억한다.
















이 부분은 또 다른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The Fire Next Time)를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 볼드윈이 맬컴 X와 만나 이야기하는 부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성경에 나온 하느님의 말씀 다음번엔 불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표현에서 가져온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 인류의 죄를 벌하는 심판으로 말이다. 제임스 볼드윈은 흑인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입장에는 동의했지만, 흑인 인권 운동을 실행하는 방법에 대해 맬컴 X와 상반된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있다. 제임스 볼드윈은 오히려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에 가까운 방식을 지지했던 것 같다. 출판사에서는 알렉스 헤일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보다 읽기 쉽게 행간을 넓힌 기념판을 내주었으면 한다. 뿌리(Roots)는 나머지를 다 읽고 정리를 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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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11-11 14: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도끼샘 200번째 벌쓰
데이로군요.

카페이 투자로 땡긴 책이 오늘
쯤 오나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벌쓰데이 수령은 안될 것 같네요.

내일은 받을 수 있겠죠?

오르부아르는 5년 전에 사두었는
데, 아직 못 읽고 있네요. 그래픽
노블로라도 만나야 하나 어쩌나
싶네요.

초란공 2021-11-11 21:52   좋아요 3 | URL
도끼샘 책을 주문하셨나 봅니다^^ 내일 받으시길~ 저는 르메트르 선생이 국내 왔을 때 사인받아놨는데 책이 오디로 갔는지 못찾겠네요 ㅋㅋ

scott 2021-11-11 14: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퇴근 하는 아내를 기다리며 따뜻한 국수 한그릇 사주는 초란공님 따숩
빼빼로 보다 더 달콤 ^^
코너스톤 첫판 완판시키고 재판 찍고 있다고 합니다 ^^

초란공 2021-11-11 21:55   좋아요 3 | URL
아내가 오늘 빼빼로 사왔습니다~^^ 추운데 편의점 밖에 떨고 있는 누드 빼빼로가 가엽다고요 ㅋㅋ 코너스톤 3쇄도 찍으시길~!

stella.K 2021-11-11 2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TV 시리즈 유명했죠. 70년대 후반에 나오고 나중에 또 만들어졌던 모양인가 본데
저는 오리지널판은 봤습니다. 나중에 만들어진 건 잔인해서 결국 안 봤죠.
영화가 하도 감동스러워 책을 샀는데 결국 읽지는 못했습니다.ㅠ

초란공 2021-11-11 21:56   좋아요 3 | URL
와~ 그럼 지금 넥플릭스 처럼 대단한 인기였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오리지널판이 궁금해지네요.

레삭매냐 2021-11-13 07: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피에르 르메트르 아자씨의 책들
도 예전에 사두기만 하고 당최
읽지 않았네요.

초란공님의 글을 보고 나서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래픽 노
블 <오르부아르>를 빌려다
읽었는데 아리까리하네요.

아무래도 원전으로 다시 읽
어야지 싶습니다.

초란공 2021-11-13 11:36   좋아요 2 | URL
그래픽 노블이 이미 나와있었군요! 그래픽 노블은 정말 별개의 작품일듯합니다^^; 모비딕 그래픽 노블도 상당히 낯선 느낌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레이스 2021-12-09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집이 곳곳에 출몰하고 있어서 지뢰밭 지나가듯하고 있습니다.^^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1-12-09 23:21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scott 2021-12-09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

도끼옹 전집
반쯤 완독 하셨을 것 같습니다 ^^

초란공 2021-12-09 23:24   좋아요 3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사실 마구 진도나가기 보다는 작년에 처음 읽어본 <죄와 벌>을
읽는 것으로 다시 시작했습니다. 읽은 내용이 가물가물해서요. ㅜㅜ
이제 <악령> 읽어보려구요~

페크pek0501 2021-12-10 14: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 님 같은 분을 능. 력. 자. 라고 하지요. 두 편의 당선작을 내시다니... (혹시 더 있는 건가요?)ㅋㅋ
진심을 담아 축하드립니다. ^^

초란공 2021-12-10 19:29   좋아요 3 | URL
페크님, 감사합니다! 올해 페이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선된 것 같아요. ^^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써야만 한다'


























































"요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써야만 한다. 절대 출판하지 못할지라도, 절대 완성하지 못할지라도, 몇 년 후에 손을 떼고, 몇 년간의 노력이 끝을 맺지 못하고, 처음 가졌던 야망을 끝까지 밀어 붙이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기록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약간이라도 진척시켜야 한다. 타오스에서 타오르미나까지, 우리가 찾아갔던 곳에서부터 절대 발을 들이지 못할 나라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진척시키도록 애쓰는 것이다." (308)




장의 장의 구분도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글이 수다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제프 다이어만의 솔직함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두서없이 생각이 가는대로 글을 써가는 특징은 이번에 읽은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로런스의 모습은 다이어가 로런스의 서한집(로런스는 무려 7권짜리 서한집을 자비로 출판했다)중 여러 곳에서 인용한 부분에 근거하는데, 로런스가 얼마나 성마르고 예민한 면모가 있는 인물인지 잘 보여준다. 책을 읽다보면 로런스가 제프 다이어와 닮은 구석도 많은 듯하다. 다이어도 온갖 질병을 달고 다니고, 어께가 좁다는 콤플렉스를 비롯해서 끊임없이 셀프 디스를 하며 자책하기도 하고 독자를 웃기기도 한다. 물론 다이어가 쓴 말의 절반은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회만 되면 로런스 연구서 쓰기를 미룰 핑계를 찾아내는 '재능'을 가진 작가의 면모가 유감없이 들어있다. 다이어는 태어나기 전부터 뭔가 모범적이고 반듯한 것에 두드러기가 나는 인물 같다. 알레르기 치료약에도 알레르기를 가진 인물이니 말이다. 뭔가 하고 싶어서 실행으로 옮기고 나면 시간 낭비했다고 자책하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지만, 또 하려고 했던 일을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미련과 후회로 고민하는 사람이 제프 다이어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은 예상 외로 '교훈적'이다. 왠지 '제프 다이어스럽지 않은' 마무리이지만, 이 또한 그가 D.H. 로런스의 흔적을 찾아다니고 그의 서간집을 읽고 좋아하면서도 그에 대해 연구서를 쓰지 않은 여정의 기록이기에 마음에 든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로런스 연구서를 써야만 한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우울증세로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과 열정을 잃었을 때, 제프 다이어가 다시 무언가에 대한 열의와 열정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만의 로런스 연구서 쓰기 프로젝트'같은 것들이 있어서일 거다. 바로 현대인들이 잃어가는 것, 현대인의 우울증을 완화하고 삶을 새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런 대상을 각자 하나씩 갖는 일이 아닐까 싶다. 누구에겐 하루에 단 30분 정도만 주어지는 독서 시간일 수도 있다. 나만의 프로젝트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책에 대한 생각]

*이 책은 장의 구분 없이 저자의 생각들을 이어붙이듯 쓴 글이기에 독자에 따라 읽다가 지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이어의 솔직한 수다와 은근한 유머가 이런 점을 상쇄해주는 면이 있다. 제프 다이어는 이 책에서 로런스에 대한 연구서를 완성하지 않는다. 그 '변명'을 책의 마지막에 다소 '교훈적'으로 써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이유가 나름 인상적이다.  


**전자책이 아니라면 물성으로서의 책 역시 독자에게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표지가 일반적인 소프트커버에 비해 얇아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거슬리는 더스트 커버가 같이 나오지 않은 점은 좋다. 


***미주에 대한 방식이 독자에게는 불편하다. 본문의 해당 문장 일부를 미주란에 가져와 참고문헌을 기록해두었는데, 원서에 번호가 없었더라도, 번역서에는 본문에 일련번호를 달아 혹시나 찾아보고 싶은 독자가 활용하기 쉽게 배려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요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만의 D.H. 로런스 연구서를 써야만 한다."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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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09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주에 우연히(실은 주말 부터)
로렌스 비평책 집어들었는데 마침 타임지(주말판)에 로렌스 읽기 열풍에 대한 기사가 실려서 심도 있게 읽을까 했는데 ㅎㅎㅎ

그런데 한국어판 표지가
자기계발서 처럼 보이네요 ^ㅅ^

초란공 2021-08-09 17:12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 표지가 별로 마음에 안듭니다 ㅋㅋ 타임지도 읽으시고 역시 스콧님! 로렌스 읽기 열풍 소개좀 부탁드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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