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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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을 읽었다. 가독성이 좋은 작가였는데 이번 작품은 솔직히 조금 힘들게 읽었다. 왜냐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삶을 조금씩 파괴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읽는 동안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와 관련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그렇게 깊게 몰입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이들의 파국을 알고 있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1억 엔을 횡령한 리카의 삶이 어디로 갈지 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쇼핑중독에 빠져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는 아키의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다.

 

1억을 횡령한 리카가 치앙마이에서 사는 모습이 나온다. 도망자의 삶이다. 그녀의 현재가 먼저 나오고, 이후 그녀의 과거와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교차하면서 진행되는데 리카의 사연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다. 다른 지인들은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소설의 재미난 점 중 하나는 리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결코 리카를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리카와 다른 모습이라 놀라고 궁금해 할 뿐이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사람들의 습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설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야기는 왜, 어떻게 리카가 1억 엔을 횡령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녀가 1억을 횡령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한 번에 1억을 횡령한 것도 아니다. 조그만 돈이 점점 쌓여 1억이 된 것이다. 횡령의 시작은 좋은 의도에서 비롯했고 그 돈을 채워 넣으려는 마음도 강했다. 언제나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더 쉬워진다.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돈으로 누리는 행복이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 대안으로 도망을 선택했고, 불안한 도주 생활을 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작가는 리카의 무미건조하고 애정없는 삶을 잘 보여준다. 부부 사이에 성관계는 사라지고, 당연히 애도 생기지 않는다.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남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관계다. 아내가 은행에서 시간제로 일해 돈을 벌어 밥을 살 때 보여준 남편의 저급한 반응은 리카가 왜 고타에게 빠졌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우스운 것은 리카도 돈으로 고타의 애정을 샀다는 것이다. 고타가 애인이 생겼을 때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라고 말한 것은 돈으로 얻게 되는 향락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의미다. 자신이 누린 사치와 향락과 삶이 자신이 바란 것이 아닌 리카의 강요와 자신의 묵인 아래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리카가 고타에게 빠져 1억을 횡령하면서 사치를 누릴 때 또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순간적인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돈의 노예로 전락한다. 아키가 백화점에서 점원이 칭찬하면 자신도 모르게 계산하거나 마키코가 어린 시절의 부유함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과도한 돈을 지출하는 것이 소비의 노예라면 유코는 과도하게 절약하면서 자신의 아이가 도둑질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유코의 비중이 더 많았으면 한다. 다른 사람과 대비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도한 소비나 절약이 모두 돈의 노예라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키가 자신의 딸이 보여준 모습에 놀라거나 야마다 가즈키가 아내와 애인의 과도한 지출에 놀라는 장면은 이 두 사람에게 일단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음을 알려준다.

 

리카가 횡령으로 파국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수많은 ‘만약에’을 찾게 된다. 이 ‘만약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후회를 담고 있다. 긴 세월 동안 고타와 누린 사치와 향락이 남편의 멀어진 손길과 애정의 대신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돈을 횡령하고, 이 돈을 채우고 위해 벌였던 수많은 작업과 거짓말들은 이제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의 삶을 삼킨다. 그녀의 내면 속에 자리 잡은 불안과 공포는 순간적으로 향락으로 잠시 사라지지만 젊은 연인을 붙잡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악순환만을 강요할 뿐이다. 그녀가 고타와 함께 있을 때 행복이 느껴지기보다 애잔하고 안쓰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상의 평온이 사라진 곳은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해도 결코 그 비워진 공간을 메울 수 없다. 영화도 있다고 하니 언젠가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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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인문학 - 하루를 가장 풍요롭게 시작하는 방법
다이앤 애커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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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 가볍게 읽을 것이란 생각으로 책을 펼치면 새벽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냥 휙~ 하고 지나갈 뿐이다. 함축적인 문장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문장이 될 뿐이다. 그래서 다시 앞으로 넘어와서 곱씹어 읽은 적도 많다. 물론 그냥 스쳐지나간 문장은 더 많을 것이다. 새벽에 대한 단상을 담은 조금은 가벼운 책 정도로 생각하고 덤벼들었던 나의 오판이 읽는 내내 혼란을 가져왔다. 아무 곳이나 가볍게 펼쳐 읽은 대목은 분명 쉬운데 연속으로 읽으니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탓에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아무 곳이나 펼치니 새롭게 다가온다.

 

새벽. 이제는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많지 않다. 작년 말 해돋이 보기 위해 동해에서 일어난 것이 새벽을 맞이한 가장 최근의 일이다. 지난 설에 제사 때문에 조금 일찍 일어났지만 이때는 새벽을 감상할 시간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졸린 눈으로 제대로 펴지지 않은 몸을 움직였을 뿐이다. 생활 방식이 점점 야행성으로 바뀌면서 새벽은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 듯하다. 오래전 해뜨기 전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두고 있는 나의 기억과 너무 다른 모습이다. 겨울이라 더 일어나기 싫은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분량 중 봄이 가장 많은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새벽을 사계절로 나눠 이야기한다. 봄이 가장 긴 분량이고, 그 다음이 여름이다. 다른 계절은 비슷한 분량이다. 봄이 가장 긴 것은 왜일까 하는 의문이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들었다. 위에 쓴 이상한 이유가 아닌 진짜 이유를 알고 싶지만 이에 대한 글은 없다. 아마 작가의 경험과 사유가 봄의 새벽과 가장 많이 맞아떨어진 것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 하나의 소제목에 달린 분량도 여기가 가장 길다. ‘두루미들을 애도함’이란 장을 읽으면서는 이 책의 정체에 의문이 생겼다. 그러다 영어 원제를 보니 알 것 같았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장소다. 봄은 플로리다 팜비치, 여름은 뉴욕 이서커, 가을과 겨울은 특별히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이 장소들은 작가가 새벽을 맞이하고, 자신의 감각을 일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가가 관찰한 동물이나 식물 등이 바로 지역, 날씨 등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이런 이유만으로 이런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세심한 관찰과 관련 분야 연구와 깊은 성찰이 동반되어야만 가능하다. 두루미, 개미, 벌, 달팽이, 거미, 딱따구리, 찌르레기 등에 대한 글들을 보면 작가의 성찰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몇 가지 중요한 키워드가 생각난다. 모네, 호쿠사이, 세이 쇼나곤 등이다. 조금 더 많이 늘어놓을 수 있지만 이 단어들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들이다. 모네에 대한 글은 호쿠사이가 유럽 화풍에 끼친 영향을 떠올려주고, 모네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 새벽은 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에 세이 쇼나곤은 그녀가 느꼈던 새벽의 풍경과 감각을 작가가 크게 공감하면서 몇 번 인용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문화가 곳곳에 나오는데 심미적인 문화가 작가의 성찰 등과 잘 맞는 모양이다. 서양의 일본 문화 찬미가 이 책 속에서도 가끔 보인다.

 

참 다양한 소재를 새벽과 연결시켰다. 문학, 예술, 종교, 역사, 언어학, 기상학, 생물학 등이 모두 나온다. 사계절과 엮이면서 더 풍성해진다. 덕분에 정신을 빠짝 챙기지 않으면 그냥 흘러갈 뿐이다. 나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하나 배운 게 있다면 잊고 있던 새벽의 아름다움과 의미다. 일회성으로 그친 일출 보기가 아닌 삶의 변화가 더 필요하다. 쉽게 고쳐질 수 있는 습관은 아니지만 조금 더 빨리 일어나려고 노력은 해야겠다. 밤과 새벽이 교차하던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다. 그리고 이제야 문득 왜 새벽의 인문학이란 제목이 붙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의 희미한 머릿속이 조금은 새벽빛이 들어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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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 팔레스타인 시인이 쓴 귀향의 기록 후마니타스의 문학
무리드 바르구티 지음, 구정은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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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 대한 첫 기억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뉴스에 나온 것들이 대부분 테러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보여준 테러는 이 단체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었다. 어릴 때 뉴스를 그냥 받아들이던 시절이라 화면 너머에 어떤 삶이, 사실이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67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적은 군사로 아랍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사실을 선생들이 알려주었을 때 나는 감탄사를 터트리고 이스라엘 군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의 수준이 그랬다. 물론 선생들의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사실 쉽지 않다. 단순하게 보면 잘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유대인들이 구약을 앞세워 좇아낸 것이다. 착하거나 멍청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수였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편파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이 지역과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으로 아주 복잡하게 엮여 있다. 이 문제를 모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현재 나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다. 단지 파편적으로 정보를 얻고 지식을 쌓을 뿐이다. 이 책도 그런 종류 중 하나다.

 

시인이자 작가인 무리드는 이집트 유학 중에 67년 중동전쟁이 벌어지면서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다. 아랍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그는 갈 곳을 잃었다. 그의 여권은 나라 없는 사람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나지힌, 즉 추방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 나지힌들은 팔레스타인 귀국을 꿈꾼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수백 명의 노인들에게는 귀국을 허가했지만 수십만 명의 젊은 사람들은 들여보내지 않았다. 시인도 30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팔레스타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을 바로 그 귀국을 통해 바라본 팔레스타인과 귀국을 바라며 사는 동안 그가 겪었고 아파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시인은 이것을 상대적으로 냉정하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 속에는 조용히 분노가 흐르고 있다.

 

나라 없는 사람의 서러움은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집트가 이스라엘 측에 붙었을 때 그는 이집트인 아내와 헤어져야 했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추방은 항상 다층적이다. 추방은 당신 주변을 에워싼 뒤 원을 닫아버린다. 아무리 달려 봐도 원은 당신을 에워싸고 있다.” 현재 우리가 너무 쉽게 넘나드는 국경을 그는 아주 힘겹게 넘어야 한다. 입국 허가가 떨어지기 전에는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시인으로써의 그의 인지도가 높아져도 이것은 변함없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전전하고, 자신의 물건을 가질 수도 없다. 어렵게 키운 화분조차 가지고 다닐 수 없는 삶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다.

 

라말라. 처음에는 어떤 곳인지 몰랐다. 검색하니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임시 행정수도라고 나온다. 자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지된 나지힌의 삶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직 이것을 표현하기에는 나의 내공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가 본 라말라의 모습은 30년 전과 별 차이가 없다.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함없이 옛날 그대로 머물러 있다. 발전이나 변화라고는 없는 도시가 된 것이다. 신문은 고사하고 서점조차 없을 정도로 이곳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책을 갈망하는 그들을 보면서 우리가 누리는 풍족함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다.

 

정치적인 문제가 곳곳에 나온다. 어쩔 수 없다. 정치를 빼고 팔레스타인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름이 나오는데 주석을 보면 암살당한 사람들이 엄청나다. 예전에 스파이영화를 보고 통쾌하게 생각했던 인물들 중 몇 명이나 이 속에 포함되어 있을까? 격리, 파괴, 학살이란 단어들이 피와 함께 곳곳에서 흘러넘친다. 단지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을 뿐이지 사건이나 사람들에게서 그 흔적과 역사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의 경우는 주석이 그 역할을 맡았지만.

 

이 책은 팔레스타인을 다룬 다른 소설과 접근법을 달리한다. 감상적이거나 자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지 않고 나지힌의 귀향에서 받은 감상과 느낌에 충실하다. 귀향의 기록이란 표현이 딱 맞다. 중동 문제를 읽을 때면 점점 이스라엘의 반대 편에 서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데 개인적으로 작가가 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동정과 달랐으면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를 동정하는 이들이 있지만,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와 우리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는 힘든 것 같다. 그들이 느끼는 것은 패자를 바라보는 승자의 연민이다.” 그리고 시인은 솔직하게 말한다. 그들이 힘에서 밀렸다고. 낯선 아랍 이름들 때문에 조금 힘들게 읽었지만 생각할 거리도 배운 것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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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용접공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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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은 ABC의 드라마 <로스트>의 공동 원작자 겸 총괄 제작자였던 데이먼 린들로프가 썼다. 그는 이 작품을 <환상특급>에서 아쉽게도 누락되었던 에피소드 중 가장 뛰어난 이야기라고 말한다. 단순히 수중 용접공의 힘든 일상과 부성애를 다룬 그래픽노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미스터리 환상이 곁들여 있다. 덕분에 거친 그림에도 불구하고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후반부로 가면서 작가가 깔아놓은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풀어내고, 그 답 너머에 있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 와 콕 박혔다. 미스터리 환상을 바탕으로 진한 부성애를 다룬 작품이다.

 

거친 그림체를 가졌다. 주인공 잭과 그의 아내 얼굴을 보면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30대 중반인데도 50대처럼 보인다. 이런 얼굴이 작가의 의도적인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무거움과 힘겨움이 잘 느껴진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연출보다 비교적 간결하고 평범한 연출로 그들의 대화와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수중 용접공이란 직업에 대한 설명이나 작업 장면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처음에 예상한 수중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사건도 없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아니다. 물밑에서 발생하는 액션이나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이야기가 있다.

 

잭은 출산 예정일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아내의 반대도 무릅쓰고 얼음처럼 차가운 바다 속 작업장에 들어간다. 이날은 핼러윈 데이 전날이다. 열심히 일하는 그에게 한 인물이 잠수하는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해저에 회중 시계가 하나 놓여있다. 바다 위에서 그에게 통신을 보내는데 어느 순간 신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밖에서는 그가 사고를 당했다고 말한다. 정신을 잃은 후 깨어난다. 몸에 이상은 없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머릿속은 회중 시계와 바다 속 경험들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잭의 아버지도 잠수부였다. 그런데 그는 핼러윈 데이 전날 술을 먹고 잠수했다가 죽었다. 아버지는 늘 바다 속에 가라앉은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혼한 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다로 가서 잠수하고 바다 속에서 수집한 물건을 가지고 나온다. 이 물건들 중 하나를 아들이 가지고 싶어한다. 바로 회중 시계다. 이 과거는 현재와 교차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그러다가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다. 현실의 벽이 무너지고 환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씩 되살려준다. 현실의 아픔과 고통 뒤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현재, 잭은 곧 아버지가 될 예정이다. 그의 아내가 바라는 바를 그는 실천하지 못한다. 아기 침대 조립도 도와주지 않고, 함께 조산원에게 가는 것도 시간의 흐름을 잊은 탓에 놓치고 만다. 만삭의 아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그는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사고가 났던 순간 있었던 이상한 경험이다. 이 부부의 엇나감은 가정의 불화와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미 환상에 사로잡힌 잭에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홀로 배를 몰고 나간다. 그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깊은 바다 속에서 다시 한 번 더 과거의 환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뒤틀었던 진실을 마주한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과정 속에 잊었고 가라 앉아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낯설고 황량하고 외롭던 분위기를 깊은 바다 속 풍경과 기억을 나란히 놓으면서 잘 묘사하고 있다. “시간이 됐어”란 말을 아버지가 하고, 그 시간을 아들이 맞이할 때 꼭꼭 숨겨두었던 기억들이 단숨에 풀려난다. 하지만 바다 속에 잠겨 있던 그를 구해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이 구조 뒤에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는 것은 아내 수전이다. 그의 아이다. 집으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그를 맞이하는 것은 그의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가슴 한 곳이 점점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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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제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요코제키 다이 지음, 이수미 옮김 / 살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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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이다. 이 상에 8번을 도전한 끝에 수상했다고 한다. 대단한 의지와 노력이다. 수많은 도전은 이 소설을 상당히 꼼꼼하게 엮는데 많은 도움을 준 듯하다. 작은 사건이 살인사건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과거의 사건을 불러오는 구성인데 상당히 깔끔하게 진행된다. 큰 줄거리 옆에 다른 사연들이 곁가지를 치고, 이것들이 다시 하나로 엮인다. 의문이 생기면 다른 곳에서 그 의문을 풀어준다. 그리고 그곳에 또 다른 사실과 사연이 숨겨져 있다. 이것은 마지막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우연이 너무 강하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큰 흐름과 구성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느낌이다.

 

초등학교 동창생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시즌이라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마키코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아들 마사키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다 잡혔다는 전화다. 그 전화를 건 것은 점장 사쿠마 히데유키다. 지역 유지인 사쿠마 집안의 장남이자 문제아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엄마는 바로 달려간다. 히데유키가 요구하는 것은 훔치는 장면이 찍힌 테이프와 현금 30만 엔의 교환이다. 좋은 사립학교를 다녀서 다른 문제가 없다면 대학까지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는데 이것이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다. 전 남편에게 연락을 해서 돈을 들고 찾아가지만 그가 요구하는 것은 돈 만이 아니다. 마키코의 몸이다. 더 큰 돈을 마련해서 다시 남편 게스케가 찾아간다. 그곳에 있는 것은 히데유키의 시체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마키코의 시선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끝난 후 동창생 준이치가 등장한다. 그는 형사다. 그런데 술을 먹으면 같이 동거하는 애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 일이 있은 다음날 비번인 그에게 히데유키 살인사건에 대한 연락이 온다. 이제 어릴 때 이후 자신을 괴롭혀온 과거의 그림자와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첫 번째는 희생자의 동생이자 동창생이 나오토이고, 조사에 의해 의문을 품게 된 마키코 등이다. 그러다가 나온 탄흔 정보는 네 명의 동창생으로 하여금 23년 전 함께 묻었던 타임캡슐 앞에 모이게 한다. 왜냐고? 히데유키의 몸에서 발견된 총알이 바로 그때 묻었던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기 때문이다. 이제 누가 죽였는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누가 타임캡슐을 열었는가 하는 의문도 같이 생긴다.

 

마키코, 게스케, 준이치, 나오토. 이 네 명은 초등학교 동창생이었고, 게스케의 아버지 밑에서 검도를 같이 배웠다. 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강한 유대를 맺게 만들어준 사건이 있다. 바로 게스케의 아버지가 23년 전 은행 강도 손에 죽었던 사건이다. 이때 나오토와 준이치가 게스케의 아버지 시체를 발견했다. 같은 곳에 은행 강도의 시체도 있었다. 준이치는 이때 경찰의 총을 훔쳐 타임캡슐 속으로 넣었다. 그런데 이 총이 이번 살인사건에 이용된 것이다. 준이치는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형사들에게 숨긴다. 그러나 이 사건에 유난히 집중하는 형사가 있다. 바로 준이치와 동행한 현경 수사1과 나라 형사다. 그는 이 동창생들의 비밀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역할은 한다.

 

잔혹한 살인사건도 없고, 과장된 명탐정도 없다. 친구들은 서로 비밀을 입 닫고 있고, 형사들은 탐문수사로 한 발 한 발 사건의 범인에게 다가간다. 물론 그 과정에 착오도 있다. 그 착오 중 하나는 나오토다. 나오토의 이야기 속에는 단순해 보였던 이 사건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첫사랑이다. 단순한 첫사랑의 아픔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건을 보면서 가진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른 이야기로 단서와 사연을 제공한다. 만약 이것을 과도하게 사용했다면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었을 텐데 적당한 분량에서 잘 끊어주었다. 화려한 연출을 부리지 않고 견실하게 이야기를 만들어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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