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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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을 읽었다. 가독성이 좋은 작가였는데 이번 작품은 솔직히 조금 힘들게 읽었다. 왜냐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삶을 조금씩 파괴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읽는 동안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와 관련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고, 그렇게 깊게 몰입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이들의 파국을 알고 있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1억 엔을 횡령한 리카의 삶이 어디로 갈지 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쇼핑중독에 빠져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는 아키의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다.

 

1억을 횡령한 리카가 치앙마이에서 사는 모습이 나온다. 도망자의 삶이다. 그녀의 현재가 먼저 나오고, 이후 그녀의 과거와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교차하면서 진행되는데 리카의 사연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다. 다른 지인들은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소설의 재미난 점 중 하나는 리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결코 리카를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리카와 다른 모습이라 놀라고 궁금해 할 뿐이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사람들의 습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설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야기는 왜, 어떻게 리카가 1억 엔을 횡령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녀가 1억을 횡령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한 번에 1억을 횡령한 것도 아니다. 조그만 돈이 점점 쌓여 1억이 된 것이다. 횡령의 시작은 좋은 의도에서 비롯했고 그 돈을 채워 넣으려는 마음도 강했다. 언제나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더 쉬워진다.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돈으로 누리는 행복이 더 많다고 생각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그 대안으로 도망을 선택했고, 불안한 도주 생활을 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작가는 리카의 무미건조하고 애정없는 삶을 잘 보여준다. 부부 사이에 성관계는 사라지고, 당연히 애도 생기지 않는다.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남편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관계다. 아내가 은행에서 시간제로 일해 돈을 벌어 밥을 살 때 보여준 남편의 저급한 반응은 리카가 왜 고타에게 빠졌는지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우스운 것은 리카도 돈으로 고타의 애정을 샀다는 것이다. 고타가 애인이 생겼을 때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라고 말한 것은 돈으로 얻게 되는 향락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의미다. 자신이 누린 사치와 향락과 삶이 자신이 바란 것이 아닌 리카의 강요와 자신의 묵인 아래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리카가 고타에게 빠져 1억을 횡령하면서 사치를 누릴 때 또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순간적인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돈의 노예로 전락한다. 아키가 백화점에서 점원이 칭찬하면 자신도 모르게 계산하거나 마키코가 어린 시절의 부유함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과도한 돈을 지출하는 것이 소비의 노예라면 유코는 과도하게 절약하면서 자신의 아이가 도둑질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유코의 비중이 더 많았으면 한다. 다른 사람과 대비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도한 소비나 절약이 모두 돈의 노예라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키가 자신의 딸이 보여준 모습에 놀라거나 야마다 가즈키가 아내와 애인의 과도한 지출에 놀라는 장면은 이 두 사람에게 일단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음을 알려준다.

 

리카가 횡령으로 파국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수많은 ‘만약에’을 찾게 된다. 이 ‘만약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후회를 담고 있다. 긴 세월 동안 고타와 누린 사치와 향락이 남편의 멀어진 손길과 애정의 대신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돈을 횡령하고, 이 돈을 채우고 위해 벌였던 수많은 작업과 거짓말들은 이제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의 삶을 삼킨다. 그녀의 내면 속에 자리 잡은 불안과 공포는 순간적으로 향락으로 잠시 사라지지만 젊은 연인을 붙잡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악순환만을 강요할 뿐이다. 그녀가 고타와 함께 있을 때 행복이 느껴지기보다 애잔하고 안쓰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상의 평온이 사라진 곳은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해도 결코 그 비워진 공간을 메울 수 없다. 영화도 있다고 하니 언젠가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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