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리랜드 1 - 셉템버와 마녀의 스푼
캐서린 M. 밸런트 지음, 공보경 옮김, 아나 후안 그림 / 작가정신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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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화려한 수상 이력과 수많은 호평에 혹해서 선택했다. 그런데 앞부분을 읽으면서 약간 당황했다. 내가 예상한 판타지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적응하게 되었다. 작가가 꼼꼼하게 묘사하고 설명한 캐릭터와 세계가 아주 멋있었다. 영화 등으로 만들어졌을 때 풍성한 장면을 보여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예상은 다 읽고 난 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읽으면서 어디에서 본 듯한 설정과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대충 맞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 등을 오마주했다는 설명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5월에 태어난 소녀의 이름은 셉템버다. 아버지는 전쟁터에 끌려갔고, 엄마는 군수 공장에서 비행기 엔진을 만든다. 소녀는 일상이 따분했다. 이때 초록 바람이 찾아와 함께 모험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셉텝버는 신나는 모험을 하겠다는 기대를 품은 채 페어리랜드로 향한다. 책을 통해 알고 있던 모험과는 전혀 다른 모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초록 바람과 함께 페어리랜드를 여행할 것이란 예상은 입국 심사대에서 깨진다. 그녀는 홀로 이 낯선 세계를 여행해야 한다. 겨우 열두 살 소녀에게는 힘든 일이다. 약간 긴장한 채로 소녀의 모험을 읽기 시작한다.

 

갈림길에서 한 길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앞으로 그녀의 삶을 결정한다. 결코 평탄하지 않다. 길을 가는 중 쌍둥이 마녀와 인간늑대 부부를 만난다. 이들은 미래를 볼 수 있다. 소녀는 이들을 만나 한 가지 부탁을 받는다. 후작이 가져간 마녀의 스푼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소녀의 미래를 보고 알려주겠다는 조건이다. 수락한다. 소녀는 후작을 만나 마녀의 스푼을 가져오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가는 도중에 셉템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용을 만난다. 그 용은 어머니 용과 아버지 도서관이 맺어져 탄생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결합이라니 놀랍다.

 

셉텝버의 친구인 용의 이름은 엘이다. 그는 후작의 법령에 따라 날개를 묶고 있다. 날 능력은 되지만 법에 의해 날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엘인 것은 그가 도서관에서 A부터 L까지만 읽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어로 시작하는 명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재미난 설정이다. 이 설정은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나온다. 모험에는 항상 새로운 지명과 사람 등이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발한 설정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셉템버의 모험이 이어지는 동안 꾸준히 나온다. 왠지 이 시리즈가 계속 나온다면 <원피스>와 비슷한 부분도 상당히 많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너무 나간 것일까?

 

작가가 캐릭터에 불어넣은 생명력은 대단하다. 요정들이 사는 세상을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게 만들어놓아 완전히 딴 세상이 아님을 말해준다. 맬로 여왕이 사라진 후 권력을 잡은 후작의 법들은 자유로운 존재들을 억압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에서 독재 정치나 미국의 관료주의를 은유했다고 하는데 한국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 외에 아는 만큼 많은 설정과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역자조차도 모두 파악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소설 속에는 많은 설정과 은유가 심어져 있다. 이런 종류의 판타지를 거의 읽어보지 못한 나 같은 독자에게는 낯설다. 그럼에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과 풍성한 캐릭터와 아직 풀어놓고 거둬들이지 못한 설정들이 남아 있다. 이제 겨우 하나의 이야기가 끝났을 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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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될 거라고 오키나와 In the Blue 19
이진주 지음 / 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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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 직원이 오키나와로 휴가를 다녀왔다. 가기 전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하루에 여섯 끼 정도 먹을 것이라고 해서 그러려면 오사카로 가지! 라고 말했다. 직원은 일본 방사능이 걱정되어 이곳을 선택했다고 한다. 일본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최근에 본 TV에서 방사능을 피해 본토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봤는데 이 책에도 그 부분이 나온다. 덕분에 오키나와는 급속하게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음식도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반전처럼 오키나와도 자급자족하는 공간이 아니란다. 본토에서 쌀과 미역 등의 일부 해산물을 수입해서 쓴다. 과연 완전히 안전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오키나와에 대한 설명에 ‘하와이보다 가깝고 제주도보다 이국적인, 동남아보다 편하고 괌보다 뭉클한, 어떻게도 설레는’ 표현이 있다. 맞는 말이 대부분이다. 동남아보다 편한 곳이란 표현을 빼고.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게 다가온다. 두 곳 모두 낯설다. 가격을 따지면 동남아가 더 저렴하다. 비행가 값은 빼고. 그리고 두 지역이 보여주는 풍경과 음식이 다르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도 맛이 다른 것 같다. 불행했던 오키나와의 역사를 조금씩 알게 되면 이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에게 오키나와는 미군기지로 더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얼마 전 오키나와의 간단한 역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진이 참 많은 여행 에세이다. 빠르게 읽을 수 있다.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유일하게 가본 도쿄와 다른 모습을 많이 발견한다. 글도 그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정보를 나열하지 않는다. 만약 오키나와를 여행하는데 가이드북으로 선택하려고 했다면 말리고 싶다. 참고서적 정도라면 나쁘지 않겠지만. 360장의 사진이 실려 있으니 어떻게 보면 사진집에 더 가깝다. 물론 그 위에, 옆에 저자의 단상이, 경험이, 감상이 차분히 적혀 있다. 전문 여행가의 시각은 가끔 새롭게 여행지의 풍경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것을 발견할 때 떠나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해진다.

 

이 책의 핵심 단어는 바로 ‘난쿠루나이사’다. ‘어떻게든 되겠지’란 의미다. 우리가 알고 있던 오키나와의 외피 안에 감추어져 있던 한스러움의 반전을 표현한다. 평화로워 보이는 관광지의 이미지가 있는 오키나와는 사실 우리가 겪고 있는 미군의 문제를 그대로 혹은 그 이상 경험하고 있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의 실수인지 아니면 실제 그런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문장이 있다. 오키나와의 옛 나라 이름인 ‘류큐는 일제 강점시대에서 미군정을 거쳐 다시 일본에 복속되는 것을 선택한 역사가 되었다.’란 문장이다. 과연 그들이 일본에 복속되는 것을 자신들의 의지로 선택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2차 대전 당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더.

 

여행을 가면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기보다 한 곳에 숙소를 정하고 그 도시를 돌아다니길 좋아한다. 그런데 이 하룻밤의 잠을 멋지게 표현한 글을 발견했다. “하루 종일 다녔어도 잠을 자지 않고 떠난 여행지는 관광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무게를 가지지만 하룻밤을 지낸 여행지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인격을 갖게 된다.” 이 말처럼 자고 일어난 여행지의 아침은 다르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 숙고 근처의 길들이 익숙해지면서 낯선 여행지가 아닌 아는 곳에 놀러온 듯한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이때가 정말 좋다. 이 편안함과 익숙함이 또 다른 낯선 공간과 만나면서 깨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엔 목차가 없다. 약간 불편하다. 공항이 있는 나하에서 시작하여, 북부, 중부, 남부를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풍경과 사람과 음식을 찍고 글로 남겼다. 부록이 있어 풍부한 정보를 주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다만 소바에 대한 정보는 재미있다. 메밀국수가 아닌 밀가루 국수이기 때문이다. 미군기지의 영향 아래 있다 보니 원래의 것과 뒤섞여 만들어진 음식 문화도 눈길을 끈다. 우리의 부대찌개가 떠오른다. 직원이 가기 전까지 크게 관심이 없었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도 그렇게 관심의 대상이 아닌 곳이었는데 이제는 왠지 모르게 강하게 끌린다. 조금 길게 머물면서 두세 곳 정도 여유있게 여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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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은 필요 없다
베른하르트 아이히너 지음, 송소민 옮김 / 책뜨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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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글 중에 나의 시선을 잡아 끈 게 있다. 바로 이 작품을 쓰기 위해 6개월 동안 장의사에서 보조원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작가들이 작품의 소재를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등의 취재를 하는 경우는 많다. 물론 자신의 전직을 이용해 글을 쓰는 작가들도 많다. 하지만 이 작가처럼 직원으로 일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보통의 짧은 기간 동안의 경험만 쌓고 그만두기 때문이다. 이렇게 먼저 한 점을 딴 후 <덱스터>와 <킬 빌>에 대한 글이 나를 사로 잡았다. 특히 <덱스터>는 소설 속에도 잠시 나오지만 내가 예상한 잔혹한 복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블룸은 고아다. 양부모에게 입양되었다. 이 부모가 바라는 것은 자신들의 장의사를 물려받는 것이다. 어린 블룸을 양부모는 아주 혹독하게 키운다. 열 살도 되지 아이를 염하는 곳에 데리고 들어가서 일에 익숙해지길 바란다. 보통의 시체도 무서운데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시체까지 참석하게 만든다. 어린 아이가 무서워 내는 말은 쉽게 묵살된다. 이런 양부모와 함께 여행을 간 그녀가 그들이 바란 도움을 거절한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이들은 물에 빠져 죽고, 그녀는 양부모의 장의사를 물려받는다. 더불어 가장 사랑하는 남자 친구인 마르크를 만나고, 둘은 결혼까지 한다.

 

8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 블룸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형사인 마르크는 좋은 아빠이고, 시아버지는 그녀의 아이들을 잘 돌봐준다. 평온한 가정이다. 이 가족에 한 명 더 덧붙여진다면 레자가 있다. 그는 보스니아 사람이다. 인종 대학살의 와중에 살아남았다. 현금인출기를 털려고 하다가 마르크에게 잡혔지만 그의 사정을 들은 마르크가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 후 레자는 브룸의 가장 훌륭한 조수가 된다. 사업은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은 건강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 이런 평온한 가족에게 무시무시한 사건이 생긴다. 바로 마르크가 뺑소니차에 치여 죽은 것이다. 범죄의 냄새가 강하게 난다.

 

마르크는 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 둔야란 여자가 신고한 것이다. 다른 경찰이 거절한 것이지만 그는 강한 범죄의 냄새를 맡았다. 둔야를 만나 자신이 다시 조사하겠다고 한다. 그녀와 만나 그녀가 겪었던 사건의 세부적인 이야기를 듣고 녹음한다. 이 녹음을 브룸이 마르크의 유물을 정리하다가 발견한다. 단순한 뺑소니 사건에서 타살의 흔적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하지만 분명한 증거가 없다. 둔야를 찾는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트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얼굴은 모르지만 수없이 들은 목소리라 금방 안다.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녀가 겪었던 참혹한 강간과 무지막지한 폭력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둔야가 말한 다섯 명의 남자를 찾아 복수를 하려고 한다.

 

여자 장의사가 품은 살의는 너무나도 강렬하고 잔혹하다. 첫 번째 용의자를 찾아낸다. 작은 실수를 하지만 무사히 처리한다. 장의사는 시체를 처리하는데 최상의 직업이다. 자신의 화장터를 가지고 있다면 최상이겠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시체들이 있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시체들은 그녀가 처리한 시체 토막을 분산해서 숨기기에 딱 맞다. 비록 처음 하는 일이라 무게를 감안하지 못한 잘못이 있지만 말이다. 이 실수들은 다음 용의자를 찾아서 처리하는데 좋은 본보기가 된다. 물론 이것이 항상 그녀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브룸은 잔혹한 복수극을 펼치지만 덱스터처럼 훈련을 받지 않았다. 이 차이는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거기에 여자다. 무거운 시체를 옮기기도 쉽지 않다. 만약에 그녀가 실수를 해서 체포라도 된다면 그녀의 두 아이는 부모 모두를 잃게 된다. 이런 두려움은 쉴새 없이 그녀를 덮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녀는 나머지 악한들을 찾아낸다. 어쩌면 운이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너무 쉽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그리고 그녀가 반전처럼 심어놓은 마지막 악당은 결코 바라지 않은 인물이다. 이 부분은 조금 아쉽다. 너무 안일한 설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장이 참 간결하다. 짧은 호흡으로 끊어 읽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건조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속도감을 높인다. 장면을 짧게 끊어 더 쉽게 몰입하게 만들었다. 사이사이에 마르크와의 추억을 넣어 그녀의 감정을 노출시킨다. 이 추억의 삽입은 그녀가 흔들릴 때, 외로울 때, 두려울 때 마음을 다잡게 만든다. 복수의 여신이 되어 악당들을 난도질하는데 주저함이 없게 만든다. 미스터리를 자주 읽는 독자의 눈에는 허점이 많이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덱스터처럼 시리즈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더 강해진 모습으로. 악당들은 결코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죽인 마르크의 아내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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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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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을 읽는 것이 오랜만이다. 예전처럼 특정한 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찾아서 읽지 않다보니 가끔 만난다. 물론 아직도 어떤 문학상들은 나의 관심의 대상이다. 읽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나오면 위시리스트에 늘 올려놓는다.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반응이다. 이 책의 선택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었다. 잘 모르는 작가의 장편을 덥석 잡고 읽기에는 사놓은 책들이 너무 많다. 이런 기회는 또 한 명의 작가를 기억하게 만들고, 사고 싶은 책을 늘려주는 역할을 한다. 언제나처럼.

 

구성은 간단하다. 현재와 과거의 시점가 점점 다가와 만나고, 각 시점에 주인공 두 명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이 사이에 다른 인물들이 잠시 끼어들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한 명의 눈먼 프랑스 소녀와 어린 나이에 전쟁에 끌려온 독일 소년이다. 소녀의 이름은 마리로르이고, 어릴 때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 눈이 멀었다. 소년의 이름은 베르너이고, 가난한 탄광촌에서 부모없이 자란다. 마리로르가 열쇠 장인 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면 베르너는 아이들의 집이란 고아원에서 동생 유타와 함께 산다. 이 자매를 엘레나 아줌마가 돌봐준다.

 

두 아이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되지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다가온다. 다른 두 시간은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만난다. 이야기는 생말로에 연합군이 폭격을 가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1944년 8월 7일이다. 과거의 시간은 성큼 성큼 달려온다면 현재의 시간은 하루씩 차근차근 진행된다. 당연히 이야기의 비중은 과거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의 사건이 어떤 과거와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그 시대의 모습과 광기를 차분히 그려낸다. 소녀의 시간이 패배국 국민의 입장에서 그려진다면 소년의 시간은 나치의 광기가 그 극에 달했을 당시의 일면을 극대화시킨다.

 

과거는 1934년부터다. 소녀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박물관에서 하나의 전설을 듣는다. 전설의 133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 이야기다. 이 다이아몬드를 가진 자는 영생을 얻지만 그 주변은 불행이 다가온다는 전설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있는 전설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전설을 믿는 사람이 등장하고, 그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끈질기게 찾아다닌다. 이것은 이 소설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자그마한 축이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다. 우리가 알듯이 프랑스는 항복하고, 소녀와 열쇠 장인 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피난 간다. 첫 번째 피난처는 그 다이아몬드를 전해준 박물관장이 말한 곳이다. 그 다음 피난처는 1차 대전 이후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버지의 작은 아버지가 살고 있는 생말로다.

 

소년은 과학에 관심이 많다. 그 당시에 귀했던 라디오를 잘 고친다. 그 시절은 나치의 망령이 전 독일을 휘몰아치던 시기다. 이 재능을 눈여겨 본 귀족 한 명이 소년에게 나치의 청년 정치 교육원에 입학하라고 말한다. 지식에 목말라 있던 베르너는 입학을 신청한다. 합격이다. 그 이전까지 소년은 동생과 함께 자신이 만든 라디오로 프랑스 방송을 듣는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프랑스 방송이다. 나치의 광기가 아이들에게까지 파고들던 그 시절 이 남매는 다행스럽게도 이성을 유지한다. 그랬던 오빠가 갑자기 나치의 교육원에 가고, 자신들의 라디오를 부셨다는 사실에 동생은 놀란다. 다정했던 둘 사이에 금이 생긴다.

 

생말로에 도착한 소녀의 일상은 파리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소녀의 아버지는 파리에서처럼 생말로의 도시 모형을 만든다. 눈먼 딸이 홀로 다닐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소녀의 작은 할아버지 에티엔은 광장공포증이 있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마네크 부인이 늘 그의 곁에서 돌봐줬다. 이 구성원은 독일의 지배 아래에서도 이전과 별 차이 없이 살게 된다. 아버지가 전보 한 통을 받고 파리로 돌아가다가 잡혀 어딘가로 사라지기 전까지. 그 이후도 소녀는 그녀를 돌봐주는 마네크 부인과 에티엔 할아버지 덕분에 큰 불편함 없이 산다. 재미있는 것은 마네크 부인이 또래 할머니들과 함께 점령군을 골려주고, 연합군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것이다.

 

학교에 입학한 베르너는 강한 군사 교육을 받는다. 이때 수학에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학교의 과학자 눈에 들어간다. 과학자는 그를 시험한다. 그가 연구하는 것은 삼각측정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전파가 발생한 장소를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나중에 베르너로 하여금 파르티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전문가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이 학원에서 친구 한 명을 사귄다. 프레데리크다. 새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눈이 나빠 학원에 올 수 없는데 테스트 시험지를 모두 외워 입학시험에 통과했다. 베르너처럼 그도 아직 이성이 남아 있다. 모두가 전쟁과 나치의 광기에 휩싸여 있던 시절이라 이성이 밖으로 드러나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이성이 광기를 몰아내던 한 순간 소년의 삶은 파괴된다.

 

이렇게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성장한 두 소년 소녀의 이야기가 빠르고 간결하게 진행된다. 이들이 만나는 것은 단 하루다. 책 소개처럼 이 하루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자신들은 알지 못하지만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눈 먼 소녀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면 전쟁과 광기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움직인 소년의 삶은 참혹하다. 그의 삼각측정법이 적을 찾아내는데 엄청난 활약을 펼치지만 그 결과는 잔인한 학살로 마무리된다. 독일군이 아니라면 멋진 활약이라고 칭찬할 뻔 했다. 그러다 실수를 한다. 실수는 그의 마음속에 불안감을 가져다준다. 이 불안감은 소녀에게도 마찬가지다. 레지스탕스 활동이 쉬울 리가 없다. 단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람들이 잘 돌봐주고 있을 뿐이다.

 

하루.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 된다. 누군가는 이 하루가 자신의 삶을 바꾸게 한다. 작가는 잔인하고 참혹한 장면을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고 간결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이 이후의 삶도 역시 간결하다. 그러나 그 여운은 길고 강하다. 어떻게 보면 흔한 후일담일 수 있는데 갑자기 강한 슬픔이 가슴을 강하게 두드린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전쟁의 참혹함을 견디고 살아남았지만 그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 있다. 30년이 지나도 그것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일상을 짧게 보여주는데 그 평화로운 일상이 너무 거대해 보인다. 일상의 위대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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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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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년 전 8월 하치오지 교외 신축 주택단지 느티나무 언덕에 지은 단독주택에서 부부 살해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오기 유키노리, 리카코 부부다. 이들을 죽인 남자는 한동안 집안에 머문다. 이 부부를 살해한 후 욕실까지 옮기고, 그 흉악한 현장이었던 복도에 피로 쓴 글자를 남겼다. ‘분노’란 단어다. 이 남자가 오기 저택에서 나온 것은 새벽 1시 무렵이다. 옆집 사람이 인사를 건넸고, 자전거 불을 켜지 않고 달리다 검문 중이던 경찰관에 제지당했다. 자전거 등록 번호를 조사하기 시작하는 순간 도주했다. 다음 날 범행이 발각 났고, 몽타주가 작성되어 지명수배되었다. 곧 이 남자의 신원과 주소를 밝혀졌다. 남자의 이름은 야마가미 가즈야다. 하지만 만 1년 동안 도주 중이다. 간략한 사건 개요를 설명한 후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작가는 노련하게 세 명의 남자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가출한 후 매춘업소에서 일하는 딸 레이코를 데리고 온 요헤이 주변에 살고 있는 다시로 군, 게이 유마가 섹스를 위해 찾아간 장소에서 만난 나오토, 이즈미의 엄마가 저지른 불륜으로 도망간 오키나와의 작은 섬에 숨어 있는 배낭여행객 다나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직접 화자로 등장시키지 않고 요헤이, 유마, 이즈미 등의 일상 속에 등장시켜서 혹시 이들이 살인범 야마가미 가즈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계속 품게 만든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속 수사 중인 형사 기타미를 등장시켜 야마가미에 대한 최신 정보를 언론을 통해 알린다. 하지만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마음속에 의심의 싹을 틔우게 만든다. 독자도 마찬가지지만.

 

이 세 명의 남자들의 외모와 과거는 분명하지 않다. 일단 의심의 싹이 자라면 분명하지 않은 과거가 무시무시한 환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자신과 그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순간 그 환상은 어느새 부쩍 자란다. 마음은 요물이라 신뢰라는 거대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조그만 바람에도 쉽게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더 쉽게 일어난다. 아이코의 좋지 않은 과거가 걱정인 요헤이나 게이란 사실이 알려지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유마나 나쁜 일을 겪은 이즈미와 다쓰야 등이 바로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등장인물들이 의심하는 만큼 독자도 같이 이들 중 누가 과연 범인인지 혹은 전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책 후반부가 되기 전까지 이 의심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첫 도입부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분노’란 단어를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소설은 바로 이 분노의 원인과 이유를 찾아서 긴 여정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하지만 다른 세 곳에 나타난 수상한 남자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노보다 관계에 더 많이 집중하게 되었다. 노련한 작가가 이들의 일상을 편하게 보여주면서 경찰의 공개수사 과정에서 보여준 단서를 이들과 살짝 연결시킨다. 이 작은 연결 고리는 누군가 혹은 자신들이 품게 된 자그만 의심으로 인해 점점 부풀려진다. 현실에 만족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와중에도 이 의심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언제나 그들의 마음을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있다.

 

이 세 명의 남자 외에 또 한 명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형사 기타미와 사귀는 미카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다. 기타미가 형사라고 했을 때 달아나려고 했지만 그녀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들은 사귄다. 하지만 기타미가 그녀를 강렬하게 원하고 열망하게 됨에 따라 이 관계는 깨어진다. 그녀의 삶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고 들어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다. 이것과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는 사람들이 세 곳에 등장한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남자들이다. 세 남자와 관계된 사람들은 이들을 자신들의 삶 속에 편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의심의 싹을 틔운다. 물론 이 세 명 중에 범인은 있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의심이란 귀신에 먹힌 사람들의 심리 묘사와 행동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엄청난 가독성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묵직하게 전개하지 않고 약간은 가볍지만 일상의 모습과 문제들을 보여주면서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범인의 심리를 깊게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살인범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면서 또 다른 방식의 범죄소설을 썼다. 공개수사를 통해 야마가미의 사건 전후의 흔적을 경찰이 쫓아가지만 좀처럼 살인 현장에 있던 ‘분노’란 단어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분노란 단어가 꿈틀거리면서 사람을 잠식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단서를 제공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불친절하지만 열린 결론으로 맺으면서 분노보다 더 무서울 수 있는 의심이란 심리를 아주 잘 표현했다. 생각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 조금 아쉽지만 다른 방식으로 만족감을 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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