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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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환상을 무참하게 깨트리는 소설을 읽고 놀란 적이 있다. 덴도 아라타의 <가족사냥>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읽고 난 후 지금까지도 가장 잔혹한 소설로 기억한다. 오래되어 세부적인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화목한 가족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다. 실제 살다 보면 내가 알던 가족과 다른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 가족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것도 가족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참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경우는 흔히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유산 분배할 때다. 이것이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나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고백한다. 바로 이어서 “ 가족 구성원 각자를 한 사람의 개인으로 간주하고 생각을 전개해나가려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단순히 개인적 경험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실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본 것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물론 아버지의 몰락과 어머니의 집착과 오빠의 떠남 등이 어우러져 홀로 서고자 하는 삶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이것을 단순히 환경만의 문제로 돌리기에는 이와 비슷한 삶을 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물론 그녀 자신이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아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하면서 또 하나의 삶을 포기하였지만 이것 또한 자신의 살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다.

 

나 자신도 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혹은 콩가루 집안이네 등과 같은 말이다. 한 사람의 행동을 확대해석하거나 하나의 현상을 전체로 확장하는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이런 말을 많이 한다. 가족의 한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고, 이것이 사회문제로 발전할 경우 그 가족이 그 잘못을 짊어져야 하는 일이 생긴다. 내가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쑥덕거린다. 누구네 아버지네, 어머니네, 아들이네, 동생이네, 오빠네 등과 같이. 저자는 이런 경우 실제 잘못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고, 당사자의 죄의식이 희석된다고 말한다. 공감하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인과 가족을 혼동하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자기 가족과 차이를 두기 위해 이런 표현을 한다.

 

가족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그 틀이 정해져 있다. 틀 안에서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데 이 속에서 개인은 매몰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의 인격을 되찾는 것이 진정 가족이 무엇인지 아는 지름길이 아닐까 묻는다. 여기에는 단란하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환상이 없다. 실제 우리는 화목한 가족을 강요받으면서 자란다. 가족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휘둘리면서 혹은 그속에서 폭력을 휘두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족 간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사고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누구나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수없이 많은 강요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형제자매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더 좋다는 말이 있다. 실제 현실의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이런 경우는 많이 일어난다. 나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빈도수를 따지만 친구들이 더 높다. 물론 가족이 아니기에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도 많다. 요즘과 달리 이전에는 다른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빈약했다. 가족을 더 강조하면 할수록 부모, 형제자매가 아니라 부부와 자기 자식으로 그 가족을 한정시키고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대가족 사회에서는 그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졌지만 핵가족이 되면서 더욱 이기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저자도 현대 사회의 가족이 핵가족화되면서 예전의 가족과 차별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더 깊게 파고들어 연구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예전에 할리우드 영화 비평을 보면 가족주의를 너무 강조한다는 말이 많았다. 실제 그 영화를 보면 늘 가족이 중심에 있다. 선택의 순간은 언제나 가족이 우선이다. 물론 결과는 좋게 끝난다. 이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글이 이 책에 있다. “국가도 나서서 가족을 예찬한다. 전시 중에 그랬던 것처럼, 가족이 화목하고 단합이 잘되면 통치하기가 쉽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작은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은 다른 가족에게 배타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는 모르다고 말하고, ‘자기 가족만 좋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는게 아닐까.’하고 묻는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나 가부장적 체계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가장의 위치나 역할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도 그 기본 구성은 별 차이가 없다.

 

현재 일본의 점점 심해지는 우경화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글도 있다. 바로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다. “패전 후에는 두 번 다시 전쟁을 하는 것도 군대에 가는 것도 싫다고 하더니, 그 후 국력이 강해지고 나라 전체가 우경화되자 과거에 교육받은 사고방식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라는 문장이다. 물론 현재 저자의 아버지가 죽었다. 하지만 이런 영향력은 이런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는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한국의 극우보수세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비교하면 많은 부분에서 닮을 꼴이 나올 것 같다. 한 가지 저자에 대해 오해를 풀어주자고 하면 그녀는 오래전에 결혼해서 반려 혹은 파트너와 잘 살고 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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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도우 헌터스 4 : 추락천사의 도시
카산드라 클레어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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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고편으로 먼저 만났던 소설이다. 영화와 동시에 3권까지 한꺼번에 출간되었다. 하지만 그 후속편들이 나오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이번에 나온 두 권도 마지막 6권 한 권을 남겨두었다. 개인적으로 6권까지 나와서 한 번에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바로 나오지 않는 한 나의 기억력이 5권까지의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몇몇 에피소드들은 잘 기억에 났지만 몇 가지 관계나 설정 등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가 한 편 한 편 완결성을 가지고 있고, 출간 연도도 1~2년의 격차가 있음을 생각하면 문제는 나에게 있기는 하다.

 

이 시리즈를 읽다 보면 하나의 사건이 끝난다고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3권에서 가장 큰 사건 하나를 해결했지만 겨우 6주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사건들이 벌어진다. 이 시리즈를 나눌 때 앞의 세 권을 前 삼부작, 뒤의 세 권을 後 삼부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구분은 모든 사건의 주체가 되는 인물이 누구냐에 따른 것이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 삼부작이 발렌타인이 구상하는 세계에 대항하는 섀도우 헌터들의 이야기라면 후 삼부작은 그의 아들인 세바스찬이 모든 음모의 주재자다. 이번 시리즈는 3권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세바스찬의 부활과 그를 부활시킨 악마의 계획에 의해 사라진 제이스를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판타지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이는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십대들의 열정과 무모함이 놓여 있다. 십대들의 미숙함이 불러오는 몇 가지 사건들과 자신이 가장 바라는 바를 위해 무작정 달려나가는 열정에 따라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자신의 사랑을 현재가 아닌 먼 미래에 두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알렉의 모습은 과도한 소유욕이 만들어낸 문제들이다. 그가 카밀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을 보면 사랑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신뢰와 현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번 책들에서 가장 많은 갈등 속에 놓여 있는 인물은 사이먼이다. 뱀파이어가 된 그가 겪는 정체성의 문제는 계속 그를 괴롭힌다. 이마에 카인의 표시를 새겨 자신을 공격하는 존재를 소멸시키는 힘을 가졌지만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의 본능까지는 어쩔 수 없다. 인간의 피가 아닌 동물의 피로 그 갈증을 달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변한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죽기 전 인간을 그리워하기에 겪게 되는 과도기의 혼란이다. 이런 그의 혼란은 결국 엄마에게 발각된다. 엄마는 뱀파이어로 변한 그를 두려워한다.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물리쳐야 할 악으로 생각한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영화 등에서 이런 것들을 보아왔는가.

 

이번 시리즈에는 새로운 인물이 둘 있다. 하나는 오래된 뱀파이어 카밀이고, 다른 하나는 늑대인간 카일이다. 카밀은 인간의 피를 마시면서 무리에서 쫓겨난 흡혈귀지만 오랫동안 살면서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사이먼을 유혹하고 뒤흔드는 역할을 맡는다. 그녀는 한때 매그너스의 연인이었는데 이것이 알렉을 뒤흔드는 역할을 한다.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그녀가 뿌린 불신과 불안의 씨앗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카일은 초보 뱀파이어 사이먼을 돌보기 위한 늑대인간이다. 프리터 루퍼스 소속이고 마야의 전 남친이다. 새로운 조직인 프리터 루퍼스는 다운월드 신참자를 돌보는 역할을 맡는다. 뭔가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조직 같은데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기 위한 십대들의 사랑과 열정은 언제 봐도 불안하고 위험하고 화려하다. 화려함에 가려진 불안과 위험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면 아무 이야기도 되지 않겠지만 화려함에 둔다면 다르다. 그들의 열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지 않고 달려갈 때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주인공들의 삶에 비해 조연이나 엑스트라 역할은 언제나 희미하다. 그들이 선택한 결정에 의해 그들은 죽어나간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들의 결정을 새롭게 보게 된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그 순간 그들은 성장한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자신의 변화를 인정하고, 정체성을 깨닫고,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고, 상대방을 신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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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해변
크로켓 존슨 글.그림, 김미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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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만 읽는 데는 십 분도 걸리지 않는 분량이다. 책 뒤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이나 후기나 모리스 센닥의 추천사가 오히려 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별로 대단할 것 같지 않은 이야기와 간결한 선으로 만든 그림이 모두 읽은 후 머릿속을 맴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이 책이 왜 그렇게 많은 추천을 받았고, 인기가 있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다시 읽으면서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 읽은 것이 거의 2주 전이고, 이번에 다시 스쳐지나가듯이 한 번 더 읽었다. 간단한 구성이라 어려운 것도 없었다. 지난 번에도 느낀 것을 지금도 다시 느꼈을 것이지만 마지막 대사가 가슴 한 곳에 머문다. “왕은 아직 거기에 있어. 이 이야기 속에” “여전히 왕좌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거야”라고 말할 때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나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하던 왕이 아닌 자신의 성을 향해 말을 달리고,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다가 혹시 반역의 무리들과 싸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법의 해변이란 제목처럼 이 해변은 단어로 쓴 것이 현실로 나타난다. 벤이 장난처럼 쓴 첫 단어 잼이 해변에 실제 나왔을 때 그들은 그것에 어울리는 단어를 떠올리고 쓴다. 빵이다. 이 단어들은 다음 단어를 만들고, 어는 순간 이야기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왕이다. 왕은 성을 요구하고, 말을 타고, 자신의 성으로 달려간다. 이렇게 이 책은 단어와 단어가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단순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왕이 말을 타고 자신의 성으로 달려가고, 자신들은 해변이 물에 잠기면서 다시 돌아온다. 자신들이 만든 이야기는 해변의 바닷물 속에 잠긴다. 이야기와 창작자가 분리되는 순간이다. 앤이 마지막에 한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작가의 놀라운 이력에 반해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 있다. 바로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이 책에 실린 작가의 그림이 아닌 다른 삽화가의 그림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관념적인 이야기에는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제목도 다르다. 1965년 출간된 책의 제목은 <모래 위의 성>이다. 개인적으로 원 제목이 더 어울린다. 모래 위의 성이란 한자로 사상누각이지 않은가.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절대 이것이 아니기에, 이 책의 깊이를 생각할 때 너무 안이한 작명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원 제목과 원래의 삽화가 곁들여진 책이 나온 것은 반갑고 축하할 일이다.

 

1965년 판 책의 삽화를 보지 못해 둘의 평가를 정확하게 내릴 수 없지만 이 이야기와 이 삽화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간결하지만 명확한 선으로 그려낸 삽화는 배경이 없지만 우리의 상상력으로 분명하게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그냥 휙 읽을 때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다시 읽으면서 다른 해석을 하게 되면서 이 간결한 그림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개인적으로 아직 이런 종류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고,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말처럼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뭔가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은 내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서평을 쓰면서 잊고 있던 것들이다. 언젠가 나도 단어와 단어를 이어서 작은 이야기 하나를 만들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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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인문학
장석주 지음 / 호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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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이름이다. 어디서 본 듯한데 정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이전에 한 권씩 사곤 했던 출판사 청하의 대표다. 지금도 집 책장을 뒤져보면 몇 권 정도는 쉽게 나올 것이다. 시집도 한 권 정도 있지 않을까? 이건 모르겠다. 이런 몇 가지 자잘한 사실을 제외하면 저자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없다. 낯익은 책 제목이 몇 권 보이지만 읽지 않았고, 그의 철학이 어떠한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둘씩 알게 되었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자칭 활자중독자라고 하는데 그의 분야가 인문학과 시에 더 집중되어 있다. 실제 이 책의 내용도 그가 읽은 책을 바탕으로 자기의 철학과 엮었다. 그 방대한 분야는 나로 하여금 감탄사를 절로 내게 만들었다.

 

읽으면서 각 장의 시작을 알리는 요약 밑에 쓰인 숫자에 눈길이 갔다. 이것이 제목처럼 한 해 동안의 일요일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이 생각은 한 해의 일요일 수를 잘못 세면서 사그라졌다. 계산기로 간단하게 두드리니 54주가 아닌 52주다. 52번의 일요일을 이용해 저자는 그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고 요약하고 핵심을 추려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방대한 분야는 쉽게 요약해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읽을 책을 골라야 할 경우 인문학 책에 먼저 손길이 가거나 ‘인문학은 맛있는 것, 즐거운 것이다.’ 같은 수준이 되어야 가능하다. 물론 나의 수준은 아주 한참 아래다.

 

일요일. 사실 나는 일요일보다 토요일을 더 좋아한다. 다음날 출근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일요일 오후는 다음날 출근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는 시간이다. 만약 그가 말한 것처럼 늦잠이라고 자게 되면 일요일의 시간은 불과 네다섯 시간의 여유 밖에 없다. 그래서 한때는 저녁에 커피숍에 나가 한두 시간 책을 읽은 적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간이 아주 좋았다. 아내가 이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면서 나가는 시간이 당겨지고, 빠른 저녁 시간은 텔레비전과 함께 하게 되었다. 이것은 가족이 된 아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자그만 몇 가지 의무 중 하나다.

 

52번의 일요일에서 만난 방대한 분야의 다양한 글은 저자의 깊이를 쉽게 느낄 수 있게 만든다. 편집으로 이 각각의 글을 몇몇 범주로 묶지 않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각 글의 깊이와 폭이 책 읽는 재미를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간 것은 역시 책, 서재, 여행, 요리 등이지만 다른 글들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요즘 나의 독서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나이가 들수록 철학 책을 읽고 시집을 가까이하라’는 제목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실제는 아직도 소설이 절대 다수지만. 반복되어 강조되는 몇몇의 철학자가 있는데 아직은 나에게 어려운 철학자다. 니체, 들뢰즈, 발터 벤야민 등이 그렇다. 이 중에서 니체 전집은 예전에 청하 출판사에서 나온 적이 있다.

 

산책, 걷기 등은 한때 좋아했던 행동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이 줄어들었다. 귀찮아졌다. 힘들어졌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편안함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 덕분에 점점 살이 찌고, 다리의 근력이 약해진다. 가끔 전철로 출퇴근하면 허리가 아프다. 탈 것 속에서 시선은 사람이나 밖의 풍경으로 향하지 않고 늘 손에 놓인 책에 가있다. 늘 쫓기듯이 살다보니 여유가 부족하다. 아니 여유를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가끔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하다. 시간의 강박 속에서 침몰한다. 책읽기도 마찬가지다. 여유가 없다. 깊은 숙독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욕심이 많아 책을 더 사지만 읽기는 멀기만 하다. 그의 서재가 부러운 것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수없이 많이 든 생각 중 하나다.

 

하나의 주제를 풀어내는데 한 권의 책만 다루지 않고 두세 권을 같이 놓고 자신만의 해석을 들려준다. 책의 핵심을 뽑아내어 말하고, 다른 책과 비교하는 과정은 읽으면서 내가 늘 바라던 글이었음을 깨닫고 부러웠다. 최근에는 관련 있는 인문학 두 권을 동시에 읽은 적도 없으니 뭐라고 할 말도 없다. 단순히 인문학을 요약하고 서평을 쓴 글이라면 딱딱했을 텐데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여 내면서 좀더 부드럽게 읽히게 만들었다. 다 읽은 후 아쉬운 점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저자가 읽은 책과 인용한 책에 대한 색인이 없는 것이다. 있다면 위시리스트에 올릴 책 찾기가 훨씬 쉬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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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J의 다이어리
전아리 지음 / 답(도서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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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찹>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가인 전아리가 다음 7인의 작가전에 연재하었던 글을 손봐 장편소설로 내놓았다. 공식적으로 218쪽이라고 하지만 실제 활자의 크기나 한쪽의 분량을 보면 조금 긴 중편소설의 분량이다. 덕분에 한달음에 읽을 수 있다. 이제 겨우 두 권 읽었으니 전아리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지만 경쾌하고 톡 쏘는 글이 상당히 매력있다. 시골의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병원으로 무대로 의사, 간호사, 환자 등의 이야기를 빠르고 유쾌하고 기발하면서 따뜻하게 그려내었다.

 

간호사 J의 이름은 정소정이다. 그녀는 라모나 종합병원에 오기 전 청담동, 홍대 등에서 좀 놀았던 언니다. 그녀의 이력을 듣다보면 놀랍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이 라모나 병원에 오기 전 실수를 하거나 잘못 때문에 병원에서 잘렸다. 간호사의 기본을 망각한 일도 있다. 이 병원에 오게 된 것도 느슨하고 한가한 일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놀다가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 허술하고 나이롱환자 가득한 병원에 근무하면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그녀의 생각과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소정 간호사가 근무하는 병원에 한 할머니가 입원하기 위해 온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외롭기 때문에 병원에 온다. 시골에 홀로 사는 노인들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병원에 입원한다. 박유자 할머니도 그렇다. 이 할머니에게 앙숙같은 할머니가 한 명 있다. 이순복 할머니다. 둘은 만나면 싸운다. 같은 방에 있어도 싸우고, 다른 방에 있어도 찾아가서 싸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천하에 저런 원수가 없지만 사실 이들은 깊은 정이 들었다. 아파서 보이지 않으면 걱정해준다. 이 소설 속에 벌어지는 에피소드 중 몇 개는 바로 이 두 할머니 때문에 생긴다.

 

이런 병원이라면 예상할 수 있는 보험사기 환자가 한 명 있다. 강배씨다. 그도 처음부터 보험사고를 낸 것은 아니다. 우발적인 사고 이후 이것이 더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자해공갈로 변했다. 덕분에 그는 이 병원의 단골손님이다. 그가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욕해야 할 것 같은데 그의 행동을 보면 웃게 된다. 치밀하게 계산해서 큰 사고를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박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이순복 할머니와 누가 더 강하고 아픈 사고를 덤덤하게 넘겼는지 하고 황당한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엄청나게 아픈 상처를 입어도 상대방의 시선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모습은 가히 웃음 폭탄이다.

 

고등학생 꽃미남 환자는 이 병원에서 가장 제대로(?) 된 환자지만 늘 그를 숭배하는 여고생들이 병문안 온다. 좀 놀았던 언니 입장에서도 꽃미남 환자는 보는 즐거움을 준다. 그렇다고 이 미성년과 뭔가가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정 간호사는 이 동네 연하의 미남 중국집 주방장 동석과 동거하고 있다. 동석은 병원장이 가끔 지나가듯이 유혹할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필리핀 남자 환자가 한 명 더 있다. 돈을 벌어서 필리핀의 가족에게 송금하는데 이번에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그런데 그를 찾아오는 한 필리핀 여성이 있다. 애인인가 물으면 아니라고 한다. 둘은 묘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둘 사이에 오해가 생긴다. 외로움과 착각이 만들어낸 오해다. 이렇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외롭다.

 

무겁지 않다 보니 잘 읽힌다. 놀던 언니의 생각과 행동이 곳곳에 드러나 툭툭 튀는 즐거움을 준다. J 간호사를 따라다니는 의사가 한 명 있다. 닥터 박이다. 그냥 한두 번 찔러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데이터를 요청한다. 정 간호사는 관심도 없다. 닥터 박과의 에피소드는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작은 재미를 준다. 하나의 중심 이야기가 펼쳐지는 와중에 소소한 이야기가 곁들여져 풍성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결말은 아쉽다. 너무 평이하고 바르다. 어떤 부분에서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속 한 장면을 연상하기도 했던 이야기가 모범적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반전 같은 장면 하나를 넣었다. 그런데 이것도 코믹멜로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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